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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과 슬라브 족이 공존하는 곳,
동유럽과 중부 유럽, 중동을 잇는 관문. 아드리아 해의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 세계의 화약고.......
현직에 있을 때 3주 장기 근속 휴가를 얻어 전 유럽을 뛰어 다니다가 발칸 반도를 눈 앞에 두고도 시간이 없어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나는 밀렸던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발칸 반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의 절대 왕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유럽은 민족 주의 노선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제국 주의로 변질하게 된다.
열강들은 무력 침략으로 식민지를 지배하려는 정책을 펴서 아프리카 대륙은 이디오피아와 리비아 등
몇 나라만 제외하고는 모두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영국의 3C정책(케이프 타운, 카이로, 캘커타))이 독일의 3B 정책(비잔티움, 바그다드, 베를린을 잇는 라인) 을 방해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이 둘이 언젠가는 맞부딪히게 될 일촉 즉발의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 베르크 소피아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피살된다. 1914년 6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1914년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선전 포고.
7월 29일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침공.
러시아, 곧 바로 군대 동원 세르비아 지원.
독일, 기다렸다는 듯 오스트리아 지원.
영국, 더 이상 수습 불가 판단, 독일의 주도권 막기 위해 전쟁에 동참.
연합군(영국, 프랑스, 러시아)
동맹국(오스트리아, 독일, 터키)
900만 명이 전사하는 세계제 1차 대전.
1918년 독일의 항복 선언.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은 식민지 모두 뺏긴다. 그리고 1,320 억 독일 마르크의 엄청난 배상금도 물게 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은 생제르맹 조약으로 국토는 10/1로 줄어 들게 된다.
발칸 반도로 가는 길목, 독일 프랑크 프루트 공항에 내린 나는 체코 국경 가까운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아침 산책길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담아 보았다.
다음날, 체코 관광길에 나섰다.
체코의 바츨라프 광장, 건국 영웅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騎馬像) 너머로 국립 박물관 건물에 반가운 글자들이 내 눈을 확 끌었다.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십니까.
1968년,민주화를 부르짖는 군중에게 소련은 20만 군인을 동원해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실패로 끝났던 프라하의 봄.
1989년, 이 곳에서 바츨라프 하벨의 주도하에 공산 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체코 최초의 자유선거로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로 정권 교체를 성취했다고 해서 부드러운 천, 벨벳 혁명이라 불리어진다.
1991년 12/26 소비에트 선언.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쵸프 대통령 사임, 소련의 시스템 전권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승계.
드디어 찾아 온 프라하의 봄. 동 구라파의 봄 .
아내와 함께 이' 프라하 Old car'를 타고서 체코의 구 시가지 관광을 했다.
그 유명한 카를 대교의 모습이다. 1406년, 보헤미아 왕 카를 4세 때 완공되었다.
수 많은 조형물들, 체코의 화려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카를 4세가 세운 프라하 카를 대학교의 모습이다.
1348년에 세워졌으니 조선 건국보다 44년 이전의 일이다.
이 대학이 저명 학자들의 무대였으며 서유럽 간 학문적 교류를 촉진했던 곳, 후스 주의의 요람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프라하 마리오네트 극장 앞, 돈 지오반니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돈 지오반니, 천하의 바람둥이, 2,065명의 여인들을 후렸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만들어져서 1797년 프라하에서 첫 공연되었다.
이 공연에서는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오페라의 제목은 '벌 받은 탕자'였다.
마리오네트는 손으로 움직이는 인형극을 말한다.
나는 몇 작품을 본 적 있는데 사람 대신 인형들이 연기(演技)하는 아주 색다른 맛이었다.
프라하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볼타바 강 , 낭만이 흐른다. 스메타나의 음악이 흐른다. 드보르작이 빛을 낸다. 밤이 되자 도시 전체가 황홀했다. 특히 언덕 위 왕궁에서 비치는 불빛은 장엄 그 자체였다.
이 곳은 후스 광장, 후스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있다.
얀 후스 (1372-1415) 체코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모교 교수, 총장 역임.
당시 보헤미아에 전파되었던 위클리프 교설을 받아들여 교회의 세속화, 면죄부 판매 비판.
교황 요한 23세는 1411년 그를 파문, 1415년에 화형(火刑)에 처한다.
마틴 루터(1517년)보다 백 년 앞서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사람, 얀 후스.
