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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에 대한 무지가 신격화 낳았다”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따마 붓다의 일생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따마 붓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은 경전들 여기저기에 부분적으로 흩어져 전해지는 데다가 더욱이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가 뒤섞여 있고, 후대의 전적일수록 역사적 존재로서 붓다의 모습보다는 신화적인 모습들이 더욱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따마 붓다의 전기를 읽을 때, 저자에 따라 붓다가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어떤 자료를 어떤 시각에서 선택하느냐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우리 주변에는 고따마 붓다를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신심이 부족한 것처럼 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적 존재인 고따마 붓다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심을 정립하는 것이요, 바른 신행의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누구의 삶도 사회의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 고따마 붓다의 삶도 그가 태어난 역사와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그의 삶을 반영하는 가르침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가 어떠한 변동기에 있었으며, 고따마 붓다와 교우했던 이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붓다는 신이 아닌 '길을 가리키는 사람'
고따마 붓다가 태어난 시대는 봉건적 세습 군주국가에 의해 공화정을 펼치던 부족국가가 정복되어가는 정치적 격변기였으며, 제2의 계급에 속했던 캇띠야들이 바라문들의 명목상 권위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시기였다. 또한 강가강 중류 지역에서 점차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로 제3의 계급에 속했던 평민들 가운데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이들이 사회적 실력자로 부상하는 시대였으며, 고대 인도의 사상계가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갈라져 극한적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혼돈의 시대였다.
이처럼 고따마 붓다는 마치 혁명이라도 일어날 듯한 격변의 시대에 태어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조차 없는 격변과 혼란의 한복판에 태어난 붓다는 이미 극한 대립을 조절하고 화해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을 떠안고 온 셈이다. 붓다가 말한 중도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 땅의 대부분 불자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신행은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 고따마 붓다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체험을 통해 자기화하기보다는 신격화되고 초인화된 붓다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마디로 불교학이라기보다 불교신학의 성향이 짙다. 고따마 붓다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방식은 신앙심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교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불러왔다. 불교의 신학화야말로 불교 타락의 극치라 하겠다.
고따마 붓다를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는 고따마가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각자로서 위대한 스승이요, 출가한 이들의 단체인 상가의 창설자요, 상가의 후원자들인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를 조직한 지도자였다. 당시의 불교도에게는 우상숭배도 없었고, 출가자에게는 사제의 역할도 없었다. 붓다는 선각자로서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 신이 아니었다.
라자가하에서는 시자 우빠와나에게 “내가 지금 풍으로 척추가 아프니, 너는 지금 성으로 들어가 따뜻한 꿀물을 조금 구해오라”고 했고, 아난다에게 “지금 나는 늙어빠진 노인이라 머지않아 갈 것이다. 나는 인생행로의 끝에 도착했고, 생의 한계를 맞고 있다. 내 나이 80을 넘지 않았느냐, 나는 이제 쉬고 싶을 뿐”이라 했듯이 붓다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제자 왓깔리가 “나는 오랫동안 부처님을 가까이서 뵙고 싶었는데 몸에 병이 들어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보아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라 하여 오직 붓다가 깨달은 법을 터득하는 것이 붓다를 만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붓다를 신처럼 보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인도 대륙 남쪽 앗싸까국에서 멀리 마가다의 라자가하까지 찾아왔던 16명의 수행자들이 “저 분은 혹시 신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었고, 꼬살라국의 웃깟타에서 세따비아로 가는 길에 만났던 바라문 도나도 “당신은 신이 되셨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붓다는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이 “붓다는 금강신이라 하던데 늙고 병드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리의 체현자인 나에게도 늙고 병들며 죽는 일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나 역시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는 숫도다나요, 어머니는 마야시며, 캇띠야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일 뿐”이라 했다.
붓다 그분을 신처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붓다 자신이 말했듯이 인간일 뿐이라고 볼 것인가. 붓다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더 이상 번민하지 않으면서 대자유의 삶을 누리는 지혜를 성취한 인간이기를 원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중생들의 마음은 지상의 인간이 아닌 신으로 그리려고 했다. 붓다에 대한 존경심이 그려내는 아름다움이겠지만 붓다에 대한 실체적 접근에는 큰 장벽이 된다.
