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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글. 고담중평 세계무속신문 주간
역사천문학회 부회장 소설가
우리의 화려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는
기원전 238년 47대고열가 단제께서 2096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을 폐관하고
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여 신선이 되신 이래 암흑세계로 들어가는데
그후 우리문화는 무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잃어버린 역사의 숨결을 무속에서 많이 느낄수 있다.
무속을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잃어버린 우리역사를 복원하는 지름길이 될수 있다고 여겨 이글을 싣는다.
미신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상고사에 관한한 무속연구가들이 훨씬 고단수이다. -<운영자>-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곧 소멸하고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를 강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 세계를 통일 할 것처럼 기승을 부리던 사회주의가 1백년의 수명을 다하고 멸망했듯이
민주주의도 수명이 다 되어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세상에 나온 지가 어언 2백년, 사회주의 보다 1백년이나 더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처럼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인류를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주의주장이 아니라 아직까지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의주장이 세상에 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민주주의를 대체할 신시주의(神市主義)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맞아야 할 역사적인 현실이다.
신시는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국가형태이다.
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삼신산이 있는 봉래, 방장, 영주에 세우신 인류최초의 사이버국가였다.
그 뒤를 이어 한인 할아버지가 한국(桓國)라는 이름의 신시국가를 계승하였고,
다음에 한웅 할아버지가 나와서 사이버 국가와 현실국가를 통합한 형태의
발전된 신시국을 태백산과 흑수 사이에 건설하였다.
마지막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조선을 백산 아래에 세우면서 10년마다 한번씩 신시를 열었다.
신시국은 요새 말로 영토의 개념을 초월한 사이버국가이다.
마고 할머니가 신시국을 세울 때,
후손을 하나로 결속시킨 주의주장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
<해혹복본>이란 "의혹 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라"는 주의주장이었다.
마고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 사셨던 분이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그때 지구에는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대륙과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때 살아 남아서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쪽에서는 마고 할머니였고, 대서양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
마고 할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도지(符都誌)에 있다.
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세기에 있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
지구의 중심에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
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
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
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고 한다.
도합 25000년 동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지구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가 이때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2000년을 시작하는 금년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지구 멸망의 날로 잡은 날이 사실상 금년 3월 20일 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가들이 이날 이전에도 여러 번 지구 멸망의 날을 잡았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시대이다.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 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한다.
마고 할머니는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
후손이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 >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 인(天符三印)이다.
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이다.
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지었는데, 사방 한 장(丈, 10尺, 3.3m)의 규모 지은 전각이었다.
이 전각을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솟대를 세우는 곳)라고 하였다.
굿을 할 때 쓰는 신장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
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신대를 꽂는 것은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았고,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烝山, 증산은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다.
안택굿에서 무당이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상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군왕검이 마고 할머니에게서 전수한 삼신신앙과
한웅 할아버지에게서 전수한 태백진교를 발전시켜 덕교(德敎, 덕사상)를 만들어 선포하시고
나라의 사대문 안에서 안택을 빌었다는 의미가 있다.
안택(安宅)이란 나라의 서울을 정하기 위하여 방위를 잡는 일이다.
당시에는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東北艮方)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동북간방에 잡은 터를 서사태방위(西四宅方位)라고 한다.
동북간방에 터를 잡고 사대문을 내는데, 이때 올린 굿이 안택굿이다.
성주거리에 나오는 성조는 당시에 처음 집을 짓고 궁궐을 지은 성조 할아버지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내력>이라는 책에 보면,
성조거리는 반드시 단군왕검을 먼저 청배하여 굿을 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단군왕검 때 서울 백산 아래에서 처음 안택한 감격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한웅 할아버지는 신시를 세우고 태백진교(太白眞敎, 참사상) 선포하면서
두 가지 신시나라의 국정지표를 내세웠다.
정치는 화백(和白)으로 하고,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은 책화(責禍)로 한다는 것이었다.
화백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의회제도이다.
책화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나라의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제도이다.
앞으로 전 세계는 사이버국가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시대엔 한 국가가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
사이버시대엔 어느 나라든 IMF와 같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수 있다.
주식시장을 통하여 일시에 자본을 빼내 가면 하루아침에 나라가 거덜난다.
우리는 IMF라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바가 있다.
그래서 모든 나라가 참여하여 단 하나의 사이버국가를 만들어
자국이 당하게 될 피해를 예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사이버국가 의회에는 사이버인간을 대표로 참석시킨다.
이 의회에서는 다수결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100% 찬성의 화백제도로 운영이 된다.
100% 찬성이 도출 될 때까지 불찬성에 대하여 단계별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자동으로 불이익이 돌아가게 한다.
가령 식량공급을 축소한다던가, 연료공급을 축소한다던가 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일시에 시장을 교란하여 국가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도록 한다.
이리하여 100% 찬성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책화는 책임져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잘못을 저지르면 "통치행위는 처벌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최고 사형까지도 당해야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시대에 부활하는 구원의 여인 '마고'
우리에게 마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민족과 나라는 그들 나름대로 '구원의 여인상'을 가지고 있다.
국민에게 꿈을 주고 결속시켜 줄 '구원의 여인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유한 단 한 분의 여신을 받들어 모시려고 한다. 우리의 선조는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민간신앙으로서 삼신할머니인 마고를 받들어 모셔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삼신 할머니를 미신 정도로 취급한다. 이것은 무지에 서 나온 소치이다. 결코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금모낭낭(金母娘娘)이나 서왕모(西王母)를 구원의 여신으로 친다.
일본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최고의 여신으로 모신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삼국관계에서도 우리 역사에 마고의 등장은 절박하다.
우리에게는 이들을 초월하는 마고가 있다.
우리가 마고를 부활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고는 후손에게 신표인 삼신을 새긴 '천부삼인'을 전수하고,
모든 종교의 원전이 될 수 있는 '해혹복본(解惑復本)'을 가르쳤다.
천부삼인은 인류가 천문을 시작했다는 징표가 된다.
특히 천문이 동이에 의하여 인류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천문에서 우주의 원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데,
그 원리가 '천부경(天符經)'에서 제시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원리'이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한웅천왕에 의하여 세상을 이끌어 가는 '참사상'인
'태백진교(太白眞敎)' 를 출현하게 하였고, 단군왕검 시대에 가서 덕교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마고의 존재를 우리의 문화사와 종교사에서 자리 매김 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마고가 후손에게 가르친 '해혹복본'이 '종말론'의 미혹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종교인들에게
구원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마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은 시급하다.
마고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부활하도록 도와주면,
마고의 휘하에 금모낭낭이나 서왕모나 천조대신이 무릎을 꿇게 될 것으로 본다.
국가의 형태와 국가의 기능을 초월한 초국가 신시
원래 신시는 각 종족의 대표가 삼신산 아래에 와서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시장을 열어 문물을 교환하였다.
신시는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나라로,
각 종족이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각 종족의 대표가 참석하는 의회를 화백이라고 하였고,
또한 문물을 배에 싣고 와서, 해변에 당(幢, 깃발)을 꽂아 놓고 서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교환하는 것을 시장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신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시의 의회기능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화백의회제도 였고,
신시의 시장기능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 문물교환과
세금을 바치는 문물교환의 2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하가 불어나면 물에 잠기는 신시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신시는 묘도군도
봉래 방장 영주 세 섬은 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묘도군도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을 지상에 제일 처음 발표(愛石 1999. 9월호)한 분이
장동균씨(九山 張東 均 한국애석문화연구소장)이다.
장동균씨는 애석지에 실린
'신시본토기 3 신시의 발생지는 삼신산? 고조선의 뿌리 신시는 바다에서 탄생하였다'는
제목의 글에서 묘도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해도(海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바다(편집자 주, 발해)를 건너가기 전에 봉래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등고선이 꾸불꾸불 보이는 곳이 언덕인데, 제일 높 은 곳이 해발 439m의 주산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청구(靑丘, 편집자 주, 역사서에 기록된 청 구는 지금의 탁록이다.
청구라는 지명이 상나라 이후에 탁록으로 바뀌었다) 땅으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이 해도를 분석하기 위해서 수심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그려 넣은 것이다.
진한 갈색은 육지이며, 살색에 가까운 색깔로 칠한 곳은 수심 15m 이하의 뻘 밭이다.
청색 은 15m이상으로 수심이 깊은 등주수도(登州水道)이며, 급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징검다리 같은 발판을 디디고 건너면 수심 3.8m 밖에 안 되는 곶(串)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장산도가 나타난다.
갈색으로 표시 된 곳이 물 밖으로 보이는 섬들이다.
태백산으로 추측이 되는 북장산도 옆에 탱글렁도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제사를 올리던 장소로 추측이 되고, 탱글렁도 옆으로 청색으로 그려진 곳이
조천지(朝天池)로 추측되는 연못이다.
섬의 주변으로는 동쪽으로 깊은 바다로 보이는 장산수도(長山水道)가 있고,
이 곳에는 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외의 바다는 대부분이 수심이 15m 이내의 낮은 곳이므로
5, 6천년 전 에는 간조시에 모두 물 밖으로 드러나는 뻘 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의 밀물과 썰 물의 차이는 8∼10m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추측이다. "
묘도군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묘도(廟島)'의 '묘(廟, 사당)'자와 탱글렁도의 탱글 렁(하늘)'이라는 문자들이다.
'묘'자는 이 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문자고 보고,
'탱글렁은' '단군'을 의미하는 문자라고 본다.
한국문자학회에 따르면, '묘(廟)자'는
신농국시대에 나라에서 전욱고양이 임명한 제관이었던 중여곤(衆艅 )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데에서 생겨난 문자라고 한다.
'탱그렁'은 몽골족의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 '탱그리 (Tangri)'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은 중여곤의 후손이다.
묘도군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낸 사당을 의미하는 문자인 '묘'자가 발견이 되고,
단군을 의미 하는 '탱그렁이라는 문자가 발견된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그러나 신농국이 생기기 이전에, 신농국의 조상인 고시(高矢)를 농관(農官)으로 썼던
한웅천 0왕이 세운 신시국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묘도군도를 삼신산으로 보았을 때,
삼신산이 신시이므로,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국을 세웠다는 기록의 출처가
묘도군도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삼신산과 신시씨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조천석(朝天石)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조천석'은 조천지(朝天池, 장동균씨는 탱그렁도와 북장산 사이에 있는 바다로 비정)에서 찾아낸
'수석'이 아닌가 한다.
그가 조천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조천석을 방장산에서 방장에 모신 '삼신의 신체'로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조천석을 수석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삼각산 형상의 수석을 삼신산의 모형인 석가산(石假山)으로 보거나,
삼신의 신체로 볼 수 있다.
