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쟝켈레1959앙리베16L03B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1절 활동가와 구경꾼(Acteur et spectateur, 29)
제2절 생성 Devenir 36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선입견 없는”(non prévenue) 사유, 그리고 전적으로 자기에게(à soi) 현재하는 사유와 상의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시건에 개입하고 또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거리를 두고 나열된’ 우상들을 멀리한다면,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만들어 갈 발견물이 있다. 인간은 내가 모를 그 무엇, 즉 거의 현존하지 않고 또 애매한 무엇이며, 생성 속에서만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지속하고 있으면서 그 자체 구현된 생성인 무엇이며, 순회하는 시간성이라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그것은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생성되고 있고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간에 대해 말한 우크 에스틴(οὐκ ἔστιν)[..로 있지 않은, 즉 생성하는]인데, ἢ μόλις καὶ ἀμυδρῶς.... το μεν γαρ αΰτοΰ γέγονε καί ουκ εστίν, το δε μέλλει και ουπω εστίν. 그것은(생성)은 있는 무엇이 아니고, 그리고 있지 않는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있지 않고, 또 다시 있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동일한 것이 연속적인 교대에 의해 항상 다른 것이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의식 상태들은 수와[수적 나열과] 연관 없이 중단 없는 생성에 따라서 연쇄고리로 이어져 있다. 벩송은 이 연쇄를 지칭하기위해 유기체화(organisation)란 단어를 쓴다. 유기적 총체성들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유기체화를 현재 있는 대로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우선 “유기체화”는 동일자와 타자의 교대를 극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필레보스편과 파르메니데스편에서 논의되었던 일자(l'Un)와 다자(le Pluriel)에 상대적인 난문제들(les apories)은 거짓 문제라고 선언되었다. 벩송은 일자(l'Un 하나)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다수들은 하나일 수 있는 것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지성으로써는 절망인 이 모순들을 연출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혼합물인 생성은 배중률의 원리를 피하지 못하는가? 살아온 지속 속에서 순서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생명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뉘앙스 없는 동일성과 정합성없는 타자성(l'altérité, 이타성, 異他性) 사이에 선택하는 것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한다. 벩송은 이 반대들이 서로 등에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일방적인 원인성과 일방적인 목적성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볼 것이다.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들 중의 한 딜레마를 위해서 그것은 더 이상 있지 않다. 셸링(Schelling, 1775-1854)은 이미 그것을 주목했었다. 즉 생명은 독단적인 철학보다 수천 배 더 많이 풍부하게 창의적이다. 독단적 철학은 [배타적] 선언명제의 원리에 부딪히고, 그리고 이 극단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우선 생명은 선택하는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당연히 생명은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물체들은 결코 늙어가지 않고, 이것들의 부분들이 지닌 비시간적 병치 속에서 존속한다. 이것들은 단위(통일성)의 형식 또는 다수성의 형식을 채택함에 따라서, 이것들은 영원히 등질적이거나 또는 영원히 다수적이 된다. 거기에는 어떠한 치료제도 없다. 그러나 동일한 의식이 오늘도 그리고 여러 날 다음날도 그대로인 것을 누가 막는가? 시간은 결정적인 술어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빌려주기는 하지만 결코 얻지는 못 한다: mancipio nulli ... omnibus usus. 그러나 만일 시간이 자신의 고유한 선물들을 기꺼이 철회한다면, 시간은 또한 중요한 병을 고치는 자(le guerisseur, 치유자)이다. 그 치유자는 상처를 치유하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모순들을 매끄럽게 하며, 유동성있게 하고 평화하게 하며, 해결할 수 없는 충돌들을 약화시키고, 거친 통일성에다가 유쾌한 다양성을 가져다준다. 공현존할 수 없는(uno eodemque tempore) 모순들은 적어도 계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순의 둘 중의] 하나가 우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다음에 나온다. 그러한 것은 미래화 작업(la futurition)의 술수인데, 그 미래화 작업은 아직 있지 않는 것(le Pas-encore), 지금 있는 것, 이미 더 이상 있지 않은 것의 동시대성(la contemporanéité)이다. 이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하나의 잘못인 불합리한 모순이 최소한의 잘못인 추잡스런 배반(le reniement 부인)이다. 고갈되지 않는(inépuisable) 섬세함이, 시간적 해결들의 기발함이, 지성을 흔들어 놓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계속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통불가능성, 양립불가능성, 화해불가능성들의 막다른 골목 안에 기꺼이 가두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잠재적 성격의 통일성 안에 원초적으로 압축된 다수의 경향성들을 조금씩 펼치면서, 우리는 인격성이 다양하게 또 빛살처럼 진화한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다발(la gerbe)의 이미지는 벩송 작품들 속에 곳곳에 있다. 그리고 마치 인격 전체는 다수(다양)의 경향성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처럼, 인격의 내부에서 따로 있는 각각의 경향은 그 자체 다양한 감동들로 번식한다. 그리고 이 감동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 우리 삶의 긴 여정을 따라, 점점 더 개별적으로 수많은 고통들과 환희들을 분봉한다. 진화 일반은 하나에서 다양(다수)으로 이행, 즉 다수성으로 성숙하는 동일성의 점진적 개화,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통일성[인격단위]은 개별적 경향성들로 폭발하여 터지고, 이 경향성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 반대적이며 비례적인 운동에 의해 해소된다. 만일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다수성은 통일성이 풀려지는 정도에 따라서 치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리하여 의식은 생명의 모든 순간들에 풍부하게 다양한 동일성의 구경거리를, 또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가 말하듯이 상호견제(concordia discors)의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이 상호견제에서는 추상적인 일자도 다자도 결정적인 우선성을 자랑할 수 없다. 종합(la Synthèse)에 대한 비판주의자의 관념[생각]은 분명하고 새롭고 정신적이고 찬탄할 만한 의미를 발견한다. 정신의 통일성은 “합창같은” 통일성이며, 이것은 마치 트루베츠코이(Serge Troubetzkoï, 1790-1860), 프랑크(Simon Frank, 1877-1950),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자(Le slavophilisme)에 따르는 소보르노스트(Sobornost)의 “공의회적인”인 통일성과 같은 것이며, 다시 말하면 이 통일성은 특이성들의 고양에 근거하는 것이지 특이성들의 평준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신의 통일성은 협주하는 다양성들의 사막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성에 관한 영속적 승리이지, 고독한 정체성에 관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은 단순히 모순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설득되고 영속적으로 해결된 모순이다. 더 좋게 말하자면, 그것은 타동사적인 측면에서 고려된 해결 그 자체이다. 이로부터 두께, 구체적 충만, 생성의 생명화가 나온다. 이 통일성은 반항적인 독창성들을 그 이유로 내놓기 것으로 결코 끝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자의 항의를 쉽게 종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지속은, 마치 그것은 일자와 타자의 안티노미를 극복하듯이 또 마치 장 발의 형이상학이 스스로 반명제들의 저넘어에 위치하듯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안티노미를 극복한다. 확실히 우리의 살았던 시간은, 화가 까리에르(Eugène Carrière, 1849-1906)의 공간처럼, 연속성 자체이다. 그러나 이 연속성은 배제가 없다. - 내가 무슨 말 하지? 연속성은 상태들의 근본적 이질성을 가정하며, 그 연속성은 상태들 사이에 유기체화한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로 동질적 공간은 자기의 동질성 그 자체에 의해서 가장 단호한 불연속성에 적합하다. 