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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경영하는 ‘이’시인께서 금강산 관광을 추천하신 것은 지난 2월 말께였다.
관광 내용에 비해 요금이 비싸다고 하는 말도 들었고 또 3월 말경의 북녘 산 날씨가 아직은 춥지 않을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한국에 체제하고 있는 동안에 명산 금강산을 한 번 가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관광은 어느 문학회의 주최로 선상 시화전과 사생대회를 비롯해 저명인사들의 강연과 구룡폭포에서의 시 낭송회 등을 개최 할 예정이라고 해서 설레는 기대감으로 선뜻 신청을 하였다. 남편은 강의시간과 연구 스케줄을 이리저리 옮기는 한편, 여행에 대한 사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 답사기」를 구해 읽기도 하고, 100명에 한정하여 무료 증정한다는 고은 시인의 <금강산 답사기> 비디오테이프를 얻기 위하여 영하 18도의 새벽길을 호암갤러리까지 달려가기도 하였다.
고작 3박 2일의 관광을 위해서 우리 부부는 등산화를 새로 사고, 가볍고 따뜻한 겉옷을 챙기는 둥 부산을 떨면서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출발을 1주일 앞두고 관광회사로부터 우리가 금강산관광단 명단에서 탈락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외국시민권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대관광공사로 한달음에 달려간 우리는 그런 규정을 좀 더 자세하게 홍보하였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 라며 정말로 맹렬한 기세로 따지고 들었다. 우리가 처음 케이스라고 변명하는 그들과 근 한 시간이 넘게 실랑이를 벌렸지만, 결국 남편과 나는 50년 만에 겨우겨우 문이 열린 북녘 땅 밟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관광 협상안에 들어있지 않은 외국시민권 소지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인해 추호라도 좋지 않은 경우가 돌발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도 마음대로 관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여행비를 환불받고 돌아서 나오긴 했지만, 사무실 돌층계를 내려올 때는 눈물이 쏟아질 만큼 속이 상하고 섭섭하였다.
마치 애를 쓰고 찾아간 집에서 문전 박대를 받고 거절당한 것처럼, 또는 내가 막 받으려던 보물을 누가 확 가로채어 간 것같이 허탈하고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계획됐던 출발 예정일까지는 울적한 마음을 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차츰 평정이 되면서 문득 이북 실향민들이 떠올랐다. 나는 관광을 가려다가 좌절되었지만, 오매불망 절실하게 그리는 부모형제와 고향산천 방문을 차단당한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이 짙게 나를 내리 누르면서 상념에 젖어들게 하였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제가 나서 자란 곳,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 마음이나 영혼의 안식처(마음의 고향)를 고향이라고 한다 했다.
초등학교 시절 ‘고향’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때가 내게는 있었다.
아버님의 직장 관계로 나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님의 직장관계로 2, 3년의 사이를 두고 함흥, 북청으로 이사를 다니던 우리는 북청에서 해방을 맞고 다음해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누가 나에게 고향을 물으면 부모님의 고향인 충청도의 마을을 댈 것인지, 아니면 이북의 한 도시를 말해야 할지 한참 쩔쩔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미국 유학을 가고, 캐나다에 이주해 사는 동안 이번에는 내 고향은 더 많은 이름으로 더 넓게 퍼져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출생 한 곳, 자란 곳, 그리고 조상들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은 모두가 각각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캐나다에서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나는 한국에서는 외국인이라는 고향상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현대인들은 거의 모두 실향민인지도 모르겠다. 월남한 이북민 같이 생명과 자유를 위하여, 혹은 공부를 위하여, 직업을 위하여, 좀 더 나은 생활 터전과 개인의 이상 달성을 위하여 사람들은 고향을 떠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이런 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고향을 빼앗겼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월남한 사람들이나 도시로 이사한 지방 사람들, 그리고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은 그곳의 형편대로 적응하고 뿌리를 내리면서 일가를 이루게 된다. 특히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다수 속에 묻힌 하나의 대표성 때문에 각자 모두가 민간외교관이 되어 나름대로 한국을 알리면서 유명무명으로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했노라 하는 자부심으로 살아간다.
이들이 고향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요건은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의 망배단이나 휴전선 철조망을 휘어잡고 통곡하며 차례를 지내는 실향민들은 산천초목만을 위하여 북녘 고향이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혹은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의 귀향길이 막힌다는 것은 큰 비극이다. 지금은 세계화시대가 아닌가. 국민의 반 이상이 외국에 거주하면서 힘을 길러 조국의 번영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유태인처럼, 국토와 국민을 좀 더 넓게 보는 안목과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외국시민권자도 자유롭게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린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길일 뿐이다.
어디서 출생했던지 우리는 여러 곳을 지나치며 안착하면서 일생을 산다. 우리의 원 고향, 그곳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살이라면 우리 마음이나 영혼의 안식처는 이 땅 위에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이생의 저쪽 피안을 넘어가는 길목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곳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내 영혼의 본향(本鄕)이기 때문이다.
완 맨 카우 밀크
비가 개인 오후에 공원엘 가 보았다.
