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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 존재 가치를 위하여
수필을 쓴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된 대상이나 세계는 작가의 사유능력을 통해 의미부여 과정을 거쳐 해석의 결과를 낳는다. 작가의 눈에 관찰된 모든 대상은 해석되고야 만다. 이 과정 속에서 작가의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이때 작가 이면에 있는 모든 특성들 즉, 경험, 세계관, 철학성, 사유력, 인격 등이 동원 되어 자기가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대로 해석의 언술을 펼쳐낸다. 이것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보다 해석에 무게를 둔 것이다. 따라서 좋은 해석은 대상을 가장 나다운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한 편의 수필이 탄생한다.
조내화 문제작 다섯 편을 만났다. 분명 다섯 편 속에 저절로 엮어져 있는 의미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가 대상을 관찰하고 해석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평자는 ‘조내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중을 읽고 싶었다. 조내화의 관찰과 해석은 결국은 자기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무를 말하고 흙을 말하고, 교단 이야기를 하고, 또 타인을 말해도 결국은 대상을 통해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조내화의 삶은 한 편의 수필이요. 그의 수필은 곧 조내화이며 그의 존재형식이었다.
1. 소유냐 존재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을 포함해서 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펼쳐진 두 방향을 두고서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일갈한다.
소유적인 태도는 소유지향을 삶의 중심 가치로 삼는다. 만족의 근거를 외부에서 찾는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상대방과 비교를 해서 비교우위를 점령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반면, 존재적인 태도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의 의미를 삶의 중심부에 두고 산다. 참다운 행복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한다. 진정한 만족을 성취와 소유가 아닌, 의미와 감동에 둔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아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많이 깨닫고, 더 깊이 앎으로 미 완성 속에 자아의 완성을 추구한다.
물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나는 물을 찾기 위해 온 힘 다해, 끝없이 우물을 파는 경우다. 이와 같이 소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자는 죽을힘을 다해 물을 파는 경우와 같다. 물을 얻었다 치자. 얻은 것은 물 외에 아무것도 없다. 또 하나, 물을 얻기 위한 방법은 수로를 마르지 않는 샘 가에 두는 경우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곧 물 댄 동산이다.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솟구치는 물을 만끽한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존재론적인 삶이란 곧 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실제 생활뿐이겠는가. 수필에서도 다를 바 없다. 글을 쓴다는 것, 차라리 고통이다. 머리를 쥐어짜야 하고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글쓰기가 힘들 때면 나는 나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내 책을 읽는다. 글쓰기는 언제나 어려웠고 가끔은 거의 불가능했었던 기억도 있다’ 이 말은 셰익스피어가 했던 말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인들 쉬웠겠는가.
여기서 소유적인 글쓰기냐 존재적인 글쓰기냐를 생각해 볼 때다. 이것은 수필의 지향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수필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목표지점이 어디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필 입문 자들이 몇 편의 수필을 쓰다가 중단하는 이유는 글쓰기 실력의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필에 대한 자의식의 결여다.
내 수필의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면 구체적인 ‘그 무엇’이 무엇인가. 답을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무얼 방증하는가, 수필을 쓰는 이유 또한 철저하게 소유적인 가치에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글쓰기 지향점을 소유적인 지점에 둔 자에게는 진정한 작가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작가정신이란 작가적 정체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냐’는 작가의식이 어떤 장애에도 진득하게 글을 쓰게 한다. 전쟁에 패했을 때 졸병은 살기 위해서 적장 앞에서 무릎을 꿇지만, 장군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당하다. 그것은 장군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은 누구든 작가다.
단, 정신은 올곧되 형식 면에서는 힘을 빼자고 말하고 싶다. 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너울너울 넘쳐나는 자유로움! 무엇을 얻어내겠다는,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없을수록 훌륭한 글이 탄생한다. 글을 쓰고 있다는 존재인식을 가진 자가 진정 글쓰기 과정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 조내화는 존재론적 글쓰기를 추구한다. 그의 수필 중심을 ‘존재’에다 두고 관찰하고 해석한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도 없어 보인다. 마치 잘 써야겠다는 욕망마저 없는 사람 같다. 말투는 선비처럼 부드럽고 행동은 농부처럼 소박하다. 힘이 들어가지도 과시하지도 않았다. 구조화된 창작기법이나 현란한 문학적 기교도 동원된 흔적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정서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고 독자들에게 가독의 수월함도 선사했다.
