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 Ones/Cliff Richard
영국령의 인도에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 8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철이 들어서는 영국에서 드립터즈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되죠.그와 함께 The Shadows라는 밴드도 Cliff와 함께 유명세를 톡톡히 냈습니다.1958년 Moving Doll을 계기로 Cliff가 크게 히트를 하게 되었습니다.참고로 Cliff Richard의 본명은 Hank Marvin입니다
The Young Ones
The young ones,
darling we"re the young onesAnd the young onesshouldn't be afraid to live,love while the flame is strongCause we may not bethe young ones very longTomorrow, why wait until tomorrowCause tomorrow sometimes never comesSo love me there's song to be sungAnd best time is to sing itwhile we're youngOnce in every life time
comes a love like thisOh, I need you, you need meOh, my darling, can't you seeThe young dreams should be dreams togetherAnd the young hearts shouldn't be afraidAnd some day when the years have flownDarling, then we'll teachthe young ones of our own
젊은이들이여,우리는 젊어요젊은 사람이라면 젊음의 불꽃이강하게 타오르는 동안은 사는 것을,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요왜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오래 젊음을유지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요내일, 왜 내일까지 기다리나요왜냐하면 내일은 때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사랑해 주세요 불러야 할 노래가 있어요그 노래를 부르기에 가장 좋은 때는우리가 젊었을 때입니다일생에 한 번 이런 황홀한사랑이 찾아와요아, 난 그대가 필요해요, 그대에겐 내가필요하고. 아, 내 사랑. 모르시겠어요우리 젊은 꿈들을 함께 합시다젊은 가슴은 두려워해서는 안 되요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그대여, 그 땐 우리 아이들을가르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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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의 도가니'가 된 클리프의 내한 공연
Cliff Richard(1940년생)의내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다.
전날 공연을 TV가 중계해서인지 이대 앞에는 수천의 관중이 몰렸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 강당
유리창이 깨져 사람들이 베이고 넘어져 다치는 소동이 일어났다.
경찰은 서둘러 출입문을 막았다.
표를 가지고도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여학생들은 그런 중에도 "클리프 오빠, 사랑해!" 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공연장 안은 더 심했다. 뜨거운 흥분과 광기에 가까운 소란이
무대와 객석을 후끈후끈 달구었다.
Cliff Richard가 최고의 히트곡 'The young ones'를 부르자
무대 위로 꽃다발 손수건 선물상자들이
던져졌다. 관객 전체가 기성을 지르거나 노래를 따라 불러
정작 가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흐느끼다 못해 통곡하는 여학생이 넘쳐났고
기절해 실려 나가는 사람도 생겼다.
몇몇 남성은 "시끄러워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며
의자를 쾅쾅 치고 여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거의 주먹다짐 수준이었다.
레퍼토리가 'Summer holiday' 'Devil woman'을 거쳐
당시 젊은이들이 거의 가사를 외다시피 한
'Visions(of you)' 'Evergreen tree'로 넘어가도
가수의 목소리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공연 초반 Cliff Richard는 청중들에게 "제발, 제발,
노래를 할 수 있게 조용히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함성 탓에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나중엔 그런 호소마저
포기했다. 아예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려놓고 자신이
오히려 청중의 노래를 듣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무대에는 여전히 손수건과 사진 수첩 머리핀 등
온갖 잡동사니 선물들이 쉼 없이 던져졌다.
이들 물건 가운데는 여학생들이 입고와 벗어던진
팬티도 있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나중에 선물을 모두 수거, 점검한 결과 팬티 등
속옷은 한 점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한마디로 그날 이대 강당은 안과 밖 할 것 없이
완전히 집단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런 소동은 사실 CR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예견됐다.
1969년 10월16일자 매일경제는 입국장 소동을 이렇게 전했다.
"클리프 리처드군(29세)일행이 내한한 15일 낮
김포공항은 2백여 명의 단발머리 소녀 팬들이 모여들어
수라장....리처드 군이 트랩을 내려서자 그의 초상화를 든
앳된 소녀 팬들은 발을 구르며 일제 기성을
질러 이채....리처드 군이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소녀들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흐느끼는 등
광태(狂態)를 보여 기동경찰관들이 등장, 겨우 진압.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공항 손님들,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미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
그런데 당시의 팬클럽은 Cliff Richard의 내한에 맞춰
즉석 결성된 게 아니었다.
내한공연이 있기 5년 전인 64년 12월
스카라 극장에서는 CR주연 영화 'The young ones'를 상영했었다.
이때 그에 감명 받은 여학생들이 CFC(Cliff Fan Club)
혹은 CRFC(Cliff Richard Fan Club)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 CR의 내한공연은 사실
이들의 노력으로 성사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 팬클럽은 외국의 팬클럽 및 영국 CR측과 연락해
최신 음반을 들여왔고 그걸 최동욱 이종환 피세영 등
라디오방송 디제이들에게 보내 한국에 CR노래가
더 많이 퍼지도록 애를 썼다. 물론 CR(Cliff Richard)에게
끈질기게 내한공연도 요청했다. 소리만 지르는
오빠부대가 아니라 진짜 열광적인 팬이었던 셈이다.
당시 공연 입장료는 특A석 2,000원, A석 1,700원부터 D석 800원까지 5종류였다.
버스 값이 10원, 연탄 1장에 15원, 해장국과 자장면이 50원,
설렁탕이 90원 하던 때니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도 표는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구입자는 대부분 여고, 여대생. 이렇게 CR의 광(狂)팬이 많다는
걸 여고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시내 많은 여학교가 그의 방한일자에 맞춰 중간고사를 실시했다.
