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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27권
7. 분별지품 ②
이와 같이 온갖 지(智)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지’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먼저 부처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처음으로 성불(成佛)하여 진지를 획득하는 단계에서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닦는데, 여기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1)
무엇을 열여덟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8불공법]
열여덟 가지의 불공법이란
부처의 10력(力) 등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念住)와 대비(大悲), 이와 같은 공덕을 모두 합하여 18불공법이라고 이름한다.
즉 이것은 오로지 모든 부처님께서 진지를 일으킬 때 닦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성자는 닦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10력]
바야흐로 부처님의 10력(力, bala)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0력 중 처(處)ㆍ비처(非處)는 10지(智)이고
‘업’은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여덟 가지 ‘지’이다.
정려와 근(根)과 승해와 계(界)는 아홉 가지 ‘지’이고
변취(遍趣)는 아홉 가지 혹은 10지이며
숙주와 사생(死生)은 세속지이며
누진(漏盡)은 여섯 가지 혹은 10지이다.
숙주와 사생의 지력(智力)은 정려지에
그 밖의 지력은 모든 지(地)에 의지하는데
섬부주 남성의 불신(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경계에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에 [‘힘’이라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10력은 이와 같다.
첫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으로,
이것은 다 같이 여래의 10지(智)를 본질[性]로 한다.2)
둘째는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으로,
이것은 여덟 가지의 지를 자성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멸지와 도지를 제외한 그것이다.3)
셋째는 정려ㆍ해탈ㆍ등지ㆍ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이며,
넷째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며,
다섯째는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며,
여섯째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 힘은 모두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한다.4)
일곱째는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니,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의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단지 온갖 능취(能趣)의 도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를 본질로 하며,5)
만약 이와 아울러 소취(所趣)의 과(果)도 역시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10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6)
여덟째는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이며,
아홉째는 사생지력(死生智力)으로,
이와 같은 두 가지 힘은 모두 세속지를 본질로 한다.7)
열째는 누진지력(漏盡智力)으로,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역시 그 뜻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이것이 만약 단지 누진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지와 고ㆍ집지와 타심지를 제외한 여섯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며,8)
만약 이와 아울러 누진의 소의신 중에 획득된 공덕(즉 누진의 방편)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10지를 자성으로 삼는다.9)
10력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의 차별은 어떠한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힘(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4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그 밖의 여덟 가지 힘은 모두 열한 가지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여기서 열한 가지 지라고 함은 욕계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과, 그리고 4무색정을 말한다.
10력의 소의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것의 소의신(所依身)의 차별은 어떠한가?
10력은 모두 남섬부주에서 태어난 남성의 불신(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10력의 소의신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와 같은 10지를] 어떠한 이유에서 ‘힘[力]’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일체의 앎의 대상[所知境]에 대해 지(智)가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힘’이라고 하였다.10)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10력은 오로지 불신(佛身)에 의지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오로지 부처님만이 이미 모든 번뇌와 그 습기(習氣, 습관적 습성)를 제거하였고, 일체의 경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로 능히 알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는 이와는 다르기 때문에 ‘힘’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사리자(舍利子)는 득도하기를 희구하는 이를 저버렸으며,11)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의 전제와 후제의 생의 많고 적음에 대해 능히 관찰하여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 따위가 그러한 것이다.12)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 지니신, 두루 알아야 할 것에 대한 마음의 힘[心力]은 가이없는 것[無邊]이다.
그렇다면 색신의 힘[身力]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거나
혹은 마디마디가 모두 그러하니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가 열 배씩 증가한 힘으로
이는 촉처(觸處)를 본질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의 색신의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다.13)
그러나 유여사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색신의 사지와 마디마디에는 모두 나라연의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으며,
대덕 법구(法救)는,
“모든 여래의 색신의 힘은 가이없으니, 마치 마음의 힘과도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색신은 마땅히 가이없는 마음의 힘을 능히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대각(大覺, 즉 불타)과 독각과 전륜왕의 사지와 마디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은,
그 순서대로 마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려 얽혀 있는 것[蟠結]과 흡사하고,
서로 연이어 물고 있는 것과 흡사하며,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서로 견주어 보면, 그 힘에 수승함과 저열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연의 힘은 그 양이 어느 정도인가?
코끼리 등의 일곱 가지의 힘을 각기 열 배씩 증가시킨 것으로, 이를테면 보통의 코끼리인 범상(凡象)과 향상(香象)과 마하낙건나(摩訶諾健那)와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와 벌랑가(伐浪伽)와 차노라(遮怒羅)와 나라연이 그것이니, 뒤의 것일수록 그 힘은 앞의 것보다 열 배씩 증가하는 것이다.14)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앞의 여섯 가지는 열 배씩 증가하지만, 그것은 나라연의 반신(半身)의 힘에 필적할 뿐이며, 이러한 힘의 천 배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을 성취한다”고 하였다.15)
이러한 여러 설 중에서 오로지 그 양이 많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색신의 힘은 촉처(觸處)를 본질[性]로 하니, 이를테면 소조촉(所造觸) 중의 대종(大種)의 차별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는 소조촉(所造觸)으로, 일곱 가지를 떠나 그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16)
[4무외]
부처님게서 지니신 4무외(無畏, vaiśāradya)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무외는 그 순서대로
첫 번째와 제10ㆍ제2ㆍ제7의 힘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의 4무외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17)
즉 첫째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로서 10지(智)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첫 번째 힘(처비처지력)과 같다.18)
둘째는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로서 여섯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열 번째 힘(누진지력)과 같다.19)
셋째는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로서 여덟 가지의 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두 번째 힘(업이숙지력)과 같다.20)
넷째는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로서, 아홉 가지의 지와 10지를 본질로 하니, 이를테면 일곱 번째 힘(변취행지력)과 같다.21)
어떻게 지(智)에 대해 ‘무외(無畏)’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같은 ‘무외’라는 말은 두려워함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지(智)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외라고 하는 말은 온갖 ‘지’ 그 자체에 근거한 것이다.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무외는 바로 ‘지’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그 자체가 바로 ‘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논주 세친의 평석)
[3념주]
부처님께서 지니신 3념주(念住, smṛtyupasthāna)의 상의 차별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3념주의 본질은 염(念)과 혜(慧)로서,
따르고 어기고 둘 모두를 소연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가 지닌 3념주는 경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受持)하여 행하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쁨을 낳지 않으며, 사기(捨棄)하고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첫 번째 염주라고 한다.
