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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이 왔다. 방직공장에 새 공장장으로 온 이의 딸이라고 했다. 버들 류씨였던 그애는 낯빛이 유난히 희고 허리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냘펐다. 숫기 없던 그 애는 조용히 앉아 있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가던 날, 우연히 그 애를 보았다. 가방이 무거워 보여 들어다 주마고 손을 내밀자 그 애는 망설이다 가방을 건넸다.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의 중간 쯤 그 애 집이 있었다. 하얀색 울타리가 둘러쳐진 이층집이었다. 울타리 위로 붉은 넝쿨장미가 늘어져 피어있던 어느 날, 하얀 프릴 원피스를 입은 그 애를 따라 그 집에 들어갔다. 집은 크고 멋졌다. 내부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집을 그때까지 TV에서나 보았던 내겐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칠을 한 나무기둥이 호위병처럼 늘어서 있었다. 거실에서 엄마를 부르던 그 애는 따라오라 손짓하며 나비처럼 나풀나풀 제 방으로 올라갔다. 쭈뼛거리며 굼실굼실 따라 올라간 그 애 방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 애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쳐 보이는 피아노 소리는 신비로웠다. ‘피아노 소곡집’을 펴고 양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그 애 모습은 동화 속 공주처럼 예뻤다.
그 애 엄마가 올라왔다. 원피스로 된 홈웨어를 입은 그 애 엄마는 나의 엄마와 많이 달랐다. 그 애처럼 피부가 희고 고왔다. 나의 엄마는 바글바글 볶은 머리에 노상 몸빼 바지만 입었고, 피부는 늘 햇볕에 그을러 된장빛이었다. 그 이층집 모녀는 왕비와 공주를 연상케 했고, 그곳은 동화 속 성을 떠올릴 만큼 내게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곧 친해졌다. 나는 연약한 그 애 가방을 들고 피아노학원으로, 그 애 집으로 따라다녔다. 그 집에 가는 것이 마냥 신나고 좋았다.
하루는 그 애 엄마가 밥을 차려주었다. 된장국에 김치, 밭에서 나는 푸성귀가 전부였던 우리 집 밥상과 달리 상에는 소시지와 장조림 같은 우리 집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한창 먹성이 좋던 나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 애는 입이 짧아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고 난 며칠 후였던 것 같다. 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애 엄마가 간식으로 케이크를 주었다. 달콤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황홀한 맛, 하얀 크림 위에 설탕으로 만든 분홍, 노랑, 연두빛 장미꽃이 얹어진 케이크는 먹기도 아까울 만큼 예쁘고 맛있었다.
그때 우리 집에선 생일에 떡을 해먹었다. 엄마는 ‘생일에 시루구멍을 막아야 잘 산다’며 작은 시루에 떡을 쪄주었다. 엄마가 만든 떡엔 생크림 대신 하얀 쌀가루가, 예쁜 장미모양 설탕과자 대신 검은 콩이 올라갔다. 엄마는 검은콩으로 ‘축♡생일’이라고 써주곤 했는데, 어떤 때는 새벽 잠결에 쓴 탓에 ‘축♡새일’이 돼있기도 했다. 엄마는 시루구멍 막는 데 까지만 정성을 다해줄 뿐, 늘 농사일에 바빠 생일 떡이나 미역국을 함께 먹거나 축하노래를 불러주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떡시루와 과일, 과자 한 접시, 그리고 미역국과 식은 밥이 엄마대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생일날이면 나만을 위한 떡시루가 생기고, 그 떡을 학교에 가져가 친구들과 나눠먹는 재미가 좋았다. 하지만, 그 애 엄마가 준 케잌을 맛본 다음, 엄마의 백설기는 내게 모양도 맛도 그저 그런 밋밋한 것이 되 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도 그 애 집에 가면 먹어보지 못한 과자와 간식을 맛 볼 수 있었다. 쥐가 방앗간 드나들 듯, 나의 하굣길은 으레 그 애 집을 거쳐 오는 것이 정해진 코스가 돼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가방을 들어다주는 것은 핑계고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으러 가는 것 같아 그랬다. 좀 일찍 집에 가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도 양심에 가책이 되었다. 매일 놀다가 늦게 오는 나에게 쏟아지는 언니들의 눈총도 한 몫 했다. 그 애가 놀다가라 붙잡아도 대문 앞에 가방을 두고 뛰어 와 버리는 일이 생겼다. 조금씩 그 애와 멀어졌고, 어느 날 그 애는 아빠의 새 발령지를 따라 전학을 갔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가끔 그 애 집에 갔던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고왔던 아이, 우아했던 아줌마, 맛있었던 간식, 화려했던 이층집. 딴 세상 같기만 했던 것들에 대해 느꼈던 동경과 혼돈의 시간은 가끔 씁쓸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기억에서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옅어지고 흐려졌다.
