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시점
시애틀에 며칠째 겨울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런 날엔 그에 걸맞은 곡을 들어줘야 한다. 한편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 이만한 배경과 효과음은 필수다. 일정한 속도로 건반을 연타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말달리듯 한다. 그리고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에선 마왕의 손톱 끝에 집 두 채만 한 나무들의 목과 팔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단숨에 꺾여 나간다. 창문은 그의 차가운 숨결에 부들부들 떨리고, 집과 집 사이로 마왕은 거칠게 몸을 부닥치며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런 날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듯 검은 망토로 하늘을 덮으며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삼킬 자를 찾고 있다. 피아노 위를 쉬지 않고 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어느새 우리 집 지붕위로 옮겨졌다.
이건 노래도 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짧지만 강렬한 극이다. 노래하는 바리톤은 총 네 가지의 역을 혼자 감당하며 4분 동안 연기한다. 처음엔 이야기를 소개하는 화자가 되었다가 다음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이가 되었다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급히 말을 달리는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종국엔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마왕으로 변신한다.
네 가지의 역은 각자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 화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 극을 바라본다. 차분한 목소리로 감정을 넣지 않은 채 독자 혹은 청자에게 이 상황을 설명한다. 아이는 이 극의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뀐다. 그는 고열로 죽어가며 마왕을 보게 되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를 호소하며 날카롭게 부르짖는다. 아버지는 주인공인 아들을 품에 안고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극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갖고 주인공인 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죽음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부자의 주위를 배회하는 마왕이 있다. 마왕 스스로 그들을 보고 ‘너는’, ‘너희는’이라고 칭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면 이인칭 시점이라는 독특한 시점도 가능할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전지적인 경우, 시점은 뭐라고 해야 하나요?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답장을 보냈다. 이야기 속의 인물이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다 읽어낼 수 있는 게 가능할까요? 만약, 화자가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초능력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시점, 그렇게 바라보는 시각.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전지적 일인칭 시점인데 난 그것이 ‘역지사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린 모두 인생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편의 극 속을 살아가며 다양한 시점을 경험한다. 주로 내 인생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 주인공의 시점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살아가지만, 때론 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이인칭이나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방관자의 시점인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라떼 이즈 호올스(나 때는 말이야)’를 연발하며 이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과연 전지적 일인칭 시점은 신이나 초능력자에게만 가능한 것일까. 물론 완벽히 다른 이의 상황과 마음, 생각을 나 자신의 것처럼 안다는 건 어렵겠지만 보다 노력하면 약간의 마음에라도 닿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붕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다가 이내 멈췄다. 결국 아이를 손에 넣은 마왕의 승리다.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려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내 입장도 생각해 주렴. 그게 나의 일인 걸. 책임을 비켜 가려는 그의목소리는 간드러지다 못해 설탕이 본체를 물속에 녹여 숨겨버리는 듯하다. 그런 그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점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하던 내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다시 말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