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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2.21.월. 강한나 목사 부흥성회 2. 노아의 順從 (38P)
히브리서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내가 만든 믿음인가. 하나님이 선물로 부어 주신 믿음인가?
노아의 믿음이라니...
아아!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구나.
믿음은 삶의 모든 영역, 대인관계의 모든 영역에 저절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며 산 것이다.
인류 최대 장수자로 969세를 살다가 종말을 맞이한 므두셀라는 아비 에녹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고 살았을까?
‘하나님의 아들들’ 이 ‘사람의 딸들’ 을 사랑하고, 결혼했다.
오늘날 목사, 장로 들이 다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딸들을 그대로 사랑한다.
나의 판단이 기준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 알렷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흐리게 한다.
나의 남편 박요한 장로는 돈을 빌려서 장가를 왔다. 곗돈을 타서 장가를 와서, 결혼 후에 빚들을 갚아 나갔다.
아내 될 아가씨인 나를 만나려고, 4개월을 서울로 오가며 7-8시간을 열차를 타니, 죽을 것 같았다.
노아는 믿음의 조상들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키웠다.
하나님은 아무나 택하시지 않는다. 순종할 사람을 택하신다. 쓰실 사람을 택하신다. 축복을 할 사람을 택하신다.
당신이 바로 그 주인공임을 아는가?
노아에게 우리가 배울 가장 값진 교훈은 순종의 삶이다.
세상에...
120년을 일심으로 순종하다니...
한 마디로 순종의 끝판 왕이다.
나는 ‘뼈 아픈 순종’ 을 깊이 한번 말하고 싶다.
용호동 산꼭대기에 오륙도가 보이는 공장이 6억에 나와서, 경매를 붙여 사기로 했다. 이미 3억에 산 교회로부터 다시 사기로 했다.
제직회에서 교인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강 건너 불 구경이니까...
남편 박요한 장로가 6억 부족금 중, 우리 집을 1억 5천만에 팔아서 교회 건물을 사고, 교회에서 살자고 했다. 아이들이 고 3년인데,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12시까지 피아노를 치는 아이를 교회에서 살라니...
처음에 순종하던 내 마음이 점점 현실에 눌려,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타산적으로 바뀌어 갔다. 나머지는 10% 만큼은 교인들이 하게 하라는 마음이 강력했다. 나는 결국 거절했다.
나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고, 나는 사탄에게 놀아 났고, 집 담보로, 땅 담보로 화장품 사업을 하다가 10억 이상을 쫄딱 망하여, 이렇게 고난의 기나 긴 길을 걸어 왔었다.
나의 불순종이 패가망신을 길을 걷게 한 것이다.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고, 손가락질 하는 고난의 삶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억 5천만이 없어서, 그 교회터도 사지 못했다. 지금 그 곳은 황금이 땅이 되었다.
노아는 500세에 자녀들을 낳았으니, 이전 세월을 어마 어마한 배를 지으며 일생을 허송세월(?)하며, 오직 순종 하나로 행한 것이다.
노아의 자녀들은 아비를 보면서, 그냥 순종의 체질로 자라 난 것이다. 보고 듣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비가 오지 않던 시대에, 방주를 지어, 비가 오고, 홍수에 대비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는가?
이게 바보인가, 멍청이인가, 쪼다인가, 밥통인가?
세상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장가 가고, 제 멋대로 놀아 나고...
저 이쁘고 잘 생긴 선남 선녀들이...
여자도 음란한 사람들이 분명히 따로 있다.
남자들을 바라 보면서, 침을 삼키며, 음욕을 느끼는 것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은 ‘심판’ 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하나님은 다 쓸어버리고 싶으셨다.
지금도 다를 게 무엇인가?
똑 같다.
어쩜 이렇게 소름이 끼치도록 똑 같을까?
그 수 많은 동물들을 다 배에 싣는다?
최소한 7,000마리 이상을,
그것도 일년 동안이나 악취를 견디며 산다고?
해변도 아닌 곳에서, 배를 만난 적이 없는데?
배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기술도 없는데?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 큰 배를 짓다니...
얼마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받으며, 얼마나 지속적으로 받으며, 세밀하게 받는가?
얼마나 골방에서 기도하고 신음했단 말인가?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행한다.
어김이 없다...
그 순종이 우리를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김이 없다.
2022년부터 담임목사님이 월 1억을 집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을 기억하는데, 세상에... 1월의 <성령의군대> 재정을 정리하니, 일억이 넘지 아니한가?
이 모든 돈들이 적자 대행진이란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는 말이 있다.
시아주버니는 아들이 바다에서 죽자, 3년을 바다에 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40일 간을 온 세상에 창대비를 퍼부으실 때에, 그 창대비는 오히려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이 아니었을까?
당신의 자식들이 하나 하나 죽어 가는 것을 보시면서...
코로나 재앙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어 간다.
하나님의 신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은 크고 작은 채찍과 징계로,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기회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 과정 과정이 하나님의 눈물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지 회개할 줄을 모른다.
방주에 들어 간 비용이 얼마나 될까?
이건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역청’ 을 ‘코올타르, 아스팔트’ 라고 생각해 보라. ‘철도 침목’을 상상해 보라.
아니 백보 양보하여 ‘송진’이라고 하자.
그 양이 얼마나 엄청날까?
냄새는 얼마나 지독할까?
‘역청’ 을 대충 바를 수가 없다.
한 치만 틈만 벌어져도, 바로 심판의 물이 스며 들기 때문이다.
엉터리 작업이란 있을 수가 없다.
술 취한 노아가 자식을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는 허물을 어찌 설명할까?
포도농사의 결과라니...
노아가 과연 술을 알지 못했을까?
셈과 야벳은 벌거벗은 아비의 하체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았었다.
함은 아비를 조롱했고, 그 저주는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나 목사라도 이렇게 저주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부모나 목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가 셈이나 야벳처럼 행한다면, 축복의 유산을 이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함의 반열에 선다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할 자에게는 축복하고, 저주할 자에게는 저주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일이다.
<성령의군대>는 새로운 미숙한 자들을 잘 인도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담임목사님의 단돈 10만도 없어 절절 매면서, 100억짜리 <성령의군대> 세계선교센타를 준비한다고?
첫돌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다.
어린 손자가 다리미에 자꾸 손을 대려 하더니, 마침내 데었다.
그냥 척 믿으라.
주신 말씀대로 턱- 믿으라.