또한 모든 제자들이 오로지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근심을 낳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두 번째 염주라고 한다.
또한 모든 제자들 중의 어떤 부류는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며, 어떤 부류는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으며, 사기하고서 정념과 정지에 안주하니,
이것을 여래의 세 번째 염주라고 한다.22)
이러한 3념주는 모두 염(念)과 혜(慧)를 본질로 한다.23)
[불공법을 세운 까닭]
위대한 모든 성문들도 세 가지 경계에 대해 기쁨과 근심과 양자 모두를 떠났는데, 어떻게 이것(부처의 떠남)만을 일컬어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오로지 부처님만이 이것에 대한 습기(習氣)를 아울러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24)
혹은 모든 제자들은 여래를 따르거나 그에게 소속되어 있기에 그를 따르고[順, 공경하고 수지하여 행하는 것] 어기고[違, 공경하지도 않고 수지하여 행하지도 않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행할 경우에는 마땅히 깊이 기뻐하고 근심해야 할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능히 그것을 일으키지 않으니, 참으로 희유하고도 기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은 [여래의 제자로서] 성문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 어기고, 두 가지 모두를 행할 때 기쁨과 근심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기특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로지 부처의 그것만을 ‘불공’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대비]
모든 부처님께서 지니신 대비(大悲)에는 어떠한 상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비는 오로지 세속지로서
자량과 행상과 경계와
평등과 상품(上品)으로 인해 ‘대’이며
여덟 가지 이유로 인해 ‘비’와는 다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래의 대비(大悲)는 세속지를 본질로 하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공유(共有)의 법인 비(悲)와 마찬가지로 능히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의 행상(즉 苦苦ㆍ行苦ㆍ壞苦)도 능히 지을 수 없을 것이다.25)
이러한 ‘대비’라고 하는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인가?
다섯 가지 뜻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첫째는 자량(資糧)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크나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힘은 능히 세 가지 괴로움의 경계에 대해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연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모두 3계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넷째는 평등(平等)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일체의 유정에 대해 평등한 이익과 안락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품(上品)으로 말미암아 ‘대’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최상품으로서, 다른 어떠한 비(悲)도 능히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대비와 ‘비’가 다른 것은 여덟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자성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무치(無癡)와 무진(無瞋)으로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26)
둘째는 행상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세 가지의 고(苦)와 한 가지의 고를 대상으로 하여 행상을 짓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7)
셋째는 소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3계와 1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8)
넷째는 소의지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제4정려와 그 밖의 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29)
다섯째는 소의신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오로지 부처의 몸과 부처 이외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30)
여섯째는 증득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유정지와 욕계를 떠나 증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31)
일곱째는 구제(救濟)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사업의 성취와 희망으로서의 구제가 다르기 때문이다.32)
여덟째는 애민(哀愍)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불평등과 평등으로서 애민이 다르기 때문이다.33)
부처님의 공덕이 그 밖의 다른 유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모든 법은 동등하다]
모든 부처님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그들의 법은 모두 동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량과 법신과 이타에 의거할 경우
모든 부처님의 법은 서로 유사하지만
수명ㆍ종성ㆍ족성ㆍ크기 등에 있어서는
모든 부처님의 법에 차별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諸佛]은 다 동등하다. 즉
첫째로는 자량으로 말미암아 동등하니,34) 그것을 원만히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동등하니,35) 그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이타(利他)로 말미암아 동등하니, 그것이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수명과 종성과 족성과 신체의 크기 등의 차이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수명의 차이란 부처님의 수명에 길고 짧음이 있는 것(백 세에서 2만 세)을 말하며,36)
종성의 차이란 부처님이 찰제리(刹帝利, 크샤트리야를 말함)와 바라문(婆羅門)의 종성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족성의 차이란 부처님의 족성이 교답마(喬答摩, Gautama)나 가섭파(迦葉波, Kāśyapa) 등인 것을 말하며,
크기의 차이란 부처님의 색신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머문 지가 오래되고 얼마 되지 않은 등의 차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에게 이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출현할 때 교화될 유정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원덕]
나아가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여래의 세 가지 종류의 원덕(圓德)을 사유하여 깊이 애호하고 공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세 가지 원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인원덕(因圓德)이며, 둘째는 과원덕(果圓德)이며, 셋째는 은원덕(恩圓德)이다.
처음의 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무여수(無餘修)이니, 복덕과 지혜 두 종류의 자량을 남김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시수(長時修)이니, 3대겁(大劫)의 아승기야(阿僧企耶, 혹은 3아승기겁)를 거치면서 게으름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무간수(無間修)이니, 정근함이 용맹하여 찰나찰나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존중수(尊重修)이니, 배워야 할 법을 공경하여 [신명을] 돌보거나 아끼는 일이 없었으며, 태만함이 없이 닦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과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지원덕(智圓德)이며, 둘째는 단원덕(斷圓德)이며, 셋째는 위세원덕(威勢圓德)이며, 넷째는 색신원덕(色身圓德)이다.
