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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촌놈 서울 ~안산 한바퀴 드라이브 (2부)
1. 일 자 : 2017. 8. 13. 일요일 ~ 8.14. 인천 영흥도 / 안산 대부도, 제부도
2. 2일차 안산 영흥도 ~ 대부도 ~ 제부도
3. 이동 : 카니발 이용
4. 영흥도
대교 밑 1박 후 영흥도 드라이브(1.5시간)
가. 영흥도 둘레길 소개
영흥우체국 ~ 망태봉 ~ 국사봉 ~ 통일사 ~ 장경리해변 ~ 양로봉 ~ 전망대 ~ 헬기장 ~
에너지 파크 ~ 버스정류장 / 10.5Km / 4.5 시간
나. 영흥도 둘레길 : 십리포 ~ 진여부리 ~ 수해해변 ~ 농어혀변 ~ 국사봉 ~ 장경리 해변
/ 14Km / 4.5시간
다. 사진감상
영흥대교에서 십리포 해변으로 이동 중 인천 송도와 인천대교를 배경으로.......
영흥대교....
십리포 해수욕장......
장경리 해수욕장......
5. 대부도
가. 대부도 유래
대부동은 삼국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주에 종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 소속이었으며 조선조말 조선시대에는 남양군에속했다.
조선조 인조시대에는 방어사가 주재하였으며 1914년3월1일 남양군에서 부천군에서 편입
되었고 1973년7월1일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1994년12월26일 행정구역 개편(대통령열 제14434호)으로 안산시, 시흥시, 화성군
편입을 위한 주민투표 결과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대부지명은 화성군 남양면쪽에서 대부도를 바라보면 섬 같지 않고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불렀으며 이회 연화부수지, 낙지섬, 죽호, 대부도 등의 전래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오이도와 대부도 방아머리를 잇는 총 연장 12,676m의 시화방조제가 끝막이 공사를 완료하고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간척사업장 최대의 난공사로 특히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10.3m, 최대유속 초당 7.5m로써 6시간 마다 한강의 홍수 경보와 유사한 9억6천만㎡의
바닷물의 드나들며 7∼8톤 크기의 바위덩어리들을 흔적없이 휩쓸어 가는 공사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 국내 제일의 방조제 이다.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4차선의 도로도 개통 예정이며,
인근의 수려한 경치와 더불어 바다 관광휴양지 및 명소로 조성될 계획으로 있다.
나. 대부도 전설
1) 대부도의 학지
옛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의하면 광주(廣州) 땅에 뻗어 내린한
산맥은 화성(華成)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두 줄기로 나누어 뻗다가 한 줄기는 서북으로
뻗어 안산(安山) 수리산(修理山)을 거쳐 소래산(蘇萊山)에 이르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화산(化山)에 이르러 세 갈래를 이룬다. 또한 화산의 한 맥(脈)이 서해로 뻗어 남양
(南陽) 비봉산(飛鳳山)을 이루었고, 이 맥은 화양진(化梁津)에서 바다로 뻗어 선감도(仙甘島)
를 지나 대부도에 이르러 뭉친 것이 황금산(黃金山)이다.
이 맥은 다시 해저(海低)로 뻗어 영흥도(靈興島)를 거쳐 덕적도(德積島)에 이르러 운도산
(雲島山)에 이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양 화양진에서 대부도까지 해중(海中) 맥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맥이 있다고 전하는데 무너진 석맥(石脈)의 꾸불꾸불 뻗은 등마루가 조금(조수가
가장 낮은 때인 매달 음력 8일과 23일) 때에는 그 석척(石脊)이 약간 노출된다는 것이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그 석맥(石脈)을 모르고 있었는데, 학(鶴)들이 조금 때면 그 맥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육지와 연결된 대부도 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길을 '학지(鶴指)'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학지란 '학이 길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다.
옛날 어느 사람이 위급할 때 학지를 따라 육지로 도망해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전한다.
대부도는 연륙매입공사(連陸埋立工事)로 육지화되었는데 이 학지를 따라 막았다고 한다.
■「옹진군지(甕津郡誌)」, 1989, 옹진 군지편찬위원회.