" 수반 가운데 놓여지는 산수경석의 유래가 원지(苑池)문화에서 발생하였음을 발견하였고,
지당 안에 둥근 섬을 만드는 이유가 삼신산 중에서 한 개의 산을 선택하여
선계(仙界)를 상징하는 뜻으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삼신산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백제시대의 남궁지와 고구려시대 안학궁의 진주지, 신라시대 월지 등에
삼신산을 조성하였다는 설명이 있다.
원지 안에 조성하는 섬의 숫자가 세 개로 통일되지 않고,
부여 남궁지는 하나, 경지 월지는 다섯(세 개로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개임),
평양 안학궁터의 진주지는 네 개로 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의 난지궁 연못에는 봉래산이 조성되었고,
한나라의 태액지에는 봉래, 방장, 영주 등의 삼신산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 (장동균)
그렇다면 삼신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북애자北崖子가 숙종 2년인 1675년에 저술한 역사서)에 옮겨 쓴
태시기(太始記)와 단군기(檀君記)는 한웅천왕을 신시씨 (神市氏)라고 밝힌다.
따라서 삼신산의 주인에 한웅천왕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천문학에서 찾아야 하는 마고의 신시개천
현대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2000년 단위로 끊어서
2000년마다 한 시대로 보고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사자궁시대,
거해궁시대,
음양궁시대,
금우궁시대,
백양궁 시대,
쌍어궁시대,
보병궁시대,
마갈궁시대,
인마궁시대,
천갈궁시대,
천창궁시대,
쌍어궁시대 로 구분하는 12궁시대이다.
12궁시대는 12간지에서 나온 것으로,
사자궁시대는 자(子, 쥐)에,
거해궁시대는 해(亥, 돼지)에,
음양궁시대는 술(戌, 개)에,
금우궁시대는 유(酉, 닭)에,
백양궁 시대는 신(申, 원숭이)에,
쌍어궁시대는 미(未, 양)에,
보명궁시대는 오(午, 말)에,
마갈궁시대 는 사(巳해, 뱀)에,
인마궁시대는 진(辰,용)에,
천갈궁시대는 묘(卯, 토끼)에,
천창궁시대는 인(寅, 호랑이)에,
쌍어궁시대는 축(丑, 소)에 해당한다.
12궁시대 표에 보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이다.
이 시대는 사자궁시대로 12간지는 자(子)에 해당한다.
12간지의 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1년으로 치자면 동지에 해당한다.
동지는 겨울의 긴긴 밤을 끝내고 시작의 눈을 뜨는 때로서 역사를 시작함 을 의미한다.
이고선이 쓴 심당전서(心堂全書)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삼황개국기(三皇開國紀)에,
한인천제 가 나라(桓國)를 세운 날을
360 갑자(甲子, 桓紀 9199년) 상달(上月) 3일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이 나라(神市. 배달나라)를 세운 날도
4321년 갑자(神市紀 5898년) 상달 3일 이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 청구)을 자오지 한웅(치우천왕)이 세운 날도
신시개천 1261년 갑자 상달 3일이라고 하였다.
단군왕검이 장가든 나라인 웅심국은
한인천제의 대를 이어오는 나라로서 단군왕검의 처(하백녀)의 조부
천일태제(天一泰帝)의 나라였다.
(주, 이고선 선생의 조선기는 천일태제를 황조고皇祖考, 지일홍제를 황고皇考라고 하였으나,
한단고기 부소보고 금문신고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하면,
천일태제는 처조부, 지일홍제는 장인으로 보아 야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다)
천일태제는 한국개천 5941년, 신시개천 1621년, 단국개천 361년 되는 해를
갑자개천원년(甲 子開天元年) 상달 3일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로 하였다.
한국, 신시, 단국, 배달나라 모두가 왕조를 세운 시대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상달 3일을 나라를 세우는 날로 잡았다는 것은
상달이 언제인가를 볼 줄 아는 천문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각 나라가 나라를 세운 당시에는 자월(子月, 11월)을 세수(歲首, 첫 달)로 삼고,
동지 날을 원일(元日, 첫 날)로 잡았다. 이를 보면 동짓달을 시작한 달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1월 상달(지금은 10월을 상달로 한다)를 여러 나라를 거쳐오면서
수천 년 동안 지 켜왔음에도 불구하고
마고의 개천년대와 개천일을 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4000∼12500년 전 사이에
지구가 기상이변과 화산폭발로 인류가 전별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이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대서양 쪽에서는 멜키지덱이, 태평양 쪽 에서는 마고가
역사 기록에 올라 있다.
멜키지덱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와 있고, 마고는 우리 의 부도지와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와 있다.
인류역사의 시작을 12간지의 자(子)로 본다면, 이때에 해당하는 12궁 시대는 사자궁 시대이다.
사자궁 시대는 12000년 전으로, 인류의 시조인 멜키지덱과 마고시대에 해당한다.
이렇게 역사의 시발을 사자궁 시대에서 시작하면,
9199년 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시대는 거해궁 시대에 해당하고,
5898년 전에 신시를 세운 한웅천왕의 시대는 금우궁 시대에 해당하고,
4333년 전에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시대는 백양궁 시대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쌍어궁 시대를 지나서 이제 막 보병궁 시대로 들어섰으므로.
현재에서 과거로 12궁 시대를 역추적하면 마고시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시대 언제 인류 최초의 신시였던 삼신나라가 세워졌을까?
그 해답은 한국 신시 조선 등 모든 나라가 상달 동짓날 나라를 세웠으므로,
갑자년 상달 초3일에서 찾아야 한다.
마고가 지금으로부터 14000년 ∼ 12000년 전 사람이라면,
그때 갑자년은 12000년 전이어 야 한다.
따라서 12000년 전 상달 초3일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500년의 년차(年差)가 있다고 해도, 동짓달 동짓날에는 변동이 없으므로,
마고의 개천 년대는 12000년∼12500년 전 인 BC10000년∼BC10500년 상달 3일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 '마고지나'
동이문명을 시작한 마고지나
<동이(東夷)>는 우리의 직계 조상이다.
'마고'가 신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인 '황궁'과 '유인'과 '한인'과 '한웅'의 대를 이어
'황제'가 역사에 나오기 이전까지 중원 땅을 다스린 인종은 <동이> 이외엔 어떤 인종도 없었다.
<동이>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문명을 동이문명(東夷文明)이라고 한다.
태초에 동북아시아에는 인류 최초로 동이문명(東夷文明)을 탄생시킨
<동이족>만이 오손도 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을 시작하였고,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시작하였다.
시장을 열어 한 곳에 모이니 이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동이문명'의 탄생을 역경(易經)에서는 지화명이(地火明夷)라고 말한다.
'지화명이'란 "땅위 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동이"이라는 뜻이다.
역경에서 동이의 '지화(地火)'가 사국(四國)을 밝힌다고 했다.
'지화'가 바로 문명의 모체가 된다.
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이 일을 최초로 한 사람들이 <동이>이다.
오늘날 '사국'은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와
이들 세 나라에 기초를 두면서도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도 아닌 제 3의 나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직 '제 4국'이 출현하지 않은 이상, 지금도 이 괘의 효력은 유효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생겨날 제 3의 나라는 3국이 연합하여 만들게 될 미래형의 국가로 해석이 가능하다.
사이버 상에서 탄생이 가능한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를 <새로 태어나 는 신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신시>를 탄생하게 할
뿌리가 될 시원문명(始原文明)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밝힐 '지화'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 것인가?
이 지화를 밝힐 사람 들은 <동이>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이것은 국경과 국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핏줄과 정신이 동이에 맞닿아 있으면 그가 어디에 살고 있든 편을 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이문명을.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황화문명이
우리의 조상이 인류 최초로 탄생시킨 동이문명임을 모르고
한족문명(漢 族文明)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못 알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황하유역을 포기하고 한반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민족이 동에 있었다.
이는 우리 조상이 한족과 겨루어 오면서
사실상 진시황 초기에 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이후로 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지금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 두 번째 이유는 동이가 마고지나(麻姑之那), 한국(桓國), 신시(神市), 조선(朝鮮)으로
나라의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의 이름인 '마고지나'를 보전(保傳)해 오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마고지나'는 모든나라의 원형
'마고지나'의 문명은 우리 최고의 조상인 '마고'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 12000년 전에 해당한다.
이때가 한웅천왕이 신시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최초로 세운 신시국가시대였다.
신시국가는 오늘날의 국가체제와 다른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국가체제이므로
초국가체제(超國家體制)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신시를 표방하고 나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에
오가(五加)체제에서 우리는 마고시대의 초국가체제를 유추할 수 있다.
<이고선>이 쓴 <조선기>는
단군왕검이 그의 장인인 '지일태제(地一泰帝)로부터 '배달나라 '를 인수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때가 BC2333년이다.
그러나 BC2311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다.
'달나라'를 '조선'으로 바꾸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불어나서 오가체제를 유지 할 수 없게 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부여'가 건국되고, 이어서 '고구려'가 건국된다.
이들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고려'가 건국된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면서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하였지만,
단 하나 사라 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이었다.
'마고지나(麻古之那)'란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 증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정부에서 부르는 나라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이름이 달랐던 '고려'
고려에는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의 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의 이름'이 따로 있었다.
'고려'는 외교문서에나 나오는 국가명칭이고,
백성이 부르는 진짜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였다.
나라에서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부를 때, 백성은 '고려'라고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麻古之那)'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고지나'는 고려의 백성이 살고 싶어했던 나라, 현실을 떠나서 찾아가고 싶어했던
고려 백성의 유토피아였다.
왜, 고려엔 '백성이 부르는 나라 이름'과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 각각 달랐을까?
이는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부르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데에서 비롯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려의 백성이 '마고지나'라고 부른 나라는 마고가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였다.
신시 는 그 맥을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이어 오고,
다음에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나라의 체제 로 자리 잡았다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이 10년마다 한 번씩 신시를 열다가,
진시황 8년에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백성들은 역사적인 유물이 된 '마고지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고지나'는 언젠가 회복해야 할 고려 사람들의 근원상징(根源象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 당하고, 민족이 역시 남과 북으로 분단 당하고,
외세에 의하여 국가적인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오늘의 국가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고지나'라는 심원한 근원상징은
우리의 꿈이 되고 나아가서 현실로 성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고지나'는 땅에서 우주의 중심과 일치하는 곳에 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세운 최초의 나라,
지금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나라였다.
영토에 대하여 개념정립이 전혀 아니 되었던 나라,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모이는 사람들의 나라, 초국가적인 나라였다.
이 나라가 앞으로 온 세계 인류가 세우게 될 사이버 국가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시의 원리를 천착해 보는 일이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마고지나'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사유체계가 우주의 원리인 삼태극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삼태극 원리 위에 세워진 나라가 신시였다.
삼태극의 원리란 음양조화의 원리이다.
이 원리를 원시신앙으로 발전시킨 분이 마고였다.
