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거건축에서 바라본 풍수지리
1. 풍수지리의 시작과 배경
2. 풍수지리의 개념
3. 풍수지리설의 기본원리
4. 풍수지리의 분류
5. 한국건축의 성격과 흐름
6. 풍수지리로 본 형국
7. 사례조사
8. 연구방향(결론)
1. 풍수지리의 시작과 배경
풍수지리는 중국 황하유역을 배경으로 동양사상과 체계를 이루면서 수천 년간 전래되어 왔던 동양의 텃자리 학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들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당연히 집단적 텃자리가 필요했다.
인류는 이상적인 텃자리로 외부로부터 방어와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입지조건들을 갖춘 곳을 원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집단적 텃자리로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유역 등 4대문명 발생지는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인더스강, 갠지스강 그리고 황하라는 물줄기들을 입지조건으로 삼고 있다. 4대 문명 발생지에서 보듯 득수는 인류생활을 영위케하는 텃자리의 필수 조건이었다.
그 중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지역은 열대와 아열대라는 더운 풍토에 속한 반면 황하지역은 북위 40°의 대륙성기후로서 매서운 북서풍의 겨울을 견디어야 하는 텃자리 입지 조건마저 필요로 하게 되었고 여기에 득수(得水)라는 공통 조건을 덧붙이게 된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인 풍수(風水)가 황하풍토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던 유래를 볼 수 있다.
풍수라는 용어가 문헌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록은 AD25~222년 사이에 존재했던 중국의 후한시적 청오자(靑烏子:생몰년미상)가 지었다는 청오경(靑烏經:최초의 풍수서)의 구절에서 발견된다. “음양부합천지교통(陰陽符合天地交通) 내기맹생외기성형(內氣萌生外氣成形) 내외상승풍수자성(內外相乘風水自成)” 이라는 청오경 구절에서 풍수라는 글이 눈에 띄나 당시 풍수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던 시절로서 이는 누군가가 후일 첨가해 놓은 글짜일 뿐이다. 풍수라는 용어가 필요이유와 함께 기록된 문헌은 4세기에 쓰여진 금낭경「金囊經」이 된다. 이럴적 금낭경 이전 풍수는 어떤 용어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일까. 주나라 주서에는 터잡이 용어인 상택(相宅)이 나오고 있다.
상택(相宅)은 길한 집과 흉한 집이라는 길흉택(吉凶宅)을 뜻하며 상지(相地)는 명당터와 흉당터를 구별하는 길흉지(吉凶地)의 텃자리 개념인 것이다.
이렇듯 길지(吉地)와 길상(吉相)을 추구하는 상지(相地),상택(相宅)의 목적은 모두 승생기(乘生氣)에 있다.
생기를 올라탄다(乘)는 이러한 성립은, 생기(生氣:生命之氣)중에 하나로서 사람의 경우 땅 위에서 생활을 영위함을 당연히 올라 탈 수밖에 없기에 승생기(乘生氣)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지라고 일컬어졌던 풍수의 목적이 승생기(乘生氣)라는 점에 모든 학설들은 오늘날까지 공통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상지의 목적인 승생기(乘生氣)를 달성하려면 생기가 서린 자리에 입지 하여야 하고, 이러한 생기의 입지 점을 발견하려면 먼저 생기의 특성을 알아야 했다.
생기의 특성은 진나라 시대 곽박(郭璞:276~324)이 저술했던 금낭경「錦囊經」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바람에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는 생기 특성을 이용하여 길지의 입지점을 찾으려는 상지는 비로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원리는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원리와 물을 얻는다는 득수(得水)원리였던 것이다. 이것이 풍수라고 부르고 있는 명칭의 유래이다.
2. 풍수지리의 개념
풍수지리는 단지 ‘풍수’ 혹은 ‘지리’란 것이 원칭이고, 또 따로 ‘감여’라고도 일컫는다. 한충 합리적인 용어로써 한다면 이를 지상학 또는 상지학이라고도 한다. 대개 풍수지리는 도읍․궁택․능묘의 지를 복상 하는 데 쓰이는 일종의 관상학이기도 하다.
풍수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동양적 자연관의 하나로서, 풍수지리․지술․음양설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동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와 장생을 누리지만 반대로 흉기가 있는 장소를 택하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즉,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완전히 天과 地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지표의 하에 흐르는 지기라는 무형적인 힘과 인간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풍수지리설에 있어서는 토지에 일종의 신비력을 인정하고 그 힘의 인간에 미치는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이란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으로, 피흉․발복을 목적으로 삼는 지리기술학이다. 이것이 후세 효의 관념이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속신으로 진전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土地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3. 풍수지리설의 기본원리
풍수의 목적은 땅속에 흘러 다니는 생기에 감응받음으로써 피흉발복할 수 있는 진혈을 찾는 데 있다. 땅속의 생기가 충만한 곳이 진형이 되고 이 진혈을 찾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므로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가 풍수원리이다.
◉ 간룡법(看龍法)
풍수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원리가 1차적으로 가시적 실체로서 표출되는 사상이 산, 즉 풍수용어로 용이며 그 용맥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조산으로부터 혈장까지 살피는 일을 간용법이라 한다.
◉ 장풍법(藏風法)
명당 주변의 지세에 관한 풍수이론을 통칭하여 장풍법이라고 하며, 결국 장풍법을 통하여 정혈도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실제로 도읍이나 주택 혹은 음택을 相地함에 있어서는 장풍법이 요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장풍법은 바람을 막는 것이 아니고 불어서 흩어지고 사라져가는 바람을 잘 끌여들여 간수하자는 의미로, 들어오는 기는 받지만 안의 기가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지세를 살피는 것이다. 풍수에서 가장 이상적 형국으로 보는 장풍국(藏風局)은 혈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그 중앙분지에서는 음양을 중화하는 생기가 넘친다. 이러한 장풍국은 王都의 자리가 되며 대표적인 예가 개성이다.