‘턱- 믿는 믿음’ 이 얼마나 중요한가?
오직 이 믿음에 순종하는 종들이 되라.
첫돌 아기의 믿음이 되라.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 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2>. 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 없이 살아 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3>.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후렴] 걸어 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 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 진실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念願(염원)하는 ‘성령님의 侍從’,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묵상 7 (732P) ♥
♥ 노아의 놀라운 믿음의 順從(순종) (28P) ♥
히브리서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 믿음의 증거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실례(實例)들을 접하게 되는데,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참된 믿음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각 개개인의 행하여진 사역들과 행위들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내가 믿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의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 실제적인 행위의 무엇인가를 본 후에야, 비로소 나의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약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믿음의 용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이 대단한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믿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자신들의 행함과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 믿음의 진보
성령께서는 믿음에 대한 실례(實例)들을 아벨(4절)로부터 시작하여 믿음 생활의 시작을 다루시며, 그 후에는 에녹에게로 내려 가 지속적인 믿음의 발걸음을 다루시고, 세 번째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역을 예시하는 노아에까지 이르신다.
여기에는 점진성이 나타나 있다.
아벨의 기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에녹의 기사는 예배와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노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을 보게 된다.
노아는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나아 간다. 믿음이 다음과 같이 역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에 예배 드릴 것이 요구되며, 믿음의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겨우 첫번째 단계에까지만 도달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다.
어떤 이들은 두번째 단계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 후에야 하나님을 믿고 동행할 뿐 아니라, 믿음에 전폭적으로 의지한 노아와 같은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이다.
노아의 믿음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어서, 정상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가 노아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멍청이 짓이 될 것이다.
루이스(C. S. Lewis)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감연히 바보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셨던 것이기에 행하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그의 믿음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이기에 행하였던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님! 저 배종부 목사의 믿음의 행보가, 진정 하나님 앞에 진실성과 의미성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판단이나 평가, 사람들의 이성적 평가나 판단은 더 이상 제게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독단성과 自家撞着(자가당착)에서 나온 과신적 믿음이 아니라, 진정 성령 신앙에서 나온 그 믿음으로, 남은 인생과 사역을 승부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노아의 믿음이 합당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세 가지 증거들, 즉 노아의 믿음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증거들이 있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 그는 세상을 책망했다.
-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었다.
이러한 것들이 세 가지의 전통적인 참된 믿음에 대한 지적 들이다. 믿음이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것이며, 세상을 책망하며 살게 될 것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바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함(7 상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Ⅰ. 그의 헌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어찌나 잘 믿었던지 그는 방주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밖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든 것을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노아에게 "노아야,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 나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한다. 너는 방주를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에 대해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모든 것을 且置(차치)하고, 무려 그의 인생의 가장 소중한 황금기 120년 간을 방주를 짓는 데에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바다와는 너무나 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한 장소에서 방주를 지었다.
당신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처음 몇 년 간은 모르지만, 얼마 후에는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려 120년 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삶의 행동으로 직접 배를 지으며 준비할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믿음을 나타 내어, 보여 주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이유를 대지 않는 것이다.
노아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시대를 살아 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에게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를 짓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위대한 헌신인 것이다.
사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있던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배에 관하여는 모르는 점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서는 그 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 그것에 자신의 생(生)을 바쳤던 것이다. 그가 뛰어 나가서 재목감들을 마련한 것도 훌륭한 믿음이지만, 백년 후에도 여전히 역청을 바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헌신하되, 계속하여 믿을 수 없이 위대하게 믿음으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Ⅱ. 그의 경외심
7절은 "믿음으로 노아는...(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 라고 말해 준다. 괄호의 "하나님의" 라는 구절은 어떤 역본들에는 나타 나지 않는다 (개역 한글성경에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흠정역에는 표기되었다 - 역자 주). 그러나, 그것은 작은 글씨로나마 분명히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가 "... 보지 못하는 일에(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 라고 할 때, 이 구절에는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은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노아는 물을 보지 못했었다.
또한 그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오로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또한 7절은 "노아는 ...경외함으로 ..."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당신은 "아하! 그래서 그가 방주를 지었군요. 하나님께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너를 치겠다」고 말씀하셨군요." 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잘못 안 것이다. "경외하다"(fear) 라는 단어는 당신에게 잘못된 인상, 즉 노아가 두려움으로 인하여 행동했다는 인상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단어는 헬라어(eulabeomai)로는 "존경하다"를 뜻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행했던 것이다.
그는 경건한 조심성으로 행동했었다. "경외하다" 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경건한 조심성이다. 그는 큰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멧세지를 대했고, 방주를 예비했던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칭찬을 들었으며, 그의 가정, 즉 그의 아내와 세 자녀 셈, 함, 야벳, 그리고 그들의 세 아내 들은 구원을 받았다. 여덟 명의 영혼들이 구원 받았던 것이다.
실로 노아는 자녀를 믿음으로 오로지 순종하는 자녀로 너무나 아름답게 잘 양육한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하라. 하나님은 존경하라. 그 분의 말씀을 경외하라. 그 말씀이 곧 하나님 당신이시다.
Ⅲ. 그의 도전
창세기 6장으로 돌아 가서 이 사건을 살펴 보고, 이 기사에서의 흥미 있는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창세기 6장 14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이지 선례(先例)가 없는 믿음에의 도전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광야 한가운데에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그것도 무려 120년 간이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위들 중의 하나는 노아가 팔을 뻗어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렸던 사실이다. 한층 더 나은 믿음의 행위는 첫번째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연장을 집어 든 사실이다. 믿을 수 없는 노아의 놀라운 믿음은 120년 후에도 그는 여전히 방주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방주에는 많은 풍유와 상징이 있다. 이것의 한 가지 예는 "역청"이라는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역청(Pi-tch)’은 ‘속죄(Atonement)’ 와 같은 단어이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피를 너의 영혼을 위해 단 위에 바르도록(pitch) 너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영혼을 위한 역청(pitch)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 라고 바꾸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했다. 왜냐하면 역청이 밖의 물 심판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역청은 우리를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방주에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홍수로부터 신자를 감쌌으므로, 결코 신자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대속 사상인 것이다!
