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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붉은 대게먹고, 한우 먹고, 백 암온천 즐기기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롯데관광여행사에서 추진한다고해서 관심을 갖고 인터넷에 예약을 시도했다.
인터넷 예약은 쉽지않았다.
그러나 생각하는 데로 예약을 마칠 수가 있어서 기분이 한결 좋았다.
롯데관광여행사가 추진하는 경북 시티 투어에 동참하게 된 동기는 터키여행을 함께 다녀왔던 여 선생님의 전언때문이다.
문막 휴게소
품격이 높고 먹거리 여행에 그만한 여행이 없다는 것과 온천 욕을 즐기면서 동시에 삶의 뒤안길을 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예약 이틀 후 결재를 하라는 롯데관광여행사 측의 메시지를 받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218,000원을 우리은행에 입금했다.
이후 여행떠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다.
날씨가 며칠 동안 고르지 못하고 있다.
충재 권 벌선생이 과거에 응시할 때
답안지 3페이지 중의 1페이지 원안이다.
지금의 논술과 같은 시.부.표. 책중의 책에해당하는 소과 진사시 과정이다.
일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월요일까지 지속되고 있다.
모처럼 추진한 여행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여행 준비물은 치약과 칫솔, 우산을 챙겼다.
미팅은 내일 종합운동장 역 6번 출구 다.
여행을 출발한다는 기대때문에 흔히 잠을 설친다.
그래서 일찍 잠을 청하기로 했다.
여행은 숙면이 보약이다.
그런데 잠이 쉽사리 오지않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만 초롱초롱 해지고 잡념으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밤 12:30분이다.
창문에 다가가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니 일요일부터 쏟아지고 있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모처럼만에 예약한 여행이 우중 여행으로 변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우산을 들고 우중을 헤매며 여행을 한다는 것도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밤을 지새고 말았다.
박물관 소장
정신은 비몽사몽간이다.
눈이 까칠하고 얼굴도 푸석푸석했다.
아침 06:00까지만 해도 빗줄기가 그치지 않았다.
오전 07:00부터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서쪽은 아직도 먹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식사를 먹은 등 마는 등하고 07:00에 집을 나섰다.
집 앞 맞은 편 도로 승강장에서 463번 버스를 승차하기위해서다.
청암정의 아름다운 모습
기단석의 모양이 살아있는 거북의 모습과 흡사하다.
날씨때문에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포이 동 사거리에서 잠실 종합운동정 역으로 이동하는 데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종합운동장 역까지 직접 가는 버스가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463번 시내버스 노선이 신설되었다.
접근성이 훨씬 편리해진 것이다.
463번 버스를 타고 역삼역에서 하차하여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합운동장 역에서 하차하면 되었다.
463번 버스를 타고 역삼역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2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종합운동장 역에 하차했다.
6번 출구를 찾아 지상으로 올라왔다.
날씨는 개고 있었다.
시간도 여행 출발시간 30분 전이다.
그러나 출발 시간인 08:30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롯데관광 버스는 보이지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해지기시작했다.
경주 불국사의 청운 교와 백운 교에 견줄 만하다.
중앙의 인도교 난간이 여유있고 유유자적한 양반들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발 장소가 확실한지 의심이 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주변에 몇 명이 보이기도했지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종합운동장 역 주차장 안쪽이었다.
출발시간 2~3분 전에야 종합운동장 안쪽에서 관광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가이드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여행 전날에 정확한 장소를 문자메시지로 남겨야했다.
막연하게 6번 출구 라고만 메시지를 남기고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
그래서 혼란을 유발했다.
자연을 연상 케하는 청암 정의 모습
넋을 잃게한다.
이러한 문제는 차후에 개선했으면 한다.
08:30분 정시에 종합운동장역을 출발한 버스는 미끄러지듯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 중부고소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불쾌한 감정과 우천이 여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생각했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가이드가 여행객들을 사로잡았기때문이다.
즐거운 여행이 진행될 것 같다.
그러나 날씨는아직도 불안정하다.
동.남.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다.
정자 1동 외에 공부방인
별채가 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비가 오락가락하여 좀채 날씨를 종잡을 수 없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다시 영동고속도를 달리다가 만종에서 중앙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경북 영주에서 봉화로 진입하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들뜨고 행복한 도보여행 이라기보다는 버스 안에서 시간을 즐겨야 할 것 같다.
차창밖은 장대같은 굵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괴로움이 지속되고 있어 마음이 착잡 하기만 하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충재 권 벌선생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사색하기에 적격이었다.
경북 봉화군 봉화 읍은 인구가 3만 5천이다.
서울 아파트단지 사람 수 보다도 적다고 하는 가이드의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산업화의 현실을 실감하고 있다.
직장을 따라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봉화군 뿐만 아니다.