2. 소박한 언어, 농밀한 정신
「가정 방문」그의 첫 번째로 배치된 작품이다.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존재 지향적 방식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의 글을 보자.
땅거미가 지는 길을 혼자 걸어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산등성이는 이미 안개로 지워졌고 아직 잎이 다 돋지 않은 숲의 나무들이 나를 굽어보며 수런거렸다. 내게 온 소중한 나의 가족 스물여섯 명. 나는 한 발짝 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그럴 때마다 또 그들의 집안 풍경과 가족들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그들의 부모님과 형제도 또한 나의 가족이 된 거구나.
땅거미 지는 가정방문 길을 혼자 걸으며 ‘한 발짝 뗄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던’ 숫되던 초보교사 시절, 순수하고 뜨거웠던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와 닿는다. 작가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곧 인간 중심의 교육철학이다. 수필에서 화자와 수필가는 동격이다. 수필가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삶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독자는 작가의 인품을 곧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작가 조내화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존재에 의미를 두는 자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산다. 자신이 담임한 반 아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내게 온 소중한 나의 가족 스물여섯 명’이었다. 그의 교육관은 가족애와 맞닿아 있었다.
가정 방문 다음날 교장 선생님이 작가에게 소감을 묻는다. 그는 곧 바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유는 아이들을 향한 내적 확신이 너무나 강렬해 말하는 순간 ‘햇살에 걷히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우 한 마디 내뱉는다. “학부형들을 만나 보니 제 할 일이 더욱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작가의 내면적 확신은 바로 이것이다. 어제 만나고 돌아온 아이들은 피교육생이 아닌, 가족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가의 인간애와 따듯한 시선은 작품 전반에 고루 깔려 있다. 수필 장르 특성상 작가의 인격과 뚜렷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교육관이 작가가 진술하는 언어에도 녹아있다. 그의 수필 언어 체계도 인간적이다. 언어란 분명 오랜 세월 동안 사회와 문화가 약속으로 만들어낸 인공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조내화의 언어는 실생활처럼 너무나 인간적이다. 글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간의 균열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번 읽으면 교육자 상像이 눈앞에 그려지고, 두 번 읽으면 섬진강 냄새가 난다. 이것은 현란한 인공언어의 조합이 아닌, 진정성이 담겨있는 직설 언어의 힘이다. 그것은 작가의 언어체계가 철저히 타자 지향적이라는 삶의 방식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배려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의 언어 전달 방식에 고스란히 젖어있다. 그의 언어는 소박하다. 하지만 인간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정신은 깊고 농밀하다.
3. 수필의 놀이성 회복
어느 날 작가는 다목적 교실에서 한 명의 교사와 아이들이 청소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다. 교사는 앞에서 기름걸레를 끌고 어린이들은 그 걸레 위에 매달려 있다. 이때 ‘아하, 무릎을 쳤던’작가는 이 광경을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노는 청소놀이로 해석을 했다. 작가의 교육 철학이 글쓰기에 녹아있고, 그의 수필 정신은 그의 교육관에 투영되어 있는 장면이다.
저 선생님은 어린이들과 신나게 청소놀이를 하고 있다. 저를 어쩐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에겐 변하지 않을 본질이 있으니,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존재) 다.
작가의 자연스러움, 자유분방함, 서두름 없는 자연주의적 교육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청소를 업무나 의무로 여기지 않고 놀이로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지닌 작가. 섬진강 물줄기가 흐르고, 보랏빛 제비꽃, 노란 민들레가 지천에 늘려있는 지리산 한 자락에 위치한 산골 학교에서 ‘청소’라는 단어가 어디 어울릴 법한가. 이런 자연의 공간성에서 소제掃除를 한다면 또 무얼 소제할 게 있겠는가.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호모 루덴스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다. 놀이는 그저 단순한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창조 활동을 가리킨다. 놀이는 풍부한 상상의 세계 속으로 떠나는 모험이며 탐험이다.