거기에는 생성의 둘째 역설(paradoxe)이다. 사람들은 벗은 공간 속에서 자연적 접속들을, 커다란 유기체적 분할들 찾지 못한다. 이 분할들이 그 밖에서도 그 안에서도 한 그룹의 개별자들을, 살아있는 한 신체의 부분들을, 한 의식의 감정들을 한계 지운다. 벗은 공간은 획일성(l'uniformité)의 왕국이며, 황폐한 효라(χώρα 재질, 공간)이다. 이 효라 위에 우리는 이런 임의적 절단들을, 또 인공적인 조각조각 잡업들을 실행할 수 있고, 이런 행위의 요청들이 우리에게 유용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벗은 공간 그 자체는 다른 종류의 분할들의 배제보다는 몇몇 종류의 분할들을 위해 어떠한 선호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무차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들에 알맞게 물질적인 부피(l'etendue, 길이)를 잘라야한다(débiter)[소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피들을 조각[덩어리]들로 구획하고, 우리는 이것을 사물들, 물체들, 현상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것이 조각나누기(ce morcelage)라 불린다. 플로티노스와 다마스키오스(Damascios, Δαμάσκιος, 458/460경-537)는 이미 메리스모스(μερισμός)[(« division »)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반대로 지속은 이질적이며 조각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조각나누기는 인위적인 조작이며, 지성이 그 조작을 자신의(지성의) 고유한 작업들에게 실행한다. 그리고 공간은 그 조작을 감내[허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당하게 공간은 지성의 추상작업화로써 이완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속은 자신의 객관적인 분할들(ses divisions)을 지니고 있어서, 그 어느 종류의 분석도 무차별적으로 감내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은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잡한 조각나누기는 지속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이 “연속적”이라고 말하고, 지속은 그 결과로 공간을 씹는 유용한 분석이 거기에서 최소한의 균열도 발견하지 못하고서 시간의 길이를 따라서 미끄러져 간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연속성은 오직, 생성이 그 어떤 불연속성도 허용하지 않는다고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성은, 생성이 안개 속에서 흐릿해지거나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배제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연속성은 흐릿함도 무차별화도 아니고, 시간은 공유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자연적이고 심층적인 구별을 예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에 따라 그것을 재단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연속체는 무한히 불연속성이다... 특히 이것은 벩송주의자인 알베르 바자이아스(Albert Bazaillas, 1865–1924)에서, 또는 어떤 제임스(un James)같은 이와 어떤 르누비에(un Renouvier) 같은 이의 다원론 속에서 충분히 밝혀진 것으로 나타난 분리작용과 결정 작업의 측면이다. 다원론자의 일방성은 게다가 다른 이들 보다 훨씬 더 벩송주의자인 것 같다. 만일 선택을 해야 했다면, 우리는 제임스와 더불어 “경험의 다양성들”보다 우리 스스로 지체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hétérousie”[이질체]와 “tautousie”[동질체] 사이에 또는 아마도 다신론과 일신론 사이에 주저하는 셸링이 말하는 것과 같다. 너무나 적다라기보다 너무나 많도다! 그러나 거기에는 선택해야 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학제적 딜레마들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다원론은, 자료(le donné)가 모든 부분에서 설명된 것을 넘쳐난다는 것을, 그리고 지속의 경험은 드라마적 경험이라는 것을 단지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설명작업”(l'explication)은 항상 일원론적이며, 이 설명작업이 이용하는 조각나누기들은 다원론의 희극을 단지 공연할 뿐이다. 우리는 저 아래에서는 신중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이 조각나누기들은 우리에 속하는 우리의 일(notre oeuvre)이며, 만일 우리가 이것들을 실행한다면, 그것은 이것들[조각나누기들]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조용하게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통일성을 재발견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 조각나누기들은 통일성을 가정하는 것이지 이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성질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대신하여 우리는 협약적인 절단[작업]들로 대체한다. 이 절단들은 체계의 획일성을 심각하게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이리하여 수학적 공간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 공간은 그 어느 불연속에게도 제공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자가 그 자체로 파괴되기 되기 위하여 조각화작업의 끝까지 갈 것이다.
조각나누기(le morcelage)는 통일성(l'unité)에 귀착하며, 그러나 근본적으로 조각나누기는 통일성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조각나누기의 “다수”는 진실한 다수가 아니다. 반대로 시간의 질적 이질성은, 이 이질성이 통일성에 가장 폭력적으로 모순을 말하는 순간 그 자체에, 즉 대립된 것들이 신비적 경험 속에서 일치되는 것과 같이 약간의 폭력적인 순간에, 그 통일성을 함축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가 지금 밝혀야할 불가사의(le mystere)가 있다. 생성의 통일성은 첨예한 위기로부터 나오며, 푹 젖어서 풍성하게 된 통일성이 거기에서부터 나온다. 벩송은 지적 노력을 연구하면서, 어떻게 역동적 통일성이 공간을 모델로 하는 변증법적 통일성에 대립되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한다. 수평적 또는 시각적 변증법에서는 하나의 이미지만 있으나, 그 이미지는 여러 다른 대상들의 대리이다. 그런데 수직적 또는 침투적인 변증법에서는, 반대로 동일한 대상을 위한 무한한 이미지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것은, 첫째의 경우에서 동질적 세계를 가로질러 불연속적 진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벩송에서 어떻게 무의 거부가 이 불연속성의 거부를 설명하는지 볼 것이다. 반대로 둘째의 경우에서 이것은 가로지른 우주들인데, 이 우주들은 본성상 이질적이다. 단지 이 우주들을 노력의 연속성이 다시 연결한다. 이 연속성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지나간다. 첫째 경우에서 통일성은 말하자면 실체적이고 형태학적이며, 이 통일성은 둘째 경우에서는 기능적이다. 왜냐하면 통일성은 여기서 더 이상 형식의 엄격한 동일성을 원리로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잠재태의 방향잡기와 멜로디 주제의 영속성을 원리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내적 목소리(cette voix intérieure)와 같은 어떤 것이다. 피아노 작품집 속에서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이 내적 (목)소리에 대해 비물질적 성악을 표기할 필요를 체험했으며, 이 내적 (목)소리는 볼 수 있는 화음(하모니)들 아래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화음을 “제3의 손”에 부여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오히려 수평적 변증법의 법칙일 같은 다채로움(la diversité)이고, 그리고 그것[법칙]이 채택한 환경의 피상적 통일성은 자기 소재의 근본적 다수성을 훨씬 더 투박하게[거칠게] 강조한다. 사물들의 독특한 회귀에 의해, 다자(le multiple)를 고려하기를 원치 않았던 평평한 통일성은 영원히 찢어진 체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평평한 통일성이 우리에게 곧바로 영원히 고독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시간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으며, 오직 자기 상처들을 봉합할 수 있었으리라. 우리의 모든 분할들은 시간에 치명적인데, 왜냐하면 이 모든 분할들은 결정적이고 치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의 뿌리에서 발견할 질적 다채로움은 지속의 순환 속에 무매개적으로 해소된다. 음악적 음색들(des tonalités, 음계들)도 이와 같다. 음색의 우주들은 마치 환원할 수 없는 많은 세상들처럼 우리들의 감동에 호소한다. 오직 여러 변조들의 기적만이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우주들의 상호침투를, 그리고 플로레스땅(Florestan)이 (들었던)이해하는 내적 목소리의 연속성을 실현한다. 이 불연속성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조하는 역동적 힘의 심층 속에서 녹여있으며, 이 동력은 불연속성들을 가로지른다.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의 [피아노곡?]간편한 소품들(Les Pièces brèves op. 84, 1869 et 1902)의 8편 중의 제1편 「변덕(Capriccio)」(en mi bémol majeur : Proche d'un impromptu 1899)에서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펼치는 서정적인 춤은 잡다한 색깔의 연속성에 대한 찬탄할 만한 예가 아닐까? 