2) 홍정희 선생의 효자문
대부동 큰마을에는 홍정희 선생의 효자문(孝子門) 이있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조선
왕조 후기인 18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은 "홀곳"이라 불러 왔는데 옛날에는
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풍어의 기쁨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홍정희 선생은 남양 홍씨로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 우애가 깊었다. 홍정희 선생은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타의 귀감이 되었다. 홍정희 선생은 부침이 별세하자 초상을 잘 치렸을
뿐더러 무덤 옆에 띳집을 짓고 3년 동안 거처하였는데, 육신은 피하고 소찬으로 일관했으며
집으로 내려오는 일없이 묘소를 지켰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마침내 조정에 까지 알려져
고종30년(1893년) 6월 효자정문을 하사 받게 되었다고 한다.효자정문은 팔각지붕에 기와를
올린 흩처마 건물인데, 개수되어 현재는 형태만 전한다. 규모는 정면 3.20m, 측면 1.35m이며,
벽은 시멘트 구조이다. 지금도 후손들이 기거하며 홍정희 선생의 효성을 이어받고 있다
■ 대부동 김동렬69세, 1996
3) 탄도의 삼형제바위
옛날 탄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아들 삼형제를 두고 살고 있었다.어느날 부부는 삼형제를
집에 두고 갯벌로 일을 나갔다. 낙지, 조개 등을 잡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갯일을 하는데
갑자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해무(海霧)가 끼기 시작하여 부부는 갯벌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짐작되는 방향으로 아무리 걸어도 육지는 나오지 않았고 갯벌에서 계속 헤매는 동안
바닷물이 들어와 부부는 결국 죽어 두 개의 바위로 변하였다.한편 집에서 부모를 기더리던
삼형제는 부모가 돌아오지 않자 산으로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며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부모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삼형제도 그곳에서 죽어 바위로 변하
였다. 지금도 탄도에는 삼형제 바위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바다에는
부부 바위가 삼형제 바위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
■선감동,장일수,56세,1997.
4) 풍도의 왕신(王神)독갑이
옛날부터 풍도에는 사업 번창을 돕는 신으로 왕신이 있었는데,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섬기는 이 신의 존재는 막강하였다. 그런데 이 신은 장난이 매우 심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서당 문에 그림자를 지게 하는 등 장난을 치다가 서당 훈장이
호통을 치면 사라지기도 하였고, 외딴집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솥 안에 집어넣는 묘기도
부렸다. 뿐만 아니라 힘에 부치는 큰 나무들을 이집 저집으로 옮겨 놓기가 일쑤였고, 배에서
쓸 큰 참나무를 뽑아다 주는 신통력도 부렸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이집 저집을 전전하면서 심술을 부렸고, 제사를 지내는 집엔 꼭
나타나 제사음식까지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신을 왕신(王神)이라고 불렀다
한다. 섬 사람들은 흔히 무속을 숭상하는 예가 많았다. 고사를 지내고 굿을 하는가 하면 경
읽기도 자주 하였다. 특히 중환자가 발생했을 때는 경쟁이를 불러 며칠씩 주야로 독경을
하며 천신(天神)·지신(地神)·오방제신 등을 불러 쾌유를 빌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대를 잡고
신장을 내려 막신(병나게 한 신)을 찾아내 결박해 단지에 가두고 백지로 봉하여 땅을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신 독갑이는 당할 수가 없었다. 제 마음대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짓굿은
일을 서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어떤 때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로
장만한 고기를 어린애가 먼저 맛보았다고 하여 그 어린애를 물 속으로 던지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독갑이는 좋은 일도 많이 하였다.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독갑이가 쥐를 잡아다 물 구멍을 막아 주어 변을 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말하자면 독갑이는 풍도 사람들고 애환을 같이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풍도, 고상호, 60세, 199
5) 선감도 나룻배 사공
선감도 북단과 마주하고 있는 대부도의 갯골은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심해서 나룻
배를 이용해야 했다. 옛날부터 나룻배 사공이 많았지만 이 이야기는 박신태 뱃가공 이야기로
부터 비롯된다. 박신태 사공은 그날그날 대부도와 선감도에서 잡은 어물이라든가 곡물 등을
실어다 주며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다. 나룻배 삯으로 현물을 많이 받던 때라 집의 찬거리도
넉넉했고, 특히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쉬는 때에는 거나하게 취하기 일쑤였다.