지구촌은 모두가 그렇다.
때문에 농촌의 토지는 남아돌고 있다.
남아도는 넓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도시 생활 못지않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이 봉화다.
무순 생각에 잠겨있는지 케나다에서 온 아주머니는 팜플릿 만지느라 여념이 없다.
주인장 아주머니는 관광객에게 한 장이라도 더 사진을 찍어 주기위해
안달이다.
아름답기만 하다.
여우비는 오락가락하여 우산을 던져벌 수는 없고.
특산물인 송이버섯은 봉화 군의 자랑이다.
또 은어축제가 진행될 때면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마지막남은 청정지역이다.
그리고 무릉도원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얗고 미인이다.
경제수준이 높기때문일 것이다.
주거지는 반듯반듯하고 뒤틀림이 없다.
식당에서 먹은 봉화 한약 우 불고기
두 보와 이백이 부럽지 않다.
어느덧 버스는 달실 마을로 접어들고 있다.
가이드가 달실 마을을 가리켰다.
모두들 일어서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일어나 마을의 구조와 멋스런 한옥의 배치를 바라보았다.
반 듯한 조선시대 반촌으로 보였다.
마을은 풍수지리설에서 주장한 배산임수의 구조다.
낮은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계서당 이몽룡 생가
13대 성 이성 후손의 열성적인 설명
집에 들어오는 손님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주인장,
너무 겸손하게 따끈한 차 한 잔을 억지로 들이 내민다.
인정이 넘치고 시골의 소박한 내면을
엿볼 수있다.다.
마을 뒤로는 개울이 있다.
개울에 냇물이 흘르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가 있다.
취락구조의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자급자족도 가능하다.
마을은 부티가 풍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파악할 수 있을 것같다.
풍수지리설에서 낮은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형을 금계 포란 형이라고 한다.
가지에 달려있은 금낭화
주인장의 소박한 모습이너무 아름답다.
계서당의 추억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싶다.
달실 마을이 그랬다.
가이드가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닭실을 달실로 표현했다.
고개를 좌우로 돌렸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북 지방 사람들은 닭이라는 발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닭을 달로 발음하였기 때문에 그대로인 달실로 표기하고 있다.
결국 국어 표준어법 적용 문제가 제기 되어 닭실로 수정했다.
그러나 전통을 강조한 경북 봉화 지역 주민들은 옛 선조들이 사용하여왔던 달실로 다시 복원하여 표기하고 있다.
계서당 뒷편에 서있는 소나무 기개인가 지조인가?
성이성이 거닐었던 곳
성춘향이 떠오른다.
고유명사인 경우 표준어법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국어표준어법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전통적 고유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환영했다.
달실 이라는 전통 고유 언어가 경북 일부지방의 방언임에도 굳이 달실로 표기할 것을 주장한 것은 고집스러운 일면도 엿볼 수 있으나 전통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때 호감이 갔다.
달실 마을은 5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마을 형성시기가 임진왜란 전 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을의 구조와 형태는 옛 모습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가 보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나의 생각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불영사 정자
고요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비구니 승 모습 보일 것도 같은데 조용하기만 하고,
비구니 승의 도량 천년 고찰
9룡이 지켜주리라.
경주의 양동마을이나 전주의 한옥 마을처럼 현대식 건물위에 기와를 올려놓고 있다.
고택 다운 느낌도 덜하며 조선시대 마을이라고 하기는 비약이다.
그러나 옛것을 보존하려는 정성은 기특하다.
조선 중기에 형성된 달실 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 촌이다.
이 마을에 충재 권 벌이 직접 지은 충암 정이 있다.
큰 아들 충암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도 있다.
소나무 숲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석천 계곡은 아주 잘 보존되고 있다.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다.
우중을 걸으며 충재 권 벌의 유물이 보관되어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개인 소장의 유물이다.
종가의 각별한 열의로 정리가 잘되어 있다.
박물관에 입실한 관광객들에게 종가 후손이 직접 설명하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가문에 대한 존경과 유물을 보존하려는 열정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같다.
충재 권 벌의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충재 다.
연산군 2년에 소 과 진사 시에 합격했다.
중종 때 다시 대과에 합격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을 고루 섭렵했다.
맛깔스런 붉은 대게
울진과 영덕에서 만 맛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현지로만 몰리고 나도 바람따라 구름따라 인파를 쫓아 갔다.
삶은 붉은 대게 맛이 환상적이다.
연산군과 중종 때는 사화가 발생했다.
피비린내나는 정적의 숙청이 지속되었던 시기다.
여기서 중도를 고수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충재 권 벌은 중도를 걸었다.
그는 좌우와 동서를 떠난 중용의 도를 강조했다.
그의 유물에서 파벌에 휩싸인 당쟁을 바로 잡아보려 노력 하였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있다.