여름 내 아이들을 태우고 껑충껑충 뛰던 목마는 두터운 휘장을 뒤집어 쓴 채 활동을 멈추고, 울긋불긋하니 분칠을 하고 흰 거품을 내며 물살을 가르던 유람선도 말뚝에 매인 채 건들거리고 있다.
무더운 밤, 더위를 피해 강변에서 맴을 돌던 페달 보트들이 유람선 주위에 이마를 맞대고 조로록 모여 있는 것이 꼭 백조의 날개 밑에 모인 오리새끼들 같다. 지금쯤이면 한창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올 듯도 한데, 빈 피크닉 테이블들만 을씨년스럽게 한 옆에 쌓여져 있다. 물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바람결을 가늠해본다. 사색의 계절,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서 나무마다 무성하고, 활활 타 오르는 숲은 잔물결이 흔들리는 대로 호반에서 꿈틀댄다.
산책길 한 옆에 폭신하게 쌓아놓은 낙엽더미 속에서 형제인 듯싶은 아이들이 뒹굴면서 까르르 까르르 웃어댄다. 땀이 밴 이마에 가랑잎이 잔뜩 묻어 있다. 무엇이 잡히는지 댐 밑의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는 바지를 걷어 올린 사내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다리 위에서 낚싯대를 길게 늘인 태공들이야 고기를 잡으려고 강물을 바라볼까? 유리알 같이 투명한 강물에 담긴 파아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쫓고 있겠지. 수확의 계절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때문일까? 나는 혼자 온 심심함도 잊고 아까부터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두터운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한 쌍의 젊은이가 결혼을 한다. 벌써 올해 들어 세 번째다. 신랑은 코흘리개 때부터 자라는 것을 줄곧 지켜본 친한 친구의 아들이다. 사랑의 결실이 축복으로 비 오듯 퍼부어지기를 기원해 준다.
이민 온 지가 20년이 훨씬 넘고 보니 이제 차츰 눈물로써 뿌린 씨를 거두는 때가 된 것 같다. 그때에 낳은 아이들이 금년에 모두 대학에 갔다. 그 중에는 아직도 어린애들만 같은 내 조카들도 셋이나 끼어 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 된다. 결혼 초청으로 이곳에 온 L씨가 약혼녀의 도움으로 이민수속을 하고 있었다. 농대 출신이던 L씨는 런던 근방의 어느 농장에서 일을 해주며 숙식을 하고 있었다. 이민국에 가서 면접을 했는데 벌써 두 번이나 낙방을 했다고 남편에게 통역을 좀 해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갔다.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두 번이나 낙방을 했을까 궁금해 하면서 들어서는 남편에게 이민관은 될수록 L씨가 말을 많이 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라고 귀띔을 했다.
“캐나다의 어떤 점이 좋습니까?”
“비유티풀 내츄럴(Natural)."
자연 (Nature)이라는 말을 잘못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저 알아들을 만해서인지 다음으로.
“한국에선 무엇을 했습니까?”
“오키드(Orchid, 난초).”
난초 재배가 취미던 남편이 반색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어떤 오키드를 주로 가꾸지요?” 하고 물었다.
“애플, 피치(Apple, Peach)."
“아 그건 오키드가 아니라 오차드(Orchard)에요.”
남편의 정정을 듣고서야 이민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캐나다에 왔느냐, 어디에 있느냐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쓰던 이민관이 “여기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완 맨 카우 밀크” “홧?” “네?” 이민관과 남편이 동시에 고개를 L씨에게 후딱 돌렸다.
“완 맨 카우 밀크 치큰에그.”
얼굴이 빨개진 L씨는 죄지은 사람처럼 다시 덧붙여가며 열심히 반복하는 것이었다. L씨의 설명을 듣고 난 남편은 통역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폭소를 터뜨렸다. 농장일이 얼마나 바쁜지 자기 혼자서 소를 돌보고 우유도 짜고, 병아리를 사육하고 계란도 모은다는 뜻이었다.
2월 강추위에 새벽 4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혼자서 그 힘든 농장 일을 다 하고 있다는 L씨를 다시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있고, 터져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두 손이 무릎 위에 포개어져 있었다. 남편은 웃다가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민이 되고 결혼을 한 L씨는 결혼 후에도 열심히 살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공장엘 가면 오버 타임을 도맡아서 하고, 저녁 7시나 8시에 집에 오면 다시 지렁이를 잡으러 나갔다. 밤새도록 눅눅한 골프장을 기어 다니면서 지렁이를 잡아다가 팔고 날이 새기도 전에 공장으로 내달으니, 잠은 언제 자고 먹기는 언제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본도 없고 고급 직장도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우고 젊어서 조금이라도 더 저축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남매를 두었다는 소식도 들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여전히 16시간 중노동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이제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또 ‘완 맨 카우 밀크’의 생활을 부지런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들도 금년에는 대학엘 갔을 것이다.