결혼을 해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부터 자꾸만 또렷해지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편의 것이었다. 그 무렵 몇 번 보았던, 엄마가 생일날 시루구멍 막는 장면이었다.
미리 불려두었던 쌀을 방앗간에 이고 가 빻아 오고도 다시 체로 곱게 쳐 놓는다. 무를 도톰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고 그 위에 물에 적신 고운 면포를 깔고 쌀가루를 포슬포슬 뿌린다. 두툼하게 쌓인 쌀가루를 손바닥으로 쓱쓱 펴 고르게 한 위에 검은 콩으로 ‘축♡생일’을 콕콕 눌러 박아 새긴다. 시루와 뚜껑사이에 김이 새나갈까 밀가루를 반죽해 뚜껑 주위를 꼼꼼히 둘러막는다. 떡시루 밑에 물 끓이는 솥이 따로 있어 그 솥과 시루 사이도 김이 새지 않게 잘 막아야 한다.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때며 떡이 설익거나 눌러 붙을까 엄마는 잠시도 곁을 뜨지 못한다. 불 조절을 하는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행여 변소 갔다 오는 사람은 부정 탄다며 부엌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다 쪄진 시루는 큰 쟁반에 받쳐 윗목에 펴놓은 상 위에 통째로 올려놓는다. 큰 초에 불을 켜 생일 맞은 자손의 건강과 복을 빌며 절을 하고 엄마는 서둘러 밭으로 나가셨다.
가끔 ‘축♡새일’이라 쓰여지곤 했던 엄마의 하얀 백설기. 배움이 짧았던 엄마는 다 익은 떡 위에 잘못 쓰여진 글씨에 몹시 민망해 하셨지만, 날마다 새날 같으라는 엄마의 바램이 담긴 글귀라고 해석해보면 또 어떠랴. 줄줄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 생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껏 시루구멍을 막아준 엄마 마음을 어찌 설탕가루로 찍어낸 제과점 케이크에 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제야 그 담백하고 쫀득한 사랑의 맛을 느낄 줄 아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엄마는 올해 팔순이다. 작년 여름 『이문』 창간호를 가져다 드렸을 때, 돋보기를 쓰고 기록적인 폭염 속에 첫 페이지에서 끝 페이지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었노라고 해 나를 감동시켰다. 딸이 쓴 글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딸이 편집을 맡은 책인데 엄마가 되어 꼼꼼히 읽기라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백설기처럼 정성스럽고 한결같다.
자작나무의 눈(眼)
자작나무 숲, 원대리, 인제읍, 인제군, 강원도.
꼭 하나, 서양식으로 주소를 쓰고 싶은 곳이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숲. 그러기에 생각이 먼저 간다. 생각은, 단숨에 그 숲으로 달려가 등고선이 넓어지듯 천천히 그 숲을 둘러싼 원대리, 인제, 강원도로 그 지형을 넓혀간다.
대한민국 남한 전도를 펼쳐놓고 찾아가는 길은 그 반대다. 지도의 오른쪽 위 어디쯤을 나의 시선은 더듬는다. 강원도는 넓다. 동공에 힘을 주고 그 숲을 찾는다. 한 지점을 향하여 지형은 좁혀져 간다. 마침내 거기에, 자작나무 숲이 있다.
숲은 이미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에 뽑힐 만큼 유명해졌다. ‘힐링’과 ‘웰빙’이 삶의 지표가 되고 트레킹이 여가의 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요즈음의 트렌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작나무 자체가 가진 매력도 단단히 한 몫을 했으리라.