작가는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존재’를 언급했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라고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말했다. 이것은 도구인 혹은 공작인을 뜻하는 호모 파베르와 대칭되는 개념이다. 공작을 하는 사람이 행동, 노동, 강제, 소유와 같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면, 놀이하는 사람은 유희, 상상, 자발성, 존재와 같은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학교를 가기 위해 논두렁 길을 걷는 것도, 논고동을 잡는 것도, 길가에 꽃을 꺾어 꽃 팔지를 하는 것도, 학교에 이르러 공부를 하는 둥 창밖의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다가 시간이 되면 청소를 한답시고 마루복도를 우당탕 뛰어다니는 것 자체가 문화 속에서 둘러싸여 있는데,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놀이문화가 어디겠는가.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쉼 없이 일을 한다. 우리 사회는 일을 많이 한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실제로 OECD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많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식, 놀이, 상상력, 존재가치를 잃어버렸다.
핸리 데이비스 소루우은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잘 사람이 가축의 주인이라기보다 가축이 사람의 주인이고, 가축이 훨씬 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황소는 서로의 일을 바꿔서 한다. 그러나 필요한 일만은 생각한다면, 황소를 먹일 건초 농장이 훨씬 더 넓으니, 황소가 우리보다 크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황소와 서로 바꿔서 하는 노동의 일부로 인간은 6주 동안이나 건초를 마련하는 일을 하는데, 이만큼의 노동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소박하게 사는 나라, 다시 말해 철학자들의 나라가 있다면, 분명히 그 나라는 동물의 노동을 사용하는 따위의 엄청난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핸리 데이비스 소루우, 『월든』부분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황소와 인간이 뒤 바뀐 것 같다. 인간은 황소처럼 죽도록 일을 하고, 황소는 인간이 일해서 만든 꼴을 먹고 살이 찐다. 또 우리는 그것을 잡아먹고.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김경집 교수는 『청춘의 고전』에서 말한다.
‘일work이라는 단어에서 ‘떠들썩한 술잔치ongy와 에너지energy’등의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어원적으로 볼 때 신명 나는 어울림이란 몸과 마음이 한데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신나는 술잔치에서나 일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일과 놀이가 완전 분리되어 있다. 일상의 삶이 고단한 건 그런 괴리 때문이다. 그런 삶은 가엽다. 일과 놀이가 상통한다는 것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다.’
-김경집,『청춘의 고전』
놀 줄 알아야 한다. 시간을 내고 환경을 떠나서 놀 수 없다면, 삶에다가 놀이의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놀이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곧 놀이의 회복이다. 육체적인 놀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의 놀이를 회복하자는 거다. 놀이라고 마냥 퍼질러 놀자는 말이 아니다. 물리적 놀이의 한계를 넘어 정신적 충만함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상상을 동원하여 서로의 꿈 한 조각이라도 나누고, 사랑을 얘기하고, 지적 유희와 통찰을 즐기는 것이 정신의 놀이다. 잘 놀기 위해서 굳이 놀이 현장을 만들지 않아도, 즉 영화를 보고, 레프팅을 즐기고, 수영을 하는 활동적인 놀이를 하지 않아도 정신의 놀이는 어디든지 무엇이라도 가능하다.
이 정신적 놀이의 최고봉이 수필이면 좋겠다. 수필도 놀이정신을 회복하면 어떨까. 수필 놀이! 이런 저런 수필 다 있지 않는가. 생산자(작가)와 소비자(독자)자가 이리 저리 많으니 수필의 다양성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수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놀이와 같은 수필, 수필을 가지고 놀이도 되는 수필. 힘 빼고, 가르치지 말고, 주장하지 말고, 그저 내 신변을 펼쳐놓은 글, 나 같은 수필. 누가 보더라도 지금 잘 놀고 있구나 싶은 수필 말이다. 이런 일상사를 다른 수필이 자칫 신변잡기니 잡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도 ‘그건 너 생각이고’라며 당당할 수 있는 수필.
