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서울둘레길 19코스
6km, 2시간 50분(형제봉 입구~화계사)
오늘 산행은 지난주 태풍으로 한 주 연기된 결과다. 불과 한주 차이로 여름에서 급 가을 분위기다. 아침 바람이 선선한게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성당에서 늘 9시에 출발하곤 한다. 오늘도 먼저 오신 분들과 커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는데 꼭 오실 분이 안 오신다. 지난번 7월 산행 때의 일이다.
그날도 비가 많이 와서 안전사고에 대비해 ‘서울둘레길 6코스(광나루역~ 명일근린공원)로 급변경하고 시간 돼서 출발했더니, 혼자서 코스 출발점, 광나루역으로 직접 오셨던 이순자 마리아자매님이시다. 둘토산 산행에 함께 하신 이후 결석이 없으셨던 터라 출발 전 확인 겸 전화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하자마자 도착하셔서 우리에게 찐밤을 한 웅큼씩 나눠주신다. 출발부터 가을냄새가 물씬난다.
오늘 산행은 서울 둘레길 중 이동시간이 대략 100분 정도 다소 긴 편이다. 5호선 타고 둔촌역에서 광화문역까지(대략 30분 소요), 이후 버스이동 (20분 소요) 평창동 삼성아파트에서 내려 도보로 형제봉 입구까지 이동예정이다. 그래도 접근성만큼은 서울 둘레길만 한 곳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아뿔사...지하철 광화문역 버스 정류장이 폐쇄되었다.
알고 보니 조계종에서 주최하는 ‘국제 선명상 대회 9.28~30’로 광화문 광장을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롭습니다. 지금 이 순간, 평안합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합니다.’ 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5분간 명상한다는데
왜 조용한 산사나 실내에서 하지 않고 시끄러운 도심 한복판일까? 명상이란 본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아니던가? 하는 수 없이 경복궁역까지 걸어가야 한다.
광화문(경복궁의 남문) 부근에 이르니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걷기도 하고 고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경복궁 일대가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로 흡사 축제행렬이다. 어디선가 큰북이 울려 퍼지고 있다. 마침 경복궁에서 수문장 교대식(하루 2회, 오전 10시/오후 2시)이 있다. 이와 별개로 광화문 파수 의식(하루 2회, 11시, 13시)이 있어 연이어 관람이 가능하다. 커다란 왕궁깃발을 들고 수문군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역시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볼거리가 많다 보니 걷는 것도 일순이다. 경복궁역 버스 정류장에 이르니 북악터널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많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탔다. 버스 앞 유리창에 “승객이 앉거나 잡으면 출발” 이라는 표어가 붙어있다. 이제 곧 65세 이상 노인인구 1,000만 시대이고 우리 둘토산 만해도 80% 이상이니 눈높이 버스 행정에 박수를 보낸다.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형제봉 입구다. 북한산 둘레길 5코스 명상길, 북한산 둘레길 4코스 솔샘길, 3코스 흰구름 길과 겹치는 구간이다
처음부터 가파른 데크 계단을 오르고 잠시 후 왼편에 큼지막한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위에 커다랗게 ‘나무미륵대불’이라 새겨 놓았다. 어느 불심 강한 불자의 소행?이리라. 저런 소행?을 과연 부처님은 좋아하실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어 두 갈래길이 나온다. 하나는 서울둘레길, 다른 하나는 바위사이로 난길이다. 길끝에 석상과 살림집 같은 암자가 보인다. 길을 점하고 만든 집인지? 집을 만들고 낸 길인지 모를 일이다. 왜 사람들은 자연을 자연스럽게 놓아두지 못하는 걸까...
아쉬움을 억누르며 지나치자 또 분기점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형제봉 정상 900m 이정표다. 율리아 자매님이 기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형제봉도 한번 가보고 싶다며 의견을 내신다. 의견을 들어보니 패가 갈린다. 젊은이들이라면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남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가슴은 아직 뜨겁고 마음도 쿨한데 체력이 그렇지 못하다. 설왕설레하다 결국 지나치기로 했다. 살다 보면 우리는 가끔 본의 아니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럴 때 주님은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팀을 위해 양보해주신 율리아님께 감사 드린다.
숲길이 고즈넉하다. 아니 ‘오소록 하다.’는 표현이 맞을듯 싶다. ‘숨겨진 아늑한 곳’이라는 제주 방언이다. 이곳은 숲이 무성하고 해가 들지 않아 앞사람과 잠시만 떨어지면 오소록 한 느낌이 든다. 가끔 반대편에서 걸어와 우리와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왕형님께서 길을 걷다 말고 나무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따고 계신다. 무얼하시냐고 물었더니? ‘산초’열매란다. 추어탕 먹을 때 넣는 향이 강한 ‘산초?’ 했더니 바로 맞추었단다. 그러면서 산초 열매따기에 꽂힌 듯 집중하신다. 과연 주변에 산초나무가 많다. 불과 잠깐 사이에 검은 비닐봉지 절반정도를 따셨다. 어떻게 먹느냐고 여쭸더니 ‘산초 열매로 장아찌’를 담그면 ‘간장 게장 저리가란다.’ 인터넷 검색해보니 귀한 사찰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둘레길도 걷고 열매도 따고..
