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스님을 추모하며
내가 처음에 은사스님과 사제師弟인연으로 맺게 된 동기는 참선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애초부터 참선에 뜻을 두고 해인사로 출가하였다.
그 당시 성철스님께서 조계종 종정이시면서 해인사 방장으로 계시었고 혜암스님이
수좌首座로 계시었는데 내가 출가했을 무렵 은사스님께서는 수도암에서 해인사선원 수좌로 오셨다.
혜암스님이 전당前堂수좌 은사스님은 후당後堂수좌로 계시게 되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인데 참으로 힘이 들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행자들이 선방스님들과 강원학인스님들 그리고 종무소 스님들과 종무원들 또한 그
당시에는 사중에서 큰 불사를 계속하였기 때문에 일하는 처사들의 공양까지 그리고 크고 작은 행사들을
치루려니 새벽 2시45분에 기상하면 밤 9시 취침시간이 될 때까지는 방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질긴 나일론 양말이 일주일에 한 켤레씩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힘든 행자생활 하면서도 큰 법당에서 큰 스님들께서 법문할 때는 바쁜 중에도 잠깐 짬을 내어
법당 밖에서 법문을 듣고는 했었다.
어느 행사날 혜암스님께서 법문을 하시었다.
그날도 법당 밖 기둥 뒤에 서서 법문을 들었는데 말씀 중에 “금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덤으로 사는 세상이려니 생각하면서 그저 죽으나 사나 참선 공부만 열심히 하라면서 출가자는 수행을 위해서라면 배사背師(스승을 배신하는 것)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오로지 수행을 위해서 생사를 떼어 놓고 정진을 한다면 굳이 은사스님을 곁에서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면서 법문 중에 “억!!”하면서 할喝 을 하시는데 침이 튀어서 혜암스님 당신의 입술위에 침이 튀었다.
얼른 손바닥으로 침을 닦았는데 그 동작이 얼마나 재빠른지 대중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법전스님은 선원대중들과 큰방으로 공양하시러 오실 때 뵈올 수 있었다.
체구는 작으셨지만 차돌처럼 단단하면서 매서운 선기禪氣를 느낄 수 있었다.
선원의 젊은 스님께 조심스럽게 저 스님께서는 누구시냐고 물어보았다.
저 스님은 수도암 회주이신인데 평생을 참선만을 했으며,
참선을 하려면 저 스님을 은사로 모시라고 귀띔까지 해주었다.
며칠 후 나는 당돌하게 선원으로 가서 큰 스님을 찾아뵙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인사를 드렸다.
삼배를 올리니 절을 받지 않고 옆으로 돌아 앉으셨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가만히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앉아 있으니 갑자기 “알았어 가봐!!”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다시 삼배를 드리고 방을 나왔다.
며칠 후에 원주스님이 나를 부르더니 큰 스님의 사중 처소인 선열당(지금의 주지실 자리.)시자로 보냈다.
이때부터 은사스님과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사미계 받기 전에 은사스님을 모시고 수도암에 간적이 있다.
사중을 이곳저곳 점검하시는 중에 후원에서 우연히 정각에서 정진하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께서는 정진하지 않고 왜 내려왔냐면서 호통을 치시면서 정진만 열심히 하면 의식주는 해결되는
법이니 공부마칠때까지는 수도암이 불이 나도 내려오지 말고 오로지 화두만 챙기라면서 참선자參禪者는 오로지 화두에 살고 화두에 죽어야한다고 독려하시었다.
정진할 때는 오직 화두만 있을 뿐 그밖에 모든 것은 망상이라는 말씀이다.
내가 스님이 되고 한참 후에 들은 얘기지만 은사스님께서 수도암 선원에 계실 때 선원의 어떤 스님이
종무소 와서 전화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정진 하지 않고 망상을 피운다며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치시면서 전화통을 망치로 때려 부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었다.
큰 스님에게는 그러한 다이내믹한 기질이 있었다.
행자시절에 은사스님을 모셔봤지만 스님께서는 통 말씀이 없으셨다.
필요 없는 말은 일체 하지 않으셨다.
나 자신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나는 무척 좋았다.
“알았어 가봐!” 그 말이 전부다. “가서 밥 먹어!”하면 인심을 많이 쓴 말이었다.
태백산 도솔암에 살면서 은사스님을 두 번 찾아뵙는데 한번은 비구계 받을 때이고 또 한 번은 이가
자꾸 빠져서 치과에 갔을 때인데 큰 스님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원덕이 너 자신한테 속고 있어!
다시는 내려오지 말고 정진해!! 가봐!! 그리고 끝이다.
그 후 도솔암에서 15년 정진을 모두 마치고 은사스님께 인사를 올렸다.
실로 10여년 만에 사제지간의 만남 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가서 밥 먹어!!. 가봐!! 그리고 끝이다.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함축된 법어法語이지만 참으로 무뚝뚝한 노장이시다.
해인사 선원에서 두철을 보내고 수도암 선원에서 정진하려고 마음먹고 택배를 부쳤다.
그때가 2000년도 음력10월8일 큰스님 생신날이다.
도림사(당시는 서광사)에서 은사스님 생신모임이면서 문도회의 하는 날이다.
오늘의 문도회의 주제는 도림사 주지 임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도림사는 주지가 공석이다시피 하여 큰 스님께서 고심하고 계셨다.
