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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살차니건자소설경 제7권
8. 여래무과공덕품 ②[4]
[여래의 선정]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무엇이 여래의 선정인지요?”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사문 구담은 9차제정(次第定)이 있어 삼마발제(三摩拔提)에 드니,
첫째는 초선(初禪)이요, 둘째는 2선이요, 셋째는 3선이요, 넷째는 4선이요,
다섯째는 공처(空處)요, 여섯째는 식처(識處)요, 일곱째는 불용처(不用處)요, 여덟째는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요,
아홉째는 입멸진처(入滅盡處)입니다.
[초선]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모든 욕망과 삿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어 아직은 각(覺)과 관(觀)이 남아 있으며 생사를 여읜 기쁨과 즐거움 있는 초선행에 듭니다.
모든 욕망과 삿됨을 여읜다 함은, 이른바 초선에 상대하는 모든 애욕의 물든 법이니, 그 법을 멀리하는 것을 일컬어 모든 욕망을 여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삿되고 착하지 못한 법이란, 이른바 탐ㆍ진ㆍ치로 인해 살생 등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을 일으키니, 이것을 일컬어 착하지 못한 법이라 말하며,
그 법을 멀리하는 것을 일컬어 초선(初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각이 남아 있다[有覺]고 함은, 이른바 공각(共覺)인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각이겠습니까?
어떤 경계에 의지하여 초선을 수순할 때 이 각은 여러 종류가 있게 되니, 이른바 지각하고 사유하고 관찰하고 모으고 집중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觀)이겠습니까?
초선을 수순하는 각행(覺行)에서 사유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정(定)을 원하고 지각하는 이것을 일컬어 관이라 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행[厭行]과 저 각관(覺觀)에 의지하여 초선의 의지처[依]를 이루며,
싫어하는 행과 희락(喜樂)이 함께하여 초선의 행(行)을 이루니,
이것을 일컬어 기쁨 있고 즐거움 있음으로써 초선의 행에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이란, 이른바 수지하고 생각하여 보호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제2선]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초선에 머물러서 생사 없는 법의 세계[無生法忍]를 얻으며 위로 향하는 마음을 넓힙니다.
그러므로 초선에 들어가서는 생사 없는 세계를 구하며, 더욱 뛰어난 생사 없는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초선에 대해 견고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냅니다.
위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키어 초선을 버리고 제2선을 구하되, 제2선에 들려는 까닭에 초선의 각관심(覺觀心)을 여읩니다.
그 마음을 소멸하고 그 마음을 여의고 그 마음을 맑히고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 내적으로 청정해지고 마음이 한 곳으로 모이며,
각도 없고 관도 없이 오직 집중된 상태[定]에 의해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키는 제2 선행에 들어갑니다.
내적인 청정이라 함은, 이른바 제2 선법을 장해하는 것을 물리치고, 그 법을 고요히 하여 청정하고 흐림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내적인 청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곳에 모인다 함은, 이른바 저 초선의 온갖 사유 작용[覺觀]이 멸해 오로지 적정해진 상태[寂靜一味]입니다.
마치 큰 바다에 온갖 물이 흘러 들어가 모두가 한맛이 되어 짠맛이듯이,
제2선에 들어 초선의 일체의 사유 작용을 멸하고 오로지 적정해져 각도 없고 관도 없다면, 이 같은 상태를 일컬어 무각무관의 삼매를 얻었다 합니다.
그 삼매에 의하여 기쁨이 일어나니, 이른바 불ㆍ법ㆍ승에 대해 기쁜 마음을 냅니다. 그 기쁜 마음에 의하여 모든 착한 공덕은 자연히 충족됩니다.
[제3선]
저 무생법인을 더욱더 뛰어나게 하고 더욱더 빛나게 하고 더욱더 묘하게 하고 더욱더 유연하게 하기 위해 위로 향하려는 마음을 얻으니, 제2선 가운데서 머물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아 다시 뛰어나고 높은 제3선의 행을 구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낼 때 저 기쁜 마음이 제3선 및 무생법인을 가로막음을 알게 되니, 그러므로 기쁨의 행을 여의고 기억을 버리며, 지혜의 몸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받습니다.