◉ 득수법(得水法)
득수는 음양의 화합에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그 중요성이 인식된다.
득수법은 물이 충분한 생기를 전달할 수 있는 형국을 살피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산은 음에, 그리고 수는 양에 해당되므로 물이 있는 곳에 반드시 생기가 있다고 보고 장풍국보다 득수국을 중요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지리학적 관점에서도 납득할 만하다. 그 이유는 물이 흐르는 곳은 대체로 지역이 넓고 자연이 웅장하며 물의 흐름도 완만한 곡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은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으며, 쿄통로와 도시의 발달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택리지」는 한양,평양과 같이 물을 배경으로 발달한 도시들이 장풍국의 정형인 개성보다 더 큰 도시로 발전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 정혈법(定穴法)
혈이란 풍수에서 요체가 되는 장소이다. 혈은 음택의 경우 시신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양기의 경우 거주자가 실제 삶의 대부분을 얹혀 살게되는 곳이다.
정혈법은 기가 결절 하는 혈의 위치와 형태를 파악하는 법이다.
◉ 좌향론(坐向論)
좌향이란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는 말이다.
풍수구성의 기본요소를 산, 수, 방위, 사람의 제 가지로 축약시킬 때 좌향론은 당연히 방위에 관계된 술법이 된다. 원래 좌향은 혈에서의 위치로 본 방위 즉 혈의 뒤쪽 등진 방위를 좌로 그리고 혈의 정면을 향으로 한다. 땅의 길흉판단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좌향은 背山臨水이다.
◉ 형국론(形局論)
형국론은 지세를 전반적으로 개관할 수 있는 술법이기 때문에 술사부류가 가장 많이 들멱이는 내용이고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형국론은 우주만물만상이 有理有氣하며 有形有像하기 때문에 외형물체에는 그 형상에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해 있다고 보는 관념을 원리로 삼는다. 풍수의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고 있다.
양택풍수/음택풍수/국역풍수
풍수는 二大分되어 생자의 거소를 취급하는 양적인 풍수와 사자의 거소를 다루는 음적인 풍수로 나뉜다. 양적인 풍수의 호칭에는 陽基와 陽宅이 혼용되어 분명한 개념의 정의가 필요하다. 村山智順은 양택이란 용어를 부정하고 양기가 맞는 말임을 주장하며서 그 이유로 택과 기가 모두 사람의 주거에 관계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택이 주로 용어의 관습상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 데 대하여 기는 그 택을 포용하는 대지를 칭하는 밀이기 때문이고, 음택의 경우는 사자를 땅속에 파묻는 까닭에 택과기가 구별이 없어 결국 주거의 의미로 음택이 맞다 는 것이다. 그러나 생자의 주택, 즉 보통의 가옥은 대지와 견축물이 이분되며 이때 생기에 감응받는 것은 건축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대지, 즉 땅의 생기에 영향을 받는 것인 만큼 양기가 맞다고 보았다.
대지가 중요하지 그 위에 조성된 건축물의 대소장루(大小壯陋)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양기를 주장한 듯한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우선 양택풍수에 있어서는 基地선정못지않게 건물의 방위와 배치가 지대한 영향을 거주인에게 미친다는 일반적인 풍수논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양기와 양택이라는 용어는 한자의 뜻풀이에 의하여 양자택일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풍수서에 의하면 양기와 양택은 엄격히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도읍이나 군현 등 취락풍수에 있어서는 양기를 사용했고, 개인의 주택의 경우에는 양택을 쓰고 있다.
◉ 양택풍수
양택풍수의 길흉은 장소의 좌향과 방위에 따라 결정되는데 국도풍수에서는 특히 사신사(四神砂)가 고루 갖춰져 明山吉地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그런데 양택은 작은 취락일지라도 耕地․垈地 등 비교적 넓은 땅을 필요로 하며, 특히 국도의 터는 더욱 넓은 면적을 요한다.
◉ 음택풍수
음택풍수는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하여 사회에 큰 폐해를 끼쳤기 때문에 현대의 일부 풍수가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풍수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음택풍수에 더 가깝다. 음택풍수에는 생기가 있는 땅을 하나의 별세계로 보는 감정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감정들이 혼합되어 있어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전제하에 묘지선정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국역풍수
국역풍수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분야이고, 풍수적 애국심을 나타나고 있다. 이 풍수의 형국론에 의하면 한반도는 전체가 하나의 광대한 명당이며,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열도는 내청룡, 중국은 내백호, 제주도는 안산이 된다. 또 미주대륙은 외청룡,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외백호, 호주는 조산이 된다. 국역풍수설에 의하면 서양의 물질문명이 몰락하게 되면 한반도 명당을 중심으로 한 정신문명이 온 세계로 제시한 이상향이라는 주장이다.
4. 풍수지리의 분류
◉ 형기론(形氣論)과 이기론(理氣論)
산과 물의 외적인 모양을 보고 명당 길지를 찾는 것이 형기론(形氣論)이고, 방위와 시간의 개념으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의 음양오행을 살피는 것이 이기론(理氣論)이다
형기는 외적 형상인 체(體)이고, 이기는 작용인 용(用)으로 형기는 용(산 능선), 혈(집터나 묘 자리), 사(주변 산), 수(물)등 풍수지리의 외적변화 현상을 보는 것이고, 이기는 용(龍),혈(穴),사(砂),수(水)의 방위를 측정하여 음양오행법으로 적법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 양택풍수와 음택풍수(陽宅風水와 陰宅風水)
집과 건물의 터를 잡는 것은 양택풍수, 양택은 산 사람의 거주지이다.
묘 자리를 잡는 것은 음택풍수, 죽은 사람의 안장지(安葬地)이다.