2. 창세기 6장 15절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청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즉,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長)이 삼백 규빗 광(廣)이 오십 규빗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한 규빗(cubit)이 얼마 만한 길이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씩의 차이가 있다. 즉, 그 길이가 44-56cm가 된다고 말들을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방주가 길이 132m, 폭이 22m, 그리고 높이가 13m(약 4층 건물의 높이)의 크기가 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방주는 3개의 갑판 (3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임 - 역자 주)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갑판의 총 넓이는 대략 8,891평방미터(보통의 야구장 20개의 넓이 보다도 넓다)이며, 방주의 총 부피는 40,917입방미터나 되는 것이었다.
자!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배인가!
그것의 크기는 오늘날의 거대한 철제 원양 화물선들의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아닌 수준이다. 그 모양은 우리가 최대한 잘 표현한다면, 직사각형의 바닥이 편편한 오막살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뗏목에 윗 부분만 덮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여러 용적들의 배들을 건조해 왔다. 그런데 한 번은 영국 해군의 기술자들이 드레드노트(Dreadnought: 20세기 초기의 최대 최강의 전함 - 역자 주)의 치수들에 대한 공식을 발견했다. 그 공식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것임이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해군 함정들은 이 공식의 비율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드레드노트 전함의 치수 비율과 방주의 치수 비율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배를 지으시는가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과학적 사실을 대변하는 일인가?
3.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비가 내릴 것이며, 당신께서 땅에 홍수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고 말한다. 이와 같이 땅은 땅 밑에서 올라 오는 안개로 적셔졌다. 그리고 아마도 안개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감싸져 있었을 것이다(창 1:6-7).
땅을 뒤덮고 있었던 이러한 안개는 홍수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장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태양의 방사선은 결코 그 안개를 통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양의 방사선으로 말미암는 폐해에 노출되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900년 이상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일어 나고,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자(창 7:11), 땅의 전체 대기(大氣)는 변화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태양의 방사선에 노출됨에 따라, 즉시 짧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理性)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이 있다.
1. 이전에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대홍수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에 의해 감추어져 버리고, 그로 인하여 전 인류를 멸절하실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3. 심판은 120년이란 먼 훗날의 일이었으므로, 노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그래,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개혁할 많은 시간을 주시는 것임이 분명해. 그러니 사람들은 그 때까지는 아마도 정신을 차릴 거야!" 라고 말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4. 노아가 그 멧세지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믿지 않았다. 120년 후 마침내 홍수가 찾아 왔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 만이 방주에 들어 갔다. 120년 동안이나 전파하여 왔음에도 아무 결과가 없음에 대한 자연적인 반발로, 그 멧세지를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계속하여 전파하였던 것이다.
5. 내가 확신하건대 노아는 자기 이웃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6. 노아가 가졌었을 한 가지 분명한 의혹은 "만일 홍수가 닥쳐 온다고 할 때, 저렇게 거대하고 더구나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두 마리 씩이나 싣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이다.
7. 또한 그 방주는 닻도, 돛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으며... 더구나 노아는 항해 방법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면 이 21세기 과학의 첨단시대에,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전자시대를 앞둔 가장 똑똑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컴퓨터에 삶을 다 맡긴 당신은, 도대체 어떠한 근거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나 배종부 목사는 오직 하나,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서만 나의 믿음을 가지리라.
성령께서 밝혀 주시는 오직 그 말씀을 따라서만, 나의 믿음의 행보를 결정하리라.
4.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하나님께서는 "노아야, 나는 모든 사람을 멸절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나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8절로 돌아 가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에 나타 난다.
그리고 9절에 의하면,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었다. 그래서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었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 그 자신에게서는 은혜 받을 만한 어떤 것이 없었다. 은혜는 주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
은혜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죄인에게 있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흥미를 끌 수는 없는 것이다. 노아도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창 9:21-22 참조).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심령 속에서 죄를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악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 분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건지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저로 심성이 사악하지 않게 하시고,
제 주변에 이토록 아름다운 가족과 성령의 장군들로 울을 둘러 주시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안온히 살게 하시니,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나이다.
제게 임하신 주님의 은혜가 넘치나이다.
저는 진정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이옵니다. 아멘.
2022.1.31.월. 밤 11시 10분. 넘치는 기도 응답을 주시려고, 강제로 禁食祈禱(금식기도)를 시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금식 제 1일, 제 2일의 기도)
呻吟(신음)하는 기도는
실로 좋은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까불며 살지 않기를 원하시고,
오직 呻吟(신음)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오직 주님께 부르짖으며,
신음하고, 신음하니,
그 곡조가 하늘을 울리도다.
기도의 소리 중에
신음하는 소리 보다 아름다운 소리는
더 이상 없다.
절망스러운 게 좋다.
사람이란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인간의 方案(방안)을 찾는다.
그러나 완전히 절망스러우면
오직 하나님 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나이다...
2022년 설날 명절,
다들 명절이니 즐거워 하고, 바쁘고,
정신 들이 없을 것이다...
배목사야!
즐거워 하지 마라.
배 부르게 먹지 마라.
금식을 선포하고, 재를 뿌리고, 제단 앞에 엎드리라.
지금은 네가 신음할 시간이니라...
설날에 금식이라.
실로 아름답도다.
김수읍 형님 목사님은
이 숨 막히는 나날 들을 어떻게 보내시나?
이 밤이 깊어 가는 시간에도 기도하고 계시나?
아니면 울고 계시나?
명절이라, 아무 소식도 없으시네...
나를 배려하심이겠지!
나도 너무 너무 두렵고,
조심스러워
전화도 드리지 못하네...
형님 목사님!
저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초라한 금식을 하면서...
너무 부끄러우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냥 신음하고, 또 신음합니다.
呻吟(신음)을 주님이 좋아 하시기에...
하나님이 다시 강제로 금식을 시키셔서,
4일 간을 또 다시 금식에 들어 갑니다.
내일부터 금식인데,
사실은 오늘 아침 식사 후에 계속 굶었더니,
벌써 배가 고프네요.
내일 설날 아침에
처가 가족들이 다 오는데,
제가 아침에 예배를 인도하고,
아침 식사들을 하는데,
금식을 하니,
얼마나 감사가 넘치는지요.
저는 가슴 조이는 아픔으로 기도하시는
형님 김수읍 목사님 곁에
지금 靈(영)으로 함께 있습니다...
함께 신음합니다.
통곡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김수현 사모님께 임하실
오직 그 神癒(신유)의 기적을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의 김수현 사모님을 살려 주옵소서.
이 설날을 앞두고
외롭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픈 정윤희 동생 목사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세상을 떠나 갔네...