이 즐거움을 성인 역시 설하고 또한 버리니, 제2선에서의 무생법인의 뛰어나고 높은 경지로 향하려는 마음에 의하여 저 기쁨과 즐거움을 여의고, 3선의 행에 들어가 삼매의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제4선]
저 기쁨에 대해 싫어하며 다음과 같은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 기쁨이 없는 즐거움[無喜樂]은 덧없는 즐거움이며, 다하고 소멸하는 법이며, 항상되고 영원하지 않고 항상되지 않으며,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며, 구경(究竟)의 즐거움이 아니다.’
이처럼 알고는 다시 뛰어난 무생법인의 위의 경지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 뛰어난 인[勝忍]의 위로 향하는 마음에 의하여 고락을 즐기지 않고 고락을 멀리하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없애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무관심에 의해 염(念)이 청정해진 제4선의 행에 들어갑니다.
제4선의 삼마발제에서 부드러운 마음ㆍ자재로운 마음ㆍ고요한 마음ㆍ광명의 마음ㆍ곧은 마음을 얻고는 그 일체의 즐거운 일을 버리어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줍니다.
그 중생들에게 평안한 즐거움을 줄 때에 곧 뛰어난 무생인의 광명이 눈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뛰어난 인(忍)의 광명이 눈앞에 드러나는 까닭에 행이 빨라지며 제4선의 뛰어나고 묘한 즐거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무변허공행]
저 즐거움을 멀리하고 무관심에 의해 염이 청정해지면 오직 그지없는 허공이 눈앞에 나타나니, 일체의 색상(色相)을 초월하고 일체의 유대상(有對相)을 소멸하며, 가지가지 형상을 생각지 않고 그지없는 허공을 알아서 무변허공행(無邊虛空行)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색(色)을 관찰하매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4대(大)요,
둘째는 의사대(依四大)입니다.
4대라 함은, 이른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요,
의사대라 함은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이니,
이처럼 크게 여덟 가지 색상(色相)이 있습니다.
그러한 색상을 여의고 그러한 색상이 없으며, 그 일체의 색상이 멸함을 일컬어 일체의 색상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이든지 색상이 있으면 그 법은 반드시 그와 대하는 장애상[礙相]이 있는 법이니, 그 일체의 유대상을 소멸하면 종종의 다른 상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아도 능히 저러한 종종의 다른 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종종의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오직 허공의 형상만을 보게 되니, 그러므로 그지없는 허공을 알아 곧 무변허공행에 들어갑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색상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변식처행]
그러한 무변허공삼매에 들어가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곧,
‘허공은 그지없고, 허공은 경계[際]가 없고, 허공은 기슭이 없다. 어떠한 법이든지 그지없는 까닭에 그 법에는 앞 경계ㆍ중간 경계ㆍ뒤 경계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온갖 법에 앞ㆍ중간ㆍ뒤의 경계가 없음을 관찰하여 이와 같은 삼매에 들면 곧 일체 중생에 대해 위대한 자심(慈心)을 일으키고 일체 법을 버리니, 평등한 지혜가 눈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저 무생법인에서 비로소 뛰어나게 나아가는 광명이 눈앞에 나타나니, 온갖 무변허공상을 초월해 현전에 그지없는 식(識)의 모습을 알아 무변식처행(無邊識處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마음을 일으키니,
‘이 그지없는 허공의 모습은 오직 식(識)의 분별일 따름이다.
이 같은 마음을 얻고 일체 법을 아는 것은 오직 식의 모습[識相]이니, 이 식은 한량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무소유소처행]
이와 같은 삼매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얻지만 무생법인을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은 아니니, 일체의 무변식상처(無邊識相處)를 초월해 현전에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알며, 무소유소처행(無所有少處行)에 들어갑니다.
무소유(無所有)란, 그에게 있었던 탐ㆍ진ㆍ치 등의 분별심과 가지가지 분별이 허망한 분별이니,
온갖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은 모두가 허망한 분별심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그 존재하는 바가 없는 까닭에 무소유라 합니다.
소(少)란, 말한 바와 같이 법 가운데 적은 모습[少相]과 세밀한 모습[細相]과 미세한 모습[微相] 이 있으니, 그 의 적은 모습을 말합니다.
그 적은 모습이 없는 까닭에 무소(無所)라 하며,
그 일체의 거칠고 세밀한 상을 초월한 까닭에 무소유무소소(無所有無所少)라 합니다.