마른 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 해서 붙여졌다는 이름도 마음에 든다. 15~20미터씩 하늘로 쭉 뻗은 여름의 자작나무는 회백색 몸통에 동그스름한 세모꼴 잎을 부족하지 않게 달고 서 있다. 먼 데서 바라보면 폭염 중에 퍼붓는 소나기처럼 눈이, 가슴이, 온 몸이 청량하다. 가을에 물든 자작나무 잎은 연노랑부터 황금빛까지, 원색을 무지 좋아하는 고흐 같은 화가가 가슴을 토해 칠해 놓은 듯 아름답다. 한겨울 추위 속에 잎을 모두 떨궈 버린 채 서 있는 자작나무의 하얀 몸통은 흡사 얼음처럼 차고 투명한 빛을 뿜는 눈의 여왕처럼 매혹적이다.
한때 텔레비전 CF에 북유럽 어느 나라의 자작나무가 ‘휘바~ 휘바~’하는 단어와 함께 나타났다. 껌 한통으로 그 싱그러움을 잘근 잘근 씹는 환상적 경험까지 하게 되자, 자작나무는 나의 시각과 청각, 촉각뿐만 아니라 미각까지 사로잡았다. 언젠가 자작나무로 온통 둘러싸인 숲에 들어가 그 사랑스런 나무를 실컷 바라보고, 쓰다듬고, 그 나무에 기대어 영육의 정화를 얻고 말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삼년 전 여름, 디스크로 통증을 호소하시던 시아버님을 모시고 척추검사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혈액암을 발견하였다. 불과 몇 달 전 시어머님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낸 터에, 아버님까지 암이라니 하늘이 노랬다. 나는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다. 시골에서 미혼인 시동생과 지내고 계시던 아버님을 내 집으로 모셔와 항암치료 원정을 시작하였다. 한 달에 한 번, 대전에서 서울 송파구에 있는 A병원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암병동에는 병실이 부족해 오전엔 그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은 후 항암주사를 맞고 저녁엔 근처 개인병원에 입원해 지내는 식으로 치료를 해나갔다. 워낙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많은 치료이다 보니 주사를 맞은 후 며칠간 예후를 지켜보는 것이 필요했다. 한번 올라가면 최소한 일주일은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아버님은 암이라는 말에 무척 당황하셨다. 평소 수첩에 꼬박꼬박 기록까지 해가며 위, 장내시경이며, 엑스레이며, 피검사 등의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 오신 아버님이셨다. 어머님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신 후 식습관까지 신경을 쓰셨는데 암이라니, 당신이 당혹스러워 하신 것은 당연했다.
처음 집에 모시고 왔을 때는 치료가 끝날 때마다 시골로 다시 내려가시려 했다. 내 딴에는 편히 계시도록 이것저것 신경 써 드렸지만, 당신 아들도 없는 집에서 며느리와 손주들과 지내는 일이 불편하신 게 역력했다. 해군인 남편은 당시 함정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 주간 집에 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여름 무더위에 며느리와 있으려니 런닝셔츠나 파자마 바람으로 계시지 못하고 늘 반팔 티셔츠와 바지를 제대로 챙겨 입으셨다.
