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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5일 목요일
[김용호] [오전 4:22] 새벽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날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더욱 새로운 피조물로 성장하고 우리가 하나 되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시키시려는 성령의 역사에 동역자로서 충성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귀한 날들이 주어지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요. 우리 각자에게도 언젠가 마지막 날이 갑자기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신실하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해서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아직도 어두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김용호] [오전 7:58] 윤주자매님~ 허전도사 튼튼영어 카페 동영상보기에 웬일인지 11월8일 이후에 올린 동영상들은 나타나지를 않네요. 도와주세요~~ HELP ME~~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꼭 고쳐져야만 합니다.^^
[최윤주] [오전 9:30] 수업동영상에 최동민 황서윤 동영상이 없어요. 올리면서 오류가 난듯한데 삭제하고 다시 올려보세요~
[김용호] [오전 9:31] 그 아이들은 아직 안 올렸어요. 최근에 올린 동영상은 이다연, 진혜승 등이예요.
[최윤주] [오전 9:37] 날짜 문제가 맞나요? 그런 거라면 좀 복잡해지겠네요~ 전화로 말씀드릴게요.
[김용호] [오전 9:45] 감사합니다. 믿음직한 윤주자매님 감사~~
[최윤주] [오전 9:46] 네~
[정진호] [오전 9:51] 세무사 공부하면서 그런 거는 언제 배웠어? 신통하네.
[최윤주] [오전 9:51] ㅋ
[김용호] [오전 9:54] 예전 교회에서 컴퓨터 일을 혼자 다 했대요.^^
[정진호] [오전 10:00] 우리 교회를 위해 일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예비하셨군요~라고 말하는 게 우리 조직신학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잖아요. 다른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면 견강부회가 되는 거구요. 그러니 다른 교회가 우리를 얼마나 얄밉게 보겠어요. ㅎㅎ
[김용호] [오전 10:02] 집사님 말씀이 맞아요. 조직신학적으로 도키마조,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무지 얄밉겠지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
[정진호] [오전 10:04]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조직신학적인 설명을 하는 거지요. 받아들일지 말지는 모르지만요.
[김용호] [오전 10:04] 그렇습니다.
[정진호] [오전 10:06] 교회에서 자주 써먹는 말,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를 우리도 하게 되네요ㅋㅋ 같은 말 다른 뜻이네요.
[김용호] [오전 10:07] 예 같은 말, 다른 뜻^^ 우리는 더 많이 하게 될 겁니다. 단 깨어 있는 상태에서요.
[정진호] [오전 11:24] 이제 당당뉴스 글이 내려갔네요. 추천기사에도 빠지고요.
[김용호] [오전 11:24] 예 신학 메뉴에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글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정진호] [오전 11:38] 지금의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보면 예수 믿기가 아니라 예수처럼 살지 않는다는 게 거의 대부분이에요. 그러면서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예배당 짓는 데에 소중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하거든요. 사실 사랑의 교회 같은 교회도 구제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
[김용호] [오전 11:40] 예. 요즘의 교회개혁 운동의 방향이지요. 구제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르지요. 교회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상황에 핀트를 잘 못 맞추고 있어요.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적으로도요. 예수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이지요. 그리고 사랑의 교회, 여의도 순복음 교회 등 엄청나게 구제 사업 하고 있습니다.
[정진호] [오전 11:44]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한국 교회라고 하는데 목회자가 부패하지 않고 구제에 힘쓴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고 그거는 별로 어렵지 않게 치유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김용호] [오전 11:45] 교회를 멋있고 화려하고 거대하게 만들고자하는 탐욕이 구제를 하고 싶다는 탐욕을 항상 이기지요.
[정진호] [오전 11:45] 문제가 많은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사들도 크게 문제없고 교회들도 구제 사업 열심히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된 건데 왜 타락했다고 불평을 하는 걸까요?
[김용호] [오전 11:46] 그렇습니다. 다만 구제의 규모보다 엉뚱한 방향의 규모가 더 크다는 것이 문제지요.
[정진호] [오전 11:48] 매스컴에서 떠드는 문제 교회를 제외하면 내 생각에는 한국 교회 그렇게 문제없거든요.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요. 구제도 열심히 하겠다, 전도도 열심히 하겠다.
[김용호] [오전 11:49] 묘한 일이긴 합니다. 대개 순진하고 순수한 기복신앙이지요. 사실 여론의 뭇매를 맞는 교회는 일부 대형교회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습니다.