얀 후스의 죽음으로 1419년 혁명파와 반 혁명파의 전쟁 발발.
얀 후스의 추종자인 지슈카는 1420년 이 곳에 타보르를 건설, 후스 운동의 중심지로 만든다.
교황은 십자군을 동원하여 무려 5 차례나 이들을 공격했으나 개혁 공동체의 저승사자라 불리는 지슈카의 지략과 신앙의 결속력에 의해 5 연패를 당한다. 이것이 후스 전쟁이다.
개혁 공동체의 구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편에 서서 !
여기는 왕궁앞 광장. 오르골을 연주하면서 노래하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거리 악사를 찍으려면 돈을 줘야한다.
이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동전이 있을 때는 돈을 넣었지만 바쁠 때에는 그냥 찍은 적도 있다.
프라하 비트 대 성당의 모습이다.
1344년 카를 4세의 명령으로 착공, 신 고딕양식으로 첨탑의 높이만 100m에 이른다.
성당 내부에는 바츨라프 왕관과 보석이 보관되어 있으며 바츨라프 무덤과 지하에는 왕실의 무덤이 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명물 천문시계 모습이다.
09시-12시 정각을 알리면 오른쪽 해골이 줄을 당겨서 모래 시계를 뒤집으면서 12 사도들이 줄줄이 지나가고 황금 닭이 울고 나면 끝이 난다.
1490년 하누스라는 명장의 작품이다.
이렇게 거리 공연을 하려면 상당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관계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다고 한다.
잘 생긴 녀석이 노래까지 잘하다니.........Life is unfair !
여기는 체스키 크롬로프, 볼타바 강의 발원지.
체코에서 프라하 城 다음으로 큰 성이 있다.
13 세기에 건설되어 1992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재된 곳.
카메라만 들이대면 어디든 예쁜 그림 엽서가 된다.
에공 쉴레가 살던 집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이 곳에 온다기에 주민들이 처음에는 그를 엄청 반겼으나 이 유명한 화가가 나중에는 계속해서 젊은 여인들의 벗은 몸을 그리게 된다. 사람들은 풍기 문란의 이유로 이 집 앞에 몰려와서 '에공은 물러 가라'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이 '이발사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1605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아들 율리우스를 이 지역 영주로 임명했다. 영주는 이 동네 이발사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되고 그 녀와 결혼하였으나 의처증으로 인하여 아내를 이 강에 던져 죽게 만든다. 조현병 환자인 그는 자기의 살인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아 오라 주민을 윽박하게 되고, 범인을 잡을 때까지 하루 한 명씩 주민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딸의 아버지 이발사가 자기가 딸을 죽였노라 거짓 자백을 하여서 이 비극을 막게 된다.
후세 주민들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다리를 '이발사의 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1347년에 중국윈난 성에서부터 시작된 흑사병은 타슈겐트를 건너 흑해, 크림 반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수천 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내게 된다. 이 지역에서도 어김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딕 양식의 城에는 영주가 살고 있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 式 극장과 정원이 있다.
해마다 6월이면 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시민 절반 이상이 그 당시의 옷을 입고 거리 공연을 한다고 했다.
이곳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
쉔부른 궁전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리아 테레시아 (루이 16세의 장모, 마리 앙뚜아네트의 친정 엄마)의 화려한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시아의 초상화다.
합스부르크 집안 사람들의 특징인 주걱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다.
붓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능력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경 알프스의 보잘 것 없는 귀족 가문이었으나, 13세기 교황과 황제의 다툼의 시기에 황제를 지원함으로 득세하여 세력을 넓히게 되고, 정략 결혼 등으로 오스트리아는 물론 스페인까지 장악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 가문은 혈통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계속되는 근친 결혼, 이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으로 유전병,기형, 우울증, 자녀들의 조기 사망 등으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운이 좋은 나는 몇 가지 그림을 사진으로 담아올 수 있었다. 아무때나 개방도 사진 촬영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를 비롯하여 에공 쉴레 등 비엔나의 분리학파 화가들의 명작을 감상할 좋은 기회였다.
시내 관광에 나섰다. 국회 의사당, 빈大(빈-비엔나의 오스트리아식 발음) 성슈테판 성당 등을 불러보았다.
오래 전에 나는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교를 둘러보고 그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그에 비해 비엔나 대학의 외모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작은 학교에서 실력파들이 나오다니..........작지만 강한 나라 오스트리아.