놀이성 회복이 진정 수필의 수필다움을 회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놀이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수필의 경직되어 있던 목이 아무래도 조금은 풀릴 것 같다. 노는데 목숨 걸고 죽기 살기로 노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옛 시절 우리 놀이 문화를 생각해보라. 해만 뜨면 배꼽마당에 모여서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자치기, 재기차기를 하면서 배가 고플 때까지 논다. 전화도 연락망도 없는데도 알아서 모이고 해가 떨어지면 알아서 흩어진다.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규칙이 있다. 이런 법칙은 놀이 과정에서 자생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이 속에서 더불어 사는 법도 배우면서 우리가 말하고 싶은 진짜 ‘무형식의 형식’이 길러진다. 수필이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이다. 놀이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풍부한 상상의 열매가 자유롭게 영그는 게 놀이터다. 더 많이 상상을 하고, 더 다양한 시각으로 독창적 방향성을 인정하는 것이 문학의 본령일진대, 형식의 자유로움에 대해 고개 빳빳하게 세워 주창하면서도 실상은 한우리에 가두려 하는 경직성이 특히 강한 장르가 수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수필 한 편에 무에 그리 거창한 것을 다 바라나 싶다. 대서사는 소설 속에 있고, 응축된 언어 예술은 시에 있고, 철학의 깊은 맛은 철학서적에 다 있다. 그저 나를 말하고, 일상을 얘기하다 감동 하나 심으면 그게 수필인 것을. ‘수필다움의 회복’은 곧 정신적 놀이, 정서적인 쉼의 회복이다. 놀이를 수필에서 찾고, 수필에서 놀이를 회복해야 한다.
‘선생님과 어린이들에게 이제 청소는 지겹거나 쓸모없는 행위가 아니라 즐거운 놀이, 즐거운 탐험 여행’인 것처럼, 수필쓰기가 악으로 깡으로 참고 쥐어짜낸 고통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벗고 상상의 배꼽마당에서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하듯 노는 것이라면 더 넓은 수필의 공간성을 확보한 셈이다. 가뜩이나 수필이 허구적 장치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형식상 움직임의 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놀이의 회복은 미적 깊이를 더하기에 충분하다.
소유와 존재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유하려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늘 만들어 성취하길 좋아하여 공작하는 삶을 산다. 수필에 빗대어 봐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자꾸만 낯설고 기괴하게 인공적으로 공작하려 든다. 일상성이 사라진 자리에 소위 귀족주의 언어가 수필의 본질을 압도할 때, 수필이란 무엇이며, 수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게 된다. 반면, ‘존재하는 사람’은 결과보다 여정 속에 의미를 찾고 감동을 중시한다. 뭐든 놀이에 가까울수록 순진하고 촌스럽다. 바로 이때 마음의 빗장은 허물어지고 진정 놀이가 된다. 친숙하기 때문이다. 가장 친숙한 언어의 회복이 수필언어의 회복이다. 따라서 수필 언어의 놀이성 회복은 작가와 생활 반경 그 자체를 사실 그대로 읽어내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4. 마음의 길을 여는 여정
세 번째 작품「내 마음의 유배지」는 작가의 남도 여행기다. 겨울에 찾은 월춘산과 도갑사, 터는 지워졌지만 이름만은 오롯한 왕인 박사 유적지, 비자 나뭇잎이 비처럼 내리는 녹우당, 만년동안 꺼지지 않을 땅 두륜산과 그 아늑한 골에 자리를 잡은 대흥사, 고독한 유배자 다산의 산책로를 지나 마음 꽃을 피우게 하는 땅 유랑생가에 이르는 이틀간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밤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인가. 아니 떠날 때 이미 여기에 묶인 채 떠났는가. 내 몸은 어디에 묶여 있는가. 내 마음은 어디에 유배되어 있는가.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엉터리 여행 세 가지를 소개했다. 하나는 정신 향상을 위한 여행, 둘째는 화제를 얻기 위해, 그러니까 후일에 이야기 할 재료를 얻기 위한 여행, 세 번째는 일정표에 메이는 여행이라고 했다. 임어당은 여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여행자에게는 항상 방랑하는 즐거움, 모험심과 모험에 대한 유혹이 있다. 여행한다는 것은 방랑한다는 뜻이고, 방랑이 아닌 것은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의 본질은 의무도 없고, 일정한 시간도 없고 소식도 전하지 않고 호기심 많은 이웃도 없고 환영회도 없고 이렇다 할 목적도 없는 나그네 길이다. 좋은 나그네는 자기가 이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를 모르는 법이고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여행자는 자기 어디서 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
작가 조내화의 여행기는 목적지를 앞에 정해두고 독자는 따라만 가는 단체 여행 프로그램식의 여정이 아니다. 처음엔 이랬다. 작가나 함께 동행을 한 지인들이나 노정에서 서성이는 느낌이다. 이 대목을 보라.