[정진호] [오전 11:52] 교회가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져 있어서 당당뉴스 같은 데서 비판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거의 진보 기독교 쪽으로 봐야 할 거 같아요.
[김용호] [오전 11:53] 예. 뉴스앤조이는 아예 교회개혁 운동 하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구요.
[정진호] [오전 11:53] 그리고 반대로 우리나라 기독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 쪽이 훨씬 많을지도 몰라요.
[김용호] [오전 11:54] 그렇지요. 대부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그 증거지요.
[정진호] [오전 11:55] 하나님의 촛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확장하고 있는 거라고 보는 사람, 즉 보수성향 교인들 의외로 많을 거에요.
[김용호] [오전 11:55] 결국 사회정의와 교회를 연결 짓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수 개신교를 비난하고 기복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꿋꿋하게 남아 있지요.
[정진호] [오전 11:56] 그런 거 같아요. 열심히 전도하면서요.
[김용호] [오전 11:57] 보수가 구제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율로 보면 겉 치례라고 할 수 있지요. 생색내기 정도인데 워낙 돈이 많으니까 액수가 큰 것뿐입니다.
[정진호] [오전 11:59] 사람들이 비평하는 교회의 모습은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데 교인들이 이타적인 삶만 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든요. 그런 교회마저 찾아보기 힘드니까 그렇겠지요. 사람들 기준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듯한데.
[김용호] [오후 12:01]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진보로 갔지요. 얼마 안 되거든요. ㅋㅋ 정집사님 같은 인성은 극소수입니다.^^
[정진호] [오후 12:02] 그렇게 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면 참 구원 받기 쉬운 거예요.
[김용호] [오후 12:03] 헉~ 그런 말씀 마세요. 서구주류 기독교가 아직도 버티는 이유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워낙 극소수라 교회의 윤리적인 지적질이 권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정진호] [오후 12:04] 그런 사람들은 전부 진보로 가서 돈 걷어서 착한 일 하면 되잖아요. 보면 말로만 구제 구제 하지 진보기독교도 하는 거 별로 없는 거 같아요. ㅎㅎ
[김용호] [오후 12:04] 진보기독교에서도 이타적인 삶을 실제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 집사님의 인성, 싸르크스가 비정상입니다. ㅋㅋㅋ
[정진호] [오후 12:05] 그들도 주둥아리 증인이네요. 말로는 삶의 변화를 외치지만요.
[김용호] [오후 12:05] 그럼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 정도지요. 극소수의 이타주의자들은 욥 정도구요. 교회개혁 운동이 욥들과 부자청년들이 모여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는 구도라고 봅니다.
[정진호] [오후 12:07] 진짜 삶의 변화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까 변화되지 않는 거겠지요? 말로 구원 받고 말로 변화를 외치는 걸 더 좋아하나 봐요.
[김용호] [오후 12:08] 두 탐욕의 대결인데요, 이기적인 탐욕이 항상 이타적인 탐욕을 이기는 거지요.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억지로나마 이타적인 탐욕이 좀 힘을 얻을지도 모르지요.
[정진호] [오후 12:09]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네요^^
[김용호] [오후 12:09] ^^
[김용호] [오후 12:10] 예수님 앞에서 투표해도 아마 기복 신앙이 승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정진호] [오후 12:10] 나는 예수처럼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먼저 나는 이렇게 실천하고 있다고 좀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말뿐이에요. 아프리카에서 한 열 명쯤 입양해서 키우고 자기는 셋방 살면서 가난한 사람한테 돈 다주고~
[김용호] [오후 12:11] 그거 사실 불가능합니다. 윤리도덕적으로도 깔끔한 사람 백년에 한두 명뿐이예요. 속이 켕기니까 검증 자리에 못나오지요.
[정진호] [오후 12:13] 그들도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생기는 거지요.
[김용호] [오후 12:14] 명예욕이 재물욕을 이기는 경우는 불교나 천주교의 결혼 안 한 사람들이 그 분야에 좀 강합니다. 일단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 공포가 커지니까요. 윤리도덕과 비윤리 비도덕의 싸움인데 그것이 명예욕과 재물욕의 싸움인 거지요.
[정진호] [오후 12:16] 일종에 금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헌신을 가장해서 다가올 공포를 미리 차단하는 식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거지요.