지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무사지(無師智)이며, 둘째는 일체지(一切智)이며, 셋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며, 넷째는 무공용지(無功用智)이다.37)
단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번뇌단(一切煩惱斷)이며, 둘째는 일체정장단(一切定障斷)이며, 셋째는 필경단(畢竟斷)이며, 넷째는 병습단(幷習斷)이다.38)
위세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외적 경계를 화생(化生)하고 변화시키며, 오래 머물게[住持] 하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둘째는 수명의 양을 혹은 줄이고 혹은 늘이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셋째는 허공이나 장애가 있는 곳이나 지극히 먼 곳을 신속히 가며, 작은 것과 큰 것이 서로에게 들어가게 하는 데 자유자재한 위세이며,
넷째는 세간의 여러 가지 사물의 본성으로 하여금 법이(法爾)로서 일어나게 하여 이전보다 뛰어나게 하는 희유하고도 기특한 위세이다.
위세원덕에는 다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화하기 어려운 이를 반드시 능히 교화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려운 질문에 답변하여 반드시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며,
셋째는 교법을 세워 반드시 출리(出離)하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악한 무리들을 반드시 능히 조복시키는 것이다.
색신원덕에도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로는 온갖 상(相)을 갖춘 것이며,
둘째로는 수호(隨好)를 갖춘 것이며,
셋째로는 큰 힘[大力]을 갖춘 것이며,39)
넷째로는 안으로는 신체의 골격이 견고하여 금강석보다 뛰어나며, 밖으로는 신비한 광명을 발하니, 그 밝기가 백천 개의 태양보다 더하다.
마지막으로 은원덕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3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와 생사를 영원히 해탈하게 하거나,
혹은 능히 선취(인ㆍ천취)와 3승(성문ㆍ연각ㆍ불)으로 안치(安置)하는 것을 말한다.
여래의 원덕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이상과 같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으로 분석할 경우 가이없는 무변(無邊)의 원덕이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불세존만이 능히 아시고, 능히 설하실 수 있다.
요컨대 목숨[命行]을 연장하여 수많은 대겁의 아승기야를 거쳐야만 비로소 그것을 다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불세존의 색신이 수승하고도 기특한 무변의 인원덕(因圓德)과 과원덕(果圓德)과 은원덕(恩圓德)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마치 크나큰 보배의 산[大寶山]과 같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리석은 모든 범부들은 그 자신이 여러 덕을 결여하였기에 비록 이와 같은 부처가 지닌 공덕의 산과 그가 설한 법을 들었을지라도 능히 믿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을 듣고서 믿고 존중하는 마음을 낳으며, 그것은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되니,
그는 이 같은 한 찰나의 믿고 존중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가이없는 부정(不定)의 악업을 전멸(轉滅)하고, 수승한 인(人)ㆍ천(天)의 열반을 섭수하게 된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래는 세간에 출현하시자마자 모든 지자(智者)들의 무상(無上)의 복전(福田)이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의지하여서만 헛되지 않고, 참으로 애호할 만하며, 수승하고, 신속하며, 궁극적인 구경의 과보를 인기하여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도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처라는 복전(福田)에
조그마한 선이라도 능히 심는다면
처음에는 뛰어난 선취를 획득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열반을 획득하게 되리라.40)
여래의 불공(不共)의 공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공통되는 공덕]
이제 마땅히 다른 이와 공통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시 그 밖의 다른 불법이 있어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니
이를테면 무쟁과 원지와
무애해 등의 공덕이 바로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에게는 다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어 그 밖의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니,
이를테면 무쟁(無諍)과 원지(願智)와 무애해(無礙解)와 6통(通)과 4정려와 4무색정과 8등지(等至)와 3등지(等持)와 4무량(無量)과 8해탈과 8승처(勝處)와 10변처(遍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르니, 이를테면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이며, 6통과 4정려 등은 이생과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다.
[무쟁]
앞의 세 가지 공덕 가운데 먼저 ‘무쟁(araṇā)’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쟁은 세속지로서
뒤의 정려에 의지하여 부동(不動)이
세 주(洲)에서 일으키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욕계의 유사혹(有事惑)을 소연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쟁이란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아라한은 유정의 괴로움이 번뇌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고서 자기의 몸이 복전 중에 뛰어난 것임을 스스로 아는데, 다른 이의 번뇌가 다시 자기를 인연으로 하여 생겨날까 두려워하여 고의로 이와 같은 형태의 지(智)를 낳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에 의해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자기의 몸을 인연으로 하여서는 더 이상 탐(貪)ㆍ진(瞋) 등을 낳지 않게 하리라.’
즉 이러한 행(行)은 모든 유정류의 번뇌의 다툼[諍]을 능히 종식시키기 때문에 ‘무쟁’이라 이름한 것이다.41)
이러한 행은 다만 세속지를 자성으로 할 뿐이다.42)
제4정려를 그것의 소의지로 삼으니, 낙통행(樂通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43)
또한 부동(不動)의 응과(應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으며, 그 밖의 성자는 일으킬 수 없다.
즉 그 밖의 성자는 자신이 일으키는 번뇌도 능히 방지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의 몸에 생겨나는 번뇌를 능히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것은 오로지 세 주(洲)의 인취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이다.