여행은 자유로움이라고 했던가? 나를 자연 속에 묻고, 자연은 내 마음을 그대로를 펼치도록 내버려 두므로 자유로움인가? 아니면 내 마음을 어디엔가 묶어둘 수 있기에 자유로움인가? 겨울이지만 전혀 겨울의 맛을 느낄 수 없는 12월 중순, 남도로 떠났다. 항상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얼굴 보고 웃고, 얼굴 보며 짜증내던 교사들 열댓 명이 동행하였다. 처음부터 떠나기 싫어 짜증내던 교사들과 동행한 여행이었다. 이게 자연스러움이요. 이게 인생이다. 생각한대로 계획한대로 절대 안 되는, 그저 서성이면서 사는 방랑 같은 인생, 이것이 인생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 아니겠는가.
작가의 여행 목적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다. 고택의 나뭇결 하나에도, 마당의 빗질 모양 하나에도, 유배자의 산책길에서도 경전의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여행자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작가가 여행 끝에 내뱉는 고백이 담긴 말을 보라. ‘내 몸은 어디에 묶여 있는가. 내 마음은 어디에 유배되어 있는가’라고 했다. 그는 여행 참 제대로 했다. 작가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살면서 만나는 모든 대상을, 나를 바라보는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읽어낸다.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자신’이다. 그는 여행을 통해서 자신을 직면했다. 그의 여행은 자기 존재와의 만남으로 귀착된다. 집으로 돌아와야 모든 여행은 끝이 나듯, 한편의 여행기는 작가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 작가의 여행은 소유하려는 시도가 아닌,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데 그 목적을 둔다.
이틀 동안의 여정이 끝났다.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우니 아, 편안하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인가. 아니 떠날 때 이미 여기에 묶인 채 떠났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자유를 빼앗겼어도 주어진 만큼의 자유를 충분히 향유하면서 그들의 상상력으로 더 넓은 세상을 창조했다.
작가가 또 하나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다. 지리산 자락 한 초등학교가 근무지였던 작가, 마치 유배지 같은 깡촌에 갇혀있었지만 진정 마음은 자유를 누렸다. 누가 가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유배지였다. 바람이 벗이었고 하늘이 동행이었다. 깊은 골짜기 속에서도 창공을 보고 있었다. 육신으로는 구속(拘束)이었지만 마음으로는 구속(救贖)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은 자발적인 배움터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어떤가. 언어의 길이 있지 않은가. 설령, 언어의 길이 막히면 어떤가. 이때는 마음의 길을 걸으면 된다. 가파른 산책로는 오직 숨쉬기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본능적으로 몰입을 배우는 길이며, 평평한 길에 접어들기라도 하면 굽이치는 세상을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사색의 길이었으며, 초당 서쪽 바위를 스쳐 지나는 바람은 천상의 선율을 실어다 주는 가락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소외가 아닌, 본질적으로 삶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 진정한 용기다. 세상을 두 걸음만 벗어나 자발적 유배의 땅에 서면 ‘약속의 땅’은 어디에나 있었다.
5. 살맛 나는 ‘늙음’
작가는 사건 하나를 계기로 늙어감에 대해 사색한다. 그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한다. 지리산 자락의 작은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한 명의 교사가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공 하나를 두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장면을 보라. 곧이어 가슴 뭉클한 장면이 연출될 것 같지만 끝은 사고였다. 문제는 마음 같지 않는 ‘늙은 몸’이었다. 공을 쫓아간 다음 멋진 폼으로 터닝 킥을 하고 싶었던 작가, 번개처럼 달려갔지만 ‘도끼 맞은 장작개비처럼’ 자빠졌다.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운 채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늙음’이다. 어디 작가뿐이랴. 우리도 생의 바닥에 한 번씩은 드러누워 보면 늙음에 대한 자기 발견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늙음, 신체보다 생각이 더 빨리 늙는 것 같다. 특히 ‘늙음’을 ‘쓸모없음’으로 여기는 노인심리는 노년을 더 우울하게 만든다. 늙을수록 점점 더 짐짝처럼 생각하고, 이 사회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짐으로, 소용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잘못 늙을까봐, 잊히어질까봐, 행여나 치매에 걸리게 되거나 거동에 장애가 찾아올 때, 자녀들로부터 거부를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런 ‘늙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내 방식을 더 꼿꼿이 곧추세워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작가처럼, 늙음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다친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라.