천국 문을 넘기까지,
그 육체가 얼마나 아팠을꼬?
마지막에는 견딜 수 없어서,
모르핀을 의지했겠지...
나는 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사람이 마지막 그 한 자락의 숨을 쉴 힘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닌가?
동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니야...
주님이 强勸(강권)적인 평안을 주셨을 거야!
지난 보름 어간에 유일한 통화는
간병인이 “정윤희 씨가 지금 잠들어, 통화 못합니다...” 하는
傳言(전언)이 마지막이었네...
동생 정윤희 목사의 육체는
그 마지막이 심히 고통스러웠으나,
그 영은 하늘을 날고 있었네...
이제 고통은 과거가 되고,
사랑하는 동생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 갔네...
새삼스럽게
김수현 사모님이
아들 영권 씨에게 한 말...
“나 평안해...”
이 말씀 한 마디가
어찌 이리도 천둥 같을꼬!
오호라...
이 아프고 힘들고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설날...
그 한 가운데에
나의 형님 김수읍 목사님이 서 계시네...
숨을 잘 쉬지 못하고 마냥 서 계시네.
어디 음식이 한 술 넘어 가리.
잠을 제대로 한 숨 잘 수가 있으리..
그 사랑하는 자녀가 쉬지 못하고 있네...
이 못난 나라도 신음하며 금식하며,
단 4일이라도 함께 서 있어야지!
금식 2일 째에
기운이 없고, 눈이 침침하네.
왜 이리 배가 고플꼬?
아이고... 배 고파라...
이 작은 고통이 혹시나
주님 앞에 예물이 될까?
아버지, 아버지여!
우리 김수현 사모님을 살려 주옵소서.
우리에게 이 설날이
마지막 추운 설날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김수현 사모님만 돌려 주시면,
우리는 눈물로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습니다.
기뻐 뛰며, 환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우리에게 선물 주옵소서.
김수현 사모님의 생명을 선물로 돌려 주옵소서. 아멘.
김수읍 형님 목사님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렇게 무력하게
한 켠에 서 있는 저 배종부 목사에게도...
2022.2.1.화.아침. 존경하옵는 김수읍 대선배님.
어제부터 다시 김수현 사모님을 위해
기도하며, 금식하고 있습니다.
설날이라 다들 행복하고 풍요로우나,
지금이 가장 고통과 신음이 깊은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내일이 김수현 사모님의 에크모 시술이 끝나는 시간이라,
너무나 절절한 마음입니다.
힘 내십시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 하겠습니다.
2022년 설날 아침에
<서울부흥단> 전 임 역원, 단원들과 함께 문안 드립니다.
강건하시고, 평안하십시오. 아멘.
後學(후학) 배종부 목사 드림
2022.2.1.화.저녁. 소중한 대선배님.
사모님의 폐 기능이 어느 정도인지요?
아니면, 수술이 가능한가요?
자녀 분들과 함께 어찌 하시는지요?
그냥 2일 째 금식하며, 신음하며,
멀리서 기도 드릴 뿐입니다.
주님! 오직 은혜로 인도해 주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2022.2.2.수. 아침 7:40. 넘치는 기도 응답을 주시려고, 강제로 禁食祈禱(금식기도)를 시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금식 제 3일의 기도)
2022.2.2.수. 금식 제 3일째 신음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있다.
연 이틀 째
대선배님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절망적인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크신 은혜로
오직 덮어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알아 달라 한다.
그러니,
기도가 응답 될 리가 없지!
그러니,
골방이 있을 리가 없지.
온통 까발려 제치니...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신음합니다.
금식합니다.
사랑이 많습니다.
저는 온통 ‘섬김과 나눔의 삶’ 을 오로지 삽니다.
나의 경건한 영성을 본 받으세요.
당신들은 죄인입니다...
좀 행함을 드러 내 보세요.
이 가짜 목사님들아!
오호라. 어찌할 거나?
이 일을 어찌할거나?
배목사야, 배목사야!
너도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사람이 단절되어야,
하나님이 연결되지.
사람들이 몰라야,
하나님만 아시지.
배목사야, 배목사야!
넌 뭐 그래?
김수읍 목사님이
한 없이 한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 보았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누가 기도하는데...
온통 다들 ‘강 건너 불 구경’ 이지.
너도 그랬잖아!
단 한 명만 진실로 기도했어도
김수현 사모님은 살았을 거야...
주님. 우리가 악합니다.
너무 악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주님은 없었습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올리는 기도는
단 한 자락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만 우리 주변에 가득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유행가 한 자락도 死力(사력)을 다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도록
저렇게 절절이 부르건만...
오호라!
우리는 하나님은 없고,
온통 사람만 있습니다.
온통 사람에게 다 떠벌이고...
아버지!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전00 목사님의 비문증(눈에 어리는 모기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해 주옵소서.
그의 신음하는 5,000만 예물을 받으소서.
생명을 바친 그 예물을 받으시고,
그 눈을 고쳐 주옵소서.
바로 내 코 앞에
終末(종말)이 다가 오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들을 지켜 주옵소서.
아버지! 어찌 하오리이까!
주님의 긍휼 외에는
우리가 살 길이 없나이다.
다시 로마의 그 무서운 핍박이 다가 오나이다.
패망한 월남의 대살륙이 다가 오나이다.
저 철의 장막 아프간의 대량 학살극이
바로 이 땅 대한민국에 다가 오나이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
많이 죽여야 이기는 거잖아?
더 잘,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려고
기를 쓰는 게 작전이잖아!
전쟁이야 말로
가장 큰 죄야. 악이야. 저주야...
끔찍하기 이를 데 없지.
죄악된 이 나라의
끔찍한 전쟁을 보옵니다.
주사파 간첩 정권이 토대를 마련한
이 나라의 적화통일을 봅니다.
주여! 우리를 살려 주옵소서...
부디 부디 살려 주옵소서.
한국교회의 背敎(배교)를 회개케 하옵소서.
아직도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마지막 시간이 있을 때에,
회개케 하소서.
대형교회 목사들이 협박을 받아
주사파 간첩 정권과 결탁함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그제 또 이 큰 목사들이 모여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나이다.
한 마디로 미친 자들입니다.
일제 신사참배와 똑 같은 짓을 하는 놈들입니다.
저들을 저주합니다.
저들의 부끄러움이
온통 저들 얼굴에 덮어 씌워지게 하옵소서.
오호라! 사람 마다 고통한다.