따라서 그 변조(la modulation)는, 이해하기 위한 노력처럼, 극복해야할 독창성들의 어떤 두께에 대한 직관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오직 정신적 순환만이 또한 심층의 다채로움(la diversité)을 해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만이 모순들의 충돌을 넘어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기계적인 지성이 동질성의 세계에 작용한다면, 그것은 정태적 동일성들만을 오직 다루는 지성이 솟아나는 그 많은 독창성들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벩송은 기꺼이 질적 도약(le saut)의 개념을 돌연변이에 응용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이 도약에 의해 [원]죄의 순간을 설명했다. 질들의 종별화(la spécificité)는 양들의 획일화(l'uniformité)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질이란 남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전수된 의식 상태가 완전한 우주로 둥글어지고 조직화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미리 보았다. 모든 감정은 따로 있는 한 세계이며, 그 세계는 맞자기(pour soi 대자)로서 체험되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는 어느 정도로 완전히 현재이다. 두 가지 감동 사이만큼이나 침묵과 소리 사이에도, 어둠과 빛 사이에도, 또는 두 가지 음악적 음색들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솔 단조(Sol mineur)는 드보락(Anton Dvorak, 1841-1904)에게는 독창적 우주이다. 그 음악가는 이 우주에다가 자신의 값진 감동들의 신뢰와 일치시킨다. 천성적으로 관대하고 아낌없는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음색들에서 매우 많은 반음 올리기와 매우 많은 승리의 영광을 자발적으로 생각한다. 그 예로 미 장조와 올림 파 장조. - 어떠한 것도 이 관대한 감성을 위해 더 충분한 것을 없다. 미 장조는 챠이코프스키(Tchaïkovsky, 1840-1893)에서 가을의 울적한 왕국이다. 프로코피에프(Serge Prokofiev, 1891-1953)의 놀이들은 오히려 도 장조의 순진무구한 흰 빛 속에서 펼쳐진다.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
알베니즈(Albeniz, 1860-1909), 야냐체크(Janacek, 1854-1928)는 반음 내리는 음색들에서 변함없은 편애를 드러낸다. 또한 이 음색들은 가브리엘 포레에서는 아주 다른 가치들과 잠재력들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음색들을 서로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재현]할 수 없다. 이렇게 감성의 각 상태는 그 자체로 자기의 종류에서는 유일한 음색으로, 다른 종류들에서는 독립적인 음색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것은 포레에게서는 틀림없이 반음 내린 레 장조의 기능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그만큼 많은 절대자[절대음]들이다. 이 절대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등성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등가도 없다. 이것은 이미 페히너(Gustav Fechner, 1801-1887)의 심리-물리학이 증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극이 스칼라양이고 계속적인 점점세게하기(un crescendo)에 의해 커갈 때, 심리-물리학이 껑충 뛰기에 의해 다채로운 감각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양들 사이에서 메카니즘은 이동(les transitions)을 무한정하게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방법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17세기에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Règles pour la direction de l'esprit,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1684)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인데, 그가 기하학적 도형들의 도움으로 색깔들의 차이를 해석했을 때도 그랬다. - ne aliquod novum ens inutiliter admittamus![어떤 새로운 본질을 우리가 쓸데없이 인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체하지 않도록 주의한다면..] 그러나 어떤 중간 항이 고통과 환희를 도대체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지속은 기적을 행한다. 이로부터 자기의 고유한 지속과 진실로 동시대적인 의식은, 마치 담론처럼, 숙명적으로 매개를 통해서는 도달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온다. 담론을 길게 늘이는 중개물[매개물]들은 지체일 뿐이며, 우회와 느림의 이유이다. 매개물은 오직 목적을 위해서 현존하며, 이것들은 이 목적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정신은, 만일 자신이 할 수 있다면, 곧바로 그 위로 뛰어오를 것이다. 반대로 생성의 순간들의 각 순간은 자기 가치와 자기 고유한 존심을 지닌다. 각 순간은 맞자기 자체로써 목적이자 수단이다. 거기에는 계속이 있지 추론과정은 없다. 여기서 또한 가끔 “기다릴”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몇 가지 목적들은 특권적이기 때문이며, 그런데 이 기다림은 항상 관심들로 가득 차 있고, 사건들로 그리고 정열적인 놀라움으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우리 내적 역사에서 매 순간은 예견되지 않는 것[무엇]으로 무지막지하게 풍부하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예로서 곤차로프(Ivan Gontcharov, 1812-1891)는, 세부사항들이 들끓고 있고, 새로운 것들이 솟아나고 있고, 반대들이 연합하고 있는 것이 보여지는 무한소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갈 줄 알았다.
이어서 사람들은 벩송주의가 마치 생물학적 종들의 관계에서처럼 영혼과 신체의 관계에서 어떤 중요성을 불연속과 결부시켰는지를 볼 것이다. 다수성의 고양은 생성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인데, 생성은 다수성에게 승리하고 다수성에게 특이한 상[대가]을 수여한다. 메카니즘은 다수성을 저평가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변화들에게 수적인 단계[척도]들을 포개면서 속이 빈 지속을 얻는다. 이 척도는 우리의 감정을 눈금을 그리고 계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항상 실증적이고, 항상 현실적인 의식의 생성 다음에 측정가능하고 환상적인 시간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 시간에 대해, 티마이오스(Timée)편에서처럼 시간은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이다(αἰῶνος εἰκὼν κινητή)고, 또는 메스트르(Maistre, 1753-1821)와 더불어 시간은 “끝내야 하기만을 요구하는 강요받은 어떤 것”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벩송과 그리스 철학의 대립을 약화시킬 모든 희망을 아마도 잃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가 조롱했던 시간은 일반적으로 문법적 토론이거나 또는 천문학적 시간이며, 결국 이 두 경우에서는 수적 시간(un temps numerique, κατ'αριθμόν κυκλούμενος)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바로 지체, 우회, 부정적인 어떤 것인데, 만일 정신이 보다 완전했다면, 정신은 이것[시간] 없이 지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벩송도 틀림없이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러한 시간이 우리의 진실한 본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직관은, 삼단논법들을 통해서 힘든 산책의 끝에서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 자기의 모든 순수성 안에서 무매개적으로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기를 바랐으리라. 그것은 바로 제한이며, 나약함이며, 결함이다. 우리는 묵시록의 천사처럼, 시간이 더 이상 [미래에] 있지 않을 그날이 올 것이라고 확고하게 희망한다. ὅτι χρόνος οὐκ ἔσται έτι. 그러나 이 무미건조한 시간의 단죄는 진실한 시간에 대한, 더 좋게 말하자면, 연속의 경험인 지속에 대한, 억측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로기스모이(λογίσμοι, 부정적 사유들)의 시간과 더불어 이렇게 대립적으로 정의된 “영원”과 모든 수학적 허구에 대해 벩송의 의해 순수하게 된 지속은 근친성들이 발견되기 위하여 이 많은 기회들(des chances, 운수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적인 정밀도의 절정에 있다. 정신은, 먼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지체되는 대신에, 또 임시적이고 하급적인 관념들 가운데 부재로써 배회하는 대신에, 자기 고유한 노력의 핵심에, 즉 문제들의 중심 한 복판에, 연속적으로 있다. 살아있는 영원성으로부터 문법의 시간으로 통과하기 위하여, 첨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빼야 한다(공제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기를 스스로 비우고, 개념들 가운데 흩어진다. 그러한 것은 아마도 형이상학이 말하는 이 “영원한 지금”(cet "éternel Maintenant")의 진실한 의미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확신들과 본질적 사실들로 둘러싸여진 우리자신에게 현재한다고 스스로 느낀다. 벩송주의는 재발견된 시간이다.