이민 초기에는 누구나 다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얻은 학위나 직위는 이곳에서 빛을 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정한 규격이 아니면 어떠한 기술이나 능력도 쓸모가 없다. 정신노동자가 육체노동자로 전락하여 남의 밑에서 일해야 되는 자격지심이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
부모들이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고생을 한 대가로 좋은 공부를 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게 되었으니 그 은공을 알아달라고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이민 1세가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닦달하였던 그 투지와 절제 심을 너희도 배우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뼈를 깎는 괴로움의 생활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자기 희생이라는 것을 알아준다면, 내 부모를 존경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도 우러나고 그릇된 충동이나 행동을 삼가는 극기심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으로 가득 찬 기쁜 결실의 소식이 사방에서 날아오기를 기원한다.
물비늘에 띄운 편지
이 해도 다 저물어 가는데 쌀자루를 묶지 않은 초조감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강변으로 나갔다. 가을장마에 갇혀서 구중중하니 지내는 사이 어느새 활활 타오르던 단풍들은 가랑잎이 되어 길목마다 수북이 쌓여 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벤 자리가 산뜻한 벼 그루터기들이 풍년을 합창하는 논두렁 곁에는 다 피고시든 연잎들이 커다란 할미꽃처럼 고개 숙이고, 소슬바람에도 맥없이 흔들리는 갈대밭 사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떼 지어 다니는 원앙들이 보일 뿐 두 물이 합친다는 양수리는 고즈넉하기만 했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거쳐 들어온 북한강과 강원도 삼척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온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합쳐지고, 수량이 불어난 한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조선 초기에 수도를 서울로 옮긴 뒤부터 남한강과 북한강은 목재와 세곡들을 상류에서 하류로 실어 나르는 유일한 해상 통로였고, 덕적도를 거쳐 산동반도에 이르는 중국 통상교류의 요충지여서 한강 유역의 역할은 매우 컸었다고 전해진다. 이 강을 확보하려는 격렬한 전투는 이미 삼국시대(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지만, 총길이 514Km에 이르는 강 유역엔 수많은 역사의 유적들과 정자와 누각이 남아 있어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서울에서 가깝고 오기가 쉬워 벌써 올해에만도 대여섯 번은 왔었는데, 올 때마다 갈아입는 차림새가 늘 새로운 즐거움을 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의 양수리는 왜 그런지 내 마음을 자꾸만 묵직하니 가라앉게 하고 있었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 철조망 밑으로 힘겹게 기어 내려온 물방울들이 ‘올해도 틀렸어요’ 머리만 도리질하며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은 오지 않고 해질녘 마지막 나룻배까지 떠나보낸 허허한 심정이 되어 쓰러진 갈대밭을 헤집고 물가로 내려가 보았다. 그새 원앙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때마침 내민 햇살에 잔잔한 물결이 은빛으로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었다.
수만 개 아니 수억 개의 은비늘을 바라보노라니 언뜻 거기에 겹쳐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뒤덮인 ‘수정의 밤’ 거리가 떠올랐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을 기념하여 브란덴부르크에서 성대한 불꽃놀이를 거행하던 11월 9일에 베를린에서는 독일 유대인 주최로 또 다른 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이란 1938년의 일로서, 당시 나치는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이 유대인 차별을 항의하는 한 유대인 소년에 의해 피살된 것을 기화로 유대인의 성전과 상점에 대대적인 약탈과 방화를 자행해 91명을 살해하고 3만 명을 체포했다 한다. 이때 유대인 상점의 진열대에서 깨어진 유리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메웠다 해서 ‘수정의 밤’이라 불렀고, 이것을 시작으로 나치 대원들의 광적인 유대인 말살이 휘몰아쳤다 한다.
외신에 따르면, 슈뢰더 독일 총리는 기념 연설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랑스러운 날도 기억해야 하지만, 같은 날 발생한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인 ‘수정의 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리드만 유대인협회장은 베를린 장벽 붕괴가 ‘수정의 밤’ 사건과 같은 날 일어났다는 것은 축복과 재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다. 도저히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독일과 유대인이 서로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고 용서하며 수용하는 모습은 부럽다 못해 속이 쓰리기까지 하였다.
물줄기는 북에서 남에서 흘러들어 사이좋게 합하는데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한 것일까?
이제 새 천년까진 며칠 안 남았는데, 아직도 우리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이 되어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새날에 거는 기대로 부산스럽기만 하다.
지난 세기의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말갛게 씻어 버리고 서로 사랑으로 화합하는 날은 언제일까 고심하던 중 갑자기 내 마음은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그날은 오늘일 수도 있다.
축복과 재앙이 가까이 있듯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물비늘 하나하나에 통일 잔치의 초대장을 써야겠다. 여기 두 물이 합치는 양수리에서 물비늘에 띄운 편지는 서해로, 태평양으로, 그리고 대서양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면서 흐를 것이다.
손정숙 Jung-Sook, Sohn(Song) jsondaisy1@gmail.com
서울 출생. 재(在) 캐나다 한인 수필 작가. 1999년 『수필춘추』로 등단.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The University of Western Ontario in London, ON. Canada(영양학) 수료. 캐나다한인문인협회 회장 역임.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외동포문학상> 우수상(수필) 수상(2016). 수필집으로 『아니온 듯 다녀가는 길』(2001) 『흐르는 별 무리』(2010) 『영원한 희극』(2017) 『그 하늘 그 바람』(공저, 199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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