또한 욕계의 미래 유사혹(有事惑)을 소연으로 하니,44) 다른 이의 번뇌가 자기를 인연으로 하여서는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온갖 무사혹(無事惑)을 막거나 방지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내적으로 일어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든 경계를 소연[總緣]으로 하기 때문이다.45)
무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원지(願智)]
다음으로 원지(願智, pariṇidhijñā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원지란 일체를 두루 소연으로 삼으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원지란] 먼저 원하고 나서 미묘한 지(智)를 일으키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알기 때문에 ‘원지’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지의 자성과 소의지와 종성과 소의신은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소연만이 다를 뿐으로, 이러한 지는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46)
그런데 비바사(毘婆沙)의 논자들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원지는 무색계를 능히 증지(證知, 직접지각)할 수 없으니, 그것의 인행(因行, 무색계에 들어가는 원인 즉 무색정)과 그 등류의 차별을 관찰하기 때문으로, 마치 농부의 무리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47)
모든 유정(불시해탈의 아라한)이 이러한 원지를 일으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같은 경계를 알기를 바라는 진실의 원을 발하고서 바로 변제(邊際)의 제4정려에 들어 가행를 닦고,
이로부터 무간에 선정에 들었을 때의 세력의 승렬(勝劣)에 따라 이전의 원력대로 정지(正智)를 인기하여 알고자 하였던 경계에 대해 모두 참답게 알게 되는 것이다.
원지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애해]
무애해(無礙解, pratisaṃvid)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애해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이 그것이다.
이는 명(名)과 뜻과 언설과 도(道)로서
물러남이 없는 지(智)를 자성으로 하는데
‘법’과 ‘사’는 오로지 세속지로
다섯 가지와 두 가지를 소의지로 한다.
‘의’는 10지(智)와 여섯 지이고, ‘변’은 아홉 지로
그것들은 모두 일체의 지(地)를 소의로 하는데
다만 획득하기만 하면 반드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며
그 밖의 사실은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무애해를 모두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무애해(法無礙解)이며,
둘째는 의무애해(義無礙解)이며,
셋째는 사무애해(詞無礙解)이며,
넷째는 변무애해(辯無礙解)이다.48)
이러한 네 가지 무애해를 전체적으로 설하면, 그 순서대로 명(名)과 뜻[義]과 언설과 도(道)를 소연으로 하며, 퇴전(退轉)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智)를 자성으로 한다.49)
이를테면 물러남이 없는 지가 능전(能詮)의 법인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을 소연으로 하는 것을 첫 번째 법무애해라고 하며,50)
소전(所詮)의 뜻을 소연으로 하는 것을 두 번째 의무애해라고 하며,
모든 지방의 언사(言詞)를 소연으로 하는 것을 세 번째 사무애해라고 하며,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막힘이 없는 설(說)을 소연으로 하며, 아울러 자재의 정(定)과 혜(慧)의 두 가지 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을 네 번째 변무애해라고 한다.51)
이상은 무애해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설하면서 아울러 소연에 대해 밝힌 것이다.
이 중에서 ‘법’과 ‘사’의 두 가지 무애해는 오로지 세속지에 포섭될 뿐이니, 명신(名身) 등과 세간의 언사를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법무애해는 다섯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4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상지(즉 무색계)에는 ‘명’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무애해는 오로지 두 가지 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가 바로 그것으로, 상지(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과 사(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애해는 10지(智)와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된다.
즉 제법을 일컬어 모두 ‘뜻[義, artha]’이라고 할 경우 의무애해는 10지에 포섭되지만,
오로지 열반 만을 ‘뜻’이라고 하는 경우 의무애해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변무애해는 이를테면 오로지 멸지를 제외한 아홉 가지 지에 포섭되니, 언설과 도(道, 정ㆍ혜의 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무애해는 일체의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 내지 유정지에 의지하는 것으로, 변무애해는 언설과 도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소연으로 삼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설족론』에서는 이 네 가지 무애해를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名)ㆍ구(句)ㆍ문(文)과,
이것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所詮)의 ‘뜻’과,
이러한 뜻의 단수[一]ㆍ양수[二]ㆍ복수[多]와 남성ㆍ여성 등의 언사의 차별과,
이러한 언사의 막힘 없는 설과 그 소의가 되는 도를 소연으로 하는 물러남이 없는 지에 대해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의 무애해라는 명칭을 건립하였다.”52)
즉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네 종류 무애해의 순서를 그같이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사(詞)란 이를테면 언사에 대한 일체의 훈석(訓釋, 어원적 설명, nirvacanaṃ)의 언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변애(變礙)를 지녔기 때문에 색 등이라 이름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53)
또한 변(辯)이란 이리저리 말함에 있어 어떠한 막힘이나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4무애해가 생겨나는 것은 순서대로 산계(算計)와 부처님의 말씀[佛語]과 성명(聲明)과 인명(因明)에 대해 익히는 것을 선행된 가행으로 삼았기 때문이니,
만약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해 아직 선교(善巧)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필시 무애해를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4)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일체의 무애해가 생겨나는 데에는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만이 능히 가행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무애해는 그 중 어 느 한 가지만 획득하더라도 필시 네 가지를 함께 획득하게 되니, 네 가지를 모두 갖추지 않고서는 그것을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4무애해의 소연과 자성과 소의지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무쟁과 이와 같은 점에서 차별되지만, 종성(種姓)과 소의신의 경우는 무쟁에서 설한 바와 같다.55)
[변제정]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무쟁행(無諍行) 등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섯 지(智)는 변제정에 의해 획득되니
변제정은 여섯 가지로, 최후의 정려이며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고, 구경에 이르는 것으로
부처 이외의 성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쟁과 원지와 4무애해의 여섯 종류는 모두 변제정(邊際定)에 의해 획득된다.