다채로움은 우리의 수학적인 지성으로는 감당할 없다. 이런 이유로 척도의 본질은 사물들을 양화하면서 사물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하는 것만큼이나 크기들을 분류하고 정열하고 비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척도는 [외연적]자료(le donné)를 획일화하고, 사물들의 보편성에 공통점 있는 단순한 요소를, 즉 수적 요소를 분간해낸다. 따라서 척도는 따로 구분되기보다 더 동화한다. 그리고 마치 극대와 극소의 차이에서처럼, 심지어는 이 척도가 극단의 항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거기에서, 거리는 또한 척도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등가성(une parité)을 함축한다.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이 접근하는 것, 그것은 이것들 모두가 양들의 두 가지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항들(ἐνάντια)[des contraries]처럼, 동일한 종류의 내부에서 가장 멀어진 항들이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대립은 비교할 수 있는 크기들 사이에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것과 더 작은 것이 있는 거기에서는, 동등(l'égal)이란 것이 잠재적으로 주어지거나, 또는 가능한 등급들(les gradations)이 아니다. 수는 바로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에 공통적인 중간 항이다. 삼단논법 그 자체와 같은 척도의 과학들은 점점 더 과학적 매개작용들에서 전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매개작용들은 우리에게 격차들(ces disparités, 비등가)을 동화하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질적 변화들은 잠재적 동등성을 배제한다. 한 주체가 가로지르는 계속적인 상태들 사이에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우리를 옮겨주는 연속적인 운동이 아니라면, 공통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증가들과 감소들 안에서 실체적이고 초월적인 통일성(l'unité, 단위)은 변질들(les altérations) 안에서 내재적이고 역동적이다. 왜냐하면 이 단위는, 크기들이 다소 참여하고 암묵적인 중간 항으로부터 오기 때문이고, 이 중간항을 사람들이 “단위[통일성]”라고 정당하게 부르기 때문이다. 이 단위는 변형된 상태들을 그 바깥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형과정의 걸음걸이(l'allure, 방식) 자체를 특징 지우는 것이다. 생성의 계속적인 국면들(les phases, 위상들)은 직선의 눈금들을 따라서 숫자를 매기도록 하는데 더 이상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국면들은 정신의 측량사들에게 우리가 다시 발견할 일종의 깊은 환상을 대립시킨다. 즉 환상이란 꿈의 한 가운데에서 순수 추억들의 규율 없음(l'indiscipline)에서, 또 계통발생적 진화의 개별적 변덕에서, 우리가 다시 발견할 일종의 환상이다. 모순들은 너무나 예견불가능하기 때문에, 공통성을 확장하기 위해서 임에도, 어떠한 외재적 매개도 거기에서 최소한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로 필요한 것은, 계속 적인 순간들이 그것들 자체로 줄지어 져서, 그 순간들 상호의 모든 혐오들에 승리하면서 협정을 맺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의 성공(ce tour de force)이 지속이라 불린다. 지속은 따로 있는 사물이 아니다. 지속은 단지 그자체로 조직화되고 또 무한히 해소되는 불협화의 자발적인 연속화이다. 증가들과 축소들의 거친 동질성은, 양들이 순서로 배열되는 운동자체에 전혀 빚지고 있지 않고서, 비교된 존재들의 근본적인 불연속을 어느 정도 적나라하게 내버려 둔다. 양적 동화작용는 분명하고, 평탄하며, 뉘앙스가 없다. 그 동화작용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잘게 부수어 평준화한다. 그것은 정신적 사실들을 “변형된 감각들”로 또는 “신경충격”으로 변장시키고, 결국에는 그 사실들을 서로 서로 끌어당기는 마술적 인접성을 설명하는 것을 [이제는 설명] 할 수 없게 하는데 있다. 헛되이 원자론은 생성의 즐거운 변이(la variété)를 “통일성”(단위)으로 환원한다. 관념연합주의의 환원적 분석에게 종속시킨 의식의 상태들은 끝내는 그 바깥에서 서로 잘 닮게 된다. 그러나 이 닮음[유사]은 피상적인 것만큼이나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닮음을 발견하기 위하여, 정신적 사실들의 특이성들로부터 이 사실들을 빈약하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들로부터 매우 일반적이고도 매우 추상적인 하나의 성질만을 유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속은 우선 우리 감정들과 우리 영혼 상태들의 화해할 수 없는 독창성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들의 혼란스런 뒤로돌기(la volte-face)와 그것들의 모순적인 주장들을 수용한다. 따라서 여기서 통일성은 이제 부분적인 동화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적 동의를 가정한다. 모는 것이 우리를 분할했듯이 모든 것이 우리를 재통합할 것이다. 이리하여 매순간에 지속 속에서 신비가들이 말하는 반대들의 혼융이 실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정확하고도 전체적인 이 혼융을 우리 감동들의 환상적인 연쇄들 속에서 [나중에] 체험할 것이다.
생성의 탐험과 발견은 시론에서 벩송주의의 초기 반명제들에서 생겨난 비판적 작업을 가정한다. 내가 인격의 존엄성을 사칭하는 공식적 자아와 내밀한 나의 인격을 구별했을 때라도 생성은 여전히 현재하는 무엇이다. 이것은 플로티노스가 말했듯이 내가 자아 자체의 내부에서 되었을 현재하는 무엇이다. - τῶν μὲν ἄλλων ἔξω, ἐμαυτοῦ δὲ εἴσω. [플라톤] 파이돈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u saint Augustin, 354-430)의, 라벨(Louis Lavelle, 1883-1951)의, 정신과 같은 독백적이고 집중적[명상적]인 정신은 벩송에서는 자주 비판적 형식을 취한다. 벩송의 모든 노력은 어떤 잠식의 결과에 이르는 잡종[혼혈] 개념들을 - 수, 속도, 동시성, - 분해[해체]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공간은 시간을 잠식하고 있고, 답보했던 선은 운동을, 점은 순간을, 양은 질을, 결국 물리적 필연이 자유로운 노력을, 잠식하고 있다. 시공간, 즉 상대주의자들의 “4차원”은 페히너의 로그함수들과 똑 같은 자격으로 이 자연의 애매함에 근거한다. 그 로그함수들은 감각을 자극과, 심적 사실을 심적 원인과 뒤섞어 놓고서, 관할권들(les compétence)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거기에는 -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로 - 진실한 도덕적 삼투 현상이, 다시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 사이에 실체적 교환이 있다. 벩송의 시간주의(le temporalisme)는 이 모든 괴물들을 몰아낸다. 시간은 따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에 환원되지 않는다. [시간은] 상징주의들, 대칭적 신화들을 쫓아낸다. 벩송은 특히 외부성에 의한 정신의 감염을 고발한다. 그것은 되돌려진 칸트주의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질의 양에 대한 반작용을 무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연합론자의 잡종의 개념들은 양쪽의 잠식으로부터 또 상호 잠식으로부터 태어난다. 따라서 시론의 벩송주의는 무엇보다도 이원론적 긍정이며, 과학의 타협들과 실천의 중간 척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의 거부이다. 두 가지 시간과 두 가지 자아가 있다. 브르몽(Henri Bremond, 1865-1933) 자신도 또한 “일화들과 다양한 사실들의 자아”를 “영혼의 섬세한 첨단 또는 중심 또는 꼭대기”에 - 이것은 우리의 신비적 본질인데 - 대립시키는 남성성과 여성성(Animus et Anima)을 구별한다. 그리고 두 가지 기억들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첫째] 기억은 변화의 연속화 작용으로써 지속 자체이다. 그 기억은, 의식의 과거를 의식의 현재 속으로 연장시킬 수 있는 의식 없이는 지속은 없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다른 기억도 있다. 또는 오히려 그것은 사실 이후에 고려된 동일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지나간 과거의 잔존일 뿐이다. 그것[기억]은, 그 기억 자체가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의 바깥에 남아있다. 그리고 벩송은, 이것을 몽테뉴(Montaigne, 1533-1592)를 상기하게 하는 용어들에서 쓰인 “판단”에 대립시킨다. 그 기억은 “연속화”라기보다 “유치”(rétention)이며, 기억이 의미를 상실했던 전승들에 관하여, 그리고 기억이 요약하고 비틀어놓은 무기력한 과거에 관하여, 질투하여 감시하는 데 있다. 