맛을 잡은 아낙네는 맛을 주고, 굴을 따는 아주머니는 생굴을 나룻배 삯으로 주었는데 절반은
절이고도 남아 술 안주로 족했다. 박 사공은 물살이 셀 때는 노젓기가 힘들어 고생을 많이
했으나 워낙 몸이 튼튼해 이를 잘 견디었고 곧잘 흥겹게 노래를 부렀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
없는 노총각 사공이었고, 또 돌림병인 마마(천연두)로 얼굴이 얽었으며 왼손잡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곰보사공이라 불렀다.곰보사공은 고향이 영흥도라고 했다. 그곳에서
소년 시절레 부모를 여의고 대부도로 옮겨와 방아머리에서 날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않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선감도로 옮겨와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고 한다.
대부도 사람들은 육지로 드나들 때마다 곰보사공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섬사람들이기 하지만 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곰보사공은 사시사철 나룻배를 저어 생활하였는데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사리 때는 힘이 더 들었다. 또한 겨울이
면 왕래하는 사람들 이 거의 없어 초가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는데 특히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뱃노래와 청춘가 노랫가락
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날 곱게길러서 요런 고생을 왜시키시나요." "날 데려가세요 날대려가거라
정든 내사랑아 날 데려가세요." "사람마다 벼슬하면은 어부될 사람 어디 있고 의사마다 병
고친다면 북망산천이 왜 생겼나."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요만하면 만족할까."
이러한 노랫말을 곰보사공의 철학이요 인생관이었다. 원망과 한탄, 그러나 현실에 만족하는
생활관은 몸소 겪어온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일본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섬에까지 일제의 압력이 밀고 들어오는 1940년대 초, 일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창씨개명이란 예컴대 박(朴)씨는 '기무라', 이(李)씨는 '구니모도'라고
부르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조치였다. 그 당시 대부면장은 김완수 씨였는데,
이 같은 행정조치를 윤기은이란 사람에게 주지시키는 것을 곰보사공은 덤덤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곰보영감 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셔 감정이 솟구칠 대로 솟구쳐 있었다.
그런데 윤기은이 박신태 사공에게 물었다. "자네, 창씨개명을 하면 좋겠나?" "창씨개명이
무엇이유?" "자네 이름과 성을 일본놈 식으로 고친다는 것일세."박신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유. 밥 많이 먹고 술만 있으면 족하지요."윤기은은 주멱을 불끈
쥐었다. "에이, 이 개만도 못한놈!" "내가 개라구요? 천만에, 천만에 말씀을......."윤기은은
선감도 도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심이 강했다. 항일운동을로 고생한 선친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인생관과 사명감이 투철한 청년이었다. 그러니까 무식하고 가정이
없는 박신태와는 대조적이었다. 윤기은 도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신태, 자네 술 취했나?"
"아뇨, 저 멀쩡해요." "멀쩡한 사람이 일본놈도 좋고 창씨개명도 괜찮단 말인가?" "사람은
다 매한가지라구요. 고생뿐인 인생인데 잘살기만 하면......"윤 도수는 벌떡 일어나 박신태의
뺨을 내리쳤다. 이는 김완수 면장을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이 엉뚱한 곳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박신태도 주멱을 불끈 쥐고 일어서 윤 도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김완수 면장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은 일단 수그러졌다. 사실 박신태는 세상일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풍족하게 먹고 살기를 바랄뿐 창씨개명에 따른 민족적 수치심이라든가 우국충정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만큼 박신태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김완수 면장이 적당히 얼버무려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윤기은 도수로부터 뺨을 맞은 박신태는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따라 매우 바람이 세었고 물때가
나빴으나 윤기은 도수가 나룻배를 불렀다. 윤 도수는 대부면장 김완수의 부름을 받고 가는길
이었다. 술에 취한 박신태는 배 손님이 유독 한 사람뿐이라 잠시 지체하였다. 그때 윤 도수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빨리 좀 가야겠네!" 박신태는 아무 대꾸도 않고 뒤를 보러 갔다. "저
놈이 사람을 때려. 나두 어엿한 젊은이인데......" 그는 윤기은에 대한 묵은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뒤를 보고 오면서 생각해보니 나라 일을 모르고 일본놈이 돼도 좋다는 자신의
말이 망발임을 깨닫게 되었다.박신태는 천천히 나룻배를 저어 나갔다. 그런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힘껏 저어 가던 노가 빠지면서 배가 딴 곳으로 흘렀다. 박신태는 술이 과했고 , 배 또한
걷잡을 수가 없게 되자 윤도수는 당황하여 두루마기를 벗고 덤벼들었다. 그런데 배는 여전히
다른곳으로 쏜살같이 흘러갔다.박신태가 소리쳤다. "윤 도수 양반 저리 비켜요! 내가 누군데
요. 이래뵈도 십여년 이짓을 했다구요!" "신태 이 사람, 정신차려!"윤 도수는 겁에 질린 모습
으로 노를 바로잡아 주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많으면 별 탈 없이 닻을 내리거나 힘을 모아
견딜 수가 있다. 그러나 단 둘 뿐이고 당황한 탓으로 한참만에야 물에 댈 수가 있었다.