그래서 삼신신앙이 나왔고,
삼신신앙의 성지인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기점으로 하여
삼신신앙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마고의 뒤를 이어서, 삼태극의 원리에서 나온 신시의 원리를 삼신철학으로 정리한 분이
한웅천왕이었다.
그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원리로 신시의 원리를 정리하였다.
이 원리를 국가체제에 적용하여 화백(和白)과 시장(市場)과 인사(人事)의 세 축을 만들어
이끌어 갔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게 하여
나라가 당하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자신을 책화(責禍)로 다스렸다.
이를 공동선(共同善)의 실현, 곧 덕(德)으로 보았다.
'마고지나'가 고려시대까지 백성의 마음에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왜소함과는 달리 선조들의 그 당당한 거대함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무신도에 나오는 '마고','마고'가 인류 최초로 '마고의나라'인 '마고지나'를 세웠다.
고려역사에 나타나는 마고지나
고려가 원(元)의 속국이었던 시대에, 원은 고려 땅에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고려를 다스렸다.
고려의 임금은 종(宗)에서 왕(王)으로 격하되었고,
나라의 관리들은 두패로 갈라져 한패는 고려에 붙고, 다른 한패는 원에 붙었다.
원에 붙은 자들은 왕을 배반하고 고려를 배반하였다.
고려사를 개작하여 후대에 전한 조선의 역사가들은 고려의 현실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
임금의 권위를 폄하하였고, 관리를 원의 노예로 만들었다.
고려의 말기는 이렇게 암울한 시대였다.
그래서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버리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지리멸렬 한 고려에서 신시의 근원상징인 '마고지나'가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이후의 시대인 조선시대와 현 대한민국에서도
어떠한 무게를 지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에 나오는 '마고지나'를 보기로 한다.
" 고려사에 고려의 28대 충혜왕은 타락한 인간처럼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에 붙어 종노릇을 하는 <이윤>, <조익청>, <기철> 등이
원나라로 가서 중서성에 왕이 불경스럽다고 모함하였다.
원 황제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려고
<타적>과 <별신가> 등 사신 6 명을 고려로 보냈다.
왕은 백관들을 인솔하고 교외에 나가 원나라에서 도착한 사신들을 영접하였다.
돌연히 사신 <타적>과 <내주> 등이 왕을 발길로 차고 포박하였다.
<신예>라는 자가 병사들을 매복시켜 원나라 사신들을 도왔다.
아무도 왕의 안위를 위하여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고, 칼에 맞거나 창에 맞은 자가 많았고, 2 명은 살해당하였다.
<타적> 등은 왕을 급히 말에 태워 그곳을 빠져나갔다.
원나라에 가서 왕을 모함하였던 <기철>과 <홍빈>이 왕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원나라 사람 <고룡보>의 명을 받아 정동성(征東省)의 업무를 보았다.
왕은 원나라에 압송되어, 시종 한 사람 없이 홀로 계양현을 거쳐 악양현으로 귀양가다가
독살 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고려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아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
고려 백성들이 고려를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계승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정체성이 계승된다는 것은 정체성이 타고나는 주술성도 함께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고려가 멸망한 고구려에서 나온 문자이므로,
고려가 언젠가는 당나라에게 멸망한 고구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고려는 국가로서 존립의 기반이 되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상실한 채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로 충혜왕은 원에 체포당해 갔고 귀양길에서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백성들 이 이러한 나라 같지 않은 나라의 이름 '고려'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들의 속사정이 당시의 속요인 '어아가'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자에 나타나는 주술성
한국문자학회>와 중국인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9∼1993)>에 따르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한(韓)'자는
"요(堯)임금을 죽이고 제위(帝位)를 찬탈한 순(舜)임금"에게서 나온 문자라고 한다.
그 어원적인 의미가 순시대(舜時代)에 "쿠데타, 반역, 모략, 살해" 등이었으므로,
과연 이 '한(韓)'자를 그대로 국호로 써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문자를 그 문자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 가면 높아 갈수록
이에 따라서 주술성도 함께 높아 간다고 본다면,
우리가 '한(韓)'자를 그대로 쓰는 한,
"쿠데타, 반역, 모략, 살해" 등이 가져다 주는 주술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50년 역사에서 이를 이미 충분히 경험할 만큼 경험하였다.
남북의 좌우대립의 이념에서 빚어진 여수순천 제주도의 좌익반란사건,
대구의 10월 좌익노 동자폭동, 남한 점령을 기도한 북한의 6,25 군사남침,
민주화 혁명이라고 일컫는 4.19 학생혁 명, 군사 쿠데타라고 말하는 5.16 군사혁명,
또한 광주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는 광주의 대학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 사건을 일으킨 시대적인 당위성이나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나 역사성이 어떻든 간에,
'순임금'에게서 발현한 '한(韓)'자가 내포하는 '쿠데타' 의 주술성과 '반역'의 주술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난무하는 온갖 중상과 모략, 음해와 모략,
특히 정치권을 사로잡고 이는 이러한 현상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도가 지나친 것들로,
이러한 것들도 역시 '순임금'에게서 발 현한 '모략'의 주술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이 나라 밖으로 도망쳐 불귀의 객이 되었고,
다음 대통령은 군사혁 명이 일어나 하야 당했으며,
그 다음 대통령은 측근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였다.
다음 대통령 역시 하야를 당했다. 다음 대통령들은 줄줄이 감옥을 드나들어야 하였다.
이도 또한 '순 임금'에게서 발현한 '살해'의 주술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국호에 '한(韓)'자를 그대로 쓰는 한
앞으로도 대한민국 50년 역사에서 본 '순임금'의 주술성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무엇 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주도로 남북통일을 이룩했을 때,
축배를 들기도 전에 되치기를 당하여, '순임금'의 망령이 춤을 추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제주의 옛 이름 '영주(瀛洲)'에 숨겨진 '마고지나'
제주는 삼신나라인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제주도는 삼신산에서 건너간 섬이다.
그래서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영주산이 새끼를 쳐서 옛 영주가 된 것이다.
옛 영주가 지금의 제주이다.
영주산이 의미를 갖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동이의 조상인 마고가 그의 후손과 함께 삼신산에 세운 신시(神市)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롯한다.
그가 세운 '마고신시' 즉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해만을 잇는 일직선상에
징검다리처럼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이 곳의 섬들을 묘도군도(廟島群島)라고 한다.
여기에 두 섬이 있으니 이 두 섬이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이다.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한다.
영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중의 하나에 있는 산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우리가 '남과 북'을 '북남'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서
남쪽이 북쪽보다 우선하므로 남쪽에 있는 남장산도를 영주로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이 고장에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제주의 옛 이름 두 가지 '영주'와 '탐라'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주'이다. '영주'는 마고가 다스리던 '마고지나'의 삼신산(三神山)인
'영주', '방장', '봉래'의 세 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퍼져 나온 이름이다.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이다.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 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 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여기에서 "직녀성이 탐랑성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데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므로
설명을 해 보면, 마고가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직녀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추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12000년 전에 지구중력의 회전축의 중심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신산에서 바다를 건너가는 마고 삼신. 영등바람을 타고간다.
영중의 삼조탄생지인 삼성혈 삼조는 바다를 건너온 마고삼신과 결혼했다
삼신의 나라 영주 탐라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엔 신화나 설화나 무가나 지명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흔적은 다른 고장에선 대부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찾아 낼 수 있으나,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에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기록과 구전으로 나타난 것들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이라 쉽게 찾아 진다.
먼저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지금 진산鎭山: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 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 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東海碧浪國)'이 라고 하였다.
제주대학의 현용준(玄容駿)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자세한 연구가 실려 있으므로,
중복되는 부분은 피하기로 하고, 마고삼신과 관련하여 아직 연구가 안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 지구의 회전축이 천추성을 향하기 시작한 천추성시대)부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東夷)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 (三神山)에 신시(神市)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 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동해바다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고선(李固 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국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지금의 황해)빈'에 닿았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는,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이라고 한 , 한 대목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기'가 고려사에서 영주와 탐라의 출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고기'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 장난'이 있었을 수 있 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을나(乙那)'가 어떻게 기록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고려의 옛 이름을 '마고지나(麻古之那)'라고 하였다.
'마고의 옛 나라'라 는 뜻이다.
나(那)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 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을나(乙那)를 지나(之那)로 고쳐서, 그 뜻을 '나라' 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로 읽으면 '고을나'는 '고지나'가 되고, '양을나'는 '양지나'가 되고, '부을나'는 '부지나'가 된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 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의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麻姑三神)'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모(毛)는 "털이 흰 소의 쇠꼬리"인 모( )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모는 무당이 모무( 舞, 쇠 꼬리 춤)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다.
혈(穴)은 모( )를 꽂는 구멍이다.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을 정리하면, 모흥혈은 춘분 마지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이다.
그러므로 고양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이 모흥혈이 되는 것이다.
세 처녀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를 찾아 온 '마고삼신'의 후예임을 상징한다.
아마 세 처녀가 가지고 온 것에 종자 이외에
마고의 신표인 '천부삼인'과 '해혹복본'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기록에는 아니 나오나 이 고장 무가사설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고장 무가사설에 " 할로(漢拏) 영주(瀛洲) 삼신산(三神山) 상상고고리(上峰) …" 라는
대목이 있다.
무가에서 한라산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고장에서 하는 영등제는 2월 바람으로 오는 마고삼신을 마지하는 마지굿이다.
영등제에 오는 마고삼신은 어디에서나 두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들이 삼신이기 때문에 마고와 궁희와 소희가 함께 오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일본국과 벽랑국에 대한 해석이다.
일본국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붓 장난이다.
탐라나 영주에 걸맞지 않은 상대가 일본국이라는 말이다.
오늘날의 제주가 탐랑성과 마고삼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후세의 사가가 제주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붓 장난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벽랑국은 '바다나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 된다.
제주무가에 나오는 할로 영주 삼신산인 제주도 한라산, 민족의 영산이다.
마고가 보낸 삼신은 삼신신앙의 선교사
마고는 왜 삼신을 '할로 영주 삼신산'에 보낸 것일까?
그 이유는 삼신신앙의 전파에 있었지 않나 한다.
모흥혈에서 삼신신앙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데,
모흥혈에서 남삼신과 여삼신을 '할로 영주'의 시조로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지(符都誌)>에 따르면,
마고가 생존했던 시대에 지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천문학자가 말하는 "지구가 뒤집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에 나타난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마고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종들에게 선교사로 파견한 사람들이 삼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마고는 선교사로 떠나는 삼신들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보냈다.
그 하나가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신체로 모신 '천부삼인(天符三印)'이고,
다른 하나가 삼신시대의 삼신신앙의 교리인 '해혹복본(解惑復本)'이다.