벩송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은 모순적인 두 가지 항들이라고 한번 주장하고, 창조적 진화에서는 역전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시간, 두 자아들 중의 하나 만이 진실하고 다른 하나는 첫째의 모조품일 뿐이다. 이 첫째만이 생명성의 특권을 보유한다. 한 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수학적 시간은, 그 시간이 진실한 시간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에서 불순한 시간일 뿐이다. 완성된 사실들로부터 진실하다고 여기는 정태적 과학은, 만일 그것이 완성하는 과정에 있는 사실들에 관하여, 즉 완성하고 있는 중인 현재에 관하여 규칙을 정한다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 될 뿐이다. 거짓이고 비실재적인 것, 이것은 한마디로 “합금”(l'amalgame)이며, 공간과 언어가 자신들이 더 이상 권한없는 영역 속으로 침입일 뿐이다. - 왜냐하면 진리는 관할권들의 해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벩송은, 버클리가 시각적 착각들에 설명하는 것과 약간 같은 것처럼, 여기서 진실인 것과 거짓인 것을 구별한다. 자기에게 지각된 모든 것은 진실하다. 그리고 감관들 그 자체들로 전달된 우리 감관들은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는다. 오류는 정확이 이점에서 시작한다. 정신이 자기의 추억들과 편견들의 강요되어 [겉감] 순수자료(le donné pur)를 해석하는 데 있다. 오류는 연합과 더불어 생겨나며, 따라서 관계들과 더불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시공간의 시각적[광학적] 허위, 즉 비유클리드의 4차원적 연속체(le contiuuum)는, 정신이 동등하게 실재적인 두 [의식적] 자료들(les données)들 사이에서 확립한 부당한 [관념] 연합화 작업을 기원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실재적 공간(un espace réel)이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은 그래도 진실한 지속보다 덜 진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론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순수 직관에 관한 어떤 정확성들을 얻기 위하여 물질과 기억까지 기다려야 한다. 실재적 공간은 순수 직관으로 하여금 대상을 만들 수 있고, 순수직관은 물질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시기부터 벩송이 이원론을 극복하기를 애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하건데, 시론의 목적은 특히 혼합된 개념들의 분해(해체)에, 혼동된 평면[도식]들의 분리에 있다. 따라서 벩송은 특히 이것들의 공동협력관계를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협력관계에] 이르게 되는 무매개적 자료들은 “순수 추억”과 “순수 지각”의 아주 이상적인 본성(자연)을 전혀 갖지 않는다. 꿈 자체는, 심층 자아의 지속이 주의 깊은 내성을 위하여 일상적으로 완성하지 못하는 어떤 것도 전혀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결국 시론의 목적은, 그럴듯하지도 못한 무시(無視)가 우리에게 상실하게 내버려 둔 자료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매우 자연적 실재성, 즉 우리와 가까운 실재성이 매우 오랫동안 우리를 피할 수 있는지를 또한 자문한다. 그런 이유에서 시론에서는 “직관”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진실한 자아와 마주하여 있기 때문에, 공간의 아주 부정적인 상징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서부터 고발당한[비난당한] 합금이 정신의 유기적 요청에 응답한다고 믿도록, 그리고 그것의 축출이 우리에게 값비싸게 치일 것이라고 믿도록, 몇 텍스트들은 우리를 초대한다. 사실상 담론과 직관은 모든 순간에 협력한다. 우리의 심층 자아를 왜곡하는 이 공간은, 또한 자아에게 표현하기를 허락하고 그리고 우리의 철학적 통찰에 맞게 선언되기를 허락한다. 그러나 이 비극은 정확히 말하자면, 지속이 사라지지 않고서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담론과는 다른 수단들에 의해서 일지라도, 지속이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훨씬 더 나중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직관은 창조적 진화에 앞서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지속이 아직 의식의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을 지라도, 벩송은 지속이 아마도 의식에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예감한 것 같다. 그것은 시론 속에서 조차, 순수 “운동성”의 발견이 증명한 점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외적 세계의 경계에 위치한 현상은, 즉 본질적으로 정신적이고 효과적으로 물리적인 이 현상은, 두 우주 사이에 접선으로 붙어있다. 운동은 어느 정도로 객관화된 정신이다. 벩송은 그것을 너무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고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근거]”가, 즉 물질적 사물들에게 지속의 겉보기를 부여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미 확정했다. 게다가 이 불가사의는, 즉 나도 모를 어떤 것은 그가 보기에 사물들 자체의 성질들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정신의 출현[현전]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벩송주의가 불가사의로부터 보편적 지속의 확정[긍정]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이의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이때에 이원성은 폐기되기보다 오히려 확장된다. 인간에서처럼 세계에서도 시간과 창조가 있다. 그리고 만일 주체의 기억과 사물들의 공간 사이에 대립이 더 이상 없다면, 대립(l'opposition)은 실재적인 것 일체를 관통하여 상반된 두 가지 운동 사이에, 즉 하나는 물질화의 운동과 다른 하나는 생명진화의 운동 사이에 존속한다. 그럼에도 대립은 매우 섬세하게 되고, 훨씬 덜 거칠게 된다. 이리하여 벩송의 사색은 조금 조금씩 사물들의 역사[이야기] 속에 계속의 환원할 수 없는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역사적 잔여물로써, 물리학자의 원인성을 동일성[또는 생명의 정체성]에 완전히 닮은 것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이 동일성은 수학적 시간을 그럴듯하게 하고 또 이용가능하게 한다. 창조적 진화 이후에, 벩송은 이것[역사적 잔여]에 대해서조차 자아를 희생시켜 가며 보편적 지속의 몫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만일 지속이 우리 지식의 단순한 결함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속이 의식의 성질 못지않게 사물들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더 잘 표현하자면, 그것은 의식이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우리에게 도달한(arriver) 것이 사건들이지, 사건들에 도달한 것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어나다”(avoir lieu)란 에딩턴(Arthur Eddington, 1882–1944)에게는 그 용어가 맘에 들지 않지만, 잉여적 형식성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행동의 쓴맛을 보았던 자들은 지속이 세상에서 가장 실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왜 종종 다음날을 가다려야 하는가? 왜 미래는 우리에게 현재로 주어지지 않는가?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시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또 그 간격이 압축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은 형식성이 아니다. 반대로 [미래라는 어느 것도] 아무 것도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도 설탕이 교수의 잔에서 녹는다는 것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물리적] 재료의 저항 자체는 우리에게는 안심이 된다. 변증법적 시간은 진실로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영원속에 주어진 시간의 대상을 가정하더라도, 시간은 자신을 발견하기에 앞서서 커다란 회로들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협약적 불구성[결함] 만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왜 사물들의 지속이 우리의 내적 지속에게 벙어리 일까? 변화는 인식하기 위하여 행해지고[인식하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우리의 직관은 절대자와 동일한 길에 참여한다.