변제정려의 본질[體]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중에서 사(詞)무애해를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변제를 더한 것이다.56)
사무애해는 비록 그것(변제정)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는 그 같은 정려(제4정려)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니, ‘변제’라고 하는 명칭은 다만 제4정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일체지(地)에 두루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성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변제’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57)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제4정려)을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정려를 올바로 닦고 배울 때에는 욕계의 마음으로부터 초정려에 들고 순서대로 순입(順入)하여 마침내 유정지에 이르며,
다시 유정지로부터 무소유처에 들고 순서대로 역입(逆入)하여 마침내 욕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욕계로부터 순서대로 순입하여 [무소유처에 이르고] 내지는 제4정려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일체지에 두루 수순하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증성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제4정려를 수습할 때만 하품으로부터 중품에 이르고, 중품으로부터 상품에 이르니,
이와 같은 세 품류를 다시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 상상품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58)
[제4정려는] 바로 이와 같은 정려이기 때문에 ‘변제’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여기서 ‘변(anta)’이라는 말은 더 이상 뛰어넘을 것이 없다[無越]는 뜻을 나타내는데,
수승한 것으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koṭi)’라고 하는 말은 종류[類]의 뜻이나 궁극[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서, 4제(際)나 실제(實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59)
이상에서 설한 여섯 가지 종류의 공덕은 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성자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염득이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염오를 떠날 때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0)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염오를 떠날 때에도 역시 이를 획득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모든 공덕은 처음으로 진지를 일으킬 때 획득된다.
즉 그 때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공덕을 단박에 획득하며, 그 후에는 원하는 대로 능히 인기하여 현전시키는 것으로, 가행에 의한 것이 아니니, 불세존은 일체의 법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설한 세 가지 공덕(무쟁ㆍ원지ㆍ4무애해)은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부처의 공덕으로, 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신통]
이제 바야흐로 범부와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인 신통[通]에 대해서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신경(神境)과 천안ㆍ천이ㆍ타심과
숙주와 누진통이 바로 그것으로
해탈도와 혜(慧)에 포섭된다.
네 신통은 세속지, 타심통은 다섯 지
누진통은 10력(力)의 경우와 동일하고,
다섯 신통은 4정려에 의지하며
자지와 하지를 경계로 삼을 뿐이다.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각기
2천ㆍ3천ㆍ무수한 세계에서 신통을 행하며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자는 가행에 의해
일찍이 닦은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한다.
염주의 경우, 처음 세 신통은 신(身)이고
타심통은 세 염주, 나머지는 4념주이며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이고
나머지 네 신통은 오로지 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통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이며,
둘째는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이며,
셋째는 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이며,
넷째는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이며,
다섯째는 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이며,
여섯째는 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이다.61)
비록 이러한 여섯 신통 중에서 여섯 번째 신통은 오로지 성자만의 공덕이라 할지라도 앞의 다섯 가지는 이생도 역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 특징[總相]에 의거하여 이생에게도 역시 공통되는 공덕이라고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신통은 해탈도에 포섭되며,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사문과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해탈도’라고 하는 말은 장애에서 벗어났다[出障]는 뜻을 나타낸다.62)
신경통 등의 네 가지 신통(타심통과 누진통을 제외한 네 가지)은 오로지 세속지에 포섭되며,
타심통은 다섯 지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누진통의 경우는 10력(力)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때에는 여섯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때에는 열 가지 지에 포섭되기도 한다.63)
이에 따라 누진지증통은 일체지(地)에 의지하고, 일체의 경계를 소연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셈이다.
그리고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네 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무색정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앞의 세 가지 신통은 각기 개별적으로 색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며,
타심통을 닦을 때에는 색을 방편[門]으로 삼기 때문이며,
숙주통을 닦을 때에는 점차로 분위(分位)의 차별을 기억하여 생각함으로서 비로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숙주통을] 성취할 때에는 처소와 종성 등을 능히 소연으로 삼기 때문으로, [앞의 다섯 신통이] 무색정의 경지에 의지할 경우 이와 같은 능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64)
즉 온갖 유정으로서 타심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의 두 가지 상이 전후로 변이하고 전전(展轉)하여 서로를 따르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후 다시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니,
이에 따라 가행이 점차로 성취될 수 있으며, 성취하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음과 온갖 색신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의 마음 등에 대해 능히 참답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온갖 유정으로서 숙주통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바로 전찰나에 멸한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점차 다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생의 분위(分位)로서 이전(성년)과 그 이전(소년)의 차별을 관찰하여 결생(結生)할 때의 마음에 이르고, 나아가 중유 전의 1찰나를 능히 기억하여 알면,
이를 일컬어 자신의 숙주통의 가행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니, 다른 이의 숙주를 기억하기 위한 가행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이 처음으로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순서대로 알지만,
자주 익혀서 성취될 때에는 역시 능히 순서를 뛰어넘어 기억할 수 있다.
또한 기억된 모든 일은 요컨대 일찍이 영납(領納)된 것으로서, 정거천(淨居天)을 기억하는 자는 옛날에 일찍이 그것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65)
또한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이곳에 태어난 자는 처음에는 다른 이의 상속신에 의지하여 이러한 신통(무색계에 관한 숙주통)을 일으키며,66) 그 밖의 신통은 역시 자상속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통 등 앞의 세 가지 신통을 닦을 때에는 가벼움[輕]과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행으로 삼으며, 그것이 성취되고 나서는 자유자재로 응하는 바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갖 무색정은 관(觀)이 감소하고 지(止)가 증대하지만, 다섯 가지 신통은 필시 ‘지’와 ‘관’이 균등한 경지(즉 4정려)에 의지하니, [그래서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미지정 등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셈이다.67)
이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의 경계는 오로지 자지와 하지뿐이다.
바야흐로 신경통과 같은 것은 그것이 어떤 경지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든 자지와 하지에서만 가고 변화하는 것이 자재할 뿐 상지에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네 가지 신통도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무색계의 타심과 숙주를 취하여 두 가지 신통의 경계로 삼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다섯 가지 신통은 작용하는 세계의 경계에 넓고 좁음이 있어 온갖 성자의 그것이 동일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위대한 성문과 인각유와 대각(大覺)이 지극하지 않게 작의할 경우 순서대로 능히 1천과 2천과 3천의 온갖 세계의 경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등의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만,
만약 지극하게 작의할 경우 순서대로 능히 2천과 3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세계에서 [가고 변화하는 작용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신통을, 설혹 수승한 힘과 맹리함을 가졌을지라도 무시(無始) 이래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하며,
만약 일찍이 닦아 익힌 자로서 뛰어난 힘을 갖지 않은 자나 [미래세의] 그러한 종류의 유정은 이염에 의해 획득하지만,
만약 지금 일어나 현전하고 있는 자라면 모두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 일체의 신통은 모두 가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염에 의해 획득된 것으로, 원하는 대로 현전한다.
