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질투는 나의 힘 -
나는 외로운 늑대
- 양곡
녹음방초 우거진 동의보감촌의 점심시간
허준 순례길 오장육부기를 걷고 있는 나는
오늘도 영혼이 배고픈 외로운 늑대 한 마리
흐리고 습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공휴일
승용차 관광버스로 주차장은 가득 차서 넘치고
정작 영혼을 살찌우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찾아내지 못하는 나는 한 마리 외로운 건데
관광객 관람객 사이를 헤치며 사람들의 발길
뜸한 점심시간 한때를 한없이 유영 遊泳하고 있다.
분수대 폭포에서 내뿜는 물줄기들을 친구 삼아
턱 밑까지 차오르는 더위를 이따금
물리치며 배고픈 이리떼가 마냥 나는 허기진
영혼을 달래가며 석경귀감석복석정을 찾아가고 있다
지나는 길목에 만나는 정자들이며 누각들
해부동굴이며 무릉교는 마음을 잠시 쉬어가는 곳
바람이 불어오든 불어오지 않든 거쳐야만 지나칠 수
있는 나에게는 참새의 방앗간 같은 곳
아무래도 칙칙한 욕망을 가슴속에 억누르며
겉으로는 점잖은 발걸음으로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헛된 헛한 영혼이며 가녀린 정신 달래가며
우리들 생명의 근원인 기를 찾아 기바위를 찾아
130만 평 동의보감촌의 점심시간을 걷고 있다
*양곡: ‘개천 문학’ 신인상(1984), ‘문예 운동’ 봄호 신인상(2002)으로 등단. 작품집으로 시집 ‘덕천강’, 창작산문집 ‘인연을 살며’ 등 다수. 수상으로 제2회 경남작가상, 제3회 현봉문학상 등
모든 사랑에는 질투가 있다. 엄마의 젖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아이의 처절함부터 사랑하는 이의 관심과 사랑을 끌기 위한 고군분투까지.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기쁨에 나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의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매력적인 여자였다. 야생에서 한 마리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수컷들의 생리를 이제야 나는 알 것 같다.
그녀는 나만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한 것일까, 아님, 날 떠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그날 이후 나는 사무실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늘 마음이 불안했고 두려웠다. 점심 식사 후 복도 자판기 앞에 모여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는 사무실 직원 곁을 지나다 나는 이런 말까지 듣게 되었다.
“야! 들었지? 요새 옆 사무실 이 대리와 K 관세사 여직원 정유희인가? 둘이 엄청나게 잘 된다며?”
“에이! 내가 보기엔 이 대리 혼자 좋아하는 것 같아. 그 여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만만찮은 상대잖아. 서울내기가 어디 쉬워?”
“무슨 소리야? 어제 퇴근 후에 삼겹살집에서 둘이 웃으면서 소주 마시고 있던데?”
“그래? 하긴, 그 여자 매력은 정말 치명적이지. 야! 내가 결혼만 안 했더라도 그냥, 한방에.”
“넌 꿈도 못 꿔. 자슥아. 촌놈같이 생겨서 어디 저리 예쁜 여우 같은 서울내기를. 예끼!”
“와하하.”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지나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부장 방에 가는 것을 잊고 그 길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답답해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마음을 다잡은 후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하려다, 아직은 아니다 싶어 참았다. 그냥 소문은 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때였다. 내 등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하셨어요?”
그녀와 연희였다. 둘 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연희가 다른 손에 잡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게 내밀었다.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무슨 담배를 그리 급하게 피우세요?”
그녀는 내가 뻔히 무엇 때문에 줄담배를 피우는지 알면서 시치미를 뗐다. 옆에 있는 연희가 거들었다.
“응. 과장님은 요사이 바쁘셔. 요새 우리 사무실에 일이 많거든. 참! 내 정신 좀 봐. 오늘 오후 1시 30분까지 부장님 회의자료 올려야 하는데. 유희야. 미안. 나 먼저 내려갈게. 과장님과 놀고 있어. 일이 많은 만큼 외로 우실 거야.”
연희는 내게 눈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버렸다. 나를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둘 다 날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옥상 담벼락에 두 팔을 걸쳐 하늘만 쳐다보았다. 연희가 건네준 아이스크림은 난간 위에 둔 채.
“나, 그냥 갈까요?”
그녀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렇게 물었다. 멀찌감치 저쪽 편에서 담소를 나누던 일단의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나는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요즘 잘 나간다면서?”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었다.
“뭐가요?”
“그놈이랑 잘 된다며? 어제는 삼겹살집에서 다정하게 소주도 먹었다던데?”
“허락해놓고선, 내 뒷조사까지 하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같은 빌딩 안에서 매일 보는 사람이에요. 내 또래구요. 그래서 친구삼아 술 한잔하면서 일 이야기며, 고민 같은 거 서로 나눴을 뿐이에요.”
“그대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그놈이 딴 맘을 품고 있다면 어쩔 건데?”
그녀는 내 말이 우스운지 혼자 깔깔거렸다.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과장님!”
“어라,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나는 진심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그 친구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면야, 나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죠. 저도 노처녀로 늙긴 싫거든요. 이번에 서울에 가니 엄마도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도 하셨구요. 조건만 좋으면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꼭지가 돌 지경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손을 잡아주고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왜 이럴까.