양택과 음택은 모두 지기(地氣)의 영향으로 발목(發福)이 나타나는데 그 차이는 음택은 발복의 속도는 느리지만 여러 자손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주는 반면에, 양택은 그 집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사람 그리고 현재 거주하는 사람에 한해서 매우 빠르게 영향을 준다.
◉ 동기감응론
묘의 좋고 나쁜 기운이 후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발음(發蔭), 발복(發福) 도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한다. 조상과 후손은 같은 혈통관계로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5. 한국풍수의 성격과 흐름
신라말기 입당승들에 의하여 중국 풍수가 전래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풍수의 시작은 사람들이 생활을 영위하려 할 때부터 당연히 내재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고, 중국 황하가 기후가 비슷한 우리 나라 역시 장풍과 득수의 개념이 존재 할 수 있다.
신라 말기 이전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석탈해의 반월성 상지(相地)기록이나, 선덕여왕의 여근곡이야기 그리고 불국사의 입지점들은 풍수 맥락이 아니면 풀 수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풍수의 특성을 담을 수 있는 공간적 논리며 두 번째는 시간적 가능성인 풍수의 현장을 가르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풍수를 오늘날 자생 풍수라 일컫는다. 여기서 자생이란 용어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는 뜻으로 풍수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풍수의 특성 중에서 또 하나는 풍토와의 불가분석(不可分說)이다. 풍토를 최대한 활용하여 생활에 이용하려는 것이 풍수이기에 생활 터전인 풍토와 생활 활용인 풍수는 불가분이 되는데, 이러한 해석에서 풍토가 다르면 풍수 역시 다르다는 논리가 성립됨을 알 수도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같은 대륙성 기후에 놓여 있어 장풍과 득수를 필요조건으로 성립시키고 있으나, 풍토는 완연히 다르다. 중국의 황하 유역은 황하라는 물줄기의 영향에 의하여 좌우되는 반면, 우리나라는 7할 이상의 산악지역이기에 산을 더욱 중요시 한다. 중국이라는 풍토에 있어서 텃자리 제약조건은 황하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나, 우리나라는 산악국토라는 풍토에서 생활활용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풍토의 상이성에서 중국 풍수는 득수의 개념을 우선으로 하였던 반면, 우리나라의 풍수는 장풍의 개념을 더 중요시하였다. 중국 풍수서인 「금낭경」역시 이러한 중국풍수의 성격을 나타내는 구절이 있다.
“풍수지법(風水之法)은 득수위상(得水爲上)이오, 장풍차지(藏風次之)니라…….”
득수가 첫째이며 장풍이 그 다음이라는 중국풍토와는 달라서 장풍을 중요시했던 한국의 풍토차이는 오늘날 풍수론마저 다른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풍수는 형세론과 이기론이라는 양대 학파로 체계를 이루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는 형국론이라는 우리 고유의 풍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산악 국가라는 풍토에서 파생된 산악숭배사상은 산에 영혼을 부여하는 정서로 그리고 산을 살아 있는 영물로 삼으려는 정서까지 확장되어 동물과 식물로 비유하는 형국론을 낳게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자생풍수의 특성으로, 중국 풍수 전래 이전의 반월성, 여근곡, 불국사입지점들이 모두 형국론의 현장들인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산악 국가라는 풍토에서 자생한 한국의 자생 풍수는 중국 풍수가 유입된 이후에 성립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오랜 시간 속에 우리 땅과 함께 있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형국, 형세, 이기론은 도선 풍수에 의하여 종합적 체계를 이루며 내려오게 되는데, 최초의 현장은 859년에 도선이 조성한 경북 김천 증산면 수도산에 있는 삼층 석탑이 된다. 도선은 후일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추숭되고 국사까지 오른다. 한국의 풍수는 도선에 의하여 형국론과 형세론이 조화를 이루면서 고려 시대 불교 승려들 중에서도 선승에 의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 특징도 양기, 양택풍수에 눈길을 담고 있었다.
고려 왕조 이후 조선 왕조 시대로 들어섰을 대 한국의 풍수의 흐름은 가장 커다란 변환을 맞게된다. 조선 왕조의 개국 이념인 숭유배불(崇儒排佛)에 의하면 전통풍수 법맥을 이어왔던 선승계열은 자연히 활동이 금지되었고, 더불어 충효(忠孝)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시대에 있어 음택인 무덤 풍수를 성행시켰던 것이다. 숭유배불에 의한 전통 풍수 법맥의 단절과 충효이념에 의한 무덤 풍수 성행은 풍수를 타락시켰고 게다가 무덤 신봉주의는 반풍수 문제로서 사회적 물의까지 일으켰다. 이러한 무덤풍수 병폐론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사람들은 조선후기 실학자들 이였다. 실학자들의 풍수 비판론은 무덤 풍수를 그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지, 풍수지리 자체를 공박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무덤 풍수를 반박하였던 실학자중 이중환은 양기풍수서라 할 수 있는 「택리지(擇里志)」를 지었고, 홍만선은 양택 풍수서격인 「산림경제(山林經濟)」를 편찬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를 몰락시킨 일제국주의자들이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 자행했던 식민풍수는 식민사관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와 우리 땅을 음해 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식민사관은 임나본부설(任那本部說)이며, 식민풍수는 한반도를 토끼라고 음해했던 그것이다. 더불어 풍수는 무덤 보는 것이라는 과장의 왜곡은 전통 풍수로서 우리 것을 찾으려는데 에 방해하려는 눈가림마저 되었고 이는 일제국주의자들이 반사 이익을 얻게하려는 목적에 부합되었다고 한다.