6신통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신념주이니, 그것은 다만 색처(色處)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신경통은 외적인 네 가지 처(색ㆍ향ㆍ미ㆍ촉처)를 소연으로 하고,
천안통은 색처를 소연으로 하며, 천이통은 성처(聲處)를 소연으로 하는 것이다.68)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에서,
“사생지(死生智)는 유정류가 현신(現身) 중에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온갖 악행 등을 성취함에 따라 [당래 악취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고 설하였겠는가?69)
천안통이 능히 이 같은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신통의 권속으로서 성자의 몸[聖身]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별도의 수승한 지혜가 있어 이것이 능히 이와 같이 아는 것으로,
이러한 지혜는 바로 천안통의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과 합하여 ‘사생지’라고 하는 명칭으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타심지통은 세 가지 염주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수ㆍ심ㆍ법이 그것으로, 그것은 마음 등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숙주지통과 누진지통은 4념주에 포섭되니, 5온과 일체의 경계를 모두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70)
이러한 6신통 중에 천안통과 천이통은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러한 두 가지 신통의 본질은 바로 안식ㆍ이식과 상응하는 혜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4정려에 의지한다고 설한 것인가?71)
근(根)에 따라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다.
이를테면 소의지(所依止)인 안근과 이근은 4정려의 힘에 의해 인기되어 그 지(地)에 포섭되기 때문에 4정려지에 의지하는 것이다.
즉 신통이 [그러한 지에 포섭되는] 근에 의지하기 때문에 ‘4정려에 의지한다’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는 신통인 무간도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신통인 무간도는 4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72)
그리고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 신통의 성질은 모두 선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품류족론』에서,
“신통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바로 선성의 혜이다”고 말한 것인가?73)
그것은 대개의 경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거나 혹은 뛰어난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74)
[3명]
예컨대 계경에서는 “무학의 3명(明, vidyā)이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신통 중의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5ㆍ제2ㆍ제6의 신통이 ‘명’이니
3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으로
뒤의 명은 진실이고 두 가지는 가설인데
유학의 경우는 어리석음이 있어 ‘명’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3명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이며,
둘째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이며,
셋째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인데,
순서대로 무학위에 포섭되는 다섯 번째와 두 번째와 여섯 번째의 신통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는다.
즉 6신통 중에서 유독 세 종류의 신통만을 ‘명’이라 이름하는 것은 3제(際, 3세를 말함)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숙주지통은 전제(前際, 과거)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사생지통은 후제(後際, 미래)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며,
누진지통은 중제(中際, 현재)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3명을 모두 ‘무학의 명’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은, 그것들은 다 같이 무학의 소의신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제일 마지막 명(누진지증명)이 진실(眞實)한 것이라고 할 만하니,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두 가지 명은 그 본질이 오로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기 때문에 가설(假說)일 뿐이다.75)
나아가 유학의 소의신 중에는 어리석음[愚暗]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앞의 두 가지 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비록 잠시동안 어리석음을 조복하고 소멸하는 일이 있지라도 그 후에 다시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을 ‘명’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3시도]
계경에서는 ‘세 종류의 시도(示導, prātihārya)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6신통 중의 무엇을 본질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1ㆍ제4ㆍ제6의 신통이 시도(示導)로서
교계시도(敎誡示導)가 가장 존귀하니
결정코 신통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시도란,
첫째는 신변시도(神變示導)이고,
둘째는 기심시도(記心示導)이며,
셋째는 교계시도(敎誡示導)이니,
그 순서대로 6신통 중의 첫 번째와 네 번째와 여섯 번째 신통을 자성으로 한다.76)
즉 오로지 이러한 세 종류의 신통만이 교화될 중생을 인도하여 처음으로 발심하게 하는 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혹은 이는 능히 정법을 싫어하여 등지는 이나 처중자(處中者,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자)들을 인도하여 발심하게 하기 때문으로,
능히 [신통을] 나타내어 능히 [중생을] 인도하기 때문에 ‘시도(示導)’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77)
또한 오로지 이러한 세 가지 신통만이 부처님 법에 귀복(歸伏), 신애(信受), 수행하게 하기 때문에 ‘시도(示導)’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나머지 세 가지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세 가지 시도 가운데 교계시도가 가장 존귀하니,
오로지 이것만이 결정코 신통(즉 제6 누진통)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며,
결정코 능히 다른 이의 이익과 안락[利樂, 즉 열반]의 과보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시도는 주술 따위로도 역시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신통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시도가 아니다.
예컨대 건타리(健馱梨, gāndhārī)라고 일컫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허공을 자유자재로 솟구쳐 오를 수 있다.
또한 이찰니(伊刹尼, īkṣanika)라고 하는 주술이 있어 이것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바로 결정적인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시도는 단지 다른 이로 하여금 잠시 마음을 돌리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뛰어난 과보를 인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계시도는 역시 또한 결정코 다른 이로 하여금 당래의 이익과 안락의 과보를 인기하게 하니, 능히 참다운 방편으로써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교계시도가 가장 수승하며, 그 밖의 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신경(神境)]
그렇다면 ‘신경(神境)’이라는 두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의 본질은 말하자면 등지(等持)이고
‘경’은 ‘가는 것’과 ‘변화하는 것’ 두 가지이니
가는 것의 세 가지 중 의세(意勢)는 부처에 한정되며
운신(運身)과 승해(勝解)는 그 밖의 유정과도 통한다.