붓다에 대한 무지, 한국불교의 위기
붓다가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위대함은 오히려 붓다에 대한 시기질투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붓다에 대한 시기질투는 붓다를 모함하고 살해하려는 사악한 행위까지 불러왔다. 반대세력의 모함은 붓다가 겪게 되는 아픈 시련이었는데, 사람들은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는 데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는 정말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지만 그의 삶을 지켜보면 붓다의 위대성에 더 이상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업보 자체를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라 할지라도 인과의 이치를 초월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자신이 행한 업에 대한 대가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과의 필연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인과응보를 강조함으로써 어떤 사람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용수는 붓다가 인과의 굴레를 넘지 못하고 겪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일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1. 순다리 변사사건(외도들이 죽여 놓고 붓다에게 뒤집어 씌우려 함)
2. 찐짜마나위까의 거짓 임신 사건(사람들 앞에서 붓다가 임신시켰다고 외치다가 옷베 등으로 배를 부르게 했던 것이 드러나 임신하지 않았으며 외도들이 시켜서 했다고 고백함)
3. 데와닷따에 의해 발에 상처받은 사건(사촌 형인 붓다를 살해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려고 산에서 돌을 굴렸는데 그 파편이 날아와 발등을 다침)
4. 걸식하다가 나뭇 가지에 발이 찔린 사건
5. 위두다바의 샤까족 몰살 사건(첩인 종에게 난 딸을 이웃 나라 왕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앙심풀이)
6. 웨란자에서 말먹이를 먹어야 했던 사건
7. 찬바람으로 척추를 앓았던 일
8. 성도 전의 6년 고행
9. 빤짜살라 마을에서 걸식하지 못한 일
10. 웨살리의 고따마까 쩨띠야에서 동지 전후 8일 밤을 세 벌의 가사로 추위를 견뎠던 일
이와 같이 역사 속의 붓다는 설화 속의 붓다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불교를 믿으면서 '부처가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교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고따마 붓다, 그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불교의 교주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구도와 자비 실천에 집중한 붓다의 80 평생
고따마 붓다의 80 평생을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을 얻기 전의 구도의 과정과 깨달음을 얻은 후의 자비 실천의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되기까지의 삶, 즉 구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숫도다나의 아들로 태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다가 29세에 출가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존재의 실상을 눈뜨기까지의 삶은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구도의 길에 나섰는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볼 때, '엄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기 위해 욕망을 떨쳐내는 과정'이었으니,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었고, 지혜를 완성하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욕망에 가득 찬 기대감을 떨쳐버리는 비움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붓다가 깨달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말 자체가 무엇인가 없었던 것을 있도록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있었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요, 그것은 '있는 사실 그대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실지견이 바로 붓다의 깨달음을 번역한 말이다. 그 '알고 보는' 깨달음이 보편성과 타당성을 가졌기에 등정각이라 하고, 정변지라 했다.
붓다가 말하기를 “붓다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상주하는 현상계에 존속하는 이치이며, 현상계의 근원적인 원리로서 붓다인 내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했던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사실 그대로'가 현상계요, 현상계는 고정되어 있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수시로 바뀌고 변하는 역동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여)'고 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의 마음 상태를 멸진정이라 했는데, 그것은 몸뚱이의 상태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느끼는 감각적 느낌(수)이나 그 감각적 느낌을 가지고 지각하는 것(상)을 모두 떨쳐 없애 버린 무념무상의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무심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깨달았다는 것은 무심으로 보고 무심으로 알았다는 것인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을 말하고, '안다'는 것은 사고가 만들어 내는 이름과 문자의 세계(명)를 말한다. 그러니까 고따마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과정은 결국 5온에서 말하는 수와 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고따마 붓다가 깨달았다는 것은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내 목전에 펼쳐지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직관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통해 세상을 보거나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붓다는 그 선입견을 '욕망에 가득 찬 기대감'이라 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는 말이다.
붓다는 어떤 분인가? 이제 인도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붓다라는 이가 어떤 분인지를 고따마 붓다의 입을 통해 알아보자.
한 바라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붓다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바라문아,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 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나를 붓다라고 말한다."
붓다란 어떤 존재인가를 붓다 자신의 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붓다는 분명 역사 내적 존재이지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것은 신앙심의 발로이겠지만 그러한 마음만으로는 붓다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다음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다. 구도의 길에 들어선 싯달타의 삶이 천둥번개가 치고 폭포수가 내리쏟는 듯한 치열한 투쟁의 삶이었다면 정각한 후의 붓다의 삶은 잔잔하고 평온한 자애가 흘러넘치는 성자의 삶이었다. 전반부는 오직 지혜를 완성하는 길이었다면 후반부는 성자의 잔잔하면서도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의 실천과정이다.
붓다의 전도 선언, 불교 대중화의 길 열어
성자로서 붓다의 삶은 자비심에 충만한 인간애의 분출이었다. 그의 인간애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깨달음을 얻은 이의 양심의 발로이자 새로운 시대적 사명에 눈뜬 것이다. 붓다로서의 그의 삶은 무지와 맹목의 굴레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였으며,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오직 지적 성숙뿐임을 알아 그칠 줄 모르는 가르침으로 나타났다.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임종의 날을 향해 천리 길을 걸으면서 자비에 가득 찬 말씀을 나누었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자신을 뵙고자 하는 이면 그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다. 29세에 출가하고, 6년간 수행해서 35세에 성불한 붓다는 만 8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45년간 오로지 전법의 길 위에 서 있었다. 80 평생 중 가장 긴 기간 동안 전법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전법을 통해서 불교는 새로운 인도사회의 사회운동, 정신운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한 점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분이 깨달음을 얻고 평생 노구를 이끌고 설법의 길에 나섰다는 점이다.