6. 풍수지리로 본 형국
풍수지리의 형국(形局)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기러기/꿩/말/닭/소/토끼/호랑이/물고기/사슴/학/용/봉황/개/거북/돼지/뱀 등 동물과 관련된 형국이 있고, 배/소반/금가락지/반달/등잔/거문고/진주/띠/가마솥 등 물질과 관계된 형국, 연꽃/매화/버들과 같은 식물과 관계된 형국, 신선/장군/승려/어부/옥녀 등 인물과 관계된 형국, 야(也)/일(日)/용(用)/품(品)/물(勿) 등 글자와 관계된 형국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풍수지리의 형국 중에서 대표적인 형국과 그 지역을 알아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형국의 길흉보다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자연환경과의 조화와 균형이다.
닭 모양
금닭이 알 품은 모양(金鷄抱卵形), 닭 둥지 모양(鷄巢形), 우는 닭 모양(鷄鳴形),
닭볏 모양 등의 형국이다. 닭은 울음으로 새벽을 알리는 태양의 사자로 새로운 세상, 올바른 질서를 의미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영물이다.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의 상징이며, 닭의 볏은 벼슬을 뜻한다. 풍요와 무사태평, 행복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국의 지역으로는 충남 태안군 태안읍, 경남 의령군 가례면 양성리, 경기 김포군 백석산부근 등이 있다.
소 형국
누운 소 모양(臥牛形), 황소가 강을 건너는 모양(黃牛渡江形), 엎드린 소 모양(伏牛形) 등의 형국이다.
소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영물이라 하며, 오늘날에도 농가 재산 1호이다. 평화, 태평, 풍요를 의미하며 음택이 소의 형국이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형국의 지역으로는 충남 서천군 시초면 신흥리, 광주광역시 북구 대촌동, 경남 울주군 삼남면 조일리 등이 있다.
호랑이 형국
엎드린 범 모양(伏虎形), 범이 숲에서 나오는 모양(猛虎出林形), 범 꼬리 모양(虎尾形), 흰 범 모양(白虎形) 등의 형국이다. 호랑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마귀나 잡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산신의 지시를 받아 인간의 길흉화복을 깊이 생각하는 뜻을 지니며, 벼슬을 얻음을 뜻한다.
이러한 형국의 지역으로는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경북 의성군 단촌면 후평동,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등이 있다.
배 형국
배 모양(行舟形 , 매어 놓은 배 모양(繁舟形) 등의 형국이다. 배는 많은 것을 싣고 다니므로 부귀영화를 뜻한다.
그러나 항상 물위에 떠 있는 까닭에 위험이 따르고 그러한 위험을 막기 위한 보조 수단을 강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마을 가운데에 탑이나 솟대를 세워 배의 돛대 역할을 하게 했던 경우가 있으며, 평양의 경우 대동강 한가운데에 커다란 닻을 놓아 배 모양의 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형국의 지역으로 경북 안동군 의인 마을, 전북 무주군 무주읍, 전북 남원군 운봉면, 전북 고창군 흥덕읍 등이 있다.
소반형국
금소반 모양(金盤形), 금소반의 옥잔 모양(金盤玉杯形), 금소반의 옥병 모양(金盤玉壺形) 등의 형국이다.
소반 위에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여러 가지 음식이 놓인다.
따라서 소반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한다. 또한 금소반 위에 옥잔, 옥병이 놓이면 매우 좋은 형상이며, 평평한 소반의 모양은 넓은 들, 즉 풍요로운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국으로 충남 당진군 송악면 반천리,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구림마을,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등이 있다.
금가락지 형국
금가락지 터 모양(金環落地形), 금비녀 터 모양(金落地形), 벽에 걸린 금비녀 모양(金簪掛壁形) 등의 형국이다.
가락지는 여성의 대표적 장신구로 여성의 전유물이자 여성을 대표한다. 다산과 부귀영화를 의미하며, 재운을 불러들이고 악귀를 내쫓는다.
이러한 형국으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와 금내리 일대가 있다.
연꽃형국
연꽃이 물 위에 뜬 모양(蓮花浮水形), 연꽃이 물에 다다른 모양(蓮花到水形), 반쯤 핀 연꽃 모양(蓮花半開形) 등이 있다.
연꽃은 불교의 교리를 상징하지만 씨앗이 많은 관계로 다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연꽃의 속성상 더러운 곳에서도 맑은 본성을 간직하는 이유로 청정, 순수를 뜻한다.
이러한 형국으로 경북 안동시 풍산읍 하회마을이 있다.
옥녀형국
옥녀가 거문고 타는 모양(玉女彈琴形), 옥녀가 머리를 푼 모양(玉女散髮形), 춤추는 옥녀 모양(玉女舞裳形) 등의 형국이다.
옥녀는 도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긴 하나,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하고 마을의 수호신 또는 절세의 미인, 남녀합궁을 뜻한다. 따라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이러한 형국으로 전북 익산시 산북리 내산동,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 원색장 마을, 전남 보성군 낙안읍성 마을 등이 있다.
글자형국
야(也)자 모양, 일(日)자 모양, 용(用)자 모양, 물(勿)자 모양 등의 형국이다.
각각의 글자 형태와 그 뜻에 따라 형국이 뜻하는 바가 다르다. 야(也)자는 문장의 끝에 위치한다하여 훌륭한 문장가를 배출한다고 하며, 일(日)자는 해와 같이 세상을 밝힐 인물이 태어난다고 한다.
이중에서 예를 들면 물(勿)자 모양 형국의 지역으로 경북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이 있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용어
나반(那般)
패철(佩鐵), 나경(羅經) 이라고도 하며, 4괘, 10간, 12지를 사용하여 24방위로 나누어져 있다.
양택(陽宅)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가옥, 마을, 성곽 등을 말한다.
염승(厭勝)
마을의 안정을 목적으로 마을 지세가 지닌 부족한 점을 보충하거나 변경하는 위이다. 그 예로 배 모양의 마을에서는 배가 흘러가지 않도록 닻을 만들어 봉우리에 걸거나 솟대 등을 세워 돛대의 의미를 지니도록 하였다.
