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德泉君) 사우(祠宇)는 장군면(將軍面) 의랑초등학교(儀朗初等學校) 옆에 있다.
덕천군(德泉君) 사우(祠宇)는 조선 2대 정종(定宗)의 열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을 모시기 위해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세웠던 사당(祠堂)이다.
그후 건물이 낡아 조선 영조 15년(1739)에 지금의 자리인 장군면(將軍面)으로 옮겼다.
덕천군(德泉君)은 가난한 백성을 도왔으며, 왕자의 신분임에도 들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여름에 금강에 홍수가 나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구제하여서,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고도 불렀다.
"사우말 큰우물"
우물앞에 있는 이 빨래돌은 옛날부터 있던 것이라고 한다.
강당(講堂)
이 건물은 경기도 광주군(현 거여동) 옛 묘소에 있던 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묘소(墓所)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송덕비(頌德碑)
송덕비(頌德碑)는 자연석의 한 면을 다듬어서 만들었다.
추모전(追慕殿)으로 들어가는 문.
추모전(追慕殿)은 덕천군(德泉君)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한다.
효자정려(孝子旌閭)
이는 옛 광주군 묘소에 있던 정려(旌閭)를 복제(複製)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孝子大庄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贈謚文忠公李景奭之門
(효자대장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증익문충공이경석지문)"
덕천군 신도비(德泉君 神道碑)는 1754년 10세손 이광사(李匡師)가 찬(纂)하였으나 후에 이광사(李匡師)의 손자 이면우가 추록(追錄)하였고,
글은 이조판서 이면긍(李勉兢)이 써 1808년(순조 8)에 세웠으며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250㎝, 폭 77㎝, 두께 45㎝다.
덕천군(德泉君)의 신도비(神道碑)는 묘역 입구의 오른쪽에 각 1칸으로 지어진 비각 내에 세워져 있으며
신도비 명(神道碑 名)은 전서(篆書)로 "王子 德泉君 贈諡 積德公神道碑銘"(왕자 덕천군 증시 적덕공신도비명)이라 적혀 있다.
내역은 오래돼서 읽기가 어렵다.
신도비(神道碑)옆에는 "泉源深長 萬古不渴"(천원심장 만고불갈)이라고 써 있는데
누구의 글인지 누가 썼는지 알수가 없다.
"샘의 근원이 깊고 길어 오래 오래 마르지 않는다"는 뜻일듯하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2장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하다.
윗부분의 글은 오염이 돼서 읽을 수가 없다.
이런 부분은 후손들이 관리를 해서 잘 보이도록 했으면 좋겠다.
덕천군(德泉君)의 초장지(初葬地)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암리/거여리"(廣州郡 中臺面 巨岩里/巨餘里)로
지금의 송파구(松坡區) 거여동(巨餘洞)인 남한산성(南漢山城) 서문(西門)밖 아래쪽에 있었다.
이 지역이 군용지(軍用地)로 편입되면서 1974년 현재 사당(祠堂)이 있는
세종시 장군면 태산리(世宗市 將軍面 台山里) 문중(門中)의 묘역으로 이장(移葬)하고 석물(石物)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뒤의 곡장(曲牆)은 원래 없었던 것인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조성한듯하다.
비명(碑銘)은 “德泉君兼領宗正卿府使 (덕천군겸영종정경부사)
諡積德公諱厚生 之墓 (시적덕공휘후생 지묘)
高澤郡夫人長水李氏 合窆(고택군부인장수이씨 합폄) 이라 써있다.
부인 장수 이씨는 1419년 대마도 정벌(對馬島 征伐)로 유명한 이종무(李從茂)장군의 딸이다.
묘역(墓域)에서 내려다 본 사우(祠宇)
건물 맨 뒤에 덕천군(德泉君) 사우(祠宇)라 쓴 사당(祠堂)이 보인다.
德泉君墓出土紛靑耳咐壺(덕천군 묘출토분청이호부) 자료사진(인터넷에서 발췌)
이장(移葬)할 당시에 출토(出土)된 항아리로 현재 공주박물관(公州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