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정과 귀래정 후손들 570년만의 만남 / 이두백
만일, 500여년 후에 나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과 내 처가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한 세대를 약 30년으로 잡으면 19세대가 넘게 되겠는데 무수한 성씨들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혼인관계를 생각해 볼 때 그런 후손들의 만남을 서로 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만나는 후손들이, 나와 내 아내가 살아왔던 시대의 삶의 행적을 반추하고 감상해 간다면, 그리고 저승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어떤 영적 수단이 주어진다면 나와 내 아내는 얼마나 기뻐하고 보람을 느낄 것인가? 생명의 뿌리가 그렇게 오래 기억되고 이어지니, 마치 영생의 일부 가치가 실현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거꾸로, 나에게 피와 생명을 이어준 500여 년 전 선조의 흔적들이 오늘날에도 생생히 후손들에게 인식되고 이어진다면 얼마나 힘나고 놀라운 일이랴!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가는 요즈음의 추세이지만 증조할아버지 할머니를 넘어,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의 얼굴을 뵙거나 삶의 한 부분을 공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바쁜 사회생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영위해야하는 시기엔 조상들을 떠올려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년퇴직을 하고 여유롭고 즐겁게 노후생활을 해오는 중엔 의외로 매우 값지고 고귀한 결실을 많이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내게 행운의 여신이 그런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이다.
종친회일 봉사를 하면서 문화유적을 남기신 선조 분들의 유적지를 탐방하곤 했다. 그중 내게 16대 선조가 되시는 분이 전남 함평에 정자를 세우셨고 그 정자가 지금도 남아있어 탐방을 했었다. 바로 전남 함평의 영파정이다. 여행안내 자료엔 이렇게 소개된다. 함평 영파정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이다.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2(사장길39)에 소재해 있다. 구기산 앞자락을 흘러가는 영수천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안(1414년생~)의 아호를 따서 영파정으로 명명되었고 이후 영수헌으로 불렀는데 관덕정 활터로도 사용되었고 정자로 사용해 오고 있다. 단종 3년(1455년)에 세워졌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순조21년(1821년) 현감 권복과 김상직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고종 20년(1883년)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하고 1966년 다시 수리했는데, 현재 함풍이씨 가문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영파정 정자의 주인공 이안께선 조선 시대에 단종의 퇴위와 수양대군 세조의 즉위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1455년 윤6월에 낙향을 하게 된다. 그 사육신 생육신이 생기던 역사시대에 아우 한 명과 처조카인 신말주와 같이 향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함평에 영파정 정자를 세우고 은둔 생활을 한다. 나라에서 두 번이나 관직(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내리고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지내면서 강론을 펼치고 시를 읊는 생활을 한다. 그런 생활 중 이안께서 노래한 대표적인 6자씩의 한시를 남겼는데 학생들 수험 자료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누고비안평간배(樓高飛雁平看背)
수정유하세수수(水淨遊鰕細數鬚)
이를 풀이하면,
누각이 높으니 날아가는 기러기의 평평한 등도 볼 수 있고