일부 학교는 아예 학생들의 조기 하교를 막았다.
생활지도 교사를 공항과 공연장에 보내 학생 동태를 파악한
학교도 많았다.
소녀 오빠부대에 충격받은 어른들은…
이른바 오빠부대의 기성(奇聲)과 소란을 서구 젊은이들의
철없는 짓거리로만 보아왔던 기성세대는
'CR 사태'에 넋을 잃었다. 당시 '어른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는
한 달 뒤 Y시민논단이 이 현상을
분석하는 토론회를 연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10대와 클리프 리처드' 제목의 토론회에서
서울 의대 정신과 한동세 교수는 "우리사회 대로의
특성을 지닌 서울에서 그처럼 광란하는 10대의 반응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면서 서양의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작가 송정숙 씨는 "CR의 팝송이
불건전하지 않은 만큼 울부짖는 우리 10대의 사고나 행동이
불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10대들만이 지니고 있는 감정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분출구를 찾아 폭발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기성세대가 10대의 '그 무엇'을 이해하여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지, 우범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찬반논쟁은 급기야 새로운 '청년문화'의 태동을
예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시민사회와 문화계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정부는 달랐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고 자기들의 우상을 좇아
'날뛰는' 10대들에게 더 이상 자극의 원천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72년 CR이 다시 한국을
찾아 공연하려 했으나 정부는 일거에 이를 거부했다.
싱가포르가 그의 비틀즈 스타일 장발을 문제 삼았듯
한국도 그의 장발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었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의 엄격한 지시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고고 춤 등 '무분별한 외래 퇴폐풍조'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설 때였다.
결국 69년 이후 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 우상 팝스타의 내한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샹송가수 살바토레 아다모의 공연이 70년대 후반에 두 차례 있었으나
오빠부대가 동원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사이 한국가요무대에도 차츰 오빠부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조용필 전영록 최성수 구창모 윤수일
김범용 등의 공연장이나 녹화무대에는 10대 소녀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오빠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집은 물론, 동선을 따라다니며 팬덤을 과시했다.
그러던 80년 6월. 미국의 19살 '꽃미남'가수 레이프 가렛(Leif Garrett)의
내한공연이 남산 숭의 음악당에서
열렸다. 이때의 분위기는 CR공연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음악당 유리창이 깨졌고 화단의 꽃도 무수히
뽑혔다. 공연 때 그에게 바치기 위해 뽑은 것이었다.
객석에선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가는 여학생이 속출했다.
무대 위에는 온갖 물건이 다 던져졌다.
모든 걸 다 줘도 좋다는 뜻으로 던진 열쇠도 수북이 쌓였다.
청소년들의 아이돌 스타를 향한 도 넘은 열정에 어른들은 다시 진저리를 쳤고
정부는 해외 아티스트 공연을
불허했다. 그리고 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공연 때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까지 빚어졌다.
오빠부대의 원조 클리프 리처드는 2003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공연장인 잠실체육관에는 이미 반백이 된
여성 팬들이 몰려와 옛날처럼 환호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34년 만에 재공연을 하게 된 리처드도
"시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
1940년 10월 14일 인도의 럭크나우에서 해리 로저 웹(Harry Roger Webb)의 본명으로
태어난 클리프 리차드는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1957년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흑인 감성이 풍부했던 엘비스와달리 경쾌하고 팝 적인 느낌이 짙은 음악으로
'영국의 로큰롤 황제'로 등극했다.1963년 비틀스(Beatles)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리프 리차드는 브리티시 록의'절대 강자'였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1958년 'Move it'으로 시작한 히트 퍼레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40곡 이상을 영국
인기 차트에 등록시키며경이로운 행진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백 밴드 드리프터스(Drifters)는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보컬 그룹과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섀도우스(Shadows)로 바꾸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Serious Charge), (Summer Holiday), (The Young ones)처럼 젊은이들을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인기를 얻지 않았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그의 인기가 치솟자 영화 관계자들은 (Serious Charge), (Summer Holiday),
(The Young ones)처럼 젊은이들을소재로 한 상업적인 영화에 출연시켜
비상(飛上)하는 클리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내에서도 'Living doll', 'Visions','Constantly', 'Summer holiday', 'Congratulations',
그리고 그 유명한 'The young ones'등이확실하게 인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인기였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인기를 얻지 않았다. 1960년대 미국 음악계를 침공한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다.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자신의 백 보컬리스트 출신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 John)이 미국에서 대대적인성공하자
이것에 고무된 클리프는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인의구미에 맞는 노래들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1976년에 공개된 디스코 풍의 'Devil woman(6위)'이 처음으로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올랐고 1980년대 초반까지 'We don't talk anymore(7위)',
'Carrie(34위)','Dreaming(10위)', 'Little in love(17위)', 'Daddy's home(23위)',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올리비아 뉴튼 존과 호흡을 맞춘 영화 (제너두)의
삽입곡 'Suddenly(20위)' 같은 성인 취향의팝 사운드로 두 번째 전성기를 일구었다.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 이 3일은 우리나라의 척박했던 공연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된사건의 시간적 배경이다.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자발적인 팬클럽이 탄생했던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3회에 걸친 내한 공연,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과 조용한 환호성의 이율배반적인분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 공연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계기였다.
이제는 아주머니들이 된 예전의 소녀팬들을 위해 현재까지 공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클리프 리차드는
1995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중 음악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출처: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협의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영식(남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