겨울 철이지만 박신태도 윤도수도 땀에 젖었다. "신태, 오늘은 술이 과했어." "그래요. 술,
술 때문이예요......." "이 사람아, 술도 음식이니 알아서 해." "네, 알았어유. 어서 다녀
오세유. "박신태는 윤도수의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으나 순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해 뒤를 흐렸다. 그때 운기은 도수가 말을 이었다. "여보개 신태, 자네 창씨 성은
기무랄세." "뭐요, 기무라요? 그게 무슨 날벼락이유!" "아니 이 사람, 일본놈도 좋고 창씨
개명도 좋다질 않았나?" "저 그때 술이 그랬어요. 그리고 김면장 꼴 좀 보자고 그랬던 거예요.
저도 비록 사공이지만 조상도 있고 나라도 있어유?" 윤도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역시
박신태가 면장보단 낫구나.'그는 면사무소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그날 방 박신태는 술에
흠뻑 취하였다. 박신태는 그후 장가도 들고 자식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현재는
선감도의 나룻배는 없어지고 제방이 쌓여 육로로 변했다.
■ 대부동, 김동렬, 69세, 19
6) 까치섬
대부도 까치섬은 소나무를 비롯해 참나무. 아카시아나무. 찔레나무 등이 무성한
섬이었다. 특히 찔레꽃이 만발하는 유월에는 벌과 나비가 넘쳐나는 경관 통은 섬이었다.
또한 까치밥이라고 말하는 열매가 많아 까치들이 몰려 살았다는 추측도 가능한데, 이 까치밥
이란 찔레꽃의 열매를 말한다.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었다. 농사에 지친 어떤 농부가
논일을 하다 지쳐 소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숲에 내려온 큰 구렁이가 그 농부를
휘감아 숲속으로 끌고 갔다. 농부는 지친 몸에 정신이 몽롱해져 의식을 잃었다.그런데 그
섬에 모여 살던 까치들이 이 모든 상황을 낱낱이 지켜보고는 기진한 농부를 깨우고 머루.
다래 등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결국 농부는 기운을 차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농부에게 있어서 까치소리는 구원의 소리였다. 옛날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도 까치소리가 아침에 들리면 반가운 손님이나 기쁜 소식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까치섬 농부의 경우는 이에 대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농부는 그후
틈만 나면 까치섬으로 건너가 까치에게 은혜를 갚았다. 추수한 곡식도 갖다 주었고, 그곳에서
나는 열매들을 거두지 않고 까치들의 먹이로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점차 이웃 마을, 이웃
섬의 까치들까지 이 섬으로 모여들어 이 섬은 이름 그대로 까치섬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많던 까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소나무. 참나무 등 나무들을
마구 베어 버렸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여기저기 쓰레기가 나뒹굴어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다행히 까치밥을 만드는 찔레꽃 덩굴만은 그 옛날을 말해 주듯 푸르게
자라고 있다. ■ 대부동, 김동렬, 69세, 1997.
다. 대부해솔길
2011년 시민공모를 통해 길 명칭을 공모해 2012년 7월 개통한 대부해솔길은 2012년
1월부터 노선 개발을 시작해 7코스 총 74㎞로 조성됐다.