삼신들이 곳곳에서 활동을 함으로써 '해혹복본'을 교리로 하는
삼신 신앙과 칠성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동이(東夷)가 마고할머니가 가르친 '해혹복본'의 보호막 안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기러기로 둔갑한 오리
전통혼례 때 보면 북두칠성이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혼례婚禮를 시작한다.
저녁에 결혼의례를 치르므로 혼례라고 하는 것이다.
북두칠성이 뜨는 시각에 혼례를 올린다고 하여 이 혼례를 초례醮禮라고 한다.
이때 <기러기>아비라는 사람이 기러기 한 마리를 붉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신랑을 뒤에 세우고 신부집에 도착한다.
" 기러기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끝날 때가지 짝의 연분을 지킨다고 하여,
신랑이 백년해로百年偕老 서약의 징표로서 신부 어머니에게 바친다 "고 하나,
이 말은 그럴 듯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오리가 기러기로 둔갑을 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 기러기아비가 신부집에 기러기를 모시고 가는 것 "은
기러기가 마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러기아비가 모시고 가는 것은 기러기여서는 아니 되고 오리여야만 한다.
따라서 이 말을 바꾸면,
" 오리아비가 신부집에 오리를 모시고 가는 것은 오리가 마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마고가 보낸 삼신을 모시고 간 사자의 역할을 지금도 오리아비가 대를 이어 하고
14000년 동안 해 오고있는 것이다. "
집안에서 오리아비로부터 오리를 받는 사람은 신부의 어머니이다.
신랑집에서 신부의 어머니를 마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의식이 바로 오리를 전달하는 의식이다.
마고를 기억하고 숭상하자 하는 전통이 오리를 매개로 하여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의례를 전안례奠雁禮라고 하는데, 우리의 정체성을 흐리는 말이므로
정체성을 살리는 말인 전압례奠鴨禮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압鴨자를 여종 또는 하비下婢의 뜻으로 함께 쓰고 있고,
안雁자를 가짜 모조품이라는 의미로 함께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혼례와 관련하여 문자에 무엇인가 의미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에서 보면 전시대의 문자의 의미가 후대에 와서 정반대의 의미가 되는 것은
정치적인 변혁이 있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임금시尸자가 시체시尸자로 둔갑을 한 예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시자는 원래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문자로
치우천왕시대만 해도 치우천왕을 의미하는 임금이라는 문자로 쓰였다.
그러나 황제가 치우천왕을 죽이고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 기가 막힌 멋진 문자는 시체시자로 의미가 바뀌고 말았다.
마고삼신에게서 나온 삼신사상
영주로 시집온 마고삼신은 요즈음 말로 삼신종교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오리를 앞세워 어디든지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이것이 지금도 마을 입구에 서있는 솟대의 유래이다.
마고삼신은 무엇을 이 땅에 전파하고자 이 땅에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일까?
이는 천주교가 성모 마리아를 내세워 전 세계를 상대로 포교를 해 온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마고가 성모 마리아로 변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델이 바로 마고가 된다.
마고의 원형상징이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고삼신은 무엇을 전파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지상에 생겨난 어떠한 종교도 깰 수 없는
<천부삼인天符三印>과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원형原形의 교리敎理였던 것이다.
신시나라 2
'마고삼신시대'의 대를 이은 '황궁黃穹시대'가 있었다
직녀성시대를 역사시대로 시작한 최초의 문명인 마고
상고시대에 누군가 12궁도宮圖를 그렸다.
원을 30도씩 열둘로 나누어 12궁을 만들고,
12궁 하나하나 마다 시계방향 즉 순방향順方向으로
자(子 쥐)·축(丑 소)·인(寅 호랑이)·묘(卯 토끼)·진(辰 용)·사(巳 뱀)·오(午 말)·미(未 양)·
신(申 원숭이)·유(酉 닭)·술(戌 개)·해(亥 돼지)의 12진辰을 앉혔다.
그리고 12진 하나 하나마다 2000년씩 배치하였다.
이를 궁宮이라고 하고, 궁마다 이름을 붙였다.
축에는 쌍여雙女를, 자에는 사자獅子를, 해에는 거해거해巨蟹를, 술에는 음양陰陽(부부)을,
유에는 금우金牛를, 신에는 백양白羊을, 미에는 쌍어雙魚를, 오에는 보병寶甁을,
사에는 마갈磨蝎을, 진에는 인마人馬를, 묘에는 전갈全 을, 인에는 천칭天秤을 배치한 것이다.
이리하여 12궁도에는 모두 24000년이 2000년을 한 단위로 하여 표시되어 있다.
12궁도에는 인류 시원始原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2궁도의 역사는 쌍여궁에 해당한다.
상여궁시대는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대로, 이때 비로소 천문을 보기 시작했고,
우주의 이치를 찾고자 하였다.
인간이 왕래를 트고, 시장이 서고, 신시神市시대라는 신정체제神政體制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숭상하는 삼신신앙이 태동한 시대였다.
이 시대를 이끌어나간 분이 마고麻姑다. 마고에서 동이東夷가 나온다.
동이는 동쪽에 나오는 춘분의 기氣라는 뜻이다.
이夷는 태현경太玄經에서 춘분의 기로 풀이되고 있다.
이는 주역에서는 몽蒙괘와 대장大壯괘로 풀이된다.
중국에서는 천산天山에 마고사당을 지어 놓고 금모낭낭金母娘娘이라고 부른다.
역의 몽괘에 나오는 금부金夫는 금모낭낭의 남편이 된다. 즉 마고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
마고가 사는 곳이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는 후손들 중에서 세 처녀를 뽑아 멀리 시집보냈다.
삼신이 시집가서 청착한 곳이 영주이다.
삼신은 그들이 시집가서 정착하는 곳에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세 마리의 오리'를 앉힌 솟대를 세웠다.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에 앉은 '오리 세 마리'를 보고서
그 마을사람들이 마고삼신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엔 직녀성이 밤의 세계를 관장하며 북극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직녀성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움직임을 통제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문명인이 태어났음을 역경易經의 지화명이괘地火明夷卦가 밝혀 주고 있다.
명이明夷란 동이족의 문명이 밝아지는 것을 말한다.
괘에서는 대난大難을 깨뜨리는 것, 즉 몽蒙을 명이라고 하였다.
명이를 형상화 한 것이 삼국시대 때, 흙으로 오리를 빚어 만든 오리등잔이다.
칠월칠석 날을 직녀성에게 제물을 바치고 칠석제를 지냈다.
고구려고분 오회분 4호묘의 천장부 고임 오른쪽벽화.
삼족오를 몰아 황궁시대로 가고 있다.
세 마리의 오리시대를 지나서 세 발 달린 까마귀시대로
영해박씨의 문중비서인 <부도지>에 보면, 이 시대에 인구가 불어난다.
궁희와 소희의 뒤를 이어서 네 천인과 네 천녀가 태어난 것이다.
직녀성의 시대가 끝나고 천추성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후천시대가 왔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인데,
12궁도의 12지 중에서 자(쥐)에 배속된 사자궁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를 주도하여 이끌어간 분이 황궁黃穹이다. 황궁시대는 삼족오시대였다.
밤을 대표하는 직녀성시대, 즉 마고삼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오리의 시대가 끝나고,
낮을 관장하는 까마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왕궁시대에 천추성시대를 시작하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까마귀 삼족오를 보면,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오리와 황궁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까마귀의 발이 셋인 것은 이 까마귀가 삼신인 오리에게서 태어난 새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리 다음으로 세상에 나온 새가 발이 셋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라는 뜻이다.
까마귀의 몸이 까만 것은 아직도 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도지에 보면 황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황궁씨가 천부天符를 신표로 나누어주고 … 제족諸族이 나누어 살 것을 명했다.
이에 청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
황궁시대에 황궁의 주도로 직녀성의 마고성에 살던 모든 종족이
마고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통하여 뿔뿔이 흩어져 지구로 우주이민을 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고성이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오염이 심각해지자
청정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것(解惑復本)을 기약하고 지구로 떠난다.
"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를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하였다.
성 안의 사방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피리)을 쌓아 놓고 소리를 만드니,
첫째는 황궁씨요, 둘째는 백소씨요, 셋째는 청궁씨요, 넷째는 흑소씨였다. "
마고성에 살던 사람들은 선천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마고시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황궁의 시대는 후천의 시대가 된다.
즉 황궁이 이끌고 온 우주이민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이끌어간 황궁을 상징하는 것이 12궁도에 쌍여 다음에 나오는 사자이다.
그는 사자와 같은 기백으로 황궁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이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서 10000년 전이다.
그는 오로지 마고가 지시한 해혹복본解惑復本을 일념으로 살았다.
해혹복본은 마고성이 청정해지면 직녀성시대로 돌아가라는 마고의 지시였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4호묘(上)와 각저층(下)에 그린 삼족오.
삼족오는 직녀시대와 황궁시대가 포개져 있음을 의미한다.
삼족오시대의 의미
삼족오시대는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시대이고,
삼태극三太極의 시대이고, 음양조화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우주에서 황궁(黃穹, 黃宮)이라는 공간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황궁은 천지만물의 중심이다.
앞과 뒤의 가운데가 황궁이고, 상중하의 중간이 황궁이다.
우주에서 상원 중원 하원의 중심인 중원이 황궁이다.
소리에도 양의 소리와 음의 소리가 있고, 이들 소리 사이에 중간소리가 있다.
우주 만물에 중궁(中宮, 黃宮)이 있다는 인식은
상고시대 인간들의 사고에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직녀성이 음이라면 천추성은 양이다.
이 음과 양의 중간지대가 있다. 여기가 황이다.
이는 삼태극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흑이 직녀성이라면 적은 천추성이다.
직녀성과 천추성의 중간지대가 황이다.
황黃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을 때는 중심이 되지만,
순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하면 조화를 낳는다.
황이 회전함으로 해서 음양에 조화가 일어난다.
삼태극의 황이 음양이 조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삼족오는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다.
오회분 4호묘와 각저총에 그려진 삼족오와 덕화리1호분에 그려진 삼족오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황궁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는 아직도 직녀성의 영향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밤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까마귀를 택하게 된 것이고,
그의 발이 셋인 것은 아직도 오리 세 마리의 시대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을 숨긴 것이다.
'황궁시대'의 대를 이은 '한인桓因시대'가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한인'과 '항영'을 벽화로 그렸다.
유인시대의 의미
부도지 제 10장 서두에 '황궁씨의 장자 유인(有因)씨'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황궁씨가 장자 유인씨를 낳았다"는 의미와
"황궁씨가 유인씨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유인씨는 한인桓因씨를 낳는다.
그래서 유인씨는 황궁씨와 한인씨 사이에 다리를 이어 주는 분이 된다.
유인씨의 인因자를 보면, 인자는 '원인, 까닭, 유래,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자는 나라국자 안에 큰대大자가 들어 있는 문자이다.