늙어간다는 것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나이가 중년을 넘어 기력이 약해지는 것이라 풀이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 맞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사고가 날 수밖에… .
늙는다는 것, 프랑스의 심리학자 마리 드 엔젤은 자신의 책『살맛나는 나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년은 쇠퇴기도 아니요 황금기도 아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어려움이 있으며, 살 만한 가치가 있고 또한 풍요로운 시기다.(…)우리 각자의 늙는 방식이 우리 자신에게 달린 건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의 행동과 비밀스런 수단 덕에 나이 드는 것을 쇠락이 아니라 호기심 가득한 모험으로 경험할 수 있다.’
-마리 드 엔젤,『살맛나는 나이』
노년은 젊음을 포기하는 시기가 아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미지의 세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쇠락이 아니라 새로운 기대인 셈이다. 제 나이에 맞이할 수 있는 것들, 모든 게 새로움이다. 일흔에 내 곁에 있는 배우자와 함께 일어나 맞이하는 돋을볕, 여든에 홀로 맞이하는 저녁놀, 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늙음을 애써 미화하려는 것이 아닌, 짐짓 모양새를 뽐낸 고상함 없이 이 멋진 나이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뿐이다.
시간에도 ‘소유적 시간’과 ‘존재적 시간’이 있다. 소유적 시간이란, 내 앞에서 흘러가는 시간으로 선용여부의 따라서 유익하게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시간이다. 존재적 시간이란, 주어진 시간에다 내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소유적 시간을 살아온 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허비한 것으로 여긴다. 시간마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지만 그것 하나 잡을 수 없으니 내가 잘못 살아서 놓친 시간으로 생각한다. 움켜쥐고 살았던 내 몸둥이, 내 재물, 내 재능처럼 용을 써서 잡아둘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닫는 순간, 허망함은 더 커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늙음을 낡음으로, 쇠락으로, 쇠퇴로 생각한다. 늙음을 끔찍한 이미지로 그려 놓는다. 남은 시간은 그저 소멸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존재론적 삶을 살아온 자에게는 내 앞에 놓여 있는 시간을 숙명적으로 소멸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의미를 창출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시간조차도 소유하려 들거나 탐하지 않는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청년이면 청년으로, 노년이면 노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는 늙는다는 것이 낡아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무르익음으로 고스란히 현재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확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경탄이다’라고 했다. 출생하고 자라고 늙고 죽는 시계의 시간에 살고 있지만, 결코 그 영속적인 시간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순간 의미로 다가온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젊음의 시간이든, 노년의 시간이든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참다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궁극적인 마무리는 어디일까. 섬진강이다. 곧 자연으로의 회귀다.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섬진강에 삶을 묻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도 나는 섬진강에 삶을 묻고 산다. 노을 진 섬진의 황홀한 번쩍임은 내가 살아있음을 하늘에 고하는 것이요, 산산이 부서지며 피어오르는 황금가닥은 내 마음을 담아 하늘에 띄우는 것이다.(…)섬진강의 빛깔이 변할 때 내 마음은 영글어갔고, 섬진강의 모습이 변할 때 내 몸은 성숙해졌다.
‘나는 섬진강에 삶을 묻고 산다.’ 작가의 말이다. 섬진강을 떠나서 작가를 생각할 수 없다. 살아있음도 섬진강의 노을을 보며 느끼고, 몸과 마음도 섬진의 빛깔이 변할 때 함께 영글고, 성숙해진다. 작가는 섬진 속에 자신의 삶을 녹이고 섬진은 작가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물아일체의 경지가 된다.
에필로그
조내화의 수필도 이와 같은 여정을 따른다. 가졌던 여정이, 이제는 버리는 여정으로, 소유적 동기에서, 존재적 동기로의 여정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는 '존재적 글쓰기'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즉, 잘 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글 쓰는 존재이기에 행복한 것이다.
삶이나 글이나 자연스럽게 무르익는 것은 매 한 가지다. 성서에서는 늙는다는 것과 죽음에 이르는 것을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이라 했다. 한 생애 동안 짊어지고 있었던 소유를 다 벗고 진정한 존재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자연스러운 마무리다. 무에서 유로 태어나 살다가 다시 유에서 무로 내려놓고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소유에서 존재로 돌아가는 것, 이게 삶의 여정이며, 수필의 길이다. 또 작가 조내화가 말하는 수필적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