오성(五星)
산의 형태를 목, 화, 토, 금, 수(木, 火, 土, 金, 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나눈 것이다. 목성(木星)은 나무와 같이 솟은 모양이며, 화성(火星)은 불과 같이 뾰족한 모양, 토성(土星)은 넓고 평평한 모양이다.
금성(金星)은 산의 윗부분이 둥글고 아랫부분이 넓은 모양, 수성(水星)은 파도와 같은 모양을 말한다.
용(龍)
땅의 기복을 가리키며 마치 그 모양이 용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다.
음택(陰宅)
죽은 사람이 묻힌 무덤을 말한다.
좌향(坐向)
좌는 혈의 뒤쪽으로 집이나 무덤의 자리이며 향은 그것이 바라보는 방향이다. 좌향을 잡을 때는 길한 방향과 흉한 방향을 가려잡는데, 이때 나반(那般)을 사용한다.
형국(形局)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 따위를 동식물, 사람 또는 기타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국(局)
혈(穴)과 사(砂)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명당(明堂)
혈 앞의 평평한 땅이며, 바로 앞의 것을 내명당, 바깥쪽의 넓은 평지를 외명당이라 한다.
명당수(明堂水)
혈이나 명당의 내부에서 솟아, 그 앞을 지나 바깥으로 흘러 나가는 물의 흐름이다. 솟아나는 부분을 득(得)이라 하고, 흘러 나가는 부분을 수구(水口)라 한다.
미사(眉砂)
혈 뒤에 약간 솟아오른 지형으로, 혈에 물이 흘러들게 하지 않고 생기를 모으기 위한 것이다.
백호(白虎)
혈의 뒤쪽에서 내려와 우측, 즉 혈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경우 서쪽을 둘러싸고 앞에서 끝나는 산맥을 말한다.
내,외 백호로 나뉘는데 겹겹이 감쌀수록 길하다.
사(砂)
혈 주위의 형세 전체를 말한다.
안산(案山)
혈 바로 앞에 있는 낮고 야트막한 산이다. 혈이 '기댄다(案)' 는 뜻에서 나왔다.
입수(入首)
현무정에서 혈로 들어가기까지의 부분을 말한다.
조산(祖山)
혈에서부터 떨어진 거리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태조산(太祖山)은 멀리 떨어져 높이 솟은 산을 말하며, 혈이 있는 곳 바로 뒤의 산을 소조산(小祖山) 또는 주산(主山)이라 하고, 그 가운데쯤에 있는 산을 중조산(中祖山) 또는 종산(宗山)이라 한다. 내,외청룡으로 나뉘는데 겹겹이 감쌀수록 길하다.
현무정(玄武頂)
주산에서 내려오는 산맥이 우뚝 솟은 곳을 말한다.
혈(穴)
생기가 뭉쳐 있는 곳을 말하며, 사람의 몸에 침을 놓는 곳인 혈과 같은 개념에서 나왔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인 풍수(風水)가 우리 역사와 같이 했던 시간은 어림잡아 보아도 일천여년은 훨씬 넘는다. 그시간 시간 속에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그리고 오늘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왕조가 불교를 국교로 삼은 풍수국가였다면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풍수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문화유산들은 불교와 풍수적 시각에서 접근되어져야 하며 조선시대 문화유산 역시 유교와 풍수라는 2개의 각도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고찰하는 시각중에는 유교가 있지만 또 다른 시각인 풍수는 배제되어져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하다.
7. 사례조사
구례운조루(求禮雲鳥樓)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다.
이 건물은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른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한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앞에 펼쳐진 산이 울퉁불퉁하여 이 집을 빙둘러 있다.
그 산들이 불의 형상이라 집 앞에 연못을 파 화기를 막았다고도 하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대문 앞에 연못이 있는 이유가 그것이고, 그 산들이 병사들의 형상이라면 이 집안이 무관 출신이니 맞는것도 같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있다.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으로 기둥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다. 또,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중행랑채는 일자형 곳간채의 왼쪽 끝에서 2칸이 앞쪽으로 돌출하여 있다.
이 2칸은 내루형으로 처리되어 1칸은 방이 되고 1칸은 판상을 높이 설치한 다락이 되었다.머른을 드리고 문짝을 달았으며, 서벽 밖으로는 쪽마루와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누하주 서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는데, 죽담에 오르는 것을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또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안채의 중심부분은 대청으로 주간이 개방되어 있다. 대청 좌우로는 안방과 건넌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안동화회마을
하회(下回)란 물(河)이 돌아(回)서 흘러간다는 물돌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마을이 있어서 이를 물돌이마을, 하회마을로 불렀다. 풍수에 있어서 물은 계수즉지(界水則止)작용으로 생기(生氣)가 물줄기를 만나면 멈춘다는 풍수적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 S자를 형성하면서 흘러나가는 하회마을의 물줄기는 마을을 안쪽에다 놓고 있음에서 계수즉지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데, 하회마을로 들어오는 산기운은 형세론 중에서 간룡법에 해당된다.
하회마을 배치도
하회마을의 진산인 화산에 기운을 넣어주는 학가산은 종산에 행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학가산(勢)→화산(形)→하회마을(穴)이라는 형세론의 勢→形→穴 체계에 놓여지게 되는 간룡체계에 있어 하회마을의 태조산은 백두대간에 걸려 있는 옥돌봉에서이 일맥 빠져 나옴에 이를 태조로 삼고 있음이다.
화산에서 충효당과 양진당으로 각각 연결되는 태, 식, 잉, 육이라는 현상들을 육인 혈자리에서 살펴볼 때에는 다음과 같다. 육은 혈을 말하며 이곳 하회마을의 경우 양진당과 충효당 본채가 이에 해당된다.
형세론 설정에서 볼 때 충효당 본채 뒷 녘과 양진당 본채 뒷 녘에는 잉(孕)이 있어야 한다.