나라국자 안에 쓰였던 큰대자는 원래 어길위韋자로 쓰였던 문자였다.
어길위韋자는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9∼1993)의 해석에 따르면,
요즈음 말로 쿠데타를 의미한다.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면서 생겨난 문자이다.
이 문자는 '둘레, 둘러싸다, 사냥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因자에 들어 있는 큰대大자는 순임금으로 볼 수 있고,
위圍자는 순임금의 나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의미를 정리하면 인因자는 순임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나라가 된다.
이 나라가 위圍라는 문자를 탄생시켰다.
순임금은 인因자가 의미하는 고전적인 국가에 쿠데타를 일으켜
위圍자가 의미하는 새로운 시대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因자에서 제단과 제사의 의미를 도출
우리는 인因자와 위圍자에서 상고시대에 있었던 제사풍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나라국자는 제사를 지내는 방구단方丘壇을 의미한다.
단군조선시대에는 방구단을 쌓고, 이 위에 북진北辰(북극성)과 칠요七耀(북두칠성)를 표시하고,
전물奠物을 올려 제사지냈다. 이렇게 하여 국도國都를 정했는데, 이를 부도符都라고 하였다.
이 부도가 왕검성王儉城이다.
따라서 왕검성에서 부도를 도출해 내고, 부도에서 방구단을 도출해 내고,
방구단에서 인因자를 도출해 낼 수 있으므로,
결국 인因자와 왕검성이라는 문자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속리산 에밀레 박물관에 있는 한인제단의 표석
한인천제의 시대는 태양의 시대
역易의 수뢰준水雷屯괘 초구효初九爻에서는 천부를 반한磐桓이라고 한다.
반한이란 고인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자이고,
한국桓國에 있는 고인돌, 즉 한국의 천부에 해당하는 돌이므로,
한국의 천부가 있는 곳이라면 부도가 되고,
그곳이 부도라면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한磐桓은 고인돌, 즉 제단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桓因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선생은
한인천제가 나라를 세운 때를 지금으로부터 9199년 전으로 보는데,
나라의 역사는 3301년이고, 일곱 분의 천제가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파나류波奈留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국이라고 한다.
그 땅은 넓어 남북이 5만 리이고, 동서가 2만여 리이며,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나누어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구매여국,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치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
파나류산은 천산으로 볼 수 있는 산이다.
부도지에 "황궁씨가 천산주天山洲에 도착했다"고 했으니, 여기를 말함인 듯 하다.
황궁씨의 시대는 삼족오시대이다. 이 시대를 12궁도에서 사자궁시대라고 하였다.
기간은 약 2000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0년에서 10000년 사이가 된다.
이 시대에 그는 천부삼인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삼신사상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린 것이다.
황궁씨가 아들 유인씨에게 '천부삼인'을 전했다.
유인씨가 세상을 다스린 기간이 1천년이었다.
그러니까 사자궁 다음 시대인 거해궁巨蟹宮시대의 2000년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1천년이
유인씨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해'자의 의미
'해'는 의미로 볼 때 '게'로 읽어지지만, 음으로 읽으면 '해'로 읽어 진다.
따라서 거해궁시대는 태양의 시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이다.
부도지에 따르면, 이 시대에 유인씨는
" 사람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끊어서 마찰을 일으켜 불을 일으켜 밝게 비춰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 고 하였다.
이 시대가 인류문명에서 불을 발견한 시대이다.
이 시대를 수인燧人씨의 시대라고도 한다.
백성이 불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수인이라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紀源>에 따르면, "수인씨가 칼을 만들었는데, 이 것이 칼의 기원이다."라고 하였다.
유인씨(수인씨)의 시대를 불을 이용하게 된 거해궁시대의 1천년으로 본다면,
칼을 발명한 거해궁시대 1천년으로 볼 수도 있다.
거해巨解라는 말이 칼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해蟹자에 칼도刀자가 들어가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칼을 발명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칼은 돌을 연마하여 만든 칼이었을 것이다.
이 칼을 가지고 쇠뿔을 떠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칼을 발명하기 전에는 칼 대신 무엇을 썼을까?
거대한 게를 잡아서 집게발을 띠어내어 칼로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천문에서 칼을 쓰기 시작한 시대를 <거해>라는 말로 나타냈는지도 모른다.
거해궁巨蟹宮이라는 문자에서 해蟹자를 보면, '소의 뿔을 해체하는 벌레'라는 의미가 있다.
각角은 뿔이고, 도刀는 칼이고, 우牛는 소이다.
충은 벌레이다. 벌레는 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12궁도에서의 거해는
소를 잡기 위하여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게蟹 형상의 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라클레스가 괴물 뱀 히드라와 싸울 때,
헤라 여신이 히드라를 도우라고 괴물 게를 보낸다.
그러나 괴물 게는 헤라클레스의 발에 밟혀 죽는다.
헤라 여신은 괴물 게를 불쌍히 여겨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게자리는 황도 12궁 가운데에서 네 번째 별자리로
그리스 시대에는 하지夏至(6월 21일경)에 태양이 이 별자리를 지나갔다.
하지는 천구 위에서 태양이 가장 북쪽에 머무르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태양의 북회귀선北回歸線
(태양이 천구 위에서 최북단에 머무르는 적위赤位로 +23½˚)이 쌍둥이자리로 옮겨갔고,
태양은 해마다 7월 하순과 8월 초순에 이 별자리를 지나간다.
(쉽게 찾는 우리 별자리 이태형) 신화시대에 게는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거대한 가위를 가지고 태양의 불수레가 황도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는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탄 불 수레가 미친 듯이 다가왔을 때
그냥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신화) 이 시대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태양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나고 나서 아들 한인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산으로 들어가
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않았다.
계불은 계곡에서 몸을 씻고 부정을 물리치는 푸닥거리이다.
그가 한 일은 전적으로 이를 닦는 일이었으니, 그가 제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계불의 계자도 게蟹자와 음이 닮았으므로 어느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게가 가지고 있는 '가위다리'는 침입하는 악귀를 자른다는 벽사 邪의 의미가 있으므로
부작符作으로서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황제릉 박물관의 벽화 복희와 여왜 교미도
벽화와 족보기록에 나타나는 한인천제시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촌 통구평야 중앙부에 있는 고구려 고분 오회분 4호묘에는
한인천제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벽화가 있다.
널방 천장부 고임 안쪽 왼편 모서리에 그려진 벽화가 그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왼쪽에 달을 이고 있는 인신사족人身蛇足의 여인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 해를 이고 있는 인신사족人身蛇足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들 남녀는 튼튼한 꼬리를 기운차게 치며 하늘로 날아 오르고 있다.
이들이 입은 옷은 날개 형상의 신의神衣라고 하는 옷이다.
이들 남녀는 태양신과 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해와 달의 신이 아니라
해와 달의 신으로 신격화되어 벽화그림으로 모셔진 한인천제桓因天帝와 그의 부인 항영姮英이다.
복희伏羲와 여왜女 로 알려진 중국측의 벽화그림과는 전혀 형상과 의미가 다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족보서문인 부소보서扶蘇譜序에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가 나온다.
진주소씨가 한인천제를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소보서는 이를 한국사桓國史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애석하게도 한국사는 실전失傳하여 전하지 않는다.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爲桓國之帝開於己卯於風州倍谷
석유적제휘부해호왈축융위한국지제개어기묘어풍주배곡
(옛날에 휘는 부해요 호는 축융인 적제가 한국의 제가 되어 기묘년에 풍주 배곡에서 개국했다.)
그는 오이烏夷의 여자 항영을 후后로 삼고 아홉 아들을 낳아 구주九州에 봉했다.
우리는 진주소씨의 족보서문인 부소보서를 통하여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이 실재했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있었다는 것이 절대로 신화가 아닌 것이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선생은
한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199년 전에 한국을 개국하였다고 주석하였다.
한인천제는 풍주에서 개국함으로써 풍이風夷의 시조가 되고,
배곡倍谷에서 개국하여 배달나라倍達那羅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인 마고가 <마고지나>라는 나라를 세워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을 문명사에 남긴 이래
두 번째로 한인천제가 한국을 세워 <배달나라>를 나라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그를 적제赤帝라고 하였는데, 적제는 '남방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후에 남방을 다스려 적제로 추앙 받게 된 신농神農의 조상이 된다.
또한 그를 축융祝融이라고 하였으니,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신'을 일컬음이라,
인류 최초로 불을 쓰기 시작한 유인씨 즉 수인씨의 대를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복희의 후예가 풍산風山에 살며 풍風씨 성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는 복희가 한인천제의 후예인 풍이족의 출신이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한인천제와 항영 벽화그림을 모방한 복희여왜교미도
중국측에 한인천제와 항영 벽화그림을 모방한
신강성토노번新疆省吐魯番에서 출토한 복희여왜도가 있다.
이 그림은 한인향영도보다 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들이 쓰고 있는 관과 복식 등이 문명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신의와는 무관하다.
복희여왜도에 나타나는 복희는 한웅천왕의 6대손인 다의발多儀發한웅천왕이다.
그는 신시시대에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의 후손이다.
한인천제와 같은 종족인 풍이風夷 출신으로 그를 부해復解라고도 하였다.
'한인시대'를 이은 '한웅시대'가 있었다
'한웅시대'는 '천부사상天符思想'이 꽃을 핀 시대
한웅천왕 '천부'로 사유의 기틀을 세우다
한인천제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한웅천왕시대가 왔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한웅천왕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12궁도로 보면 금우궁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황소가 12궁도에서 금우金牛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우궁시대에 출현한 걸출한 인물인 한웅천왕은 이름을 배달거발이라고 하였다.
'배달거발'은 '배다른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 배다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발이 큰 사람을 뽑아서 천왕을 세우고
한웅천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웅桓雄'의 웅雄자는 웅熊자로 통하는 문자이다.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문자이다.
'해와 칠성을 숭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인천제에게서 물려받은 한웅의 한桓자는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낸 문자이다.
우리말로 '크다, 하나'라는 의미를 가진 문자이지만 중국 한자로는 '빛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자에 "태양을 숭상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한인천제시대와 한웅천왕시대는 공히 태양을 숭상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桓자에 웅雄자가 붙음으로써
태양을 숭상하는 이외에도 북두칠성을 함께 숭상했다는 의미가 도출되어
이 시대에는 태양과 칠성을 함께 숭상했던 시대로 보게 된다.
한인천제의 시대를 해를 숭배했던 시대,
한웅천왕의 시대를 해와 칠성을 숭상했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에 칠성숭배가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웅천왕은 천부의 이치를 깊이 상고하여 '사유思惟의 틀'을 세우고,
천부에서 철학과 종교와 학문과 사회제도를 찾아내었다.
그가 믿기 힘든 일을 한 것이다.