왕언니 레지나 자매님이 슬슬 배가 고프다며 밥 먹고 가자신다. 어느덧 12시가 다 되었다. 앉을 만한 곳을 살펴보니 이미 제대로 된 쉼터는 다른 이들에게 점령당했다. 마침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뒷길에 비교적 넓은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이다. 다들 자리를 펴고 앉았다.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식사시간이다. 다들 배낭에서 저마다 준비해온 것을 꺼내며 입가에 미소 가득이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따로없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의 왕언니 레지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오셨다. 그러시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드렸건만 뭔가 먹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소용이 없다. 잡채, 찰밥과 열무 배추 걷절이를 내놓으시는데 양이 많다. 10명 정도 예상하고 준비하셨다는데 그 이상이다. 아마 이 음식을 준비하시려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셨을텐데..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온다. 감사함과 모두의 건강을 담아 건배를 했다. 식사중에 마리아 자매님의 ‘공주 사투리’는 찰지고 정겨운 조미료다. ‘달크닥. 쓰달겁다. 산날랭이..’잼있다. 주변에 충청도분들을 보면 유머와 재치는 물론 정곡을 찌르는 충청도식 은유화법을 많이 쓴다. 웃고 넘기지만 충청도 특유의 지혜인거다. 덕분에 오늘도 즐겁게 과식?하며 먹방을 제대로 찍은 느낌이다.
즐겁게 먹었으니 또 소화시키러 남은 길을 걷는다. 명상길 전망대에 이른다. 한동안 계속 숲길이었는데 파란 하늘과 주변산이 두루보인다. 그러고보니 오늘 단체 사진을 한 장도 못찍었다. 셀카로 찍고 있으려니 의자에 누워 단잠을 즐기시던 산객이 우리가 시끄러웠던지 부스스 일어나신다. 이때를 놓칠세라 사진을 부탁했다. 별로 달갑지 얼굴표정이다. 단잠을 깨우고 사진까지 부탁했으니 그럴만하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화계사입구까지 2.2km 남았다. 산중에 체육공원이 말끔하다. 아마 화계사 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시설인 모양이다. 여기서부터는 사색의 길이다. 우리는 이제껏 명상의 길을 걸어왔다. 잠시 언덕을 오르다보니 길바닥이 어지럽게 뒤집어진 흔적이 보인다. 텃밭을 하고 계신 왕언니께서 멧돼지 흔적이란다. 흔적만으로도 멧돼지의 난폭한 정도가 가늠이 된다.
곧바로 빨간 19코스 종점 우체통이 보인다. 스탬프를 찍고 개울위 작은 다리를 건너오니 북한산 안내소다. 개울옆, 빨래골 지명에 대한 유래가 적혀 있다. ‘조선시대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터로 이용하면서 빨래꼴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인근 주민들의 빨래터로 이용하였던 자리’란다.
유제니아 자매님이 개울물에 발담고 가잔다. 오늘은 코스가 짧아 여유가 있다보니 이런저런 제안이 많다. 모두가 찬성이다..
크지 않은 개울이라 중간중간 돌출된 바위에 걸터 앉으니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옹기종기 마주 앉게 되었다. 등산을 하는 분들이라 장딴지 근육이 보통이 아니다. 특히 큰형님의 장딴지엔 알이 두 개나 들어있다. 알고 보니 중거리 400m ‘선출’이시란다.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지나, 유제니아 자매님도 달리기를 하셨다며 제법 단단한 근육을 보여주신다. 이 정도면 언제 운동회를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다 보니 이야기도 많아진다. 마리아 자매님 ‘공주사투리’에서 유제니아 자매님 ‘웃으며 삽시다.’ 유머 한마당까지 다양하다. 사는 거 뭐 있나? 이렇게 둘레길 걸으며 소탈하게 도란도란 인생 이야기하며 둘러 둘러 가는 거다.
오래 앉아 있노라니 모기들이 달려든다. 산속 모기라 집모기와 달리 매섭다. 내려갈 때가 된거다. 화계사 입구 900m 앞을 지나쳐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생각지도 못한 냉탕 족욕으로 내려오는 발길이 목화 솜처럼 부드럽고 가볍다.
다음 달은 오늘에 이어 화계사부터 우이동 입구까지로 벌써 다음 가을산행이 기대된다. 다음 만남까지 모두 모두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