배목사 너는 단지 돈이 좀 힘들 뿐이다.
넌 행복자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금식으로 배가 좀 고플 뿐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5. 창세기 6장 19-21절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 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네가 방주를 지은 후, 거기에 동물들을 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러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노아는 이 동물들이 각처에서 오는 동안 문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보라. 동물들이 정말로 나아 왔던 것이다!
하나님 그 분께서 그들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셨다는 것 외에는 이러한 모습을 설명할 방도란 아무 것도 없다.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 가면,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기적이 있다. 그 기적을 믿고 또 한 걸음 나아 가면, 다시 다른 기적이 기다린다. 그 과정 과정이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한 걸음도 나아 갈 수 없는 시련이요, 시험이요, 도전이다...
믿음은 내가 가진 이성을 늘 부수어야만 실현되는, 비합리성 위에 바탕해 있다. 가장 합리적, 이성적인 사람이 가장 비합리적, 비이성적으로 살 수 있는 이 불가사의한 사고 체계가 믿음의 세계이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관점에서, 그 방주는 7,000종의 동물들을 쉽사리 실을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이것은 매우 적은 수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이 두 마리씩 방주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에는 종(species)이 있는 것이다. 종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퍼져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을 시에는 분화된 각각의 동물은 같은 종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양(sheep) 보다 큰 지상의 포유류는 기껏 290종(species) 밖에 안 되며, 양보다 작고 고양이 보다 큰 것이 약 757종, 그리고 고양이 보다 작은 것이 1,359종 가량이 된다고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기껏해야 2,500종(species) 정도가 나타 날 뿐이다. 그런데 중간 크기인 고양이 정도의 동물 한 마리는 0.2평방미터도 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에서 동물들의 우리를 짓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9-21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셨던 그 명령은 여전히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었다. 즉, 그 동물들은 어떻게 그 곳까지 도착할 것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거할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먹일 것이며, 누가 그 장소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부대적인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거의 1년 동안이나 방주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노아는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건 해답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나 궁구하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도록 기도하고 기도했을까?
6.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진정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왔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되어 하나님에 대한 인내심이 말라 버리지만, 노아는 무려 120년 동안이나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아의 믿음이 이렇게 놀랍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놀라고 또 놀란다.
세상에... 이런 놀라운 믿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노아의 믿음이란 세상 역사 이래 감히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믿음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바로 그 믿음이었다.
노아가 보여 준 놀라운 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 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그는 믿었으며, 자기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행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하신 그대로 믿었으며,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순종했던 것이다. 노아는 심판과 약속과 그 밖의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다. 그는 짓기로 되어 있던 그대로 방주를 지었으며,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내했으며 그 모든 것을 행하였던 것이다.
2022년 2월, 이제 방역 패스는 점점 666표로 다가 가고 있다. 이제 종말이 바로 나의 코 앞에 닥쳤다,
주님!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역시 그대로 믿겠나이다. 아멘.
스펄젼(C. H. Spurgeon)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분께서 대속의 보혈로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약속에 관해서는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만, 심판에 관해서는 그 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노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믿었다.
스펄젼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하나님을 고백하신 당신이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경고가 당신의 피를 얼어 붙게 하며, 당신의 본성(本性)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을 피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는, 계시된 진리의 다른 점들에 대해서도 당신이 불신하도록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가 약속을 받게 될 것임을 믿었을 뿐 아니라, 전(全) 세계가 멸망 당하게 될 것도 역시 그대로 믿었다. 그는 말씀 그대로, 모든 것을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이다.
세상을 책망함(7 중반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Ⅰ. 설교자로서의 노아
당신은 노아가 설교자였음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가 무엇을 설교했습니까?" 라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말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의 개요에 대해서도 말해 주려고 한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가 무엇이었을까?
일백 이십 년 동안 배를 짓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설교였다.
그가 방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가 등에 판자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 라는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삶으로 설교했다. 즉, 모든 쓰러진 나무들과, 톱으로 켜진 판자들, 그리고 박힌 못들이 "심판이 다가 오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분의 보호를 받으라." 고 설교했던 것이다.
120년 동안이나 그가 설교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시대를 향한, 생생한 책망으로써 일관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책망했던 것은, 바로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꾸짖는 것이다.
Ⅱ. 노아 당시의 사회
창세기 6장을 조사해서 노아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몇 가지 특성들을 살펴 보자.
1. 죄악이 관영함(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의 눈은 사람들의 외부로 나타나는 악한 행실들 만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심중(心中)으로 하는 일을 감찰하실 수 있는 것이다(겔 11:5 참조).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가 악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파렴치한 상태였다.
2. 하나님을 슬프시게 함(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는 의외의 일도 없으며,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대하게 되는 표현은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n)이거나 하나님에 관한 인간 언어로의 진술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던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장 29절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계획을 바꾸시고, 인간을 멸절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 노를 발하셨으나, 마음으로는 슬퍼하셨음을 주목하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며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좋지 않은가?
3. 마귀에게 사로잡힘(7절)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얼마나 무서운 결단이신가!
사람들은 대개가 마귀에게 사로 잡혔으며, 너무나 극도로 타락하였었기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멸절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함께 동거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들이었다고 믿는다(1-4절 참조).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 세대를 멸절시키셔야만 했던 것이다.
4. 패괴함(12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하나님의 길을-흠정역) 패괴함이었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패괴했었다(더럽혔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 분의 길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았으나, 자신들의 길로 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마서 1장 21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고 말한다.
또한 25절은 "...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 분의 길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비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셨으나, 그들이 자기들의 길로 가 버렸음을 기억하라.
Ⅲ. 하나님의 선고
창세기 6장 13절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선고를 노아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세상은 타락했고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겠다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별된 백성에게 다가 오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케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모스서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분의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이 곳에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목적
어떤 사람은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리시는, 어마 어마하게 무서우신 분으로만 여전히 보여집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긍휼은 뒤로 하시고, 공의 만이 그 분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시간이 끝나고, 공의의 팔을 드실 것이라는 사실은 죄악으로 저주 받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소망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죄가 심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악되고, 파렴치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을 원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해 주신 세상을 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정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멸절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멸망 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세상은 타락했고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겠다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별된 백성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케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모스서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분의 심판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겐가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이 곳에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멸절시키심과 심판하심에는 긍휼이나 은혜는 없는 것이라고 호리라도 생각지 말라. 그것은 분명히 있다!
