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성산(聖山) 강화 마니산(摩尼山)<2>
마니산 등산로(登山路)
함허동천로 암릉(巖稜) / 함허동천 계곡 / 암각(涵虛洞天) / 정수사(淨水寺)
내리 매표소에서 참성단까지 오르려면 직진의 계단로는 4.8km, 능선을 돌아가는 단군로는 7.2km이다.
매표소에서 조금 오르면 천지의 조화를 이끄는 삼신(三神)인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조형물이 볼만하다. 계단로를 오르면 중간지점인 개미허리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고 다음부터 계단이다.
일반적으로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등산로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참성단에서 산줄기를 따라 함허동천(涵虛洞天) 계곡, 혹은 정수사(淨水寺) 계곡으로 빠지는 등산로를 꼽을 수 있는데 기막힌 풍광을 자랑한다.
정상(참성단)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편으로는 무수한 섬들이 떠있는 서해바다가, 왼편으로는 강화도의 벌판과 아기자기한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풍경이다.
등산 시간은 내리(內里, 華道草校 옆) 매표소에서 함허동천(涵虛洞天) 야영장(野營場), 혹은 정수사(淨水寺)까지 일주하는데 대략 3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반대 방향으로 오르면 대략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이것은 수직으로 오르는 계단로(階段路)로 오를 때이고 만약 단군로(檀君路)로 오른다면 1시간 정도 추가된다고 보면 된다. 능선 정상의 등산로는 바위로 덮여있는 구간인 암릉(巖稜)이 제법 길게 이어져 있어 무척 조심해야 한다.
또 마니산 정상인 참성단에서 반대방향 능선으로 따라가면 장화리로 넘어가는 응암(鷹巖)고개까지 가서 장화리로 빠질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장곶 돈대까지 갈 수도 있는데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선수돈대(船首墩臺)를 거쳐 선수포구로 내려가는 등산로도 있다.
가장 짧은 거리로는 반대편인 흥왕리에서 오르는 등산로도 있는데 가파르고 오르기 힘든 등산로다.
온통 가파른 비탈길을 끝없이 오르기만 하면 곧바로 참성단에 이르게 되는데 한 번 오르다 죽을 뻔 했다.
강화(江華, 華道)의 얽힌 슬픈 역사
고려 말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강화(江華)로 몸을 피신한 고종(高宗)은 강화읍성(江華邑城)을 쌓고 강화읍에 궁궐(高麗宮闕址)을 짓고 기거하는데 마니산 뒤 흥왕리에 흥왕이궁(興旺離宮, 別宮)도 짓는다.
또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이라는 정자각도 있었다는데 별궁터는 있지만 정자는 흔적도 없다.
접연화는 궁녀의 이름, 앙산정(仰山亭)은 참성단이 있는 산봉우리를 쳐다보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일본의 침입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빌리고자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데 정수사(淨水寺)에서 법화경(法華經)을 판각하였다고 한다.
병인년(1866) 10월에는 7척의 프랑스 군함과 600명의 해병대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에 휘말리게 되는데 조선의 용장 양헌수(梁憲洙)가 맞서 강화와 접경인 문수산성(文殊山城, 김포) 전투와 정족산성(鼎足山城/전등사 있는 골짜기) 전투에서 패하자 40일 만에 철수하였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제독은 전쟁일지에서 조선 사람들은 키가 크고, 흰 옷을 즐겨 입고,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사람들이며, 또 시골의 집들도 집집마다 많은 서적이 있어 조선의 높은 교육수준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전등사(傳燈寺) 안에는 양헌수(梁憲洙) 전적비(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화도면의 역사적인 명소(名所)들
<1> 정수사(淨水寺)
신라 선덕여왕(AD 639) 때 창건하였으며 원래 정수사(精修寺)였는데 조선 세종 5년(1423) 함허대사가 득도하고 중창(重創)하였으며 옆에 맑은 샘이 있다하여 정수사(淨水寺)로 고침<함허대사가 득도한 곳>
몽고병란(蒙古兵亂) 때 이곳 정수사에서 팔만대장경 중 ‘법화경(法華經)’을 판각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대웅전 전면(前面) 문은 아름다운 연화문(蓮花紋)으로 조각된 4쪽문이 아름다운데 다른 사찰의 창문에도 연화문 창살이 있지만 정수사와 같이 화병(花甁)에 꽂혀있는 연꽃을 조각한 곳은 이곳 밖에 없다고 한다.
연꽃(蓮花)은 불교를 상징(象徵)한다.
<2> 동막(東幕)해수욕장
정수사(淨水寺)에서 해변을 끼고 돌아가면 동막(東幕) 해수욕장이 있는데 서해안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백사장(白沙場)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해변에는 소나무 숲도 있고 주변 풍광도 아름다워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3> 흥왕(興王/高麗) 이궁지(離宮趾)
몽고병란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 고종은 강화읍내에 궁궐을 지었는데 고종 49년 기미(己未) 2월(1242년)에 마니산 서쪽 흥왕리(興王里) 마니산 기슭에 별궁(別宮, 離宮)을 지었으니 바로 흥왕이궁(興王離宮)으로, 일명 흥왕리 고려이궁(高麗離宮)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 유적이 흥왕이궁지(興王離宮趾)로, 향토유적 13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도 석축(石築)이 남아있는데 바로 근처에 앞서 기술한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이라는 정자각이 있었다고 한다.