특히 대부도의 수려한 해안경관을 따라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린 소나무숲길, 염전길,
석양길, 바닷길, 갯벌길, 갈대길, 포도밭길 등 다양한 테마를 담아 조성했다.
대부해솔길1코스는
대부도관광안내소 ↔ 24시횟집간 10.5km의 연장을 가진 길로써 시화방조제를 건너면 제1코스가 시작된다.
1코스 : 대부도관광안내소(방아머리) ~ 방어리 해변 ~ 하늘나라펜션 ~ 솔밭 ~ 낚시터 ~
구동도 낙조전망대 ~ 선돌 종현마을 ~ 돈지섬 안갈 / 11.3Km
1코스(11.3km) : 방아머리를 출발해 해안가를 걷다가 북망산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지는 시화호와 대송단지를 볼 수 있다. 북망산에서 내려서면 오솔길과 동해안 바닷가처럼 푸른 바다 그리고 인천대교와 송도신도시를 보며 걸을 수 있다. 걷다가 목이 마르면 구봉약수터에서 휴식을 취하며 갈증을 해소할 수도 있다.
2코스 : 돈지섬 안길 ~ 바구리 방조제 ~ 새방죽 방조제 ~ 작은잘푸리 방조제(어심낚시터) / 5.1Km / 1시간 40분
2코스(5.1km) : 석양을 보며 친구와 연인 간의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걷기에 환상적인
코스다. 군데군데 마을길로 접어들면 포도밭을 지나는 운치가 고향 생각을 하게 한다.
3코스 : 작은잘푸리 방조제 ~ 아일렌드CC ~ 큰산 ~ 선재교 ~ 정상골 방조제 ~
세해레미콘 ~ 흘곳마을 회관 / 11Km / 2.5시간
3코스(9.6km) : 27홀의 아일랜드골프장을 둘러보며 걸을 수 있는 코스다.
4코스 : 홀곳마을회관 ~ 쪽박섬 ~ 메추리섬 ~ 고래뿌리선착장 ~ 미남초교 ~ 행낭골
방조제 ~ 느릿부리안길 ~ 유리섬 박물관 ~ 베르아델 승마클럽 / 12.4Km
4코스(12.4km) : 대부해솔길 중 가장 뛰어난 코스다. 해안 습지가 넓게 펼쳐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해안길로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코스다.
5코스 : 승마클럽 ~ 한신염전 ~ 상동방조제 ~ 금당 방조제 ~ 동주선감도 입구(펜션단지) /
12.2Km
일명 갈대우는 염전길로 염전의 역사를 배우고 체험을 할 수 있는 동주염전 길을
가로질러 걸을 수 있는 코스다.
6코스 : 선감도 입구 ~ 경기창작센터 ~ 선감어촌체험마을 ~ 경기도청 청소년 수련원 ~
불도 방조제 ~ 안산어촌 민속박물관(탄도항/누에섬 입구) / 6.8Km
엄마의 품처럼 넓고 포근하게 펼쳐진 세계 5대 갯벌중 하나인 서해안의 아름다운
갯벌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최상의 코스다. 또 수만 년 전에 형성된 탄도의
기이한 퇴적암층을 만나 볼 수 있다.
7코스 : 탄도항 ~ 대부 바다향기 테마파크 ~ 대부도 관광안내소 / 16.8Km
탄도방조제를 따라 대송단지 갈대숲을 걷다보면 시를 읊조리게 하는 코스로
8,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동·식물 화석이 발견된 대부광산 퇴적암층에서
공룡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자.
대부도의 명소
대부도 사진감상
구봉도 낙조대 1코스 길
아직도 40대.....
유리섬 박물관......
제부도 입성
제부도 모세의 기적 길 2.3Km
풍력 발전소가 보이는 곳이 대부도 탄도항이며 옆에 섬이 누에섬이다.
14일 오전 부터 경기 안산(대부도, 제부도) 호우주의보로 많이 비가 내려 차로 드라이브를
겸한 나드리로 인정 샷만 하고 진해로 귀로 함.
다음 기회에 대부도 둘레길 산행 3박 4일 정도하며 주변 탐방을 하여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