아버님은 손주들에게도 미안해 하셨다. 내 아이들은 아직 손이 가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엄마가 서울에 가 있는 동안은 스스로 일어나 학교에 가고 밥을 챙겨먹고 집안일을 분담해야 했다. 이런 기회에 독립심도 기르고 엄마의 빈자리도 느낄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말씀드려도 아버님은 아이들을 측은해 하고 미안해 하셨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의 효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반감되었고 탈모와 구토 등 부작용은 심각해져갔다. 두어 번만 치료를 받으면 예전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계셨는데, 아버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동공은 두려움으로 자주 떨렸다. 아버님이 의사에게 호소하는 고통의 가짓수가 늘어나는 만큼, 담당의사의 입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버님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피폐해져갔다. 마침내 아버님은 고통의 신음을, 현실부정의 몸부림을, 운명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욕설을 온몸으로 뱉어내기 시작하셨다. 몸이 쇠하고 의식이 흐릿해질수록 아버님의 비명 섞인 악다구니는 더욱 거칠고 사나워졌다. 항암제의 영향으로 신열에 들떠 내뱉는 욕설은 분명 나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독하고 무서웠다. 아버님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간병인이었던 나는 귀를 막을 수도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조차 환자 곁에서 또 다른 환자로 변해갔다. 병원지하 매점에서 빵과 음료로 끼니를 때우며 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아버님의 휠체어나 침상을 밀고 검사실과 주사실을, 병원의 이곳저곳을 나는 혼이 나간 듯 유영하며 떠다녔다. 누구라도 부딪혔다면 쓰러져 죽은 듯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라도 시비를 걸었다면 그의 머리칼을 열손가락으로 감아쥐고 아름드리 나무 뿌리를 뽑듯 죽을 힘을 다해 잡아 당겼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장아찌를 담을 때 건더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하려고 커다란 돌멩이로 눌러놓는 걸 본 적이 있다. 사람의 감정은 그렇게 눌러놔도 결국엔 차고 넘쳐 항아리까지 깨뜨릴 수 있다. 머리가 깨지게 솟구치는 이 울화는 어떤 누름돌로도 억압할 수 없다. 나는 지금 간장에 절은 장아찌처럼 울컥 울컥 찌들어간다……’
바로 그즈음이었다. 그날은 검사를 위해 소변을 받아야 했는데, 환자의 의식이 유독 맑지 못해 보호자인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환자라지만 도저히 아버님의 환자복을 벗기고 소변을 받아낼 수가 없어 삼십여 분을 끙끙 앓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한번 터진 울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잠든 아버님이 깨실까 휴게실로 갔지만 오래오래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외롭고 힘들었다. 휴게실 있던 다른 보호자와 면회자들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더 울다가 빼꼼 열린 문 밖을 보았다. 작은 테라스가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아지려나 싶어 그곳으로 나갔다. 거기 자작나무가 있었다!
제법 넓고 둥글게 만들어 놓은 테라스에 울타리를 두른 듯 작달막한 자작나무 십여 그루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전까지 보지 못한, 아니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이 보였다. 그 자작나무 긴 몸통 군데군데 신기하게도 크게 뜬 눈(眼)이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사람의 눈 같았다. 낮은 곳에 붙어있던 잔가지가 꺾여 나간 자국인지, 아니면 자연히 발생한 자작나무 줄기의 문양인지 아직도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의 그 눈들은 분명 나를 보는 여러 개의 눈동자들이었다. 자작나무는 마치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들은 나에게 보내는 지긋한 미소들이었다. 자작나무의 미소, 미소, 미소들은 내게 다가오는 하염없는 위로였다. 나는 솟아나는 눈물을 참고 미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자작나무의 흰 낯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그동안 나의 병원 생활을 묵묵히 지켜봐 준 것 같아 힘이 난다고도 말했다.
그 후로도 나의 간병생활에는 몇 번의 고비가 더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에 조용히 테라스로 나가 자작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다 들어오곤 하였다. 훗날 누군가는 그 때 내가 보여준 평정심이 자작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피톤치드의 효과였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자작나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눈 교감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 후 다시는 울거나 지쳐 주저앉지 않았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후 집에 돌아와 아파트 정원에 있는 몇 그루의 자작나무를 보았다. 역시 그곳에도 눈동자 같은 무늬가 있었다. 전에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나는 자작나무의 희고 고운 살결과 아름다운 잎사귀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지금의 나는 어디에 가든 자작나무의 눈을 먼저 바라본다. 상처와도 같은 눈, 위로와도 같은 눈.
내가 가보지 못한 숲. 그러기에 생각이 먼저 가는 곳. 생각은, 먼저라는 부사의 의미망이 실루엣처럼 드리웠다 사라지기도 전에 그 숲에 가 있다. 생각은, 그 숲 안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며 춤추고 거닐다가 비로소 천천히 원대리, 인제, 강원도를 바라보며 물러 나온다.
가보지 않은 숲, 원대리, 인제읍, 인제군, 강원도. 이제 그곳에 가서 눈동자들과 다시 대면하고 싶다. 빼곡한 자작나무들 속에서 실컷 그것들과 눈 맞추고 입 맞추며 내 삶과 마주할 힘을 얻어 오고 싶다.
마기영:
darak4212@hanmail.net
대전 출생.
충남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문학석사.
『이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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