멀지 않은 곳에 흥왕사(興王寺) 절도 있었는데 마을 촌로(村老)들 이야기로 절에 빈대가 너무 들끓어 일부러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관연 믿어야 할지... 또 몽고의 지배로 수많은 공물(貢物)공녀(貢女)를 바치고 고려 왕들은 몽고 공주를 왕비로 맞아드려야만 하던 시기, 충렬왕(忠烈王) 2년(AD 1276)에 왕비였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일명 莊穆王后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와 이 절에 왔다가 아름다운 금탑이 있는 것을 보고 궁궐로 옮겨갔는데 흥왕사의 스님들이 돌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공주는 끝내 거절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4> 장화리(長花里) 낙조(落照)
장화리 대섬(일명 소렴섬)의 낙조(落照) / 밀물(滿潮) 때 / 갯고랑 / 해너미 촬영장소
장화리는 버드나무가 많아 예전 '버드러지'라고 불렀다는데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우리나라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이곳을 낙조(落照)마을, 해넘이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왼쪽에 바다로 삐죽이 내민 언덕이 보이는데 그 위에 북일곶(北一串) 돈대가 있고 그 아래 바다에는 조그만 섬이 그림처럼 떠 있는데 대섬(竹島, 일명 疏簾島)이라고 한다.
조그만 무인도인 이 소렴섬은 밀물이 들어오면 섬이지만 썰물로 물이 빠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인데 해가 바다로 떨어질 때 이 섬과 함께 보면 정말 그림처럼 아름답다. 썰물 때 섬을 둘러보고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잠시 오르면 북일곶 돈대가 있다.
장화리 낙조落照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은 어디인가 / 주홍색 물길은 추억처럼 일렁이고
황금빛 나래 깃으로 / 점점이 나르는 갈매기는
차마 말 못할 / 내 첫사랑의 아픔인가
너는 어느 날 / 거짓말처럼 / 내 곁에 설레임으로 다가와서는
주체할 수 없는 흔적들을 남기고 / 저 황금빛 물길 따라
신기루(蜃氣樓) 마냥 기억의 그늘로 / 그렇게 멀어져 갔었지
노을에 젖은 / 억새꽃이 / 밀물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오고
잔광(殘光)을 가로지르며 / 이름 모를 산 새 몇 마리가
첫사랑의 추억처럼 / 소렴(疏簾) 검은 숲 그늘로 날아든다. <내가 써 본 시(詩)>
<5> 여차리(如此里) 갯벌
장화리 남쪽으로 여차리가 잇닿아 있는데 이곳은 썰물 때가 되면 광활한 갯벌이 펼쳐지고 갯고랑이 드러나 생선도 많이 잡히는데 철새도래지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아득히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등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어 풍광(風光)이 기가 막힌다.
이곳은 철새도래지로 넓적부리 도요새 등 희귀 철새들이 수만 마리 모여오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해변에는 갯고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이따금 망둥이 낚시를 하러 나갔다가 밀물이 오면 철벙거리며 나오다가 갯고랑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도 생긴다. 개흙에 발이 빠지면 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세워졌던 흥왕이궁(興王離宮)에서 바라보거나 조금 위쪽에 있었다는 접연화앙산정(蝶戀花仰山亭) 정자각에서 내려다보았다면 이 아름다운 풍광에 기가 막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는 썰물이 되면 수km 씩 갯벌이 드러나는데 2~3km 나가서 개막이그물을 2~30m씩 넓게 쳐 놓고 모서리에는 통발을 달아 놓는데 하루 두 번, 썰물 때 나가보면 그물에 걸린 고기가 엄청 많을 때도 있다.
<6> 선수포구(船首浦口), 일명 후포항(後浦港)
선수포구 / 선수선착장 / 밴댕이회 / 밴댕이무침
선수포구는 마니산 동쪽으로, 바다에서 보면 뒤쪽이 되니 후포(後浦)라 불렸을 것이고 화도면에서 제일 큰 어향(漁港)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 옆에는 빤히 건너다보이는 섬인 석모도(席毛島)를 비롯하여 인근의 섬들로 가는 선수선착장(船首船着場)도 있다.
이곳은 바다로 넓게 뚫려있기는 하지만 석모도와의 사이가 제법 커다란 호수처럼 생겨서 예전에는 이곳이 엄청나게 새우와 밴댕이, 전어 등 생선이 많이 잡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잡은 새우와 젓갈을 배에 싣고 곧바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마포(麻浦) 나루로 가면 전국에서 모여든 배들로 마포나루는 항상 흥청거렸다고 한다. 마포상인들은 사들인 어물과 새우젓을 지금 남대문 시장인 칠패(七牌)로 가져다 되팔고....
예전에는 이곳에서 밴댕이가 하도 많이 잡히니 고기취급을 못 받아 퇴비장에 쌓아 썩혀서 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밴댕이회가 인기를 끌면서 선수포구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도 선수포구는 밴댕이회로 유명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부근에서는 밴댕이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선수포구에서 밴댕이회를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밴댕이는 거의 호남지방에서 가져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