이 그의 유품과 고서에서 중용의 도가 묻어나고 있다.
그는 고위 직에 있었을 때는 대의를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기묘사화와 을사 사화의 화를 입는 등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음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은 한 치의 흩으러 짐이 없었다.
감히 비판할 수 없었던 성역의 과오를 시정하도록 간언을 했으나 자신에게 돌아왔던 것은 관직삭탈과 유배의 길이었다.
오지에서 생을 마감하여야하였던 충절의 일면을 보는 듯 해서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하였다.
누가 감히 조선왕조 명종 때 최고의 세도가인 외척 윤 원형을 비판할 수 있을까?
윤 원형은 왕위계승에서 완승을 거두고 절대 권력을 거머쥔 1인이다.
그가 호령 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은 하늘을 가리고도 남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잘못의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충재 권 벌은 윤 원형의 누이 문정왕후 앞에 직접 나가 소윤의 전횡을 피력했다.
이것은 조선왕조 뿐 아니라 역대 어느 왕조에서 도 찾아볼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이다.
고국을 찾은 재미교포
충재 권 벌은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을 두루 섭렵했다.
3사의 장을 역임했다.
그의 책임은 막중했다.
때문에 책무가 무거웠다.
그는 관리의 비리나 파벌 적 전횡을 조사하고 비판해야할 위치에 있었다.
감히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는 간언이다.
을사 사화의 정치적 격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낙향하여 몸보신 하는데 치중했다.
그때 달실 마을 출신 충재 권 벌이 윤 원형을 비롯한 소윤을 비판했다.
인종의 외숙인 윤 임과 윤관 등은 대신들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 했다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결국 죽고 말았다.
역사를 연구한 사람으로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화를 식히기위해 박물관에서 밖으로 나와 충암 정이라는 정자로 올라갔다.
건물의 기단 석은 자연석 그대로의 거북바위 다.
거북바위 둘레의 흙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정자에 오를 때는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올라갈 수 없도록 한 개의 인도교만 만들었다.
한 사람씩 줄을 서서 건널 수밖에 없다.
인도교 중앙을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여 순서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판석 하나를 다리 옆으로 약간 돌출시켰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작은 것에도 소심하고 지혜가 있었다.
아주 깜찍하고 해학 적이다.
정자를 건너갈 때 혹시나 부주의 하여 떨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상대를 배려하고 질서의식을 강조한 우리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의 멋이다.
상대방을 배려한 석조 기술은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석공 예술의 극치다.
또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청암 정은 본래 방 두 칸을 둔 정자다.
이곳을 지나가던 승려가 거북바위 위에서 불을 피우게 되면 거북이 생명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방을 없애고 마루만 두었다고 하였다.
실제 정자 아래로 내려가 거북 바위를 살펴보니 연못 수면위에 떠서 헤엄을 치는 것처럼 생명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승려의 말을 듣지 않고 화덕에 불을 지폈다 면 거북의 생동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건축에서 도 이러한 생명 감을 불어넣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 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자연 사랑을 찾아볼 수있다.
정자주변에 솟아있는 소나무 한 구루가 독야청청 하다.
충재 권 벌의 중도의 숨결이 살아있는 듯하다.
봉화 읍에서 소문난 한약 우 한우고기와 지역의 특색이 향긋한 양념으로 버무린 불고기로 중식을 대신했다.
달실 마을을 뒤로한 채 이몽룡 생가를 찾았다.
전북 남원을 무대로 한 춘향전은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전소설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정을 나누다가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했다.
다음 해에 새로 부임한 신관 부사가 춘향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강요했다.
그러나 춘향은 일부 종사를 앞세워 거절하다 결국 옥에 갇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신관 부사를 탐관오리로 몰아 봉고 파직시키고 춘향을 구출했다.
이도령은 춘향을 정실 부인으로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한다는 고전 소설의 해피엔딩 적 드라마틱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도령과 성 춘향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이몽룡이라고 하는 가공의 인물이 실존 인물처럼 등장 하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이몽룡 생가 계서당을 들러보고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지자체의 얄팍한 술수가 도가 넘었기때문이다.
성이성을 이몽룡으로 대입시킨 내용은 어디까지나 정황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13대 종손이 땀을 흘리며 육성으로 설명하는 의도가 아주 흥미로웠다.
계서당 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동서를 관통하는 태백산을 넘어 36번 도로를 따라 불 영계곡을 넘기 시작했다.
장대같은 비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불 영사에 도착했을 때 중세시대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처럼 난공불락의 어두운 시야를 확보해 나갔다.
불 영계곡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그러나 불 영사가 비구니의 성지라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불 영사로 이동하고 있다.
비바람이 나무들을 정신없이 뒤흔들고 있다.