변화는 두 가지로, 욕계와 색계의 그것인데
네 가지와 두 가지 외처(外處)를 자성으로 한다.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변화이다.78)
논하여 말하겠다.
비바사(毘婆沙)에서 설한 이치에 의하면,
‘신(神)’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뛰어난 등지(等持)에 근거한 것으로,79) 이 같은 뛰어난 등지에 의해 능히 신통한 변화의 사업[神變事]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신통한 변화의 사업을 설하여 ‘경(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여기(신통한 변화의 사업인 ‘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이 그것이다.
‘가는 것’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운신(運身)으로, 마치 나는 새처럼 허공을 타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승해(勝解)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이라고 사유하면 바로 신속하게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의세(意勢)로서, 지극히 먼 곳이라도 마음을 일으켜 그것을 소연으로 삼을 때 몸은 곧장 능히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신통의 세력[勢]은 뜻[意]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세’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가는 것’ 가운데 의세는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한정된 것이며, 운신과 승해는 그 밖의 승(乘)과도 역시 통하는 것이다.
즉 우리 세존께서는 신통이 신속하여 먼 곳이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이르실 수 있으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모든 부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의세의 행(行)은 오로지 부처님에게만 존재하지만 승해는 그 밖의 뭇 성자들에게도 존재하며, 운신은 아울러 이생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계에서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욕계에서의 변화라면, 그것은 성처(聲處)를 제외한 외적인 네 처(색ㆍ향ㆍ미ㆍ촉 처)의 변화이며,
만약 색계에서의 변화라면 오로지 색처와 촉처의 두 가지 변화만이 있을 뿐이니, 색계 중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두 세계에서의 변화에는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자기 몸에 속한 변화와 다른 이의 몸에 속한 변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욕계에 있을 때의 변화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며,
색계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모두 여덟 가지의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80)
만약 색계에 태어나 머물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하였다면 어찌 향처와 미처를 성취하게 되는 과실을 범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마치 옷과 장엄구를 만들더라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계에 있으면서는 오로지 두 가지 처(색ㆍ촉처)만을 변화시킬 뿐이다”고 하였다.81)
그렇다면 이 같은 변화의 사업을 화작(化作)하는 것이 바로 신통(즉 신경통)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신통의 과보이다.
이것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것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선정의 결과인 두 가지로부터 다섯 가지까지로서
소의가 되는 선정처럼 획득되는데
정정(淨定)과 자류(自類)에서 생겨나고, 두 가지를 낳는다.
변화의 사업은 자지에 의해 일어나고
변화된 이의 말은 모두 자지와 하지에 의하며
변화된 이의 몸과 변화의 주인공은 반드시
말을 함께하지만, 부처는 그렇지 않다.
먼저 원(願)을 세워 몸을 남겨두고
그 후 다른 마음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며
죽어서도 견실의 몸을 남기는 일이 있지만
어떤 이는 남기는 일이 없다고 설한다.
초심자는 여러 마음으로 한 가지 변화를 낳고
성만위에 이른 자는 이와는 반대인데
수득(修得)의 변화심은 무기에 포섭되며
그 밖에 획득된 것[生得]은 3성과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통의 과보로서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能化心]의 힘이 능히 일체의 변화의 사업을 낳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에는 열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근본 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초정려에 의해 두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첫째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다.
제2정려에 의해 세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두 종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여기에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제3정려에 의해 네 가지 변화심이,
제4정려에 의해 다섯 가지 변화심이 생겨나니, 각각 자지와 하지에 포섭되는 그것으로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신경통의 과보로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自地)와 상지(上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필시 하지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여 상지의 과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정려 등의 과보인 하지의 변화심은 초정려 등의 과보인 상지의 변화심에 비해 소의와 작용[行]으로 볼 때 역시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다.82)
즉 정려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심도 역시 그러하니, 과보(변화심)와 소의(정려)는 동시에 획득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려로부터 그 과보인 변화심을 일으키게 되면, 이러한 마음으로부터는 필시 바로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다.