[김용호] [오후 12:17] 예. 금욕적 탐욕과 육신적 탐욕의 충돌입니다.
[정진호] [오후 12:17] 아, 이번에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네요. ㅋㅋ
[김용호] [오후 12:18] 개개인도 사실 내부적으로 그 충돌 속에서 살아갑니다. 윤리도덕에 세뇌를 당한 체험들이 모두 있기 때문이지요.
[정진호] [오후 12:18] 맞아요. 체면이라는 게 명예욕이잖아요.
[김용호] [오후 12:19] 예. 그런데 문제는 이타적인 삶도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을 오히려 불행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명예를 목숨보다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인도 마다 않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정진호] [오후 12:20] 그리고 도움을 받는 상대가 삐딱하게 나오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요.
[김용호] [오후 12:21]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했다는 증거지요.
[정진호] [오후 12:21]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어떤 딸이 있는데 자기 엄마가 고생을 많이해서 정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 엄마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대요. 그런데 어느 날 자식들한테 남겨줄 숨은 유산이 있었다는데 그 돈을 자기 남동생한테 다 준다고 했나 봐요. 그것을 듣는 순간 자기 엄마를 죽이고 싶더래요.
[김용호] [오후 12:24] 그런 거지요. 결국 자기 싸르크스의 종이기 때문이지요.
[정진호] [오후 12:25] 스스로 속고 있었던 거지요. 자기는 순수하다고.
[김용호] [오후 12:26] 그렇습니다. 소경,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절대 자기 본질이 안 보이지요. 불교에서 인간의 무명을 지적한 것은 참 대단한 일이예요. 물론 빛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형식논리로라도 거기까지 간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무명은 빛이 없음, 즉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음, 소경, 진리를 보지 못함 등등의 의미니까요. 성경의 빛과 어두움과 형식논리가 똑같습니다.
[정진호] [오후 12:30] 그러네요.
[김용호] [오후 12:31] 그래서 일본의 비교종교학자들이 예수님이 공생애 직전에 인도에 가서 불교 수행을 하고 온 것이 아니냐고 추론하기도 했지요. 형식 논리가 비슷한 곳이 참 많거든요. 특히 법화경을 증거로 많이 내세우더군요. 제가 출가 준비할 때 몇 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종교학자들이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요. ^^
[정진호] [오후 12:34] 나도 처음에 새로운 피조물이 불교의 해탈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지금은 불교는 자기가 비우는 거라면 성경의 진리는 새로운 것이 들어와서 옛것이 밀려 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요. 그리고 깨끗이 비워봐야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오고.
[김용호] [오후 12:35] 예. 그렇습니다. 해탈이라는 중간 과정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해방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푯대인 열반이 엉뚱해서 문제지만요. 독립체로서의 열반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이냐의 차이지요. 그리고 제자도도 형식논리가 비슷합니다. 복음전도냐 하화중생이냐~
[김용호] [오후 12:38] 불교도 하화중생이라고 해서 중생을 진리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내세웁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불교나 기독교나 모두 이 땅에서 복 받고 천당 또는 극락에 가자는 헛소리들을 하고 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하는 짓은 똑같다는 거~~~~
[정진호] [오후 12:40] ㅋㅋ 이럴 때 하는 말이 “그 밥에 그 나물”
[김용호] [오후 12:40] ㅋㅋㅋ 그래서 성경의 진리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서구 기독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종교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요.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두신 덕분에 우리들이 크리스찬이 되었으니 뭐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김용호] [오후 3:30] 미세먼지 엄청나군요 무서워서 차 밖을 못 나가겠다는~~ 다들 건강 잘 챙깁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귀하신 몸들이니까요. 화이팅!!!!
[김용호] [오후 5:57] 오전의 대화 주제 계속할게요. 금욕적 탐욕과 쾌락적 탐욕의 충돌이라는 표현이 더 합당할 듯싶네요. 인간의 탐욕의 두 유형이지요.
[정진호] [오후 5:59] 스토이시즘과 에피큐로이즘~
[김용호] [오후 5:59] 에피큐리아니즘이 윤리도덕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쾌락주의로 번역한 것은 탁월한 번역입니다. 윤리도덕적인 삶이 진정한 쾌락을 보장한다는~~ 헉! 집사님도 이미 같은 통찰을~~
[정진호] [오후 6:00] 인간의 탐욕의 형태는 과거부터 이미 다 나왔네요.
