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그곳에 가보면 안다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해안을 낀 작은 바다들이 소복소복 숨어있는 삼척. 경상도 경계에서 두타 청옥까지 거대한 백두대간 줄기를 잇는 곳. 그곳에 가면 자연이 지휘자다
길 그대로, 바다 그대로, 산 그대로 편집된 자연의 은유, 자연과 역사가 동굴이 소복소복 산재해 있는 거대하고도 작은 도시 삼척에서 마음먹은 만큼 자연을 비비고 비비리라
그곳에 가면 벗어라, 내려놓아라. 태양에, 바다에 그냥 나뒹굴어라. 겹겹이 산이고, 마을을 돌아서면 바다이고, 골골이 계곡이다. 자연의 울타리를 치고 나만의 레시피를 꺼내 버무리기만 하면 휴식이 된다. 강원도만의 청정하고도 예쁜 바다들이 그림엽서처럼 이어지는 곳, 저 태양이 나를 버리고 한적한 바다마을로 들어가라고, 산으로 들어가라 한다. 매일매일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바다에서, 안개처럼 내려앉은 녹음 속에서, 휴가라는 거대한 문장을 호출하라. 가만히 있어도 설렘이 공기처럼 흡수된다
섬에서
섬으로 가다
시간의 언어, 달력의 언어를 실감하는 계절이다 태양에 몸을 맡기고 몇백 년 파도에 깎여 몽돌이 되었을까, 나그네들이 쌓아 올린 돌탑에도 일몰이 순간에 찾아든다 천년만년 말이 없는 굴업도는 바다 위에 누워 있다 일식, 월식을 반복하면서 썩어 들어간 상처의 웅덩이 해식와(海蝕窪), 몇천 년 밀려온 파도 자국일까, 파도는 쉼 없이 육지의 몸으로 몰려와 출렁거린다 내 안에, 섬 안에, 나를 가두고 유유자적 그냥 몸을 맡기자
스며들고, 흐르고, 어디로든 물은 흐른다
썰물이 시작되고 돌에 붙은 산더미 같은 골뱅이
숨을 몰아쉰다
지금도 바다에는 인어공주들이
얼마나 많은 물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파종의 시간이 지나고
추수의 시간이 축제처럼 찾아오고,
추위가 엄습하는 시간이 스멀스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
섬을 돌고 돌아온 서해의 바람은 모성의 바람인가,
밀물 속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저 여인은 세월을 재촉하고 있다
그 꽃이
그 꽃이다
소나무 군락을 지나 바위산을 타고 덕적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비조봉에 올랐다. 동서남북 사면에 보석처럼 박혀 군도를 이룬 섬들이 해무에 섞여 조각처럼 지구로 솟았다. 일출은 신비로운 자연색을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듯 섬은 바다를 품고, 바다는 섬을 품고, 섬은 나무와 새 그리고 사람을 품고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산을 보고 똑같은 방향으로 바다를 보고 똑같은 바닷길로 배를 타고 나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 꽃이 그 꽃이고, 그 길이 그 길이고, 그 집이 그 집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오늘 만나는 사람들 내일 또 만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살아간다. 천천히 걸어도 컴퍼스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섬, 파도가 품었다 뿜어 놓은 갯벌, 구멍 사이사이로 호흡하는 바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 다시 물이 들어오면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건져 올린다. 이것이 섬이 만든 시간이고 일상이다.
섬에 사는 너의 이름
끝끝내 여름은 가을에 밀려나고,
태양 속에 만개했던 해당화들도
일제히 열매를 달고
들꽃 속에도 씨앗이 여물고
왕소사나무들 꽃다발처럼 군락을 이루고
게들이 작은 다리를 들고
초속으로 도로를 건너고 있다.
풀숲으로 들어간 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메뚜기, 방아깨비들 로드 킬 절대 금지
여기 섬에서는 벌레 하나 풀 하나
새 한 마리에도 명패가 붙어있다.
왕은점표범나비, 애기뿔소똥구리, 금방망이, 검은머리물떼새… 바다에는 작고 큰 섬들이 집보다 더 많고 떠 있고 섬에는 사람보다 새들이 더 많고 물고기가 더 많다.
울렁거리는 것들 2
명동성당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한 당신의 눈빛은 청년처럼 해맑았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손을 잡고 구월쯤에는 어성전에서 시 낭송회를 하자고 하셨던 말씀,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시인입니다. 당신은 나무 곁에서 살고 바다를 노래하고 기도했습니다. 노곡면 여삼리 장뇌삼 취재 건으로 연락했을 때 상세 설명서처럼 정확하고 명확하게 일갈하셨던 말씀, 장뇌삼 붉은 꽃처럼, 붉은 달처럼, 아직 생생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언어와 문장이 바랭이처럼 단단하고 달맞이꽃처럼 싱싱하게 곳곳에 스며들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평생 맞이한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나무들과 꽃들의 역사와 자연의 문장이 뜨겁던 여름처럼 울렁거립니다. 이제 가을이 오면, 다시 가을 문장을 기다리겠습니다.
*2024년 9월 20일,
(故)정연휘 시인 병문안 두타 시 낭송회를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