남해 낭하리 암각서, 한웅천왕때 바위에 새긴 녹도문자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한웅천왕시대에 천부경을 기록하여 전하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쓰기 시작한 시대가 한웅천왕시대이다.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우리나라의 문자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암각문자가 있다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렸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최초의 문자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웅천왕시대엔 한인천제 때 완성한 천부경天符經이 구전되고 있었다.
한웅천왕은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鹿圖문자로 기록하라고 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후대에 와서
신라 말에 최치원이 묘향산에서 바위에 새긴 천부경을 발견하여
한자로 번역하니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천부경이다.
천부경은 우주가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를 최초로 문자화 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사유의 주체성은 천부경에서 나온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에서 셋이 갈라져 나온다는 뜻이다.
일이 하나님이라면 삼은 삼신이다.
우주의 단면을 자르면 삼태극이 되는 것도 일석삼극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천문에서 하나의 하늘을 삼원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이 원리에서 비롯한 것이다.
천부경의 중심사상은 천지인天地人사상이다.
천지인사상은 후대에 와서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낳는다.
단군조선을 삼조선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그 이치가 일석삼극에서 나온 것이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단군왕검시대에 와서 발전하여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원리를 낳는다.
운삼사성환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원형이정의 원리에서 춘하추동 사계가 나온다.
이는 운삼사성환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웅천왕은 이 외에도 천부경을 풀어서 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지어 백성을 가르쳤다.
단군조선시대에도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쳤다. (단군세기 11대 도해단군)
주역의 천풍구天風 괘에는 다음과 같은 효사가 있다.
象曰 天下有風 以施命誥四方
상왈 천하유풍고 이시명고사방
상에 이르기를, 세상에 풍이風夷 출신의 구가 있어,
삼일신고를 사방에 가르치도록 명한다고 하였다.
구자는 여女자와 후后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인데,
한웅천왕시대에 있었던 당시의 여자 제후를 이르는 말인 듯 하다.
풍이족에 여자제후가 있는데 그가 한웅천왕의 명을 받들어
사방에 삼일신고를 펼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일신고는 총 366자로 만들어진 경전인데,
제 1장이 허공虛空의 장이고,
제 2장이 일신一神의 장이고,
제 3장은 천궁天宮의 장이고,
제 4장은 세계世界의 장이고,
제 5장은 인물人物의 장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을 풀어 쓴 것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은 천문의 이치에서 한역 8괘를 만들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하여 윷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후대에 와서 천부경 81자에서 태현경 81괘가 나오고, 노자 도덕경 81장이 나왔다.
태현경과 도덕경의 근원이 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천부경이 유교와 도교의 정수를 뽑아서 누군가 만든 것이라는 헛소리를 한다.
한웅천왕이 태백진교를 선포하고 시행하다
한웅천왕은 마고가 정착하여 삼신을 세상에 알린 태백산에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와서(삼성기전 하편) 배달나라를 세웠다.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선포하고 이를 국가의 이념으로 하였다.
마고시대에 삼신사상이 나온 이래 이를 발전시킨 것이 태백진교이다.
태백진교는 천부경을 기초로 한다.
태백진교는 우리 민족이 지상에서 최초로 갖게 된 종교의 이름으로써
삼신종교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두 번째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의 일이다.
불교가 2500년 전, 기독교가 2000년 전에 세상에 나온 것과 비교하면
태백진교의 출현시기는 불교의 2배가 넘고, 기독교의 거의 세 배가 된다.
태백진교는 천부天符에 근원을 두고, 지구가 자전自轉하는 이치에 합치하도록 하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정치를 함發政은 화백和白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治德에 있어 화禍를 꾸짖는 것보다 착한 것은 없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해나가는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였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발정은 화백으로 한다고 했으니, 100% 찬성을 도출하는 회의제도를 채용하겠다는 말이고,
치덕은 책화로 한다고 했으니, 법률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자연재해에 대하여 무과실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화백은 타살굿을 할 때 소의 머리에 정釘을 박을 무당을 뽑는 회의라고 볼 수 있는데,
각성바지 대표자 6명이 모여서 만장일치로 이 일을 할 무당을 뽑는다.
이 무당을 화백회의에서 뽑은 무당이라고 하여 백정이라고 하였다.
백정은 소를 잡아 칠성에서 오는 천기를 제단에 좌정하는 일을 하였다.
천기를 좌정하는 바위를 고인돌 즉 반磐이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 처음 이 일을 한 분이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역易의 수뢰준水雷屯괘에 반한磐桓이라는 효사가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를 처음 세울 때 경주에서 여섯 촌장이 모여 박혁거세를 이사금으로 뽑았다.
이때 회의를 주도한 사람이 단군조선 때 전국에 세운 12 소도 중의 하나를 관리하던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여섯 촌장을 북두칠성의 여섯 별인 건建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뽑은 박혁거세는
북두칠성의 첫 별에 해당하는 천추성이었다.
신시는 세금을 받지 않는 시장과 세금을 받는 시장의 두 종류의 시장을 운영하는 곳이다.
신시를 운영하는 가장 큰 목적은 동이에 속한 여러 종족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종족을 다스린다는 큰 목적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하늘에 천시원天市垣 신시원神市垣이 있는데 이는 하늘의 시장을 말한다.
하늘에 두 시장이 있으니 자미원紫微垣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신시는 이를 본받은 것이다.
책화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임금이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가령 산천이 가물어 타 들어갈 때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로 시달리게 될 때
그 책임을 임금이 진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의 인사人事제도를 만들어 시행하였는데, 그 모델을 북두칠성에서 따오고,
이를 천부의 인사라고 하였다. 이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道라고 하였다.
신시시대의 태백진교. 우리민족종교를 형성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였다.
천부경은 우리민족의 사유체계를 집약하여 표현하였다.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삼태극,삼신사상이 나온다.
천문학이 꽃을 피웠던 한웅천왕시대
마고삼신시대에서 직녀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천문학은
황궁시대에 와서 삼신을 의미하는 칠성과 해와 달에 관심을 갖는 천문학으로 발전하고,
한인시대에는 태양에 관심을 두는 천문학으로 발전하였다.
한웅시대로 와서는 태양에 대한 관심이 북두칠성으로 발전하였다.
천부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천부경에서 우주의 이치를 체계화하였다.
이 시대에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우주원리가 발견된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우리가 한족漢族의 사유체계와 어떻게 다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다.
'한웅시대'를 이은 '복희시대'가 있었다.
황제의 후손이 풍이風夷출신의 복희를 문화의 조상으로 숭배하다.
복희는 한웅천왕의 후손
복희伏羲는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6세 손이다.
그는 신시배달나라 5세 천왕인 태우의太虞儀 한웅 89년 무오년(桓紀 475년경)에
태우의 한웅천왕의 열두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여왜국女 國의 임금인 여왜와 혼인하여 동이문화東夷文化의 한 분파를 이루었다.
동이문화의 한 분파를 한족문화漢族文化라고 한다.
그가 한족문화의 시조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우리 동이문화가 한족문화에서 나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통치이념인 공자유교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의 말이다.
화서華胥가 뇌택雷澤에서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 성기成紀에서 복희를 낳았다.
<하도게명징河圖稽命徵>
<화서>는 화서족의 처녀라는 뜻이다.
<대인>은 발이 큰 사람으로 한웅천왕의 집안 사람을 의미한다.
한웅천왕을 <커발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대인은 동이의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관자管子는 발인發人을 동이라고 하였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天水 성기현成紀縣이다. 지금 천수에는 복희 사당이 있고,
그와 관련되는 유적들이 있다.
<화서>는 <뇌택>에서 임신하여 <성기>에서 <복희>를 낳았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 성기현이다. <뇌택>은 못의 이름이다.
여기는 후대에 태어난 순舜임금이 고기잡이하던 곳으 로 전해오는데 현재 제음濟陰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의 도읍은 진(陳, 지금의 회양淮陽)이고, 재위는 115년이었고,
15세를 전했다. 그는 진륜陳侖을 다스렸는데, 진륜은 구이산仇夷山리고,
사방이 끊어져 고립되어 있다. 진륜은 태호복희가 다스린 곳이고 태어난 곳이다.
위 기록을 근거로 하여 복희의 출생에 세 가지 설이 생겼다.
첫째 설은 뇌택이고, 둘째 설 은 성기이고, 셋째 설은 구이산이다.
복희는 처음에 감숙甘肅에서 살다가 섬서陝西의 황토 고원에서 살았다.
<삼황본기三皇本紀 >에 따르면 복희는 진에 도읍하고, 동쪽을 태산으로 봉했으며,
재위한지 11년만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남부南部에 장사지냈다.
<삼황의 으뜸 태호복희> 1998. 2. 중국하남미술출판사 발행
이 기록을 보면 복희가 왕이 되어 진을 다스렸고, 그의 후대로 15세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복희씨 여왜씨는 성이 풍風이다. 풍은 벌레에서 나온다. 큰 벌레는 뱀이 된다.
충은 곧 뱀이다. 용 역시 뱀에서 나온다는데 따른다.
복희씨와 여왜씨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으로 엉켜 있다.
복희와 여왜는 해와 달을 들고 있다.
<복희문화 '시론 복희씨문화'> 王彦俊 작 1994. 5.
복희와 여왜가 풍씨라는 것은
이들이 풍씨의 조상이자 한국제桓國帝인 한인천제의 후예임을 말한다.
고구려시대엔 한인천제와 그의 부인 항영을 인두사족人頭蛇足의 형상으로
왕의 무덤인 오회분 4호묘에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복희와 여왜교미도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인과 항영도>는
한인과 항영이 풍씨의 조상으로서 '일월을 숭상하겠다는 의도'로 그린 <일월마지그림>이지만,
<복희와 여왜 교미도>는 '복희와 여왜 사이에서 후손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어
그린 '조상숭배그림'이다.
태호궁에 모신 복희신상
중국천수에 있는 복희사당 태호궁
복희, '일석삼극'에서 '일석이극'을 도출하여 <복희문화>를 이룩
후대에 와서 고시와 복희와 신농의 대를 거쳐서 황제, 신농유망, 치우천왕이 아우른
탁록의 결전에서 황제에 의하여 치우천왕의 청구국이 멸망하고 황제가 중원을 차지하면서
신농과 치우로 이어지는 동이족은 사실상 괴멸하고
황제로 이어지는 동이족만이 세력을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황제지손黃帝之孫이라고 하였고 황제지손을 한 대 이후에 한족漢族 이라고 불렀다.
복희가 분명히 동이계열임에도 불구하고 한족의 조상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은
복희가 이룩한 <복희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족은 동이가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가면서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던 복희의 유적을 활용하여
한족문화를 열었다.
동이는 천부天符에 근거를 두고 우주의 이치를 3이라는 수로 한정하였다.