[김용호] [오후 6:02] 예.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스도이고 철학자와 에비구레오 철학자들과 부딪히는 장면을 보고 성경의 완벽함에 탄복을 했었지요. 그 둘이 인간들의 가치 지향의 두 방향이거든요. 좌와 우~ 그러나 성경은 똑바로 가라고 하시지요. 스토이시즘도 아니고 에피큐리아니즘도 아닌 제3의 길~ 인간은 상상도 못하는 길입니다
[정진호] [오후 6:03] 동양에서도 그런 탐욕에 대한 통찰은 이미 다 나왔겠지요? 예를 들면 극기복례 라는 것도 일종의 금욕주의일 테니까요.
[김용호] [오후 6:04] 예 맹자의 4단, 즉 인의예지가 좋은 예입니다. 그 중 예가 사양지심인데 삼가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거지요. 그 예를 이루기 위해서는 극기,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극기복례인데 말씀대로 금욕주의의 일종이지요. 그리고 이기이원론도 인간 수준에서는 아주 심오하지요. 기독교가 제일 유치합니다. 성경이 가장 심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가장 유치한 인간론이 서구 기독교의 인간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심오한 인간론이 성경의 인간론인데 말이지요. 참 기막힌 현실입니다.
[정진호] [오후 6:09] 인간들이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는 다 밝혀놓았는데 그것이 죄인의 속성이라는 것만 몰랐던 거네요.
[김용호] [오후 6:10]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정진호] [오후 6:11] 예수님은 그 죄를 드러내러 오셨구요.
[김용호] [오후 6:12] 예. 어느 문화나 짐승의 마음에서 떠나 인간의 양심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예수님이 인간의 양심이야말로 악의 본질이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서구 기독교가 예수님이 짐승의 마음을 꾸짖으시면서 인간의 양심을 회복하라고 하셨다고 해석하는 거지요. 대책이 없습니다.
[정진호] [오후 6:16] 죄란 무엇인가가 성경의 출발점인데 그것을 인식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거에요.
[김용호] [오후 6:16] 그러니 설교가 기복 아니면 윤리도덕 강의로 채워지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6:16] 예수 믿지 않으면 죄라든가.
[김용호] [오후 6:17] 예. 불교를 포함한 동양철학은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했었는데.... 아쉽지만 어쨌든 그 결과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그 공을 던질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그 공을 정확하게 던질 것인가.
[정진호] [오후 6:18] 기독교인들에게 “죄가 뭔데?” 하고 물어보면 대답할 사람 별로 없어요.
[김용호] [오후 6:19] 아직 못 보았습니다. 제가 책을 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정진호] [오후 6:24] 죄가 뭔지 이론적으로 이해를 해도 자기 자신에게 적용이 되어서 감각적으로 자기의 죄성을 깨닫는 것은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이것도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마치 새로운 피조물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체험하는 것이 다르듯이요.
[김용호] [오후 6:25] 정답입니다. 이성보다 본원적이고 심오한 것이 감각이고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정진호] [오후 6:29] 그런데 우리가 죄를 이론적으로 듣고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체험하기는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즉 성령의 역사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난 후에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요. 깨닫지 못했는데 성령의 역사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나요? 적어도 동시에 일어날 수는 있어도요. “아!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거구나” 뭐 이런 거요. 즉 정확한 성경에 대한 이해를 위한 노력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게 아닌가? 기도 열심히 한다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하는 거지요.
[김용호] [오후 6:47] 성령의 역사를 조직신학의 기반 없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멋대로 오해하고 말지요.
[정진호] [오후 6:48] 그럴 거 같네요.
[김용호] [오후 6:49] 차라리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ㅎㅎ
[정진호] [오후 6:49] 조직신학이 기반이 되서 정확한 간구의 기도가 필수겠지요. 물론 백 프로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요. 조직신학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대두가 되는군요.
[김용호] [오후 6:51] 물과 성령, 즉 말씀과 성령으로입니다.
[정진호] [오후 6:52] 그게 그 말이군요.
[김용호] [오후 7:11] 우리가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서 계속 성경을 연구하고 조직신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아마 종말 때까지 끝이 안 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5절에서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의미는 “지금 단계에서 잘 하라. 다음 단계에 이르면 또 합당하게 알려주실 것이다”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깨달음과 체험의 수준에서 충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깨달음과 체험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주저하면 안 되지요. 교만해도 안 되지만 머뭇거려도 안 됩니다.