물이 맑으니 노니는 새우의 가느다란 수염도 세어볼 수 있겠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소부와 허유의 청풍을 잇기 위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정자이름을 영파정으로 지었다고 전하는데, 한시도 ‘인륜의 도와 인의 사상에 반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다 지켜보고 있다.’는 풍자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영파공의 처조카 귀래공 신말주는 전북 순창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순창에 정자 귀래정을 세우고 고령신씨 순창공파의 원조가 된다. 여행안내 자료엔 귀래정이 이렇게 소개된다. 전북 순창 귀래정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이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산 2-1에 소재해 있다. 신숙주 아우 신말주(1429년생~1505년사)가 이조 세조2년(1456년)에 세웠고 신말주 아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명명했다. 1974년에 고쳐지었는데 안쪽에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시절을 광주광역시에서 보냈다. 그때 전북 순창이나 남원, 정읍, 고창 등 지역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중 순창 출신 신씨 성을 가진 한 친구하고는 미문화원에서 서로 다른 영어회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같은 대학에 진학해서는 전공은 달랐지만 아예 영어회화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다. 영자신문 학생기자 활동도 같이 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근년에는 고교동기동창들이 매월 받아보는 회보 편집봉사도 2년 같이 했는데 그때 신씨 성을 가진 친구는 캐나다에 있으면서 편집 작업의 주요부분을 인터넷으로 봉사해 줬다. 그후 고교 졸업 50주년 행사 때는 즐거운 시간을 많이 공유했고, 그 친구가 캐나다에서 한국 방문할 때에는 산책하며 즐거운 시간도 많이 가졌다. 역으로, 2022년에는 내가, 캐나다 행을 했다. 켈거리로 이민 간 후 3년 지난 장녀 집을 아내랑 두 달간 응원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약 97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캐나다 서부에 있는 밴쿠버시를 여행할 때, 고속 대형 훼리선을 타고 그 고교친구가 거주하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수도인 빅토리아 섬까지 여행했다. 장녀가족 4식구랑 여섯 식구가, 빅토리아섬에 도착하자, 신씨 성을 가진 친구 부부가 경치 좋은 공원에 맛있는 야외음식들을 손수 준비해 중식과 환담을 즐겼거니와 빅토리아섬 곳곳을 샅샅이 안내해줘 매우 고마웠다. 친구부부는 뉴질랜드에서 7년, 자녀들과 캐나다 밴쿠버시에서 7년, 또 빅토리아섬에서도 10여년 지내와 수준 높은 국제신사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캐나다 로키산맥 곳곳을 50일 넘게 부부 트레킹여행까지 마쳤다고 하니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라고도 생각했다. 그후 2년이 더 지난 올 6월에 신씨 성을 가진 그 친구부부는 또 스위스, 이태리 여행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고교동기동창들과 100명이 넘게 함께 나누는 단체 카카오톡에서 접하고는 2년 전의 즐거운 캐나다 여행담을 같이 나눠갔다. 그런 중 6월 5일 종친회활동을 하다가 불현 듯이, 1400년대 말에 같이 낙향하신 영파공 이안님과 귀래공 신말주님이 떠올라, 여행 중인 친구에게 단체카톡을 통해‘우리 종친선조님과 같이 낙향하여 순창에 터를 잡으셨다는 신말주님이 혹 친구의 종친 어르신이 아닌지?’여쭤보게 되었다. 의외로 그 친구는 ‘매우 놀랄만한 질문이네’라며 바로 답을 보내왔다. “내 고향 순창에 귀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네. 주변 풍광이 빼어나 어린 시절 소풍을 가곤 했지. 월백이 알고 있듯,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 선생이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낙향,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짓고 은둔하시면서 시와 묵필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하네. 그 분이 곧 우리 순창공파 신씨의 원조로 우리 가문의 뿌리시라네.”라는 내용이었다. 나도 매우 즐겁게 먼 나라 이태리에 있는 친구에게 바로 문자로 답했다. “신치우 친구! 귀래정 한번 같이 가보세. 함평의 영파정도 서로 같이! 약 570년 만에 후손들이 이렇게 반갑고 즐겁게 만나는 인연을 이어가나 보네. 두 선조 어르신들께서도 매우 반가워하시고 기뻐하시리라고 믿네!”
이렇게 두 친구가 새로운 마음으로, 영파정과 귀래정을 합동으로 같이 탐방하는 일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양쪽 가족들과 종친들은 물론 같이 졸업한 433명 고교동기동창들도 모두 응원하고 함께 즐거워하리라고 믿어진다. 저승에서 영면하고 계실 양쪽선조님들께서도 소식을 혹 접하게 되면 서로 기뻐하시면서, 미흡했던 생의 일부를 보상 받으신 듯 자랑도 하시리라. 친구가 외국여행을 마치고 빨리 한국행 하길 기다리니, 나날이 힘찬 색깔들로 채색되어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