이 원리를 일석 삼극一析三極이라고 하였다.
이 원리에서 삼신사상이 나오고, 삼태극이 나오고, 음양조화가 나왔다고 파악하였다.
1은 모든 구체球體의 지름이다. 3은 모든 구체의 지름으로 원주율 을 나누어 나오는 수이다.
1이 3으로 나뉘는 것이 일석삼극이다. 일석삼극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이다.
복희는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1을 빼고 일석이극一析二極의 원리를 도출하였다.
구체의 반 지름을 반으로 나눈 것이다.
그래서 兩儀와 음양陰陽을 도출하였고, 반지름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사상四象을 도출하고,
반의반지름을 반으로 나누어서 팔괘八卦를 도출하였다.
이 두 원리는 일석삼극이 조화의 원리인데 반하여 일석이극이 갈등의 원리라는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동이의 3에는 조화가 있지만 한족의 2에는 조화가 없기 때문이다.
'복희시대'를 이은 '신농시대'가 있었다.
신농은 '동이'의 조상으로 태어나서 '화하'의 조상으로 숭배받아
동이東夷의 기원을 밝힐 열쇠를 쥐고 있는 풍이風夷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이다.
후대에 와서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후예인 복희 또한 풍이 출신이다.
복희는 한웅천왕의 6세손인 다의발한웅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풍이 출신이므로 결국 한웅천왕과 복희는 한인천제의 후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웅천왕시대에엔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가 있었다.
고시 아음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은 다의발한웅인 복희였다.
복희의 후대에 농사의 신으로 불리는 신농神農이 태어났다.
고시, 복희, 신농이 모두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들이므로,
가업을 세습으로 이어나갔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농사를 관장했던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시와 복희와 신농은 모두 농사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들을 고시의 후예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한웅천왕시대의 농관이었던 고시라는 이름이
단군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시례高矢禮로 그대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고시 집안이 맡았던 역할이 오랜 동안 세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계에 있는 염제신농사당
또한 이들이 적제赤帝라는 신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같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으로서 적제赤帝 부해復解(扶蘇譜序에서 인용)로 불렸다.
복희 또한 부해復解로 불려지고, 신농을 염제炎帝라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 집이 대대로 불을 관장해 온 집안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신농이 복희와 같은 집안인 풍이 출신임을 밝혀 보았다.
신농 그는 누구인가
중국사람들은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楡罔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염제 신농炎帝 神農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신농이라고 할 때는 시조 신농을 의미할 때가 많다.
유망의 의미로 불릴 때는 치우천왕과 황제와 탁록을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일 때일 뿐이다.
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농사의 신, 약의 신, 차의 신등으로 불리는 시조 신농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농은 시조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으로 혼동되어 불린다.
신농은 쇠머리의 형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신농이 소를 몰아 농사를 지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전까지 소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소였을 가능성이 많다.
야생의 소를 길들여 농사를 짓도록 한 사람이 신농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농의 머리를 소의 형상으로 만들어 신격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농은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川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이 강姜씨가 되었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중국 보계寶鷄 남쪽 교외의 강성보姜城堡 일대가 된다.
보계는 신농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보계와 강씨의 족보를 연구하는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농의 후예로 8대의 수령이 대를 이었다고 밝혔다.
(寶鷄文史資料 제11집 44 ∼ 45쪽) 근거는 <자치통감외기自治通鑒外紀>에 있다.
이를 차례대로 쓰면 다음과 같다.
제1세 염제신농 재위 120년 혹 140년
제2세 괴제 재위 60년 혹 80년
제3대 제승 재위 6년 혹 60년
제4대 제명 재위 49년 혹
제5대 제직 재위 45년
제6대 제리 재위 48년
제7대 제애 재위 43년(소전)
제8대 제유망 재위 55년
<외기>에 근거하면 신농에서 시작하여 유망까지 8세 사이에 해당하는 426년 동안이
신농의 나라가 존속한 기간이다.
<초학기 구 初學記 九>는 제왕세기설帝王世紀說에서 인용하여 신농에서 유망까지
무릇 8세까지 모두 530년이라고 하였다.
신농의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제2세 임괴로부터 유망 사이이다.
중국고금성씨사전中國古今姓氏辭典에 따르면,
" 신농은 강수에 살았다. 이로써 성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염제는 강수에서 낳았다.
이로써 씨칭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이로써 성이 생겼다.
그 후로 제濟, 보甫, 신申, 여呂, 기紀, 허許, 향向, 예芮,씨가 생겼다.
그는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열두 아들이 오午씨, 병丙씨, 적赤씨, 신信씨, 정井씨, 기箕씨, 감甘씨가 되었다. "
우리 무가에서 불려지는 신농은 이상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조상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신농은 우리의 조상이다.
'신농시대'를 이은 '삼조시대'가 있었다.
삼조三祖는 '치우蚩尤', '楡罔유망', '황제黃帝'
삼조의 개념
현재 중국에서는 치우, 유망, 황제 세 분을 '중국의 세 조상'이라고 부른다.
중국에 이들 세 분의 조상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 '炎黃蚩염황치' 삼조라고도 한다.
'염炎'자는 염제 신농 즉 유망을 일컫는 말이고,
'황黃'자는 황제를 일컫는 말이고,
'치蚩'자는 치우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인들이 '염황치 삼조'를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공식화 한 때는 1993년 10월이다.
중공탁록현위부서기 中共 鹿縣委副書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집행회장 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 執行會長,
중화염황문화연구회이사中華炎黃文化硏究會理事라는 긴 직책을 가진 임창화任昌和라는 사람이
1993년에 위 세 분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
그 해 10월에 제 1차로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화염황문화연구회, 중국선진사학회中國先秦 史學會, 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 등에 제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어서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1995년 9월부터 '삼조문화'가 전국에 소개되고,
중화민족문명의 근원적인 명제로서 널리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한 국내외적 으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연구자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중화민족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저작물의 생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중국인의 '염황치 삼조'를 그대로 따라 쓰기로 하였다.
'염황치'가 우리의 조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인과 같은 의미로 쓴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삼조문화의 의미
1993년 이후에 들어와서 중국인들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탁록을
중화문명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여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중화문화를 시작한 사람은 황제뿐이라고 생각하여
염제와 치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염제와 치우는 탁록에서 황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염제는 황제에게 항복했고, 치우는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했다.
원래 염제와 황제는 배다른 형제 사이였다.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전은 시조 신농 의 가계로 보면 제 7대 제애帝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황제 자체가 동이東夷 출신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치우는 한웅천왕의 직계 후손이다.
소전은 한웅천왕 때 농관을 지낸 고시高矢 계열이다.
따라서 소전의 후손인 유망과 황제가 한웅천왕의 방계후손이므로
치우 유망 황제가 모두 한웅천왕의 후손이 된다고 하겠다.
현재 중국에서는 황제는 행정, 유망은 기술, 치우는 군사를 시작한 분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들 행정, 기술, 군사를 일컬어 '삼조문화'라고 한다.
'삼조문화'는 다음 세 가지로 의미를 요약한다.
1.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세사람이다.
염제와 황제 두분만 아니라 치우를 포함한 세 분이 있다.
2. 중화민족의 문명을 창시한 분은 염제 황제 치우로,
이들 삼조가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대 표적인 마을과 마을연맹공동체를 만들었다.
3. 염제, 황제, 치우 삼조가 처음으로 중화문명을 만들었다.
이들의 발자취가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남아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사건이 탁록에서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조를 버린 우리의 현실
중국이 5000년 동안 황제 한 분만을 자기의 조상(黃帝之孫)이라고 주장해 오다가
갑자기 유망과 치우 두 분을 추가하여 자기들의 조상(炎黃之孫)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 첫째 이유는 중국이 황제만을 붙들고 있으면
중국의 역사를 5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한족문화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동이문화가 있었다.
동이문화는 마고문화에서 시작이 되는데,
마고문화는 대체로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발해만과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군도廟島群島가 그 발상지로 보인다.
황제만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할 때,
동이문화로 접근해 갈 수 있는 탈출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동이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동이출 신인 유망과 치우를 황제 쪽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군왕검 한 분을 놓고 민족종교진영과 기독교진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 진영은 단군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단군에 대한 기록은 신화라는 것,
단군은 특정한 민족종교 의 우상숭배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민족진영은 목 메인 소리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진영이든 민족종교진영이든 우리 역사에 무지하므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간 혈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면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신농의 후예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농은 성이 姜씨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의 성씨 도한 강씨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단군왕검에 대하여 따로 다루게 될 때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단군왕검의 조상이 되는 신농을 중국이 자기의 조상으로 편입시켰다는 것은
중국이 동이라 는 정체성 고백이 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그들이 지녀 온
화하족華夏族 즉 한족漢族이 동이의 한 분파라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치우
한웅천왕의 지계후손인 치우는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무속에서 치우는 도깨비대왕으로 전해 온다.
천문에는 치우기蚩尤旗라는 혜성이 있다.
부적 오방부五方符에는 구이군九夷軍의 신명을 부르는 주문이 있다.
구이는 구려九黎를 의 미한다. 치우를 구려의 족장이라고 한다.
황제가 동이로서 동이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는 황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대 헌구야 잘 듣거라. 해의 아들이라고 함은 짐 한 사람 뿐이다. " (삼한관경본기)
그는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탁록에서 치우는 황제와 싸웠다. 그리고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동이와 화하가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삼조시대'를 이은 '홍제 전욱 소호의 시대'가 있었다.
유망의 아들 「희화羲和」와 황제의 딸 「항아嫦娥」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7-1993)가 작성한 삼황오제시대三皇五帝時代의 계보를 보면,
신농神農의 8세 손인 유망楡罔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 아들은 희화羲和 주씨로 <태양의 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태양을 관측하는 직 책을 가졌음으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둘째 아들은 금정金正 해該씨로 김金씨의 조상이 되는 분이다.
셋째 아들은 희熙씨로 물고기문양을 사용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 아들은 수 脩씨로 사냥하여 고기를 가공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는 유일한 따님으로 누조 祖로 알려진 분이다.
뉘조를 <양잠의 신>이라고 하였다.
누조는 황제黃帝에게 시집가서 항아嫦娥와 소호김천少 金天(재위 BC2474-BC2468)을
낳았다. 항아는 <달의 신>으로 알려진 분이다.
그가 달을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벼슬이름이었다.
희화의 아들 「전욱고양 頊高陽」과 황제의 아들 「소호김천少 金天」
유망의 큰아들 희화주씨와 항아가 혼인하여 전욱고양 頊高陽을 낳았다.
삼조시대가 지나 간 다음에 전욱고양과 소호김천은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전욱고양은 유망집 안의 맹주였고, 소호김천은 황제 집안의 맹주였다.
황제는 희화로 하여금 해를 점치게 하고 항아로 하여금 달을 점치게 하였다.