풍수에서 잉은 도두락하게 솟아나는 형상을 보이는데 사진에서 보듯 충효당 뒷 녘이 솟아 있는 부분이 잉이다.
양진당의 잉은 충효당과 다르게 지맥이 응결한 곳을 삼신당으로 알려져 있고, 삼신당에는 수령 6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백두대간의 기세에서 빠져나온 조종항렬의 산줄기가 화산으로 연결되어지고 화산의 기운을 둥글게 감싸면서 못빠져 나가게 막고 있는 물줄기에서 볼 때 하회는 화산의 기운을 물줄기가 둥글게 막아주면서 마을에 담아주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회마을 풍수에는 좌청룡, 우백호가 없음이 또한 특징이기도 하다. 기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것은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장풍역할을 담당하는데 하회의 물줄기는 모두 병풍같은 산줄기들을 옆에 두고 흐른다. 이미 병풍을 친 하회마을에서 굳이 장풍을 따질 필요성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회풍수의 형국(形局)은 당시 조선팔도에서도 알아주었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연꽃이 물위에 떠있다는 풍수형국에 걸맞게 하회의 배산이 화산(花山)이며 낙동강 물줄기마저 이곳에서는 화천(花川)으로 부른다. 게다가 앞녘의 벼랑까지 부용화인 부용대(芙蓉臺)인데 이곳에서 문중을 이루고 있는 그들의 본관 성씨마저 버들 류(柳)씨가 되기에 모두가 화산, 화천, 부용꽃, 버드나무라 불리우는, 초록은 동색임을 알 수가 있다.
화산의 기운을 연화부수형의 형국으로 받고 있는 이곳 풍수특징에서 버들류씨 들은 번창을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입향했던 광주 안씨나 김해 허씨들이 번창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이곳이 풍수형국인 연화부수형을 그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연화부수형의 발복 특성은 수면 선상에서 치고 올라 꽃을 피우는 수면선상이 되는데 가장 먼저 이곳에 덧자리를 잡은 김해 허씨들은 무조건 배산임수만 고집하고는 산중턱에 자릴 잡았고 그 다음에 입향한 광주 안씨들은 임수인 물줄기녘 가까이에 자릴 잡았으나 물줄기가 감싸주는 것이 아닌 바깥녘의 텃자리였음이 실책이었다.
후일 가장 늦게 입향한 버들 류씨들만이 제대로 화산의 연꽃특성에 물줄기 마저 감싸는 자리에 종가집을 매김질했고 번창과 번영을 했던 사실에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杯盤)" 이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이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류씨들의 잔치판은 영남학파로서 최초의 영의정 올랐던 류성룡(柳成龍)을 대표적 인물로 치고 있다.
이제 화산의 산기운을 하회마을로 이어놓은 풍수 지맥 체계를 살펴보기로 할 때 먼저 배산과 집의 관계를 풍수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풍수에서 배산은 부모산(父母山)으로 부르는데 이는 어미이며, 자식은 집이 된다. 자식을 기르는 어미를 보다 더 생명관계로 이어놓을 때에는 임신부와 태아의 관계 설정이 된다. 임신부와 태아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고 배산과 집의 관계로 볼 때, 이는 산줄기라는 지맥선이 탯줄에 해당되기에 이러한 산줄기를 태(胎)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럴적 지맥선인 탯줄은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것은 숨을 쉬는 것으로 꿈틀거려야 함에 이와같은 꿈틀거리는 산줄기를 또다시 식(息)이라 하며, 이와같은 산줄기의 꿈틀거림이라는 태식(胎息)이 있을 때 비로소 생룡(生龍)이 되고, 만약 태식현상이 관찰되지 않을 때에 이는 사룡(死龍)이라 하여 풍수에 있어 사룡의 산줄기는 금기시하고 있다. 태식이라는 지맥선이 평지로 내려오다가 어느 곳에 명당 혈(穴)을 맺혀주기 직전에 약간 솟구치는데 이를 잉(孕)이라 하며 잉은 마치 태아를 밴 임신부의 배가 불룩한 형상을 곧잘 하고 있기도 하다.
태식잉이라는 다음관계는 육(育)으로서 이곳에 집터의 텃자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배산이라는 어미의 탯줄을 산자락으로 연결되어진 집은 자식이 되기에 육(育)이 되는 것이다. 육은 또한 혈(穴)자리를 가르키는 풍수용어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의 2대 종가집인 충효당과 양진당은 어미산인 화산의 태아이며 육에 해당되기에 양진당 충효당 뒷녘에는 잉이 존재하고 있다. 충효당의 잉은 본채 뒷녘 텃밭을 보면 그 자리만 잔디로 조성시켜 놓은 야구장 투수 마운드처럼 봉긋이 올라 있음을 누구나 눈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다.
더불어 양진당의 잉은 뒷녘에 있는 삼신당 고목나무로 알려져 내려온다. 배산의 기운이 태식잉으로 잇대어지는 그곳에 육을 설정하고 종가집을 짓고 그 다음에는 어디를 향할 것인가를 정하여야 한다. 이는 좌향(坐向)이라 하는데, 앉는다는 좌(坐)와 바라본다는 향(向)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육은 혈자리가 되기에 집은 혈에 앉아야 한다. 이러한 혈자리 매김질은 혈좌(穴坐)라 하는데 혈좌를 잘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생기를 받게 된다.
혈은 풍수의 목적인 승생기(乘生氣)를 이루는 혈좌자리에서는 안채를 앉힘이 승생기를 이루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향(向)은 어디로 매김질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2가지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패철(佩鐵)이라는 지남철 모양의 뜬쇠를 가지고서 음양오행을 따져 가장 좋은 기운을 받는 곳을 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혈좌 자리에서 보아 주위녘 산세 중에서 빼어난 곳에 맞추는 방법이 있다.
