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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13강
말씀/잠언 24:1-34
요절/잠언 24:13절
송이 꿀을 먹으라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경희드림한의원이 넓은 곳에 개원했습니다. 수치료기, 온열치료기, 세라젬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설비들이 부족함 없이 곳곳에 배치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최고 실력의 베테랑 한의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드리겠다는 드림스피릿까지 준비했습니다. 오는 환자들마다 소위 ‘꿀 빠는’ 꿈의 한의원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삭막한 세상을 걷다보면 지치고 병들어 곤고해질 때가 있습니다. 꿀이 아닌 것을 꿀로 알거나 꿀을 먹어야 하는데 꿀이 없을 때입니다. 말씀을 통해 거짓 꿀을 분별하고 송이꿀을 먹을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거짓 꿀이 악인의 형통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잠언은 반복하여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함께 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만큼 악인의 형통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강포한 마음을 입술과 행동으로 거침없이 내뱉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게는 어떻게 보여집니까!(2)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네, 참 불쌍하다. 안되었네!’, 그렇게 보여집니까? 아니면 ‘부와 권력이 가지면 정말 신나게 사는구나, 나도 저렇게 한번 휘둘러봤으면...’, 부러움이 찾아옵니까! 십여년전 초등학생들에게 10억을 준다면 10년동안 감옥에 가겠느냐는 설문조사에 반절 이상이 ‘예’로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라고 대답한 사람들이 초딩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심할 수 있습니다. 최근 뉴스를 통해 전정보사령관이 선관위 직원들을 압송하고 취조하고자 케이블과 야구방망이와 작두를 준비시킨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중앙선관위장을 직접 자기가 손보겠다며 별렀습니다. 손본다는 것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겠다는 뜻으로 보여집니다. 사람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면 어떠할까요? 저랑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은 군 생활을 통해 많이 경험했습니다. 많이 맞기도 하고 많이 패기도 했습니다. 몽둥이질을 하면 싸움 잘하는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 기가 죽고 벌벌 떨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 맛에 취해 신나게 몽둥이를 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군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학폭의 현장이 그러합니다. 직장에서 갑질을 행하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주먹질, 돈질, 인맥질로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의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독감환자와 함께 하면 독감에 걸리듯이, 악인과 함께 하면 악의 바이러스에 전염됩니다.
돈과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아름다운 인생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 하나도 없는 자리에 섰는데도 손가락질 당할 정도로 부끄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지혜를 가져야 제대로 된 인생의 집을 짓고 명철을 가져야 견고한 집을 짓습니다. 지식이 있어야 각종 방들을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며 인테리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와 명철과 지식은 악인의 형통에 담겨 있는 위험을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의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집을 쌓는 것임을 아는 분별력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의인들이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악한 자는 아무리 부와 권력을 쌓을지라도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마7:24-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는 날이 올 때에 사정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5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가 강하고 지식 있는 사람이 더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5) 새번역성경은 5절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보다 더 강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기운이 센 사람보다 더 강하다”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보람 있고 지혜롭게 보였다가 어떤 때에는 바보 같고 손해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이 내 안에서 치열하게 싸울 때가 있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에 많음에 있느니라” 전략과 지략은 전쟁용어입니다. 전략과 지식의 핵심포인트는 나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과 상대방이 가진 것을 정확히 알아야 가능합니다. 나의 장점을 앞세우고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입니다. 아울러 상대방의 장점과 약점 또한 정확히 알아야합니다. 전략과 지략의 실패는 제대로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오판했을 때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장점을 하찮게 여기거나 약점을 지나치게 크게 봐도 문제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에 대해 지나치게 크게 보거나 약점에 대해 둔감한 것입니다. 전략과 지략이 많다는 것은 의인의 길을 갈 때 장점은 무엇이며 약점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아울러 악인의 길을 갈 때의 장점은 무엇이며, 약점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길에 주어지는 축복이 어떠합니까! 그 길에 따라오는 손해는 무엇일까! 목자의 길에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이며, 약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확히 따져보고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난을 만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계산도 엉망, 이해도 엉망입니다. 그로 인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합니다. 의인의 길을 가면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집니다. 결국 악의 유혹에 무너지고 맙니다.