즉 청정한 선정[淨定, 즉 정정려]으로부터 첫 찰나의 변화심을 일으키면,
이러한 마음의 후후찰나의 마음은 자신과 동류[自類]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이러한 마음의 전전찰나의 마음은 자신과 동류의 마음을 낳으며,
최후의 변화심은 다시 청정한 선정을 낳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심은 두 가지(정려와 전찰나의 변화심)로부터 생겨나며,
능히 두 가지 마음(동류의 마음과 청정한 선정심)을 낳는 것으로,
선정의 과보로서 무기성에 포섭되는 마음(변화심)이 다시 선정에 들지 않고서 바로 출관하는 일은 없으니,
마치 문을 통해 들어간 자는 다시 문을 통해 나오는 것과 같다.83)
또한 변화되는 모든 사업[所化事]은 자지의 변화심에 의한 것으로, 다른 지의 변화심은 그 밖의 다른 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84)
또한 변화된 이에 의해 발성된 말은 자지와 하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변화인이 말하였을 경우, 이 말은 필시 자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그보다 상지에 의해 생겨난 변화인의 말은 초정려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니,
상지(제2정려 이상의 경지)에는 스스로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5)
또한 어떤 한 변화의 주인공[化主]이 몸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때에는, 요컨대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비로소 말하니, 변화된 이의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言音詮表]는 모두 다 주인공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변화의 주인공이 말할 때
변화된 온갖 몸도 모두 말하며
어떤 변화의 주인공이 침묵할 경우
변화된 온갖 몸도 역시 그러하다.86)
그러나 이는 다만 그 밖의 유정에 대해 설한 것일 뿐, 부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부처의 온갖 선정의 힘은 가장 자재하기 때문에 변화된 이의 말과 동시가 아닐 수 있으며,
말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바도 역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말을 발하려는 마음[發語心]을 일으킬 때에는 변화심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변화된 몸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87)
먼저 원력(願力)에 의해 변화된 몸을 남겨 두고, 그 후 [변화심과는] 다른 마음(즉 發語心)을 일으켜 어표업을 낳기 때문에 비록 능히 변화하고 말을 발하려는 두 가지 마음이 구기하지 않을지라도 변화신에 의해서도 역시 말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오로지 변화하는 주인공의 목숨이 현재할 때만 능히 변화된 몸을 남기어 오랫동안 머물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마친 후에 이르기까지 지속하게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존자 대가섭파(大迦葉波, Mahākāśyapa)가 골쇄(骨鎖)의 몸을 남겨 두어 자존(慈尊, 慈氏世尊, 즉 미륵불을 말함)의 세상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88) 오로지 견실의 몸[堅實體, 즉 뼈]만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그래서 가섭파는 살 따위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필시 원력(변화의 원력)만으로는 능히 사후에 이르기까지 몸을 남겨 둘 수 없으며, 음광(飮光, 가섭파의 의역어)이 골쇄의 몸을 남기게 된 것은 여러 천신이 지켜 주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자[初習業者]는 다수의 변화심에 의해 비로소 능히 한 가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익힌 것이 성취되어 원만하게 된 자[習成滿者]는 한 찰나의 변화심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대로 많고 적은 변화의 사업을 일으킨다.89)
이와 같은 열네 가지의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은 모두 수행에 의한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修得]으로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는 바로 통과무기(通果無記)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그 밖에 태어나면서부터 획득[生得]된 능히 변화를 낳은 마음은 선과 불선과 무기성에 포섭된다. 예컨대 천룡(天龍) 등의 변화심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으로, 그들도 역시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데, 다만 열 가지 색처 중 성처(聲處)를 제외한 아홉 가지를 변화시킨다.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능히 근(根)을 변화시키는 일은 없지만, 그러나 변화되는 대상은 근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아홉 가지 색처를 변화시킨다고 말해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90)
천안통과 천이통이라는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천안과 천이는 근(根)으로서
바로 선정의 경지의 청정한 색이니
항상 동분이면서 결함이 없어
감추어지고 작고 멀리 있는 것 등을 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 말은 오로지 하늘[天]의 안근과 이근에 근거한 것으로, 바로 4정려에 의해 생겨난 정색(淨色)이다.
이를테면 빛과 소리를 인연으로 하여 가행을 닦았기 때문에 4정려에 의해 안근과 이근의 후변(後邊)에서 그러한 경지의 미묘한 대종소조인 정색의 안(眼)과 이(耳)의 두 근을 인기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니, 이를 천안통과 천이통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안근과 이근을 어째서 ‘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그 자체가 바로 ‘천’이니, 선정의 경지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91)
그런데 천안과 천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된 천안과 천이로서, 하늘에 태어나는 자의 그것을 말한다.92)
셋째는 유사한 천안과 천이[似天]로서, 이를테면 그 밖의 취(趣)에 태어난 자가 뛰어난 업 등에 의해 인기하여 능히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천안ㆍ천이와 유사한 경우를 말하니,
예컨대 장신보(藏臣寶)와 보살과 전륜왕과 온갖 용과 귀신, 그리고 중유 등의 그것과 같다.93)
그리고 수행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생에 걸쳐 항상 동분(同分)이니,94) 현재에 이르러 반드시 식(識)과 함께하며 능히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소(扶塵根, 즉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눈과 귀를 말함)를 필시 온전히 갖추었으며, 그것은 막히지도 않았고 어떠한 결함도 없으니,
마치 색계에 태어난 일체의 유정의 그것처럼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감추어진 것이나 지극히 미세하고 먼 곳 등 온갖 곳의 색과 소리를 능히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이와 같은 게송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육안(肉眼)에는 감추어져 있거나
작거나 멀리 있는 온갖 곳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작용이 없지만,
천안으로는 남김없이 모두 볼 수 있다.
앞에서 능히 변화를 낳는 마음에는 수행에 의해 획득된 것과 그 밖의 방식으로 획득된 것(즉 生得)의 차별이 있다고 논설하였는데,
신경지(神境智) 등의 다섯 가지의 획득에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역시 차별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닦아서, 태어나면서
주술로써, 약물로써, 업으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며
타심지는 닦아서, 태어나면서, 주술로써 성취되며,
또한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한 성취가 더해진다.
그 밖의 세 가지는 닦아서, 태어나면서, 업으로 성취되며
닦아서 획득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3성과 통하고
인취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 획득되는 것만이 없으며
지옥에서는 처음 태어날 때만 [타심과 숙주를] 능히 안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경지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修得]이며,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生得]이며,
셋째는 주술로써 성취되는 것[呪成]이며,
넷째는 약물로써 성취되는 것[藥成]이며,
다섯째는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業成]으로서, 만타다왕(曼馱多王, Maṅdhātṛ, 구역은 頂生王, 성장하여 금륜왕이 된다고 함)이나 중유 등의 온갖 신경지는 바로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타심지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으며,
여기에 점상(占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천안ㆍ천이ㆍ숙주지)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과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모두 선 등과 통하지만, 그것은 선정의 과보가 아니기 때문에 ‘신통’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또한 인취 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밖의 것은 모두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본성(本性)의 생(즉 숙세에서의 생)에 대한 기억[念]은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에 포섭된다.
지옥취에서 처음으로 생을 받을 때에는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획득하는 타심지와 숙주지로써 다른 이의 마음 따위와 과거의 생을 알지만,
고수(苦受)에 핍박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아는 일이 없다.
그 밖의 취에 태어나는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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