Are you free tonight?
비엔나의 오페라 극장 앞에는 배우 복장을 한 사람들이 호객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구경 오라고, 표 있다고.
이들의 홍보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저녁에는 유럽 크루즈 여행객들과 함께 비엔나 음악회에 참석했다.
월츠의 본고장 비엔나.
요한 슈트라우스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와 노래, 월츠에다가 베토벤 소곡과 과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까지 모두 12 곡을 감상했다. 전쟁의 영웅 라데츠키 장군을 찬양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할 때에는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박수를 치면서 한껏 기분을 내었고, 주최측의 팬 서비스의 하나로 나는 나비 같은 발레리나에게 선택 되어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기쁨도 누렸다.
잊을 수 없는 비엔나의 밤이었다.
여기는 헝가리,
부다 패스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겔리리트 언덕.
가톨릭을 신봉하던 왕이 죽자 가톨릭을 반대하던 성난 시민들은 겔리리트 신부를 커다란 통 속에 집어넣고 이 언덕에서 강으로 굴러 넣어 죽였다. 이 후에 시민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겔리리트 언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볼 수 있게 총알 자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전쟁의 교훈을 삼으려고 한 것일까.
남한보다 조금 작은 땅에 1천만 정도의 인구.
노벨상 수상자가 18 명이나 되는 나라.
유럽 속의 아시아 헝가리.
터키와 함께 어쩐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느낌이 드는 마쟈르 族, 語順도 같고 엄마 아빠 등의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즐겨 먹는다는 전통음식 굴라쉬는 우리가 먹는 육개장이었다.
우리 기업이 90여 개나 진출해 있는 기회의 나라 헝가리.
세계 3대 야경에 속한다는 헝가리 다뉴브 강의 야경을 담아 보았다.
강 가 한켠에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나찌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의 신발들이 여기저기 조각되어 있었다.
특히 여자와 어린 아이들의 신발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곳은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서 세운 헝가리 영웅 광장이다.
이 곳에서 8명의 전쟁 영웅들과 헝가리 역사상 위대한 인물 14명의 동상을 볼 수 있다.
Hun(훈족)+ Gary (평원,땅)=HunGary,=유럽을 놀라게 한 훈족의 땅. 헝가리.
476년 서로마가 망하면서 민족의 대이동 시작.
훈족의 일파인 마자르 族은 896년 판노니아를 정복하고 나라를 세우지만 나중엔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 와서 이 나라를 150년이나 지배하고, 그 후에는 오스트리아가 이 지역을 300 년이나 다스린다.
그 다음에는 러시아가 또 차지하고......
여기는 자다르
달마시안의 옛중심지
아드리아 海에서 가장 강력했던 도시
베네치아와 트루크 양쪽에서 시달렸던 지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해방
유고 연방에 합병
1991년 유고 연방 해제로 크로아티아 영토에 편입
9세기에 지어진 원형 교회의 모습이다.
이 곳은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동굴.
세계에서 2번째 긴 동굴인데 길이가 5Km이다.
그 중 2Km만 공개되어 있다.
내부에는 전기 기관차가 복선으로 운행을 하고 있다.
때마침 합창단의 연주 실황을 즐길 수 있었다.여러 가지로 운이 좋은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신기한 듯 살펴보고 있다.
이곳은 바다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파도의 세기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 파이프에서 연중 무휴로 언제든지 진기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여기는 토르기르 섬, 한적한 해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어디서 왔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이 친구, 한국을 좋아하고 서울 올림픽을 너무 너무 좋아했단다.
I was there.
내가 그 때 거기서 근무했다고, 내가 서울 올림픽 주관방송 요원으로 잠실 주 경기장에서 근무했다고 했더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이 친구는 태권도를 좋아해서 지금도 하고 있단다.
그럼 우리가 한판 붙자. 다칠지 모르니까 Slow motion으로,
우리는 태권도를 함께 하면서 기쁨을 누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세계 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교회 지붕이 파괴되어서 복원할 때에는 아예 지붕을 없앤 곳이 있었다.
따로 음향 시설이 필요가 없었다. 동굴 이상의 완벽한 장소.
크로아티아 7 명의 성악가들이 내뿜는 아 카펠라의 화음, 내 생애 최고의 소리를 맛보았다.