단지 이런 이유로, 지속은 절대자의 계시일 것이며, 또는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지속만이 우리에게 완전히 결정된(déterminée, 규정된) 실재성을 전한다. 왜냐하면, 지속의 상벌승인은 체험되고 지각된 경험이며, 항상 결정되고 다시 말하면 개별적인 경험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지속은 방향이 정해지지만 되돌릴 수 없는 한 계열이다. 사람들은 이 계열을 무차별적으로 아무 것이나 그 끝[갈라지는 가지의 끝]을 잡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열은 하나의 의미(une sens, 방향)이기 때문이다. 여러 경우들을 뒤따라서 이 계열은 풍부해지기도 하고 또는 빈약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지속은 드라마 같은 전형적 질서를, 즉 전기(傳記)를 표상한다. 사람들은 전형적 질서의 일화(에피소드)들을 기꺼이 뒤엎지[전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전기에서 체험된 경험들의 연속은 그 자체 비조건적이고 유기적인 어떤 것을 갖는다. 모든 것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남아있을 철학은 그 자체 스스로 단죄 받게 된다. 의미(le sens)와 방향(la direction) 만이 중요하다. 과학은 동시성들 사이에서 관계들만을 계산한다. 그래서 과학은 방정식들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무한히 가속적이거나 또는 지체되는 시간의 간격들을 가정할 수 있다. 이 추상적 유토피아는 탄알을 탄 여행자만큼이나 거의 신중하지 못하며, 상대주의의 부조리성을 증명한 것이다! 동시성들의 둘-사이가 오직 시간적이다. 이 둘-사이는 불가분적이고 이동(transition)이며 연속적인 간격이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못한다, 나는 이행을 그린다”라고 몽테뉴(Montaigne, 1533-1592)가 말했다. 살아온 모든 지속은 어떤 특별한 성질을, 규정된 가치를, 그 지속이 나의 노력으로부터, 나의 기대 또는 나의 조급함으로부터 지니는 애정적 상호효과를, 소유한다. 그런데 이 조급함 또는 이 노력은 질적 변화이며, 다시 말하면 절대자들이다. 토론은 토론의 유일한 가치를 토론이 매개하는 목표로부터 끌어내다. 간격(l'intervalle) 그 자체는 결핍과 지겨운 지체이며, 순수한 예외적 원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체할 수 있는 도구이며 - 왜냐하면 다른 수단들이 권리상으로 동일한 목적에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상적인 것은 완전히 그것들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험된(살았던) 지속은 그것의 목적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여기서는 도입하는 간격이며, 완전히 충만한 간격이다. 잃어버린 어떤 시간이 중요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시간을 “죽이는” 자들처럼, 이러 저러한 사건을 기다리는데 내가 시간을 보내야할 기대의 지속이 중요하다. 또, 그 분야에서(en son genre) 유일한 진보가 중요하다. 그 진보 과정에서 내가 늙어가고, 그리고 나에게서 획득과 상실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실한 시간은 전 인격의 역사에다가 운동경기처럼 내기를 건다(mettre en jeu). 진실한 시간과 환상적 시간과 관계는 창조적 진화의 본능과 지성과 관계와 같다. 진실한 지식은 본성상 “정언적”(catégorique)이며, 반면에 수학자의 시간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단지 가설적(hypothétique) 현존만 있다. 헤겔적 변증법에게 셸링(Schelling, 1775-1854)과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용어적 특성이고 딱하게도 효과없는 변증법적 특성이라고 비난한다. 누가 우리를 역사의 본질(quoddité)[quiddité]로 만들 것인가? 민코프스키(Minkowski, 1864-1909)가 매우 심도 깊게 서술했던 “체험된 시간”을 어떻게 재발견하는가? 지속과 동시성이란 책 전체는 이렇게 시간의 무매개적 직관은 우리를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참조 체계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편적 시간을 믿는 상식의 신념이 철학적으로 기초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바쳐졌다. 시론이 애매한 상징주의들로부터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 “상식”은 통속적 과학의 거대한 진리의 운반자가 된다. 그 진리는 운반자를 물리학자들에 대항하여 철학자들과 통합한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반대에 대한 찬성의 전복”이 있다. 체험된 지속은 - 이 지속이 그 이전에 성체를 거짓이라고 했을 것 같았던 - 공통적 명증들의 성채를 다시 생성한다. 물질에 대한 벩송의 이론은 상식의 실재론에 간접적으로 이유를 부여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과학적 순진성이, 즉 학자들의 헛된 섬세함들보다 수천 배 더 심오한 순진성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 순진함이 우리에게 시간의 보편성을, 운동의 절대적 실재성을, 믿도록 권유한다. 상대주의의 과학은 매우 단순하고 매우 단단하고 매우 자연적인 모든 사물들을 환상들로 증발시킨다. 왜냐하면 상대주의적 과학은 현상들을 전망적으로(perspectivement) 생각하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과학은 참조체계처럼 차례차례 선택하는 변화 가능한 관점들에 따라서 생각하는 습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관적인 지속은 우리에게 일종의 우월한 인간중심주의적 원리를 제공한다. 벩송주의의 고유함은 모든 상황에서 특권체계(un système privilégié)가 있다는 것을, 참조체계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참조체계보다 더 우월한 참조체계가, 즉 내가 말하는 순간에 내가 그 내부에서 실험하는 체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어떠한 역설도 자기 내부 의 사유의 확신에 대하여 능가[지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내부 사유는 그자체로 의욕하고, 살아가고,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각자는 하나의 지속(왜냐하면 지속=의식이기 때문이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각자는 특권적 도식의 내부에 “참조할”(référant, 조회) 것으로써 정당하게 처신한다. 그 결과로 보편적 상호성이 그 자체로는 파괴되고, 절대적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주의의 여러 역설들의 본질은, 참조할 의식이 참조된 의식들에 관하여 얻어지는 모든 환상적인 통찰[관점]들을 동일한 도식 위에 놓는 것이고, 따라서 그 본질은 실재적인 것에서부터 잠재적인 것까지 형이상학적 거리를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훨씬 더 좋게 말하자면, 실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의 특수한 경우가 된다. 마치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맘에 드는 변화된 환상들을 우리가 중요시 하는 체하는 것처럼, 또 마치 우리가 “참조된”(référés) 우리의 관찰자들에게 생명을 은밀하게 불어넣는 것처럼, 현실적인[효과적인] 지속은 허구적 지속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살과 뼈로 되어 있는 생명체와 밀납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구별하는 우월성을 차지하기를 그만둔다. 아마도 계산(측량)된 것들의 단순한 다수성이 있었다고 할 때라도, 사람들은 “고유한 시간들”의 다수성을 실현했고, 심지어는 실체화(hypostasier) 했다. 반대로 벩송은 실재적인 것을 너무 높은 관념으로 만들었기에 - 추억과 지각의 구별로 우리가 [나중에] 증명할 것이지만 - 실재적인 것을 그것의 모조품들과 이처럼 동일한 서열에 둘 수는 없을 정도이다. 이 모든 거북이들을, 이 모든 고등학교의 아킬레스[운동선수]들을, 변증법적 또는 수학적 이 모든 인형들을 - 사람들이 이름 붙인 탄알을 타고 가는 여행자, 시-공간[사차원], 빛의 속도 여행들 - 이 모두들을 진실한 존재로써 취급하려는 것이 곧 실재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효과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사물들은 - 나의 지속, 나의 노동, 나의 노력 - 특권적인 실재성들이자 또한 고통스런 어떤 것들이며, 어떤 다른 것도 이것들에 비교할 수 없다. 운동들은 눈[目, 목]에 상대적이고, 달리 말하자면 기하학자에게 상대적이다. 기하학자는 단지 사물들의 시각적 측면만을 유지한다. 그러나 운동은 나의 근육들에게도 또 나의 행동과 피곤에게도 상대적이지 않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그것에 속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속은 불가역적이고, 다시 말하면, 절대적으로 앞선 사건들과 절대적으로 다음 사건들을 허용하여, 사람들은 사건들의 순서를 앞뒤를 바꿀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속의 직관은 우주 속에서 동등한 상대주의가 폐기하고자 애썼던 위계질서들과 특권들(les prérogatives)을 회복한다. “실재성”이란 제목은 현상에서 현상으로 산보하는 임시적인 표지[휘장]를, 관찰자의 전망에 따라서 변하는 표지를, 우리의 관점에 종속하게 하는데 우리 맘에 드는 체계를 기꺼이 장식하는 표지를 더 이상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 특권으로써, 지각되었고 또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에게 일방적으로 속하는 자연적 특권이다. 직관의 우선성은 불러올 수 있는 협약에, 또는 임의적으로 선택된 관점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 이 권리[자연권]를 정신[영혼]은 탄생에서부터 소유한다. 왜냐하면 정신의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같은 사물들이 아니다. 이 사물들은 선택의 영역을, 즉 완전히 따로 이루어진 세상을 형성한다. 거기에는 효과적인[현실적인] 실재성들만 있고, 거기에서 사람들은 동전으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금화로 지불한다. 이 실재성들에 대항하여, 파이돈편이 말했듯이, 모든 다른 가치를 교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직관주의는 정신[영혼]의 진실한 형이상학이며, 세계[세상]의 진실한 중심이다.