반하우스(Donald Grey Bamhouse)는 "지옥은 하늘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일부분이다."라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심판은 더디게 천천히 임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5장 21절은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라고 말한다. 당신은 "므두셀라의 무엇이 중요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이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네가 너의 자녀를 보느냐?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에야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그런데 무엇이 보내질 것인가?
멸절시키기 위해 오는 대홍수인 것이다. 세상은 에녹의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되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 외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선 므두셀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므두셀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심판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얼마 동안이나 향수했는가?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긴 969년을 향수했다. 이러한 사실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무엇인가를 말해 주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비난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살펴 보라. 하나님은 너무도 긍휼을 베푸셔서 거의 1,0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므두셀라는 자연사했나, 홍수로 죽었나?
자연사라고 본다. 경건한 후손이므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진리를 알 기회를 가졌을까?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세상은 진리를 결코 알지 못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 로마서 1장 19-20절은 사람들이 보이는 피조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그들로 변명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 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한 약속된 여자의 후손, 즉 구속자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 하나님께 다가오는 방법으로서의 속죄의 제사가 아벨의 때에 주어졌으므로(창 4:4) 그들은 하나님께로 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창 8:20 참조).
-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계속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 아담은 930년을 향수했으며, 아마도 죄가 그에게 가져온 파급 효과에 관한 사실들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면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을 것이다.
- 에녹의 설교는 경고였다(유 14-15절).
- 노아의 설교도 경고였다.
- 성령께서는 사람들과 싸우고 계셨다(창 6:3).
그러므로 노아의 세대가 진리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알고 있었으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나 배종부 목사가, “방역 패스가 666표로 가고 있다”고 역설해서 말해도, 어느 목사 한 사람도 주목하지 않는다.
노아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내가 코로나 주사를 단 한 대 맞지 아니한 사실을, 새삼 이제 와서 나 자신이 진정 경이롭게 생각한다.
2019년-2022년에 한국교회가 주사파 간첩 정권과 야합하여 背敎(배교)했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적화통일로 다 죽임을 당하면, 그 때에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인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70년이 넘도록, 저 북한 이리 떼를 계속 유지 시키시는가?
쓸 용도가 있으신 것이 아닌가?
당신은 진실로 소름 끼치지 아니하는가?
Ⅳ. 노아 시대와 오늘의 유사점들
마태복음 24장 37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노아 시대의 특성들이 무엇이었으며, 그것들 중 오늘날 반복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조롱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2.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번성했다.
-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인구 폭발은 당시와 비교할 때에 얼마나 폭등하고 있는가?
3.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인내로 대하셨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인내하며 대하신다.
4.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설교자들을 가지고 계셨다.
-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자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5.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신(神)은 사람과 싸우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아니하리니..."(창 6:3 상반절)라고 말씀하셨다. 그 싸움과 더불어 성령을 거두시겠다는 위협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神)이 사람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6-7절의 약속에 의하면, "막는 자" 되시는 하나님의 신(神)은 떠나시게 될 것이다.
6.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멧세지는 거부되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7. 노아 시대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다.
- 오늘날에도 있다.
8. 노아 시대에 에녹은 기적적으로 옮기워졌다.
- 이것은 심판 이전에 성도들의 휴거에 관한 모습이다.
9. 노아 시대에 땅에는 마귀가 활동하고 있었다.
♥ ‘역경의 열매’ 치유하는교회 김의식 목사 간증 13. 욕설과 몸 싸움장 된 교회… 주일에 설교 가기도 두려워...
김의식 목사가 2,000년 서울 화곡동교회 목사 위임예배에서 당회원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6월 11일 서울 화곡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부터 한 안수집사님이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10여 차례씩 보내 왔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 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했다.
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노량진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받을 때는 교회 안에 사랑하는 형제들만 있는 것 같았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는 교회 안에 원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당시 화곡동교회는 마귀가 득실거리는 복마전 같았다.
화곡동교회는 김학만 원로목사님이 출석 교인이 200여 명 되던 1975년 부임하신 뒤, 24년 2개월 동안 2,000명으로 부흥됐다. 그런데 김 원로목사님은 은퇴를 2년 앞두고 장로 불법 선거 시비에 휘말리셨다. 총회 재판국의 판결대로 보면 문제 삼을 것이 없었지만, 시비를 걸면 문젯거리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내가 부임하기 한 주 전에 문제가 있던 관리집사 들을 해고한 것이었다. 이 일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나는 서로 간에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평한 교회를 회복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교회가 평안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관리집사들은 당회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했고, 이후 기독노조를 설립하며 교회와 대립했다.
이런 교회 분쟁이 6년 7개월 동안 계속됐다.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가 있는 주일은 교회에 나가기가 싫었다. 심한 욕설과 몸 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주일에 교회 가기가 싫을 정도라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X새끼 같으니라고...” “네 명에 죽을 것 같냐...” 등 갖가지 폭언으로 위협했다. 심지어 어떤 교인은 새벽 1시든, 2시든 상관없이 사택에 전화해서 “아파트 문에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해 놓았으니, 나올 때 콩가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또 당시 화곡동교회에는 고소의 달인(?)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계속 고소를 해 댔다.
그래서 매주 경찰과 검찰, 법원, 노회 재판국, 총회 재판국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됐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 밖에 없었다. 나는 주님만 바라 보며 치유 목회를 계속해 나갔다.
부임 후 3년쯤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왜 우리 원로목사님이 목회를 이렇게 마무리 하셔서 나를 힘들게 하냐고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셨다. “네가 평생 목회해서 오늘 같은 화곡동교회를 이룰 수 있는 줄 아느냐? 네가 못 이룬다면 이뤄 놓은 교회에 와서 설거지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 날 이후부터는 원로목사님에 대한 불만이 싹 사라졌다.
♥ ‘역경의 열매’ 치유하는교회 김의식 목사 간증 14.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치유의 은혜 체험
교회 분쟁으로 울분· 마음의 상처 쌓여,
협심증 심해져 묵상 중 호흡 곤란 발생,
"교회 수습은 하고..." 주께 눈물로 간구.
화곡동교회는 10여 년에 걸친 분쟁을 그치고 부흥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새 예배당을 짓고 입당했다. 이름도 현재의 치유하는교회로 바꿨다.
글로리아 채플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화곡동교회의 분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교회 뿐만 아니라 노회 수습전권위원회와 관계도 점점 악화했다. 수습전권위원회 부위원장 목사님이 수습을 전제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위원장 목사님이 반대하셨는지 그 후에는 각서 내용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끝이 없었다.