붓다는 와라나시에서 60명의 제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비구들아, 나는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갈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전하라. 원만 무결하게 청정한 법행을 설하라.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나 법을 들음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비구들아, 나도 법을 전하기 위하여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서 설법하리라."
이 전도 선언은 불교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여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붓다와 비구들은 동일한 자격으로 전도에 나선다는 것이요,
둘째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번민에 빠져있는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나선다는 것이며,
셋째는 한 사람씩 흩어져 가라고 했으니 불법을 전파하고자 하는 길에 저항이나 박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감정에 호소하여 절규하는 예언자적 태도나 권위를 앞세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것이 아니라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섯째는 출가 희망자가 있을 때는 현지에서 입문시키라는 것이며,
여섯째는 붓다 자신도 홀로 전도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붓다의 전도 선언이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당시 바라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법으로 전수해 온 데 비하여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붓다 이후 불교 역사의 전개는 바로 이 전도 선언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고따마 붓다가 이 세상에서 법음을 전하다가 최후를 마친 것은 서력 기원 전 486년의 일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일 뿐이고, 그 분의 역사적 존재 의미는 기원 전 486년의 사건과는 관계없다. 오늘의 불교도들의 마음에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붓다는 우리 앞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지만 불교도들이 붓다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분은 벌써 죽어버린 것이다.
신학화된 불타관 벗어나 인간 붓다 조명해야
불교도는 붓다의 부활을 희구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구현하기를 바랄 뿐이다. 고따마 붓다가 중생의 현실에 살아 있느냐 죽어버렸느냐는 기원 전 486년의 사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불교도들의 마음자세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붓다가 오늘의 불교도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려면 그 분의 삶을 생생하게 조명하고, 그 분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는가를 늘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만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붓다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따마 붓다이다. 붓다는 자신의 시대가 안고 있는 온갖 모순과 불합리를 깊이 통찰하고 그것을 일깨우고 개선하는 데 앞장섰던 역사적인 존재였다. 교리적으로 말하는 붓다는 초역사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초역사적인 존재로서 붓다에게는 생로병사도 없고 깨달음의 극적인 순간도 없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초역사적인 존재로서 붓다를 생각한다면 그의 불교는 이미 역사를 벗어나게 된다. 역사를 벗어난 불교는 신학화된 불교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화된 불교에서는 승려는 고따마 붓다의 뒤를 잇는 수행자가 아니라 사제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이 땅의 많은 출가자들이 사제의 역할에 매달려 있을 뿐 붓다의 정신으로 살려는 몸짓은 적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의 위기이다.
사찰의 수가 적고 규모가 작아서 불교가 중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찰이 허름하고 작더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출가자의 정신이 살아 있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 사찰의 규모는 거창하고 화려한데 그곳에 살고 있는 출가자들의 정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는 고따마 붓다 역시 죽어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불교를 중생의 역사에서 생동하는 삶의 가치로 되살려 내려면 신학화된 불타관에서 벗어나 인간 고타마 붓다의 진면목을 읽어내야만 한다.
우리가 찾는 붓다는 불전에 안치된 우람한 불상도 아니요, 우상화되고 신격화된 붓다도 아니다. 자신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인간 고따마 붓다이다. 붓다의 삶은 붓다 자신의 존재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삶은 붓다가 살았던 구체적인 역사 상황을 통해서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고따마 붓다와 오늘 우리의 만남은 항상 새롭고 신선미가 넘치는 현재 진행형이어야 하고, 글과 머리로 만나는 건조함이 아니라 삶과 가슴으로 만나는 온전함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삶도 그가 놓인 구체적 상황에서 전개되는 활동일 뿐 정형화된 어떤 패턴이나 모델이 있을 수 없다. 패턴을 짜놓고 거기에 맞추려고 한다면 역동적인 생생한 삶이 아니라 관념화되고 박제화된 죽은 삶이 되고 만다. 고따마 붓다의 삶을 생생하게 읽어내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불자다운 삶인가 모색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대불교’ 2009년 4월 29일자 기사에서
첫댓글 혜민 스님이 불교를 기독교 비슷하게 만들어 포교하려는 걸 보고 그가 진정한 불자인가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을 좋게 보았던 터라 독자로서 나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한 사람의 진실한 구도자였는데 불교를 과도히 대중화시키려는 대승 불교 사람들이 부처를 신격화했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줍니다. 붓다 우상화를 질타하는 한 불교인의 일침이 따갑습니다.
불교인은 그렇다치고, 기독교인들은 이런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