7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의인의 세계는 악인의 셈법으로 측량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세계입니다. 악인의 관점에서 보면 의인들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바보 미련곰탱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시각도 그러했습니다. 신의 능력을 가졌는데도 자기를 구원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모습을 사기꾼 혹은 무능력자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다 이루었다 승리의 고백을 드렸을 때에도 감동받기는커녕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악행을 꾀하는 자는 아무리 아름답고 고상한 일을 보아도 사악한 행동을 합니다.(8) 미련한 자는 말씀을 보고 선지자를 만날지라도 죄를 생각합니다.(9) 거만을 뿜어내며 미움받을 짓을 끊지 못합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았는데도 환난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머리로 아는데도 마음은 낙담할 수 있습니다.(롬5:3,4) 환난이 크고 무거워서 그럴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건강상태가 안좋아진 늙은 어머니를 보며 인간적인 연민과 함께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는 마음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동일하게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밝고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윤선사모와 대조가 되었습니다. 언제 심방하든지 늘 기도해드리고 영적으로 격려하는 모습이 저와 대조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한가지 자기발견이 섬광처럼 스쳐갔습니다. “나의 멘탈이 약하구나, 나의 힘이 미약하구나” 환난 그 자체만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닙니다. 영적 파워를 기르지 못한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더욱 기도하고 더욱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야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리할 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줄 수 있습니다.(11) 살육당하게 된 자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환난을 만납니다. 어떤 환난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죽음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환난은 모든 생명력을 빼앗고 무기력으로 끌고갑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도 어쩔 수 없다’(12),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저울로 달아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심정으로 손을 내민 자, 용기를 내어 헌신한 자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당시에는 설탕이나 시럽이 없었기에, 꿀은 당충전으로는 최고였습니다. 최고의 꿀은 송이꿀이었습니다. 송이 꿀은 벌집을 덩어리째 방금 딴 꿀을 말합니다. 벌집 덩어리에서 꿀이 뚝뚝 흐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즘 시대는 달짝지근한 단거가 너무 많기에, 별로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최고의 피로회복제였습니다. 사무엘상 14장에서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전쟁중에 수풀에 있는 야생 벌꿀을 ‘찍먹’합니다. 그때 기력을 회복하여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꿀이 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우리 영혼에 이와 같습니다. 지혜를 얻는 자들은 장래 비전을 가지며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충성하고도 광야로 쫓겨나 억울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울은 권력으로 다윗을 광야에 고립시켜 말라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사방으로 철저히 고립되었고, 장래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갈된 것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이었습니다. 사울d은 점점 악령에 시달리며 우상숭배자로 전락합니다. 돈이나 사람이나 권력이 많으면 꿀 빨고 살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도 고갈될 수 있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도 고갈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다윗이 고갈되지 않은 것은 말씀으로 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119:103절에서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7절에서 또다시 고백합니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말씀이 당장에는 아무런 도움 안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송이꿀입니다. 누군가 문제에 빠진 허우적대는 시기를 보면 말씀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을 들어도 지혜를 얻지 못할 때입니다. 말씀을 통해 지혜를 공급받으면 환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더라도 의인의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유투브 검색이나 쇼츠를 돌아다니며 잠시 압박에서 벗어납니다. 스포츠 하이라이트나 영화 쇼츠들을 보며 압박이 풀릴 때까지 멍때릴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직장을 마치고 퇴근한 아들이 그런 저를 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와, 꿀 빨고 있네”, 처음에는 귀에 거슬렸습니다. ‘나는 죽도록 고생하는데, 아빠는 편하게 사네?’라는 말처럼 들려, ‘니가 목자의 고난을 알아? 말씀연구의 십자가를 알아?’ 되받아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아들은 아웅다웅 먹고 사는 문제로 아우성치는 세계에서 민원을 감당하느라 진을 빼며 사는데, 저는 말씀의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을 돌이켜보니 유달리 환난이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보니 한번도 주일 말씀을 빼놓지 않고 전했던 해였습니다. 염려와 불안속에 던져질만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직분이 스피릿을 회복시키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잠언 말씀을 보니, 꿀을 빨았다는 아들의 말 자체는 성경적이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꿀벌이구나!’, 상상하니 즐겁습니다. 잠언에서 꿀을 얻고 출애굽기에서 꿀을 얻습니다. 일용할 양식 말씀에서 꿀을 얻습니다. 양에게 말씀을 풀어주어 꿀을 나누어줍니다. 세상이 거칠고 황량해질수록 지혜와 지식의 꿀을 얻는데 더욱 집중해야 겠습니다. 그것이 메마른 세상에서 고갈되지 아니하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비결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악한 자가 강도처럼 의인의 집을 엿보고 의인의 처소를 망치려고 합니다. 세상은 의인들이 살기에 쉽지 않은 곳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일곱 번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길을 가면 순풍에 돛단 듯이 평탄한 길이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 넘어질 정도로 완벽한 패배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런 상황을 만나면 절망하고 엎드러집니다.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믿음은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당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나의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의 원수는 복음역사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원수 곧 현실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내 편에서는 원수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원수처럼 행동하는 우리를 위해 죽음의 고통을 참았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기보다 슬퍼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림으로 살펴야 합니다.(18)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고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19)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악인의 성공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그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역사가 증거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반역자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21) 반역자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댓가를 제공한다고 약속할지라도, 그들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불의의 댓가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에서 전두광은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 한번 눈감고 크게 일을 저지르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악인의 세계로 가고 싶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도박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없듯이, 반역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속히 임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명성도 잃고 인맥도 잃고 연금도 잃고 사회적 지위까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제시하는 이득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23-29절 말씀은 악인의 여러 모습을 경고합니다. 23-26절 말씀은 공정하지 않는 재판을 경고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낯을 보고 판결하는’는 것은 얼굴 보고 판결한다는 것입니다. 판사나 검사에 대한 전관예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악인을 옳다고 판결하는 사람은 결국 저주와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4) 악인을 악하다고 견책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을 것이며 복을 받습니다.(25) 바른 말로 판결하는 것이 존경받는 길입니다.(26)
27절을 보십시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을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행복한 가정을 세우려면 먼저 기업을 준비해야 합니다. 결혼하려면 먼저 직장을 얻어야 하고 집을 사려면 먼저 돈을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업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까닭 없이 이웃에게 손해 끼치는 위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28) 그 사람 때문에 이전에 손해를 보았더라도 그리하지 말아야 합니다.(29) 악행은 어떤 이유를 내세워도 합리화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거짓은 거짓일 뿐, 정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30-34절은 게으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게으른 자의 밭, 곧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보았습니다.(30) 가시덤불이 전부에 퍼졌고 지면은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은 무너져 있었습니다.(31) 저자는 그것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하며 한가지 훈계를 받습니다.(32) 33,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농부가 좀 더 자고 좀 더 누워있어도 곡식이 알아서 쑥쑥 자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생이 맨날 퍼질러 누워있는데, 꿈에 각종 지식이 머릿속으로 다운로드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실은 빈궁이 강도같이 와고 곤핍이 군사같이 와서 끌고 갈 것입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가 울며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둔다고 말씀했습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성경이 증거하는 지혜입니다.
꿀을 먹는 것은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영적 가치관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악인의 길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꿀을 먹기에 힘씀으로 의인의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