그 기록이 < 여씨춘추 물궁편>에 보인다.
黃帝使 羲和占日 尙儀(嫦娥)占月 황제사 희화점일 상의점월
희화는 황제의 사위였고, 항아는 황제의 딸이었으므로,
희화가 항아와 함께 해와 달을 점쳤 다면 희화가 황제의 집안으로 장가가서 처가살이를 할 때였다.
황제는 희화 부부에게 일관 日官을 명하여 해와 달을 관측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화가 처가살이를 면하고 본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장자인 전욱고양을 낳아서
조상의 신상神像으로 모시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 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전욱고양 頊高陽이라고 하였다.
그가 일관으로 있으면서 지어 준 이름이었을 것이다.
전욱고양은 하夏나라의 시조가 된다.
중국인 역사학자인 <룩콴텐>의 세계 표는 전욱고양과 곤을 거쳐서
우임금에 이르는 하나라의 세계표를 작성하였다.
전욱고양은 훨씬 후대에 와서는 고구려를 세운 고씨高氏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제주도에 전해 오는 영주신화瀛洲神話인 삼성혈신화三姓穴神話에 보면
고씨가 전욱 고양이 세상이 태어나는 기원전 2400년대 보다 무려 1만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다.
고씨의 조상인 고지나高之(乙)那가 양지(을)나 부지(을)나와 함께
영주(제주도)의 삼성혈에서 세상 에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씨의 조상을 소호김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소호김천이 세상에 태 어나기 전에 이미 유망의 아들로 <김정金正 해該>가 태어난 것을
모르는 것이다. 김정은 소호김천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다.
김정은 소호김천의 어머니 누조와 남매 사이이다.
우리 나라 김씨들이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된 데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다.
그가 삼 국사기에서 「신라인이 소호씨 후손이기 때문에 김씨라고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호김천 이후에 한무제漢武帝(BC156-BC150) 때 와서
한무제에게 정벌 당한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일제日 에게 김金씨를 사성賜姓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성씨로서 김씨가 탄 생한다.
김해김씨가 생겨나는(AD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 건국) 것은
한무제 사후 192년이 나 지나서 있게 되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김씨 시조들은 중시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왕검의 장인 단국 배달나라의 홍제
소호김천이 BC 2474년에 제위에서 물러나고 BC2467년에 전욱고양이 그 뒤를 잇는다.
이 때 단군왕검의 처조부가 되는 천일태제天一泰帝(신시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가
제위에 오른다.
그 해가 BC2457년, 나라 이름은 한국의 뒤를 이은 <배달나라>였다.
이 나라를 달리 <단국檀國>이라고도 하였다.
이 나라를 <이고선의 조선기>에서는 <단국 배달나라> 라고 하고,
한단고기의 삼성기전하편에서는 <신시 배달나라>라고 하였다.
기묘 52년(BC2406년)에 유교有嬌씨가 빈객으로 와서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다.
유교씨는 소로김천과 항아 사이에서 태어난 교극嬌極이다.
유교有嬌의 교嬌는 모계혈족으 로부터 받은 족칭族稱에서 나온 것이다.
할머니 누조 祖의 뒤를 잇고 이어서 항아嫦娥의 뒤를 이은 모계혈족의 교嬌라는 뜻이다.
교喬자 앞에 여女자를 썼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교극에게서 제곡고신帝 高辛이 태어난다.
제곡고신이 BC2420년에 전욱고양의 뒤를 이제 제위에 오른다.
홍제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제곡고신의 폭정을 이기지 못한 소풍蘇豊이 홍제 8년에 귀순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여 불함산弗咸山 북쪽의 숙신肅愼 땅에 살게 하였다. (蘇氏上上系)
단군왕검의 장인이 되는 단국의 2대 홍제 때인 기사 8년(BC2390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 綏芬河 동쪽으로 쳐들어온다. (이고선의 조선기)
이때 의려장이 되어 수분하 동쪽에서 제곡고 신의 군대를 퇴치하였다.
홍제는 그 공을 치하하여 소성蘇城에 봉하고 하백河伯을 삼았다. (소씨상상계)
홍제가 풍에게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발견하는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일찍이 사성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제곡고신 때에 와서 홍제가 다스리는 단국 배달나라를 침범하는
기록이 나오므로 고신의 영토와 단국 배달나라의 경계를 가르는 경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북경의 북쪽을 횡으로 가로질러 가는 거대한 만리장성의 존재 가 이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홍제는 <한단고기>에서 신시 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으로 기록한 분이다.
단군왕검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동이와 한족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가 단군왕검시대이기 때문이다.
'홍제 전욱 소호의 시대'를 이은 '단국왕검시대'가 있었다.
단군왕검의 중시조는 신농, 우리의 중시조는 단군왕검
신농은 유망가계의 시조
지금까지 12회에 걸쳐 단군왕검시대 이전의 시대를 개괄해 왔는데,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해 온 이유는 단군왕검시대가 이들 시대를 징검다리로 하여 도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시대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대제국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우리와 한족의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족으로 불릴 수 있는 동이만이 산동반도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족으로부터 독립해 나간 것이 화하족으로 불리는 한족이었다.
단군왕검이 출현하는 시대 이전에 중원에는 큰 물줄기를 이루는 세 종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농을 조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신농으로부터 8대 유망까지 조상이 같았다.
유망대에 와서 황제와 갈라지고, 유망계열에서 4대를 내려와 배달나라의 태제泰帝가 나온다.
이렇게 세 종족이 중원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유망의 가계 (동국역대東國歷代, 홍사鴻史)
1.신농
2.제승
3.제임
4.제내
5.제백
6.제즉
7.제양
8.제유 - ① 제괴 ② 제망 ③ 제성 ④ 泰帝 ⑤ 洪帝 ⑥ 檀君王儉
황제의 가계 (황제에서부터는 駱賓基 1917-1993 의 금문)
1.신농
2.제승
3.제임
4.제내
5.제백
6.제즉
7. 제양
8. 황제 - ① 소호 ② 교극 ③ 제곡 ④ 제지 ⑤ 제요 ⑥ 제순 ⑦ 禹王
전욱고양의 가계 (유망에서부터는 낙빈기의 금문)
1.신농
2.제승
3.제임
4.제내
5.제백
6.제즉
7.제양
8.유망 - ①희화 ②제전욱 ③ 곤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누비혼인
유망가계의 제양과 황제가계의 제양은 우리 역사와 중국 역사에서 소전少典으로 나오는 분이다.
소전은 유망과 황제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르다.
유망가계의 제유帝楡는 유망이다.
유망과 황제는 아버지 제양 즉 소전에서 갈라져 나오고
이들은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중시조가 된다.
낙빈기에 따르면,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은 누비혼(Punalua)라는 양급제兩級制로 맺어진다.
두 집안이 이복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모계사회의 특징인 공동남편과 공동부인의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 제도는 순임금까지 계속된다.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는 그의 이복형 유망의 딸 누조와 결혼한다.
이렇게 사위가 된 사람을 자子로 불렀고, 아들을 남男으로 불렀다.
백伯은 외삼촌으로서 조카딸 자매가 있는 씨족마을로 장가든 사람이다.
이러한 혼인제도는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이 한 대를 건너뛰며 제위帝位를 물려받고 돌려주는
기이한 혈연제도를 유지한다.
유망의 딸 뉘조와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 사이에서 항아와 소호김천이 출생한다.
유망의 제위를 외손자 소호김천이 물려받는다.
따라서 제위의 대물림은 1대 유망, 2대 소호김천이 된다.
3대는 유망의 큰아들 희화와 황제의 딸 항아 사이에서 출생한 전욱고양(제위 47년)이 물려받는다.
4대 제위는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제위 55년)이 물려받는다.
그러나 제곡고신 대에 와서 제곡고신은 5대 제위를 전욱고양의 양자인 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측실 간적 사이에서 낳은 아들 지에게 물려주어 지가 5대 제위(제위 8년)를 잇는다.
이때 제위상속제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곡고신의 정실인 중계의 아들 요堯가 이복형제인 지에게 제위를 도둑맞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찾아 6대 제요(제위 37년)가 된다.
이어서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죽이고 7대 제순(제위 9년)이 되었다.
다음에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이고 8대제위를 이은 사람이 우(제위 8년)였다.
유망집안에서 떨어져 나온 단군왕검의 가계
유망(제위 43년)은 아들 4명과 딸 1명을 두었다.
1자는 희화 주, 2자는 금정 해, 3자는 희, 4자는 유였다.
이들 4명중에서 한 분이 제괴帝魁일 것이다.
제괴를 중시조로 하여 단군왕검이 태어나는 다른 한 분파가 유망집안에서 나온다.
제괴를 중시조로 하여 ② 제망 ③ 제성 ④ 태제泰帝 ⑤ 홍제洪帝 ⑥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를 잇는다.
<이고선李固善>은 그가 쓴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조선기朝鮮紀>에서
조선의 시조를 <단군세기檀君世紀>처럼 단군왕검에서 시작하지 않고
2대를 거슬러 올라가 태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보이는 대 가름이지만 설득력 있는 대 가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가 누비혼인이 성행했고, 누비혼인으로 출생한 외손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단군왕검의 아버지 홍제는 그의 장인이 되고,
그의 할아버지 태제는 처 할아버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시대의 「왕검」과 「곤」과 「우」
단군왕검시대에 단군왕검(재위 93년, BC2333-BC2240)과
제순帝舜(재위 9년, BC2320-BC2312)과
우왕禹王(재위! 8년, BC2311-2304)과
곤 (우왕의 장인)은 이 시대를 이끌어간 삼두마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기록에는 곤은 도산국塗山國의 주인이었다. 우가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순이 제위에 오르면서 곤에게 도산의 치산치수를 명하였다.
곤은 7년 동안 치수에 힘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순은 곤에게 책임을 물어 우에게 곤을 죽이라고 명했다.
한족의 역사는 산동반도에 있는 우산에서 우가 그를 처형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중원의 패권을 쥐고 있던 단군왕검이 홍제에게서 물려받은 배달나라라는
국호를 곤에게서 나온 문자인 조선으로 바꾸어 썼다는 점에서
사위인 우가 장인인 곤을 죽이게 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곤이 단군왕검과 동시대 사람이고
그가 당시에 국제무대의 중심에 있었던 도산의 맹주였다는 점에서
곤을각별하게 생각하여 도산으로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그를 살릴 수 있는 외교적인 교섭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기록된 도산회의塗山會議는 도산의 치수에 관한 회의와
각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는 이외에 곤을 살리는 회의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인터넷과 무당
퍼옴:메모로그 > shleej2003님의 블로그
http://memolog.blog.naver.com/shleej2003/1023
[출처] 신시는 세계 최초로 동이(東夷)가 세운 무(巫)의 나라였다 |작성자 무릉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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