아 ! 인간의 소리가 이렇게도 아름답구나.
이 곳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도시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성 슈테판 성당.
크로아티아
인구 431만에서 UFC의 이종격투기선수 미르코 크로캅과 세계적인 축구선수 다보르 수케르, ATP랭킹 3위까지 올랐던
테니스선수 마린 칠리치 등 스포츠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성 슈테판 성당은 1217년에 완공. 크로아티아의 보물로 불리어진다.
특이하게도 이 성당은 망루와 함께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적(敵)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도 신성한 성당만큼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염원에서였다고 한다.
이 곳은 교마 황제 디오클라시오누스의 별장.
디오클라시오누스, 로마 황제의 임기는 종신직이었지만 로마 역사상 임기 중도에 그만 둔 유일의 황제였다.
이 사람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다 이 별장으로 돌아와서 휴양 중에 죽었는데 시신은 성당 지하에 묻혔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인데 로마 유적 중 보존 상태가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별장 안에는 호텔도 있고 민간인도 9,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빨래가 널려 있어 사람 사는 맛이 있길래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로마 황제의 별장 앞에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우스 신부.
당시 성경이 히브리 어, 아람 어,헬라 語로 씌어 있어서 사람들은 신부(神父)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 어려운 언어들을 크로아티아 어로 번역한 신부였다고 한다. 컴퓨더도 없었던 시절, 대단한 그의 업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동상의 발을 만지면서 기도하면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내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
여기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모스타르.
20세기 최고의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1,425일간의 내전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
그 아픔을 기억이라도 하고 있을까. 네레트바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발칸 반도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이 수명을 다하게 되자 이 지역에 맹주로 있던 유고 연맹을 티토라는 사람이 접수한다.
이 사람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오랜동안 독재자로 군림했으나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발칸 반도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유고 지도부는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25만 군인을 동원하여서 12만 5천 명을 학살하고, 또 나치를 신봉하는 우스타샤 집단은 집시를 청소한다는 명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어떻게 세르비아 인들만 위대한가. 인간 백정으로 불리는 밀로세비치라는 사람은 30만 명을 무참히 죽인 인물이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전범으로 잡혔으나 죄값도 지불하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고 만다.
단골 식당 아저씨는 무슬림, 학교 선생님은 슬라브 족, 이발소 주인은 알바니아계, 수퍼 주인은 보스니아 인, 내 친한 친구는 크로아티아 인, 형의 절친은 나찌 신봉자,........
가톨릭, 러시아 정교, 이슬람 교.....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정치 성향, 분리 독립을 추구하고, 물고 물리는 상황,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는 관계. 다정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무서운 적들로 변해서 이들은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된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일어난 비극이다.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 그리고 인구의 1/4을 학살한 끔찍했던 캄보디아 내전,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섬.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별장이었단다.
해상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두브로 브니크, 아드리아 해안의 진주(眞珠)라고 불리는 곳.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붉은 산호를 진귀한 물건으로 속이고 주변 나라에 비싼 값으로 팔았다고 한다.
난공 불락의 城,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도 있지만 다분히 그 위용을 뽐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한다.
뒷산에 오르면 이 성벽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케이블 카 뷰 포인트보다 300여 미터 정도 내려온 이 곳이 명당이다.
이 곳은 슬로베니아의 플리트 비체.
알프스 산을 끼고 있어서 만년설로 인해 쾌적한 공기에다 사시사철 절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관광객이 넘친다.
돈이 넘친다.
Water is good, Air is better !
나는 블레드 성 한켠의 방에서 본 이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맞아, 물도 소중하지만 우리에게는 공기가 너무너무 소중하다.
알프스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서 살 수 있는 나라, 한 없이 부러웠다.
슬로베니아 최고의 관광지 블레드 호수.
호수의 길이 2,120m, 제일 깊은 곳은 30.6m
이 플레트나 라는 나룻배를 타야만 블레드 섬에 가고 올 수 있다.
블레드 섬. 줄리앙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
섬 가운데에는 오래된 성당이 있었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한단다.
나는 발칸 반도 여행을 하면서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었다.
여행을 마치는 날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제대로 된 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포탄을 쏘아대어야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올까?
인간의 탐욕이 불행을 낳는다.
서로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세상이 언제 돌아올까.
자유 평등 박애가 펼쳐지는 곳,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세상을 나는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