“진심이야?”
내 말에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 점심시간이 끝나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저만치 막판까지 수다를 떨던 여직원들이 급하게 내려가는 게 보였다.
“우리도 내려가요.”
나는 그녀의 왼팔을 잡았다.
“오늘 퇴근하고 만나.”
“알았어요. 아! 그 친구에게 연락 안 오면요.”
그렇게 말하고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옥상 출입구로 갔다.
사무실 근처는 이제 그녀와의 만남 장소로 부적합했다. 이미 그녀는 이 빌딩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매너는 늘 화젯거리가 되었다. 나는 퇴근 직후 그녀의 집 앞, 포장마차에서 기다린다고 문자를 보냈다.
봄이 오려는지 저녁 6시가 넘었음에도 날은 훤했다. 혼자 포장마차에 앉아 서비스로 나온 당근과 콩나물국으로 소주를 마시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소주 한 병을 먹고 나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아직 그녀는 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문자를 보내려다, 아마 사무실 일이 바쁜 탓이라 여겨 그만두었다. 이제 날은 막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내 옆으로 연인 한 쌍이 들어왔다. 여자는 남자 옆에 꼭 붙어 앉아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으나, 그녀가 금방이라도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저녁 8시였다. 내 옆자리 연인뿐만 아니라, 술이 고픈 술꾼들이 포장마차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오더라도 이제 앉을 좌석이 없었다. 두 시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 주인은 헛기침으로 압박했다. 불편해진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포장마차를 나오려는 순간, 휘청, 하고 몸이 흔들렸다. 혼자 술을 두 병이나 마셨으니 취할 만도 하였다. 그때 내 귓가에 대고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넌 바람맞은 거야. 어린 계집에게.’
마치 내 안의 누군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환청 같기도 했고, 내 숨겨 둔 자존심이기도 했다. 전화 한 통, 문자가 없는 거로 봐서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전화할까, 하다 나는 그만두었다. 나는 비참했고, 외로웠다.
술을 깰 요량으로 이리저리 걷다 보니 그녀가 사는 원룸 앞이었다. 그때 그녀와 키스를 나누었던 가로등 밑에서 나는 우두커니 그녀의 방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전화기를 찾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왜 오지 않았어?”
“…….”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디세요? 아직 그 포장마차예요?”
“아니. 나왔어.”
“그럼, 집에 들어가세요. 아내분과 아이들이 기다릴 거잖아요.”
의외로 그녀는 냉정했다. 나는 이 모든 게 그녀와 현재 만나고 있는 옆 사무실의 그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나와. 그대 집 앞이야.”
“아니에요. 나 지금 몹시 피곤해요. 내일 이야기해요.”
“뭐? 두 시간이나 바람맞혀놓고 피곤하다고?”
“네. 저도 지금까지 일하다 막 들어왔어요.”
그녀는 완강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놈 만난 거야?”
“…….”
“맞는 모양이네. 그래서 내가 기다린다고 해도 오지 않았어.”
“많이 취하셨어요. 그만 가세요.”
그녀는 이렇다 할 해명 없이 나와의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그 점이 나를 더욱 화가게 했다.
“취하지 않았어. 잠깐이면 돼.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겠어.”
“정말 오늘은 아니에요. 제발 가세요.”
“내려오지 않는다면 내가 올라갈 거야. 지금 당장!”
나는 전화기를 접고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려고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그녀일 거로 생각하고 휴대전화 창을 봤는데, 그녀가 아니고 아내였다. 받을까, 말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 일단은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요?”
“사무실 근처야. 왜?”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서 그래요?”
그제야 나는 아차, 했다.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빨리 와요.”
오늘은 장인의 기일이었다. 별수 없이 나는 그만 그녀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가슴은 찢어지고 마음속의 분노와 상실감이 한도를 넘고 있었다.
다음날, 처가 집에서 제사를 끝낸 후 마신 술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무실에 출근해보니 탁자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편지를 뜯다, 나는 도대체 누가 보낸 것인지 먼저 알고 싶었다.
“연희 씨 자리에 있어?”
인터폰으로 나는 연희를 찾았다.
“네. 갈게요.”
칸막이 안으로 연희가 들어왔다.
“아! 그 편지요?”
그러더니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유희.”
“아! 그래. 됐어요. 가서 일 봐.”
그녀가 칸막이 밖으로 나가자 나는 편지 겉봉투를 찢었다. 왠지 불길했고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예상은 적중했다. 손글씨로 쓴 내용은 간단했다. 두 번째 이별의 통보였다.
「이제 그만할까 해요. 너무 힘들어요. 그동안 감사했고 고마웠습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럼 내내 건강하세요. 유희로부터.」
나는 어리석게도 이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이별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건 무효다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가서 왜 그러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직장이었고 현실이었다. 한참을 자리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나는 그녀의 사무실 대신 부장 방을 찾았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오.”
“예. 어제 장인 기일이라 조금 무리했습니다.”
“오늘 하루면 되겠습니까? 안 그러면 며칠 푹 쉬던지.”
“아닙니다. 오늘만 조퇴하겠습니다. 약 먹고 집에서 쉬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는 부장 방을 나와 사무실에 들어올 때 연희를 불렀다. 아무리 내 마음이 엉망이라도 급히 처리할 일은 대충 인계를 해야 했다. 나는 편지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