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옆에서 / 서정주(未堂)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시에 대한 이해
미당은 그의 자작시
해설에서,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美)의 영상…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을 이 시에 담았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제1
. 2 . 4연은 단순히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시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형성되기까지의 비통과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자성(自省)의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과거이다.
- 정희성.신경림(한국
현대시의 이해 참고)
*서정주 시인의 생애(1915.5.18.-2000.
12.24.)
1915년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됨.
1933년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을 발표하며
등단
1935년-1936년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수학
1936년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1944년 일제말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발표.
1946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으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
1948년
정부수립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서라벌예대
교수,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멤버로 시분과위원장,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
1970-1974년 한국현대시 협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 56회 생일을 맞아 '전두환 예찬시'를
썼다.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2000년 12.24. 별세(85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힘.
2000년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2002년 친일문학가 42명 명단에
오름.
*국화
옆에서는 서정주의
친일시라는
논평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황국(국화)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입니다. 황국이 '거울'과 함께 등장할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황국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 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을 담아 하사한 신기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 |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국화꽃이 일본왕실의 상징물임을 알고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문학적 해석이 진행되면서, 위에서 서술한 '황국'과 '거울'의 문화적 상징성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한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더욱이 그의
친일작품은 시, 소설, 평론, 수필, 르포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할 정도로 다양했고, 또 그 내용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의 천황'은 그
외형만 바꾼 채 지속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을
'제우스'와 '단군으로, 전두환을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으로 찬양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김환희의 논평/
2001,9.24. 오마이뉴스 정지환기자 정리)
* 시는 땀이든 눈물이든 웃음이든 한 시인의 삶의
결실입니다.
시가 시인의 삶과 떨어질 수 없다면, 한국문학계에 뿌린 미당의 공적과
그 삶과 작품에 대한 논평은 두고두고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東)
첫댓글 잘 공부가 됐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생애가 잘못
기록을 옮기셨네요 ㅎ
1015년 출생 잘못을요
감사합니다.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