그 중에 가장 눈물 나는 일은 수습전권위원회가 불러서 갔다가, 위원장 목사님이 노회를 탈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면서, 3시간 반 동안 온갖 욕설을 쏟아 놓았던 일이다. 노회 탈퇴는 우리 교회의 마지막 투쟁 카드였기에 각서를 쓸 수 없었다. 유명한 목사님에게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욕설을 듣고 나니까 그 충격이 너무 컸고,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또 다시 교회로 달려 갔다. 예배당에 엎드려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들을 또 다시 주님의 사랑으로 다 용서했다. 그러나 그런 상처의 감정들은 나의 무의식 속에 계속 쌓여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생각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협심증이 생겼는데 그것도 모르고 몇 달 동안 가슴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의 치유를 간절히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목양실에 돌아 와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굳으면서 숨이 안 쉬어지는 것이다.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어디에 연락할 생각 조차도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간신히 일어 나서 무작정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숨이 안 쉬어지니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창틀에 엎드린 채로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부르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떠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저 불쌍한 양 떼를 생각해서라도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는 데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거의 숨이 꺼져 스러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푸후’ 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하나님께서 또 한 번 나를 불쌍히 여기고 살려 주신 것이다. 나의 이런 죽음 직전 체험들은 불치병 환자 교인들을 치유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 후 기도원에 들어 가 20일 간 금식하고, 20일 동안 보호식을 한 뒤, 교회로 돌아 왔다. 그 기간 하나님은 내 마음 속 깊은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심장병까지 치유해 주셨다. 강단에 서자 체중이 13㎏이나 줄어 야윈 모습을 본 교인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도 보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 시작했다.
나는 기도원에서 기적적으로 심장병을 치료 받았고, 교회 문제 해결의 돌파구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치유 은혜를 체험했고, 교회는 영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 오늘날도 세상을 살릴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 ‘노아’라는 인물을 본다.
우리는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이었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으며, 세상을 책망했고,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음(7 하반절)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성경에서 의로운 자라고 불리워진 최초의 사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그가 "의인"이라고 불리웠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노아를 묘사하기 위해 "의로운"이라는 뜻의 「디카이오스」(dikaios)가 이 구절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노아가 믿음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길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 세번째 길은 그가 의롭다고 선언된 것에 있었다.
노아가 의롭다고 선언된 사실이, 그가 자신의 힘으로 너무도 의롭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선 그의 의로움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의(義)가 그에게로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 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義)를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22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즉, 만일 당신이 장미빛 안경을 통하여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은 장미빛을 띄게 될 것이며, 파란색 안경을 통하여 본다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통하여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주는 안경을 통하여 보고 계셨으며, 현재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동일하게 보고 계신 것이다.
노아는 믿음의 삶과 걸음과 사역을 모든 방면에서 예증한다. 그는 믿음의 사람의 한 모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이 그 명령이 아무리 기괴하고, 이상하며, 어렵고, 비정상적인 것 같을지라도,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순종하는, 더 많은 남종들과 여종들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 주셔서,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타락한 세상을 향해 책망하는 자로 서게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서 서게 하시는 것이다.
♥ 2014.7.15. 나는 기도했으나, 응답이 되지 않으니... (19P)
(고난의 세월 한 가운데 있을 때, 한 설교입니다.)
야고보서 4:1-3절
(1) 너희 중(中)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肢體) 중(中)에서 싸우는 정욕(情慾)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너희가 욕심(慾心)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殺人)하며 시기(猜忌)하여도 능(能)히 취(取)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求)하지 아니함이요, (3)구(求)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情慾)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2022.1.31.월. 밤 8시 10분. 넘치는 기도 응답을 주시려고 강제로 禁食祈禱(금식기도)를 시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2022년 설날 명절,
다들 명절이니 즐거워 하고, 바쁘고, 정신들이 없을 것이다...
배목사야!
즐거워 하지 마라.
배 부르게 먹지 마라.
금식을 선포하고, 재를 뿌리고, 제단 앞에 엎드리라.
지금은 네가 신음할 시간이니라...
김수읍 형님 목사님은 이 숨 막히는 나날 들을 어떻게 보내시나?
이 밤이 깊어 가는 시간에도 기도하고 계시나,
아니면 울고 계시나,
명절이라 아무 소식도 없으시네...
나도 너무 조심스러워
전화도 드리지 못하네.
형님 목사님! 저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강제로 금식을 시키셔서,
3일 간을 또 다시 금식에 들어 갑니다.
내일부터 금식인데,
사실은 오늘 아침 식사 후에 계속 굶었더니,
벌써 배가 고프네요.
내일 설날 아침에 처가 가족들이 다 오는데,
제가 아침에 예배를 인도하고,
아침 식사들을 하는데,
금식을 하니,
얼마나 감사가 넘치는지요.
저는 가슴 조이는 아픔으로 기도하시는 형님 김수읍 목사님 곁에
지금 영으로 함께 있습니다.
함께 신음합니다.
통곡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김수현 사모님께 임하실 신유의 기적을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의 김수현 사모님을 살려 주옵소서.
이 설날을 앞두고
외롭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정윤희 동생 목사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세상을 떠나 갔네...
천국 문을 넘기까지,
그 육체가 얼마나 아팠을꼬?
마지막에는 견딜 수 없어서,
모르핀을 의지했겠지.
지난 보름 어간에 유일한 통화는
간병인이 “정윤희 씨가 지금 잠들어 통화 못합니다...” 하는
傳言(전언)이 마지막이었네...
오호라...
이 아프고 힘들고 외로고 슬프고 고독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낳는 설날...
그 한 가운데에 나의 형님 김수읍 목사님이 서 계시네...
그 사랑하는 자녀가 쉬지 못하고 있네...
나라도 신음하며
단 4일이라도 함께 서 있어야지!
아버지, 아버지여!
우리 김수현 사모님을 살려 주옵소서.
우리에게 이 설날이
마지막 추운 설날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김수현 사모님만 돌려 주시면,
우리는 눈물로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습니다.
기뻐 뛰며, 환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우리에게 선물 주옵소서.
김수현 사모의 생명을 선물로 돌려 주옵소서. 아멘.
김수읍 형님 목사님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렇게 무력하게
한 켠에 서 있는 저 배종부 목사에게도...