계곡의 물은 사자의 포효처럼 이 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대고 있다.
도로바닥은 산 위에서 흘러 내려온 우수 들로 냇가처럼 흥건히 고여있다.
지체 했다가는 119에 실려나갈 것같다.
불 영사에 도착한 나는 조용하고 고요한 평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구니승은 물론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삼라만상의 변화는 속수무책이다.
인간의 의지로 조정할 수없기때문이다.
비구니승은 불타오르는 정념과 육신을 불사르고 있다.
속세의 인간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내색도하지 않는다.
면벽 수련 하느라 인간들의 인기척 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불타의 경지에 도달하기위해서다.
비구니승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바란다.
불 영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연못에 있었던 9마리의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사찰을 지었다.그 사찰이 불 영사다.
해가 서쪽으로 저물무렵 부처형상을 한 뒷산 바위가 사찰 앞의 연못에 비친다.
그래서 불 영사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다.
불 영사는 천년고찰로 천축산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비구니의 참선 도량이며 정적이 감돈다.
불 영계곡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그러나 불 영사는 들른 적이 없다.
혹시라도 나의 발자국 소리가 면벽 수련에 방해되지 않나 조심스럽다.
그래서 소리 없이 불 영사를 걷고있다.
그동안 마음속을 억 눌렀던 찌꺼기가 빠져나간 듯하다.
이러한 묵은 떼를 벗길 수있는 곳은 불영사만한 사찰이 없을 것같다.
숨소리 조차도 참선 도량에 방해되지 않을까 숨 죽이며 경내를 걷고 있다.
인생이란 바람 같고 뜬 구름 같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스쳐가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구니 들의 삶이 그랬다.
불 영사에서 다시 울진 성 류굴로 이동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서 요란하다.
주차장은 빗물이 넘쳐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성 류굴은 오래전에 관람했다.
우중을 뚫고 관람해야 할 것인 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은 우산을 받치고 우중을 뚫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기때문이다.
신발은 이미 물이 스며 들어 양말이 젖었다.
우산은 있었지만 바람과 집중 폭우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버스는 다시 우중을 뚫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저녁식사의 메뉴는 붉은 대게다.
가이드가 안내한 좌석에 앉아 붉은 대게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좌석에 앉은 사람은 재미 교포 자매다.
언니는 하와이에서 거주한 하상례 주미 교포고 동생은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한 정엔지 주미 교포다.
교포자매는 성격이 아주 활달하고 쾌활했다.
막걸리 한 잔 마시겠느냐고 말을 걸어올 정도로 붙임성이 좋았다.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성장해서인지 발랄 하면서도 활달했다.
그러나 얼굴에서 수심의 그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고 미국생활의 장단점을 물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접근이 두려웠다.
각자 식탁 앞에는 삶은 붉은 대게 두 마리가 올라와 있다.
영덕 대게 보다는 작고 색깔이 붉다.
게 등을 열어 젓가락으로 휘 저어도 입에 들어온 것은 아주 미미했다.
먹을게 없다는 뜻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백암온천 성류파크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은 건물 구조와 외관이 호텔 이라기보다는 모텔 급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낡은 시설과 어둡게 장식된 벽지가 마음마저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나 온천수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급수다.
방의 시설은 노후 되고 낡았다.
팔팔 끓는 여분의 온천수를 보일러로 순환시키고 있는지 방바닥도 뜨끈뜨끈하다.
피곤을 회복하기는 상급이다.
첫날은 비가 억수로 내려서 망친 하루 였다면 둘째 날은 최고의 화창한 날씨 때문에 행복한 여행이 될 것같다.
조식을 마치고 구주령으로 이동하고 있다.
비가 갠 후의 날씨는 만물을 생동하게 했다.
탄생의 신비를 발산한 듯했다.
백 암온천 성 류파크호텔에서 1,013m 고지 구주 령으로 올라가고 있다.
구절 양장을 실감 케한다.
고개에서 최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네팔의 풍경과 흡사하다.
나무들은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숲 사이로 스며 든 햇볕은 신비롭기 까지 하다.
도로 양쪽에는 낙락장송 금강 송 소나무들이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선녀들이 춤을 추는 듯하다.
두보가 읊은 천상의 별유 천지 무릉도원은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구절 양장은 끝이 없다.
갑자기 여행자들이 탄성을 지른다.
이 탄성에 기사는 구주 령 정상에서 버스를 멈췄다.
기사는 카라반(Caravan)처럼 여행자들의 불편한 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고 있다.
버스는 다시 영양 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금강 소나무 생태 경영림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선경에 들른 기분이다.
울련산이 보이고 둘레길이 보인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귀청을 때린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넋을 잃는다.
출렁다리를 건너 울련산 소나무 생태 경영림에 들어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빼어난 소나무 들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