마주보이는 시야 중 산형이 좋은 곳을 향하게 하는 이것을 흔히 안대좌향(眼對坐向)이라 부르는데 이곳 하회 양진당의 경우는 확연히 안대좌향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양진당 정중앙에서 대문 지붕을 쳐다보면 마치 마늘 윗부분처럼 잘생긴 마늘봉(361m)이 걸려져 있는데 이를 풍수에서는 문필봉이라 부른다.
우리 풍수인 형국론에 있어 좋은 것은 보일수록 좋고 나쁜 것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견(見), 불견(不見)법칙이 있다. 마늘봉은 붓모양을 닮은 모양으로 누가 보아도 좋은 형상이므로 양진당처럼 그쪽으로 향하여 문필의 기운을 끌어들여서 좋다. 이것이 풍수의 견(見)원칙이다.
이와는 반대로 산기운이 살기(殺氣)를 띨 때, 이러한 살기를 보이지 않게 막아주어야 한다. 이것은 풍수의 불견(不見)원칙이다. 하회마을에 살기를 내뿜으며 흉살스러운 몰골로 서있는 것은 화천 물줄기 서쪽에 버티고 있는 부용대 벼랑 바위가 된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부용대 벼랑에 튀는 살기를 풍수 불견(不見)처리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는 긴 소나무 숲으로, 만송정은 풍수비보림(風水裨補林) 역할을 하고 있는 동수(洞藪)가 된다.
경주 양동마을
양동 마을의 임수인 형산강은 역수의 부라는 풍수발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이 곳 사람들은 말한다.
형산강 오른편 끝이 설창산이다.
배산인 설창산 자락에 텃자리를 잡은 양동마을
경북 경주시에 있는 良洞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 189호로 지정된 민속마을로서 보물급 가옥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곳이다. 보물 제 411호인 무첨당(16세기창건),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16세기창건), 그리고 보물 제 412호인 향단(16세기 창건)등을 위시하여 중요민속자료 제 23호 등 11개가 지정되어 있기에 전통 건축물의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양동마을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은 그 곳에 자리한 전통 건축물의 위용보다 더 관심을 끄는 풍수발복지로서의 양동마을 텃자리에서 우재(愚齋) 손중돈과 회재(晦齋)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인걸들이 한결같이 같은 방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 방은 삼현출생지지로서 널리 알려져 내려오는데 풍수로 매김질할 때 그 방이 명혈자리라는 점을 알수가 있다.
양동(良洞)은 민속마을이자 풍수마을이다. 풍수를 모르고서는 양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풍수를 뺀 양동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마을터의 입지 뿐만 아니라 고래등 같은 고택(古宅)들이 마을 언덕배기마다 위용을 과시하며 앉아있는 것도, 동해남부선 철도가 마을 앞에서 휘어져 비켜 나간 것도, 남향(南向)이었던 양동초등학교 건물이 동향(東向)으로 바뀐 것도 모두 다 풍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역사는 곧 '물(勿)'자형 땅 생김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손소(孫昭)는 현재의 마을내 에서도 가장 깊숙한 안골(內谷)의 능선 위에 집을 지었다. 지금의 월성손씨(月城孫氏) 대종가 서백당(書百堂 또는 松첨)이 바로 그 집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깊숙한 곳에 집터를 정하게 된데는 그만한 풍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안산(案山)인 성주산(聖主山)에 올라 마을쪽을 내려다보면, 주산(主山)인 설창산(雪蒼山) 문장봉(文章峰)에서 동남향으로 뻗어내린 지맥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네줄기로 갈라져 이른
바 물(勿)자형의 능선과 골짜기들을 이루고 있다.
서백당은 그 물(勿)자형 지세의 두번째 획어깨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 그 집터를 잡아준 풍수사가, 설창산 혈맥의 기운이 가장 크게 응집된 곳이 바로 그 어깨부분이며, 그 터에서 앞으로 세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서백당이 왜 그곳에 터잡게 되었는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양동마을의 개기(開基)가 물(勿)자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이루어졌든간에, 사실 우리는 그 주변 일대의 전체적인 지세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을터가 갖는 나름대로의 지리적인 합리성을 찾아내기
① 서백당 잉을 잡고 육자리의 방향을 잰다
② 혈좌에 향을 매김질하고(간좌곤향으로....)
③ 좌상우하(左上右下)라는 양택중심 배치로 사당을 정하고 창고와 부엌을 놓고
④ 안대들(見不見) 길흉 처리를 했다.
먼저 눈여겨 볼 것은 마을 밖으로 10리 이상 펼쳐져 있는 드넓은 안강평야다. 마을을 지탱케 하는 경작지가 하천을 끼고 그토록 가까이에 있다. 더구나 선비마을다운 주거면모를 염두에 둬야할 반촌(班村)으로서는 그같이 생산과 주거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어쩌면 더 바람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안 을 흐르는 원래의 명당수(明堂水)도 요즘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안계저수지가 만들어져 물흐름이 원활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안계리쪽의 물과 물(勿)자의 골짜기마다 흘러나오는 계류들이 합쳐져 마을 한가운데로 양동천(良洞川)이라는 명당수가 유유히 흘렀다고 한다. 이 양동천은 북(北)의 영일쪽에서 오는 기계천과 동네 어귀에서 합류하여 안락천(安樂川)이라는 객수(客水)를 이룬다.