나 배종부 목사는 올해 2022년에 <성령의군대> 제주 세계선교센타를 받으려고 준비 기도 중이다.
동기는 주님께서 <서울부흥단> 전단장님이신 백일복 목사님을 찾아 뵙게 하시고, 십일조 금식을 하도록 강권적으로 지시하셨다.
이는 매월 1, 2, 3일을 십일조로 금식하는 것이다.
지난 2022.1.1.토부터 15일 간 금식기도를 했었다. 마음 속으로, “15일 간이나 금식했으니, 1월부터 5월까지의 매일 1, 2, 3일 십일조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오늘이 1월 31일 마지막 날인데, 금식 날자가 도래한 것도 잊어 버리고, 아예 금식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날이 되어, 충북 증평의 장모님 댁에, 가족들을 다 데리고 귀향했다.
오늘 1월 31일 마지막 날,
오후에 고구마 전을 맛있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그런데 그만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구토가 나려 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약을 지어 먹었다.
그리고 속이 더부룩하여 점심, 저녁을 금식했다.
노트북을 갖고 와서 계속 말씀을 준비 중이다.
거의 매일 100여 페이지의 글을 쓰는 나는 오늘도 변함 없이 글을 쓰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나더러 금식을 일깨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퍼뜩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속이 불편한 이대로 계속 3일 간을 금식하는 것이다. 어찌하건 자꾸 금식을 하는 것은 진정 가장 좋은 일이다.
깨닫게 하시고, 일깨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오묘하지 아니한가?
주님! 감사하나이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멘.
아아! 3일 전, 1월 29일에 사랑하는 동생 정윤희 목사가 끔찍한 항암 투병 끝에 천국에 갔다.
내일 모레 2월 2일은 김수현 사모님의 폐를 지탱하는 ‘에크모 시술’ 을 중단하는 날이다. 폐를 이식하지 아니하는 한, 바로 천국 가시게 된다.
비상 시국이요, 위기 중의 위기의 시간이다.
당연히 금식해야지!
고통의 시간, 위기의 시간에는 무조건 금식이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 도와 주소서.
김수현 사모님을 살려 주옵소서.
♥ 역경의 열매 치유하는교회 김의식 목사 간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 가시나요?”
내가 존경하는 <치유하는교회> 김의식 목사님의 국민일보 연재 간증인 ‘역경의 열매 김의식’ 시리즈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어느 날 10 분 정도 밖에 다녀 오니, 감기에 걸린 5세 딸이, 3층 옥탑방 집에서 대문 앞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사고로 딸 잃고 주님께 원망했지만,
같은 고통 겪은 성도와 공감 나누며,
남은 삶 치유 사역 위해 살기로 결심.
김의식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 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87년 11월 3일,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다섯 살 딸 아이 한나가 “아빠! 해태 종합선물세트 하나 사 주면 안 돼요?” 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나야! 이제 성탄절도 가까워지니까 성탄절에 아빠가 선물하면 안 될까?” 하고 말했다. ‘아니요’가 없었던 착한 딸은 “네” 라고 대답했지만, 못내 아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흘 후, 그 날도 밤 늦게 퇴근했는데, 딸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 딸 아이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아내의 약국 문을 닫아 주려고 나갔다.
길어야 10분 정도 걸렸을까?
돌아 와 보니, 딸아이가 1층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간 사이 딸 아이가 깨어 났는데 아빠도 없고, 대문은 밖에서 잠겨 있으니, 베란다로 나와서 나를 찾다가, 그만 떨어진 것이었다.
딸 아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교회에 가기만 하면 혼자 본당에 들어 가서, 하나님께 항변을 시작했다.
“새벽 일찍부터 나가서 밤 늦게까지 심방하느라 쉴 틈도 없이 충성을 다했는데, 그 보상이 딸 아이를 불러 가시는 것입니까? 주님! 할 말 있으시면 한 번 해 보세요!”
항변을 계속 이어 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김 전도사!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렇게 힘드냐? 나도 너희를 위해 단 하나 밖에 없는 죄 없는 아들을 잃었는데…”
나는 그 날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여! 사랑하는 딸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맡겨 주신 목회의 사명에 죽도록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나는 그 날 이후부터 비로소 목숨을 걸고, 목회를 하게 됐다.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사고로 잃고 나니, 교인들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더 나아 가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교인 들을 통해서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교인들이 다가 와 “전도사님! 저도 첫째를 잃었어요... 저는 막내를 잃었어요”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헨리 나우웬 박사가 말했듯이, 나의 여생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성탄 예배를 마치고 해태 종합선물세트를 샀다. 혼자 교회 봉고를 몰고 노량진 동산으로 향했다. 그 날 따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밭을 헤치고 딸 아이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한나야! 아빠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물세트 사 왔어. 이렇게 늦게 사 와 미안하구나. 이제라도 아빠를 용서하고, 아빠의 사랑을 받아 다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무릎 위에 하염없이 쏟아졌다.
나 배종부 목사는 김의식 목사님의 이 간증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 그의 끝 없는 용서의 삶, 치유의 삶, 회복의 삶, 낮아짐과 겸손의 삶을 欽慕(흠모)한다.
나는 젊은 날, 하도 하도 나의 죄악의 삶이 많아 수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하나님이 자식을 데려 가지는 않으셨다.
나는 끝 없는 죄악의 삶으로 인하여, 애굽의 대재앙 10가지 중 9가지의 매를 맞은 사람이다. 이는 전적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었다.
나는 이제 성령을 받고, 20년 세월을 오직 성령으로 살아 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령님의 侍從(시종)’으로 인정한다.
65세인 내 인생을 다 살아 가는 이 나이에, 단 하나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 제목이 있다.
“나의 주님!
제게 강력한 神癒(신유)의 권능과
은밀한 기도 골방의 기도 응답의 기적을 제게 선물로 주사,
살아 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세계 선교 현장에 펼치게 하옵소서. 아멘.”
사울 왕은 그렇게나 겸손하던 사람이 어찌하여 그렇게 변질 되었을까?
‘임금’ 이란 지위가 교만과 권모술수의 귀신이 들어 가게 한 것이다.
교만이 들어 오고, 지위가 높아지고, 리더가 되면, 사람은 저절로 교만해지게 되어 있다.
김의식 목사님의 저 겸손의 영성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참 궁금했었는데, 이제 해답을 겨우 찾은 것 같다.
사랑하는 주님!
나 배종부 목사로 하여금, 오직 겸손하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