이 삼매에 머무르면 더욱 뛰어난 무생법인을 얻어 광명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비상비비상처]
그러한 뛰어난 무생법인을 얻기 위하여 무소유무소삼매를 즐기지 않고 뛰어난 욕심[勝欲]을 내어 더욱 보다 높은 삼매의 뛰어난 행을 구해 다음과 같은 마음을 일으킵니다.
곧 이 무소유무소행의 모습 역시 세상(細相)이고 허망ㆍ분별인 까닭에 다음에는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을 관찰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상비비상이겠습니까?
비상(非想)이란 공이요, 비비상(非非想)이란 인연을 따라 생한 것입니다. 그때에 비상비비상의 삼매가 나타나면 일체의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소상(少相)을 초월해 비상비비상처의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입멸진처]
그리고는 그 경지[處]에서 행하고 머무르면서,
‘저 비상비비상처도 가히 즐길 것이 없다’라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는
그 법을 멀리합니다.
그러면 곧 제법이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삼매가 나타나서 일체 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알고, 일체 법의 자성이 적멸하여 행함도 없고 머묾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뛰어나고 높고 청정한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하니,
이것을 일컬어 아홉 종류의 차례로 드는 삼마발제[九種次第入三摩拔提]라 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마침내 이와 같은 선정의 법을 성취하였던 것으로, 그러므로 나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래의 해탈의 모습]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떤 것이 여래의 해탈의 모습입니까?”
“대왕이시여, 사문 구담의 해탈에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색을 지닌 것[有色]에서는 색을 보며,
둘째 안에 색상(色相)이 있으면 밖의 색상을 보며,
셋째 믿음이 맑으며,
넷째 일체의 색상을 초월하고 일체의 유대상(有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형상을 생각지 않고 그지없는 허공을 알아 무변허공행에 들며,
다섯째 온갖 허공의 그지없는 형상을 초월해 그지없는 식(識)을 알고 곧 무변식(無邊識)의 행에 들며,
여섯째 온갖 그지없는 식상(識相)을 초월해 무소유소(無所有少)를 알아 곧 무소유처행에 들며,
일곱째 일체의 무소유처를 초월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의 안온함을 알아 곧 비유상비무상처행(非無想非無想處行)에 들며,
여덟째 일체의 비유상비무상행을 초월해 일체의 느낌과 생각[受想]을 소멸하고 멸진정행(滅盡定行)에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이라 합니다.
안에 색을 지닌 것에서 색을 보는 자가,
‘색을 지닌 것은 모두 인연으로 생한 법으로 비어 있고[空] 수명[壽者] 없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본다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解脫)이라 합니다.
둘째 안에 색상(色相)이 있으면 밖의 색상을 보는 자가,
‘비어 있고 수명 없다고 봄은 모두 인연으로 생한 법이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믿음이 맑다고 했는데, 만약에 맑거나 맑지 못함을 분별하면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하니, 믿음이 맑은 까닭에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음을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일체의 색상을 초월하고 일체의 유대상을 멸하며 다른 모습을 생각지 않고 그지없는 허공을 알아 곧 무변허공행에 들어간 자가,
‘한량없는 허공이다’라고 허공에 대해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일체의 허공무변상을 초월해 그지없는 식(識)을 알고 곧 무변식행에 들어간 자가,
‘한량없는 식이고 헤아릴 수 없는 식이다. 이는 가없는 식이니, 곧 비어 있는 것이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그지없는 식을 초월해서 무소유소(無所有少)를 알고 곧 무소유행에 들어간 자가,
‘소유(所有)란 탐ㆍ진ㆍ치의 번뇌요, 무소유행에 들어간다 함은 그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무소유를 초월해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의 안온함을 알고 곧 비유상비무상행에 들어간 자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非有想]란 그 성품이 비어 있고 적정(寂靜)함이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상태[非無想]란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는 까닭이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을 초월해서 일체의 느낌과 생각을 멸하고 멸진정행(滅盡定行)에 들어간 자가,
‘이 같은 견해와 생각[想]이란 마치 아지랑이[陽炎] 같고, 느낌[受]이란 물거품과도 같다. 생각이 곧 느낌이고 느낌이 곧 생각이니, 안다는 것도 없고 목숨이란 것[壽者]도 없다’라고 능히 이와 같이 보면
속박에서 벗어남을 얻으니, 일컬어 해탈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마침내 이와 같은 해탈을 성취하였던 것으로, 그러므로 나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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