그리고 그 안락천은 서(西)의 영천쪽 칠평천 물을 합친 후, 북류(北流)해오는 형산강과 마을 밖에서 또 다시 합류한다. 물줄기만 보더라도 양동마을은 안팎으로 이합수(二合水)가 세번이나 이루어지는 더없는 길지인 셈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형산강 뱃길을 따라 동구 밖까지 동해의 해산물들이 운송돼 왔다고 하니, 이 마을에 해물을 쓰는 전통요리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모두 그런 빼어난 입지성(立地性)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큰 평야와 강으로 된 그 같은 훌륭한 외곽환경에 비해 실제로 양동마을 내부는 물(勿)자라는 길상(吉相)의 지세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주산과 안산사이의 거리가 엎어지면 코닿을 정도로 가까울 뿐더러 규국(規局)마저 너무나 협소하다. 만약 골짜기 바닥에 주거지를 정한다면 일조량, 배수, 습도조절, 조망 등의 측면에서 언제든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양동마을 사람들은 그런 점을 십분 고려하여 처음부터 산등성이에다 집을 짓는 방법을 택했다. 거기에는 물론 물(勿)자 지맥을 통하여 인물이 난다는 풍수설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대종가는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위에 위치하고, 파(派)종가들湧 좀 더 낮은 자리에 터를 잡았으며, 외거(外居) 노비들이 사는 가랍집들은 또 그보다도 낮은 터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곧 양동마을의 주거 택지(擇地)에 물(勿)자라는 자연의 질서외에도 유교 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련된 인위적 질서가 공간적으로 반영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물(勿)자 능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지만, 양동마을에서는 집이 숲을 없앴다기 보다는 오히려 집이 숲속을 찾아들었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훼손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안산인 성주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여느 마을 앞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묘지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깨끗하다'는 뜻의 물(勿)자와 '어질고 훌륭한 산'이라는 뜻의 성주산을 오래도록 보전하고픈 주민들의 삶터에 대한 애착심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낳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하지만 양동마을인들 어찌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일제때 양동은 마을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일제가 1938년에 경주와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부설계획을 세우면서, 양동의 주산과 안산 사이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 철도가 지나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마을 터가 반 동강날 지경이었으니 온 마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전전긍긍하던 끝에나온 묘안이 바로 물(勿)자의 자연지세에 만약 철로를 놓아 아랫부분에 획하나를 더 보태게 되면 피 혈(血)자가 되어 마을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마을 안으로 철도가 통과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주민들의 단합된 힘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했고 그 결과, 마침내 일제도 어쩔 수 없이 현재처럼 철도가 마을 앞에서 우회해 빠져나가도록 원래의 노선 설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 양동천을 통과하는 철도부설계획을 막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양동은 민속마을은 고사하고 거의 폐촌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물(勿)자형의 길지를 지켜낸 양동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후손들도 조상들의 삶터를 사랑했던 바로 그 마음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에 양동 사람들은 또 하나의 대역사(役事)를 말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때 지어진 후 그동안 마을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던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바꿔 앉힌 것이다. 두가지의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동네는 전체적으로 서향을 취하고 있는데, 학교 건물이 남향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혈(血)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에서 북류해 오는 형산강 물을 맞이하는 북쪽 제1관문인데, 학교건물이 그토록 아름답게 굽이쳐 오는 길격(吉格)의 조수(朝水)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마을앞을 가리고 있어 마땅히 그 좌향을 바꾸어 신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양동마을이 갖고 있는 상징성, 그리고 그 장소적 뿌리를 전승시키고자하는 노력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치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보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바로 지역주민의 정신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양동은 외부 관찰자의 객관적, 분석적인 눈에 비치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자체 장소성과 상징성, 그리고 지역주민의 지리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력 있는 공간 인것이다.
8. 연구방향(결론)
그렇듯, 풍수지리란 자연지리 현상을 인간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여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 또한 땅의 변화 현상을 이해하여 명당 길지를 찾아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을 짖거나 조상의 유골을 편안하게 모셔 지력(땅의 기운)에 의해서 거주자와 자손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는 데서부터 풍수지리의 발생동기이다.
풍수지리설은 우리 민족의 기층적 사상체계를 이루어 온 수 많은 사상들 중의 하나로, 그 내용의 성속 이나 진가를 막론하고 신라 이후의 역사상 우리 민족에 깊은 영향을 미친 관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풍수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동양적 자연관의 하나이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동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지표의 하에 흐르는 지기라는 무형적인 힘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이란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이다. 이것이 후세 효의 관념이나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속신으로 진전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토지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데, 연구의 방향을 첫 번째는, 토지관의 표출인 풍수지리를 전라도 지방 마을중심(지리적 배치)으로 이 지방의 풍수의 특성사항을 알아봄으로써 마을의 공간특성을 알아보고, 두번째는, 세부적으로 들어가 마당에 대한 풍수고려사항이나, 방위 (집향)에 대한 고려사항을 알아봄으로써 지리적 및 지형적으로 고려된 집의 배치 향의 고려사항을 알아보고, 세 번째는, (방 하나하나는 조그만 (양적공간)이고 이를(음적공간)이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다시 작은 (양)들이 모여 보다 큰 (양)이 된 채를 음적 공간이 둘러싸고 이를 다시 담장, 행랑으로 둘러쌈으로써 보다 더 큰 음과 양으로 확대되어 결국 음양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것은 방안에서는 방이 안이고 대청이 밖이나 다시 대청에서 볼 때는 마당이 밖이고 대청이 안인, 그런 안팎 구조 와도 관계되며 또 바깥사랑채와 안사랑채, 바깥주인과 안주인등등의 안과 밖의 구별과도 모두 같은 원리이다.)
처럼, 공간위주인 음양의 공간적인 의미적 풍수를 알아볼까 한다.
참고문헌
풍수지리와 현대건축 박시익 기문당 1992
생활풍수강론 장영훈 기문당 2000
대한건축학회 통권 17권 건축적 사고로서의 음양개념의 분석 이강훈 1998년 6월
대한건축학외 통권 57권 자연중심 견축계획방법의 기초적 연구 1993년 7월
건축문화 풍수지리와 신도시 (특집) 1995년 1월
출처 :http://www.homun.or.kr/data/2sebu_chui_013.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