안정리(雁汀里, 안징이)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안정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당동(院塘洞)을 병합하여 마을 앞에 흐르는 하천에 기러기가 많이 놀았다는 뜻에서 안정리라 하였다. 행정리명은 안정리이고 자연마을로 안정동(안정이).원당동(元塘:鴛塘:원댕이)이 있다.
마을유래비
마을유래비
- 마 을 유 래 비
우리 마을은 소백산맥의 줄기 따라 우뚝 솟은 명산인 민주지산(1242m)자락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약 550여년 전에 진주 강(姜)씨가 처음으로 주거하여 토대를 잡았으며, 또한 약 250년전 이씨라는 분이 살고 있으면서 과거 급제를 하여 고을 원님이된 이후로 자주 일산대를 들고 출도 하였다는 전설 있고, 이 원님이 동명을 원댕이(元塘)라 칭하였다고 한다.
마을앞 동산 밑에는 약물 탕이라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그 약효가 영험하여 나병까지 낳을 정도로 효험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또한 마을앞 동산은 말(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한 도사 님이 한집에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였으나 그것을 거절하자 마을앞 동산을 자르면 마을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말하여 그 말을 듣고 동산을 자르자 한 마리의 학이 피를 흘리며 날아갔다 하며 그 후 한때 마을에는 빈곤한 생활이 이어지고 폐허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약 500년 정도 되는 수려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서 있는 이 나무는 영동군에서 보호수(7-7-8-71호)호 1998년 8월 10일 지정되어 이 마을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다.
본래는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안정리에 병합되어 행정리는 안정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원댕이(元塘)라 현재 불려지고 있다.
선조 들이 물려주신 아름다운 터전을 지키고 그 유래를 후손들에게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한다.
2001. 3. .
원당리 주민 일동
월전리(月田里, 달전)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달밭이 많다고 하여 달밭, 월전이라 하였으며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흘계동(屹溪洞)과 남악동(南岳洞)을 병합하여 월전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리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로 흘계리(흘계:흘기)와 월전리(월전)가 있다.
월전리(月田里) 달밭 마을비
월전리(月田里) 달밭 마을비
- 마을 洞口 느티나무 숲
달 밭 소징이 모퉁이 돌아 골담에 둘리어 양지바른 고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맴돌이 뛰시던 솔 그루터기가 할머니의 그할머니가 빨래하시던 물이끼 둘룬 빨래터 돌다리가 천하대포 깊음 골 물소리마냥 아직도 선연한‥‥ 오래도록 우리손자의 또 그손자가 두발딛고 본향의 하늘 우러러 가꾸어 갸야할 우리의 땅 그래서 우리 이제 보습닦아 걸고 거름쟁여 뒷담에 쌓는 내 월전땅 달빛 가득한 달밭 내고향
용화리(龍化里)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고려 때 용화, 용화동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룡동.창촌동.창곡동을 병합, 용화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되었다. 처음 면사무소가 월전리에 있었으나 1936년 이곳 용화리로 옮겨왔으며, 1935년에 경찰지서가 자리잡았다. 행정리로 용화리(용화:창촌), 내룡리(내룡:안용화:안용해, 창곡:창골)가 있다.
마을자랑비
마을자랑비
- 용화리(龍化里) 마을 자랑비
민주지산(1,242m) 정기아래 아담하게 자리잡은 용화마을은 고려시대에 용화현(龍化縣)으로 내룡리(內龍里)와 용화리를 잇는 용강(龍江)의 물줄기가 용같이 생겼다는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연대(年代)는 알수 없으나 창(槍)을 보관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창마을(槍말) 로 불리어져 왔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 영동현에 편입되었고 그후 영조 35년(1759) 영동현 남이면 용화리로 명칭 되었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촌동(倉忖洞), 내룡동(內龍洞), 창곡동(倉谷洞)을 병합하여 용화리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적에는 면사무소가 월전리에 있었으나, 1935년에 경찰지서와 다음해에는 면사무소를 현재의 곳으로 옮겨와 우리 용화리 마을은면 소재지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90여세대 320여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화합하고 상부상조하면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평화롭고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우측으로는 금강상류인 남대천 맑은 물이 굽이쳐 흘러 안락하고 포근한 생활터전을 감싸주고 있으며, 주민들의 심성이 곱고 맑아 예로부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학문을 숭상하고 의와 예를 소중히 지켜온 슬기로운 마을이다.
용화마을 주민들은 1. 근검 절약하고 2. 어른을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부부간에 화합하며 3. 몸과 마음을 항상 바르게 하고, 마을 애경사에 적극참여 한다는 마을 향약
을 성실히 실천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 땅을 꿋꿋이 지키고 알뜰하게 가꾸어 조상의 얼을 되살려 후손에게 길이 물려줄 것을 다짐하며, 마을의 무궁한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2002. . .
용화리 주민 일동
용강리(龍江里) 본래 관성군(官城郡, 옥천) 속현인 양산현(陽山縣)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에 이르러 옥천군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소동(漁沼洞)과 저치동(猪峙洞)을 병합하여 용강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도 용강리이고 자연마을로 상용강(어소).하용강(선암:仙岩:선바우)이 있다.
용강리(龍江里)어소 마을비
용강리(龍江里)어소 마을비
- 이 자랑비는 전통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께 공경하며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온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고 마을 앞에 펼쳐진 귀미들을 감싸 도는 남대천 맑은 물과 마을뒷동산 조상님과 내부모의 넋이 담긴 漁沼(어소)마을. 고향을 떠나 사는 이에게는 꿈에도 잊지 못할 마음의 안식처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살기 좋은 보금자리로 가꾸고 보존시켜 후손에게 좋은 귀감과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마을 거주민과 향리출신 인사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움. 소백정기 뻗어내린 민주덕유 빙설흐르는곳 민물고기 모여노는 이소마을 내고향 병풍쳐진 뒷동산과 넘나들던 귀미고개 동구밖 동구나무 조상님넋 잠겨있고 우리네와 대대손손 길이함께 이어살곳 근면 자조 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으로 자랑스런 어소마을 잘가꾸어 물려주세요.
여의리(如意里, 河作洞, 아래자자기) 본래 관성군 속현인 양산현(陽山縣)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에 이르러 옥천군 양남이소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자자기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자자기 또는 하자작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여의티(如意峙)의 이름을 따서 여의리라 하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하였으며 자연마을과 행정리명 모두 여의리이다.
여의리(如意里) 마을 자랑비
여의리(如意里) 마을 자랑비
- 우리 마을은 본래 관성군의 속현인 양산현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 양남이소면에 속하였다가 1909년(광무10년)영동군에 편입되었다. 마을 이름은 자자기 아래쪽에 위치한다하여 아래자자기 또는 하자작동으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의티(如意峙)의 이름을 따서 여의리라 부르게 되었다.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동편으로 우뚝 솟은 갈모봉(葛冒峰)을 끼고 마을 우측으로 남대천 맑은 물이 전설처럼 흐르고 있어 훈훈한 고장의 인심과 아름다운 풍치의 조화를 더해주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본디 천성이 착하고 근면하여 관내에 두루 모범적인 부락으로 알려져 왔으며 논농사 밭농사와 함께 인삼 포도 등 특용과수작물을 재배하여 땀흘려 일하고 얻는 수확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진입로 확 포장은 물론 99미터에 달하는 여의교(如意橋) 가설공사는 76년 착공하여 78년 완공하였고 주민 모두가 횃불을 밝히는 철야작업으로 장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마을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여의마을의 정신으로서 서로 상부상조하며 생활하는 공동체적 삶은 지금도 마을의 자랑으로 이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