사람들은 기요의 심리학에서 지속과 공간의 연관에 관하여 예언적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예상참여를 알리는 기회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 만큼이나 [기요(Guyau, 1854-1888)의] 시간관념의 발생(Genèse de l'idée de temps, 1890)이 아마도 벩송의 발견물에 대해 회고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기요는 우선 벩송처럼 앵글로색슨 학파들의 경험[관례]주의자의 주제를 비판했다. 이 주제에 따르면 공간 관념은 시간 관념과 더불어 구축되었다. 우월성의 겉보기를 시간에 일치시키는 이런 이론들 하에서 벩송은 진실한 지속에 충실하면서, 특히 공간일 뿐인 착각적인 시간의 특권들을 좌초시킬 것을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를 더 잘 구출하기 위하여 고전적 비결정론과 싸울 것이다. 기요의 논증 또한 세밀한 것인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벤(Alexander Bain, 1818-1903), 셜리(James Sully 1842–1923)의 시간은, 시론이 원했던 대로 확실히 “합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시간의 개념을 구축하는데 쓰이는 공간이다. 지속은 공간의 용어들로 일단 번역되어야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기요가 주장하는 “측정하다”란 것, 이것은 항상 너비를 병치의 방법에 의한 너비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시간-표시막대를 다른 시간에 직접적으로 병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항상 나아가고 있고, 그리고 결코 포개질 수 없기 때문이다. ... 자 왜?인가 하면, 고정된 어떤 것을 시간의 영속적 흐름 속에 놓기 위해서, 사람들은 공간적 형식 하에 영속적 흐름을 표상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요는 벩송이 영감을 얻기를 원하는 정식들에 이른다. “시간은 그 기원에서 공간을 차지한 사물들의 4차원처럼 있다.” 따라서 스펜서는, 만일 그 시간 자체가 이미 공간의 환영(un fantôme, 유령)이 아니었더라면, 시간으로부터 공간을 추출하는데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벩송이 두 가지 구별된 형이상학적 실재성들을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연역한다는 것이 불가능성이라 표현한 이 순환논증의 오류(ce cercle vicieux)가 결코 증명되지 않듯이 달력으로부터 그리고 시간적 문양들로부터 공간적 기원도 더 이상 아무것도 기요에게서 증명되지 못한다. 사실상, 그는 다른 곳에서 지속에 대해 “하상”(un lit)과 “경과”(un cours, 흐름)을 구별한다. 이 스펜서류들의 유사-지속은 “살아있고 운동하는 심층”에 대립하는 “수동적 형식”이며, 구체적 사건들이 순서로 배치되는 외연적으로 줄 세우기이며, 나의 경험들의 움직이는 순환들이 활성화 될 수 있을 텅 빈 거리이다. “시간의 경과(un cours), 이것은 사실(le fait, 만들어진 것) 위에 파악된 변화자체이다.” 사실 위에[사실에 근거하여]! 또는 벩송이 나중에 표현할 용어로 “...에 따라서”(au fur et à mesure)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이 역동주의의 독창성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잃어버릴 시간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최소한 지체, 상상작업의 최소한 예상참여는 공간 그 자체와 항상 동시적인 변화에 대한 직관 대신에 공간으로 대체한다.
말하자면, 기요는 추상적 공간과 추상적 시간을 대치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경우에 사람들은 사유할 권리를 갖는데, 그 권리는 열려진 문을 돌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진실로 경험론(génétisme 관례주의)이 공간을 구축하기위하여 사용한 시간이외 다른 시간이 없다면, 사람들은 독창성의 독점권을 공간의 관념에게 예약하는데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것은 너무 많이 편드는 것이다[너무 많은 몫을 할당하는 것이다]. 벩송 그 자신은 1891년 2월에 헌신했던 작은 보고서에서, 즉 철학지에 실린 「“시간관념의 발생”에 관한 보고서」(Me, 349-356)에서 그것을 매우 잘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기요가 단 한 종류의 다양성(多樣性), 즉 수적 다량(多量)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스럽지 않다. 그리고 따라서 “시간을 공간 속에서 표상되기를 원하는 것은 무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간을 시간 속에 놓은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적 다수성(多數性)을 말하는 자는 병치의 다수성, 공간 속에서 다수성을 말한다.” 기요는 단지 다음의 대안만을 생각했다: 시간은 공간을 구축하는데 쓰인다는 것이거나 또는 공간이 시간을 - 우리 시계들의 시간과 우리 달력들의 시간 - 구축하는데 쓰인다는 것이거나 이다. 그러나 공간에 앞선 것도 뒤진 것도 아닌, 그리고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표상하는, 지속의 자치적 질서는 없는가? “배경”(le fond)과 “형태”(la forme)처럼 정밀측정의 시간에 대립되는 시간의 “경과”(un cours)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그 경과를 여유 있게 깊이를 잴 수 있다. 우리는 거기서 실재적 지속이라 이름으로 불리어질 만큼 장점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간과 시간 이란 개념들의 공통적 근원은 기요에게서는 “의도”(intension)라 불리어 진다. 기요는 이 의도를,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의 영향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용어들로 정의한다. 삐에르 쟈네는 틀림없이 이것들을 벩송보다 훨씬 더 기꺼이 인정했다. 즉 의도는 “어떤 감각에 이어지는 운동”이며, 능동행위와 수동행위에 의해 일어나는 운동적 반작용이다. 그래서 의도는 욕망하고, 원하고, “원했던 것과 소유했던 것의 구별”, 즉 “술잔과 입술 사이에 거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 의도는 수학자의 “상수적이고 필연적인 계속”과 구별되는 것이고, 순수 지속과는 구별되지 않는다. “미래란, 동물 앞에 있는 것과 동물이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고, 과거는 뒤에 있는 것과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 독창적으로 의식한다는 것, 그러한 것은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길이에 대해 이전(le prius, 먼저)과 이후(le posterius, 다음에)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운동의(du mouvement, κίνησις) 추상작용이다 ... 그것은 시간을 인간 의식 속에서 창조하는 공간 속에서 운동이다. 운동 없이는 시간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시간을 운동에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운동없이 시간은 없다(οὔτε κίνησις οὔτ' ἄνευ κινήσεως ὁ χρόνος)는 것을, 또 시간은 운동의 “수”(le "nombre")(ἀριθμὸς κινήσεως κατὰ τὸ πρότερον καὶ ὕστερον), 또는 보다 더 정확하게 세어진 것(le nombré, τὸ ἀριθμούμενον), 더 좋게 말하자면 척도(la mesure, μέτρον)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벩송은, 운동이 반대로 매개물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지속과 동시성은 또한 이런 증명작업의 일환이다) 전력을 다했다. 매개물 덕분에 지속은 측정가능하게 되고 말하자면 외연적이 된다. 그 운동은 시간의 관념을 생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지속과 궤적을 혼동하게 하는 미봉책(l'expédient)이다. 운동 속에서 있는 실증적인 모든 것은 - 운동성 또는 변화하는 작동(l'acte) - 본성상 정신적이고 시간적이다. 따라서 기요는 근육운동의 시간관념과 같은 어느 정도로는 애정적인(affectif) 시간관념을 넘어서는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가 그 시간관념을 욕구(le besoin)로부터 만족까지의 거리로써 해석했기 때문이다. 지속의 “경과”(un cours)는 시간의 “수동적 형식”보다 약간 더 기본적인 표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표상이다. 삐에르 쟈네는 그것은 하나의 품행(une conduite, 이끄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벩송은 과학자들의 거짓 된 지속의 근저에 감추어져 있는 공간적 인위성을 고발했다. 