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업가로 서른 중반의 소망
김은진, 수원연무사회복지관 지역복지과 팀장
고등학교 3학년.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대입 시험 결과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과를 선별했다.
총 3개 대학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는데, 1개는 유아교육과 2개는 사회복지학과에 지망했다.
선생님의 추천, 없어지지 않을 직업,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나서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로.
대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으로서 내게 주어지는 것을 해내는 정도로만 학교를 다녔다.
봉사활동, 현장실습, 졸업시험을 끝으로 순탄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배운 게 사회복지니 집과 가까운 복지관에 이력서를 넣었고
그렇게 입사까지도 순탄하게 지났다.
사회복지사로서 첫 업무는 ‘회계’ 담당이었다.
회계에 ‘회’자도 모르던 내가 기관에 선임 없이 오롯이 나 혼자 일을 감당해야 했다.
입사하고 6개월 동안은 내 앞에 닥친 일을 해내기에 급급했다.
몇날 며칠 야근을 해도 내가 아직 신입이고 업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했다.
입사 후 6개월 이상을 평일에도 매일 야근, 주말에도 나가서 업무를 처리했다.
지금처럼 시간외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해내고 싶은 마음에 무리했다.
그땐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몸에 큰 이상 신호가 오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사 2년차가 되면서부터는 업무에 불만만 쌓였다.
사회복지사라면 당사자를 만나거나 하다못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게 일인데
나는 온종일 사무실에만 앉아서 컴퓨터와 마주보고 있고,
기껏 밖으로 나가는 건 은행 업무를 보거나 복지관 물품을 사러 갈 때뿐이었다.
동료들이 어르신을 만나고 들어와 하는 푸념조차도 부러웠다.
규모가 작은 복지관 회계 담당이다 보니 프로그램 회비를 내가 직접 받았는데,
한번은 회비를 내러 온 한 주민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경리아가씨, 이번 달 회비 내러 왔어.”
그 순간 화가 났다. 다른 프로그램 담당자들에게는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그들과 똑같은 사회복지사인 나한테는 ‘경리아가씨’라니.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나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이해하지만
그때는 내 생각이 그렇게 깊지 않았다.
입사 후 만 3년 만에 지역사회보호사업을 맡게 되었다.
이제는 진정한 사회복지사로서 실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역사회보호사업을 맡은 첫 몇 달을 제외하고는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냥 이렇게 반찬과 후원물품을 갖다드리기만 하는 게 사회복지사로서의 일인가?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동안은 어떤 사회복지가 되고 싶은지 깊이 고민해보지도 않았고,
어떤 철학을 갖고 일해야 할지 이상과 기준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지역사회보호사업을 담당하는 동안 두 번의 출산을 했고, 각각 10개월 육아휴직 했다.
두 번의 출산과 육아휴직은 내게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떠오르는 고민을 깊이 생각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결국 두 번째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지관에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상과 기준 없이 무작정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입사하고 만 8년이 지나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회복지사로서 내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 왜 사회복지사로 일하지? 내가 가야할 길, 방향은 어디지?’
이런 고민이 깊어질 즈음, 지역조직과로 인사 이동하였다.
2016년 조직사업을 담당하고 2018년 <복지요결>과 <복지관 지역복지 공부노트>를 읽고
내 생각은 크게 변했다.
지난 실천에 후회했고, 앞으로 사회복지사로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또렷해져갔다.
지역사회 안에서, 주민과 함께 관계하기. 내가 생각하는 사회복지사의 역할도 바뀌었다.
'당사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서
‘당사자의 자주성과 지역사회의 공생성을 살리기 위해 주민의 관계를 주선하는 사람’으로.
사회복지사로 살아온 지 만 10년이 넘은 지금,
이제야 진짜 사회복지사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공부하고 글 쓰고 성찰하며 사회복지의 맛을 알아가고 있다.
나아갈 길의 방향이 명확하니 지금 내가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아직 두렵지만 그래도 이상을 보고 나아가니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내 나이도 어느덧 서른 중반을 넘어섰다.
<논어>에서 공자는 30세를 ‘이립’, 40세를 ‘불혹’이라 이른다.
‘이립’은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혹’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나이 서른에는 내 마음이 확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으니,
마흔에는 나의 신념과 철학을 명확히 해서 흔들리거나 갈팡질팡 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확신하며 나아가길 소망한다.
첫댓글 김은진 선생님 진솔한 글 잘읽었습니다ᆞ저는 서른 중반에 두아이 낳아 걸음마, 기저귀 떼고 연무복지관 길건너 복지관에서 사례관리로 사회복지를 시작했습니다ᆞ 그때가 2007년도~2009년 즈음이니 어쩌면 김은진선생님이 경리아가씨로 불리던 시절 몇번은
저랑 마주질 수도 있었겠네요ㆍ저도 그시절 강점관점 해결중심상담과 CO주민조직화교육과정을듣고 매료되어 지금까지 위기가정 사례관리를 하고 있습니다ᆞ반갑습니다ᆞ
김은진선생님 이미 멋진 선후배ᆞ동료들과 길을 잘 찾아가고있어 다행입니다ᆞ길을 따라가다 좁으면 넓히기도 하고 만들어도 잘 하실겁니다ᆞ일하는 엄마ᆞ실천하고 글쓰는 사회사업가 김은진 선생님을 마음모아 응원하겠습니다ᆞ
선생님 말씀대로 오며가며 만났을 수도 있었겠어요. 이런 인연 신기합니다^^
제 글 읽어주시고 응원 댓글까지 남겨주시니 더욱 힘이 납니다.
저 또한 선생님을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김은진 선생님~ 저도 잘 읽었어요!! 진솔한 이야기, 내면의 성찰, 사회사업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졌습니다. 근본을 바르게 세우고 근본을 좇아 실천하고자 힘 쓰시는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1년 뒤, 5년 뒤, 10년 뒤, 성장 발전해 있을 김은진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