[정진호] [오후 7:19] 오직 자기 수준에서 성령을 열심히 구하라는 것이네요.
[김용호] [오후 7:20] 예. 완벽을 추구하다보면 그것만 하다 인생이 끝나버리니까요.^^ 사도 바울도 자신이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라고 인식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이 그것을 보여주지요. 완벽해서 겸손한 것이 아니라 주체를 알기에 겸손한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다”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7:26] 구원파는 이 귀절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네요.
[김용호] [오후 7:26] 지워버린 거 같아요. ㅋㅋ 제가 박옥수 목사 책을 열 권 이상 읽었거든요. ^^
[정진호] [오후 7:27] ㅎㅎ 그 부분에 관한 내용이 없나보네요.
[김용호] [오후 7:29] 예. 없습니다. 그 말을 꺼내면 책을 다시 써야 하니까요. ^^
[정진호] [오후 7:29] 결국 자기네 이론에 맞는 부분만 가지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나보네요.
[김용호] [오후 7:29] 그렇지요.
[정진호] [오후 7:30] 다른 교단도 다 그런 식이겠지요?
[김용호] [오후 7:30] 대부분 다 그런 면에서 동일합니다. 루터도, 칼빈도, 웨슬리도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자신들의 주장과 상치되는 성경 구절들을 항상 함께 제시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지요. 말씀을 선택해서 그 말씀들만 조합해 주장을 폅니다.
[허남회] [오후 7:31] 밧데리 방전이래요. 메롱~^^
[정진호] [오후 7:31] ?
[허남회] [오후 7:32] 제가 전도사님 옆에 있거든요.^^
[정진호] [오후 7:32] 아, 전도사님 휴대폰이 방전이라구요? 오늘 수다가 너무 많았나보네요. ㅋㅋ 저도 집에 다 와 가니까 오늘 수다는 내일로 넘기지요. 하루 이틀 수다 떨 것도 아닌데. ^^
[허남회] [오후 7:37] 그렇게 전해드렸어요^^
[김용호] [오후 7:59] 오랜만에 수업 펑크난 시간에 같이 식당에 갔다가 방전~ 지금 차로 와서 갈아 끼웠습니다. ^^ 기존 조직신학은 두 부류입니다.
1. 정통신학자들의 세련된 조직신학은 자기 의로 세운 조직신학이고
2. 소위 영성가나 설교자들의 엉성한 조직신학은 자기 공포 또는 자기 탐욕으로 세운 조직신학입니다.
그 좋은 예로 사랑의 법에 대한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1. 정통신학자들은 이성을 동원해 자기 의를 기반으로 사랑이 옳은 것임을 주장하고
2. 영성가들이나 설교자들은 자기 감성을 기반으로 사랑이 행복의 조건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은 먼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가 이웃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헌신하는 것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사랑을 행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그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논리적으로 관통하는 합리적인 조직신학적 접근입니다.
이러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체험을 한 사람에게만 가증한 일입니다. 그 체험이 없으면 인간의 의, 공포와 탐욕으로 접근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조직신학이 발표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성경의 구원의 논리와 우리의 체험을 자신들의 간접 경험으로 삼아 훨씬 수월하게 성경의 진리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된 사람에 한해서지요. 그 사람이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의 조직신학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8년 동안 설명하고 삶을 보여주었지만 다 이해하고 심지어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간 형제도 있었음을 우리가 압니다. 언젠가 그 형제가 성령의 역사로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냄새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때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는 우리에게 올 이유가 없지요. 우리에게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진동하니까요. “형제님의 소원을 버리세요”라고 했던 제 말이 그렇게 끔찍하더랍니다. 그것이 출발 지점인데 말이지요. 무슨 뜻인지 이성으로야 잘 이해했지만 감성적으로 끔찍한 거지요.
사람의 생각이 감정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지요. 이성보다 감성이 원초적이고 강력합니다. 감성은 무의식의 노예의지와 좀 더 밀접하고 이성은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은 단지 효율성을 추구하는 말단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의 노예의지, 또는 감성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수인인 것이지요.
기존의 조직신학들은 그 이성으로 세워진 조식신학과 그 감성으로 세워진 조직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단 끝~
내일은 또 옵니다^^
(오겠죠? 오리라고 믿습니다.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니까 그렇게 믿게 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