우리는 인위성의 유일한 목적이 철학자들의 순수 지속을 분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또한 그것은 실재적 시간을 더 잘 재발견하기 위하여 착각적인 시간을 배척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기요의 비판이 수학자들의 기만적인 지속에 뿐만이 아니라 시간 일반에 도달하려 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람들이 순수시간을 불순한 시간으로부터 분간되는 것을 언젠가 알아보고 절망하는 것만큼이나, 그는 공간의 관념의 선행권(la priorité, 우선권)을 그 만큼 더 강조한다. 기요가 말하기를 “시간은 우주 변화들의 추상적 정식이다.” 그것은 형식이며, 이 형식에 따라서 우리의 감각들이 순서로 정돈되고, 우리의 반작용들이 방향잡게 되며, 우리의 욕망들이 분류된다. 심지어는 이렇게 사유하는 것도 허락된다. 만일 기요가 불순한 지속의 비판에 충분히 멀리까지 갔다면,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모든 심리학이 순수 지속없이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짓 지속도 순수지속만큼이나 거짓이 아니다. 그런데 그 시간으로부터 거짓 지속은 심지어 현상들(겉모습들)을 갖지 못할 것인데, 만일 진실한 지속의 직관이 거짓 지속을 유지하고 또 그것을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것은[시간은] 영화방식의 환영(유령)들 속으로 직관의 회상(une réminiscence)을 끌고 가며, 마치 그것의 회귀에 대해 수줍은 예감처럼 끌고 간다. 만일 우리가 매순간마다 직접적인 경험으로 굽을[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방정식들을 한 순간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은행 지폐는 안락과 평안과 동의의 약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마치 우리가 그 지폐를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학자들의 지속은 공간적인 만큼이나, 그러한 것이 기요에게 맘에 들었다. 그것은 그 지속이 순수하고 단순한 공간과 혼동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 겉모습이 표본(모델)을 가정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 표본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는 모든 삶이 있고, 모든 실재성이 있다. “품행”(une “conduite”, 이끄는 방식), [어쩌면] 기대일지라도 또한 의도일지라도, 지속을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미리 그것의 직관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품행들은, 품행들 자체들에게만 맘을 맡기기에(몰두하기에), 자기것들(품행들)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할은 똑바로 지속의 생생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역할 [미래에] 원하자마자 우리의 가녀린 상징들이 순수 지속이 다시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상징들을 실현하기를 고집할 것이고, 우리는 배은망덕하게도 이것들을 생생하게 살게 한 시간을 잊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직관으로 회귀를 영속적으로 연기할 수 없다. 어떤 사람도 더 이상 상징들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상징들에서는 굳건하고 효과적인 사물들, 즉 직관이 영양가를 얻게 되는 모든 좋은 사물[사정]들이 조만간에 재발견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절대자(l'absolu)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나의 차원도 아니며, 인간존재의 다른 속성들 중의 한 속성도 아니며 이 존재의 부분관사 같은 성질들도 아니다. 시간은 존재의 어떤 존재 양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어떤 경우이든 간에 권리 상으로 모든 연대기적인 양상의 바깥에 있는 비시간적 실체로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은 시간적 내용들이 부차적으로 다시 말하면 우발적으로 움직이게 할 것이라는 하나의 형상(형식)을 더 이상 우대하지 않았다. ... 이 모든 추상화작업들은 시간성 속에서 날개들의 상실로 그리고 재난의 추락으로 이루어진 편견에, - 오르페우스의 편견에, 플라톤주의자의 편견에, 영원한 편견에 - 생명을 다시 부여한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성은 하나의 벌[죄]이라면, 시간성은 그 방법으로 후성설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다음 차례로 이 편견의 기원은 참조 체계의 생물불변설의(fixiste) 미신이며, 실체론의 미신이다. 마찬가지로 실체론이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방식에 앞서서 중성적이고 자격[성질]없는 기저(un substrat)를 표상하듯이, 마찬가지로 겉만 그럴싸한 변형론(la tranformation, 진화론)은 마치 불변성(immutabilité)을 기대하여 성의없이 완성하는 것으로써 진화론을 표상하는 것과 같다. 불변의 전형은 단지 껍질만, 깃털만, 변장된 것만 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지만 변신(métamorphose)에 의해 그 전형의 양상들을 변형하는 것으로, 공간의 주제에 관하여 얇은 막 같은 어떤 작은 변이들을 실행할 것이다. 양상변화(Modification), 변형론(transformation), 모양변화(transfiguration)는 형태에서 형태로 산보를, 또는 모습에서 모습으로 이행을 돌연변이론(ce mutationisme)으로 삼는다. 그리고 변질(l'altération)에 관한 한, 그 변질은 동일자(le Même)와 연관하여 정의된다. 따라서 시간은, 우선 현재 있고 그러고 나서 생성되고 조작하는 존재의 부차적 특성이다. 왜냐하면 온존재(l'Etre)는 현실태(l.Acte)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진화를 진화된 것의 조각들을 가지고 재구성하는 진화론은 변화를 마치 옛 요소들의 피상적 배열처럼, 다시 말하면 마치 불변성의 완곡법(une périphrase)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것은 옛 것을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기술(l'art)이다. 사람들은 동일자들을 취급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적”일뿐만 아니라, 이런 의미에서 시간성은 그 실체의 질적인 형용사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 그 자신이 시간 그자체이며, 시간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시간의 자기성(l'ipséité, 자체성)이다. 겉보기의 변화들에 대하여, 벩송은 “초실제화”(une transsubstantiation)의, 또 중심적 생성의, 초경험론적인(métempirique) 관념을 대립시켰다. 중심적 생성은 존재를 다른 존재 안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이고, 동일성의 원리를 반박한다. 부분적인 신진대사들에 대하여, 창조적 진화는 급진적 돌연변이의 경이(le prodige)를 대립시킬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유사-역사주의에 대하여, 혁명적 변화를 대립시킬 것이다. 표피적 시간성의 정태적 편견에 대하여, 「변화의 지각」에 관한 옥스퍼드의 둘째 강연이 “존재적 생성”(un devenir ontique)의 역설적이며 거의 폭력적인 관념을 대립시킨다. 모순적인 관념은 우리의 모든 습관들의 개입을, 우리들 논리학의 왜곡을, 그리고 내적인 깊은 개혁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서 연관들의 역전은 이미 “전향”(une conversion)을 가정하지 않는가? 급진적인 상대주의라고 우리가 말하는 ‘변하고 있는 그 주체’가 없는 변화는 지각론적 인상주의의 기저(substrat) 없는 성질들과 짝을 이룬다. 시간은 존재의 모든 두께에 일물동체적(consubstantiel)이고 또 더 좋게 말하자면 시간은 한 존재의 유일한 본질이며, 존재의 모든 본질은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뿌리와 그 자체성(l'ipséité)에까지 이르는 존재 전체이며, 자체성은 운동 속에 생성을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하자면, 존재는 생성이외 다른 존재 방식이 아니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더 이상 있지 않는 것(un Déjà-plus)도 또는 아직 있지 않는 것(un Pas-encore)도 아닌 존재이다. - 자유는 시간처럼 인간존재의 실체 자체이다. 독단적 비결정론에서 자유는 이 존재의 부분적 성격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자유는 방어태세를 취하는 의지가 몸을 사리고 있는 공략할 수 없는 성채이다. 자유는 결정론이라는 그물눈 조직(la trame)에서 부정적 예외가 아니다. 자유는 창조적 적극성(positivité 실증성)이다. 자유는 부분들의 배열을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결단에 의해 물질[몸]을 해방하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인간이 완전히 생성중인 것처럼, 완전한 자유이다. 인간은 두발 달린 자유이며, 그는 가고, 오고, 말하고, 숨쉰다. 우리에게 제시할 것으로 남은 것은 이것이다. (49MM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