우리문중의 스님들은 은사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주지소임 맡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많은 문도스님이 법당에서 모여있을때 은사스님 방에서 위 사형스님 몇 분하고 회의를 하고 계셨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에 “도림사 주지로 임명하는 사람은 무조건 주지를 맡아야지
만일에 주지를 맡지 않으면 문중에서 나가야 된다“.면서 아주 강경하게 말씀을 하셨다고한다.
조금 있다가 회의결과가 발표되었다.
“원덕스님!”
내가 주지로 결정 된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은사스님을 찾아뵙고 여쭈었다.
"큰 스님께서는 죽으나 사나 정진만 하라고 하시더니 이제 와서 주지소임을 맡으라니 납득이 안 갑니다“.
“원덕이 너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리 좌복에 앉아서 정진해봤자 아무런 공부의 진척이 없다!”
동중動中에 있으면서도 앉아있을때와 같은 잡념 없는 정신을 지속시키는 것이 지금의 공부 처이다
하시면서 남악회악 선사와 제자 마조도일스님의 유명한 기왓장법문을 해주셨다.
마조도일선사가 열심히 좌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인 남악회양선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 좌선을 하여 무었을 얻고자 하느냐?"
" 성불 하고자 합니다. ! "
그러자 회양선사는 옆에 있던 기왓장을 줏어들고,
참선을 하고 있는 마조 옆에서 바위에 대고 열심히 갈기 시작했다.
한참을 좌선에 몰입하던 마조선사가 “스님 기왓장을 왜 갈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
마조선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 아니 스님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든단 말입니까?"
" 이놈아 !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을진대 하물며 앉아서 좌선만 한다고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다는 말인가!
참선이란 앉아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 처에서 화두가 끊이지 않고 나가야
참다운 정진이라면서 주지소임을 보면서 정신을 뺏기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고 당부하셨다.
이때부터 나의 주지소임 여정旅程이 시작되었다.
좌선만 하다가 처음 주지소임을 보자니 힘이 들었다.
더욱이 전통사찰도 아니고 새로이 창건 중인 신흥사찰이다보니 경제적인 것과 주변의정리가 되지
않아서 할일이 끝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2003년도 9월에 태풍매미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특히 대구 영남지방은 태풍이 할키고간 상처는 너무나 컸다.
도림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도량마당 여기저기 침수로 인하여 함몰되었고 도로가 유실되어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해인사에서 은사스님이 오셔서 도량을 한 바퀴 돌아 보셨다.
“마당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빨리 수해복구를 하라”고 지시하시고 해인사로 훌쩍 떠나가셨다.
은사스님이 해인사로 떠나가시고 복구 작업을 위해서 며칠을 연구를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잖아도 사중형편이 어려워서 원상복구도 힘든 판인데 시멘트로 전부 포장하라고 하시니 막막했다.
그렇다고 큰 스님께서 돈을 대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큰스님이 괜스레 주지시켜서 이 고생이라고 원망하며 투덜댔다.
그런데 이상한일이 생겼다.
내방에 앉아서 한참 큰스님 원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노크도 없이 홱! 하며 열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문 쪽을 쳐다보았다.
큰 스님이었다.
상기된 어조로 “너!!”하고 소리치며 나를 한참 뚫어져라고 쳐다보셨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라고 호통 치는 듯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해인사 시자실에서 큰 스님께서 도림사로 출발했다고 연락이 올 텐데 소리 없이
오신 것이다.
은사스님을 이 사바세계에서는 더이상 뵈올 수가 없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껍데기 같은 물질의 풍요로움이 진짜인줄알고 혼탁하고 어둠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그리고
지식과 잔꾀만 늘어가고 머릿속은 온통 망상과 잡념의 생각으로 꽉차여있는 이들에게,
서슬 퍼런 지혜의 법도法刀를 휘둘러 못된 버릇과 천박한 생각들을 단칼에 베어버리셨습니다.
항하사의 수많은 모래알 같은 법문보다는 귀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고막이 찢어질듯한
한마디의 고함소리로 귀머거리를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뺨을 세차게 후려쳐서 벙어리의 말문을 트시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한마디의 거짓말로 눈먼 장님을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양귀비가 시녀인 “소옥“이를 부르지만
사실은 시킬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담넘어에 있는 정부情夫 안록산에게
자기 목소리를 듣게 하려고 함일진대
침묵하면 말을 초월했고 말을 하면 침묵을 초월하셨습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니
화택火宅이 양택陽宅이요 탐진치가 계정혜구나
한손에는 칼을들고 한손에는 꽃을 들었으니
그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누가 감당 하리오!
오늘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한사람의 산 사람을 배웅하였으니.
고향이 어디고 객지가 어딥니까!!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첫댓글 스님 많이 슬프시겠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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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서부터 해인사까지 오셔서 조문하신 이거사님께 감사드림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의 산사람을 배웅하다....
가슴이 뭉클하고 시려옵니다.....()()()
중생들을 위해 할일이 아직은 많으셨을텐데 떠날수 밖에 없으신 대종사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기를 .......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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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한사람의 산 사람을 배웅하였으니.
故鄕이 어디고
客地가 어딥니까!!
南無釋迦牟尼佛
南無釋迦牟尼佛
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