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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 아가사 크리스티
초대받은 사람들
요즘 현직에서 물러난 워그레이브 판사는 일등 흡연차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타임즈의 정치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서머셋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앞으로 두 시간이다.
판사는 인디언 섬에 대해 신문에 난 모든 기사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요트를 좋아하는 미국인 부호가 섬을 사들여 이곳 데븐셔 바닷가 가까운 섬에 사치스러운 근대적인 저택을 세웠다는 게 첫번째 기사였다.
그런데 미국인 부호의 세번째 아내가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섬과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사람의 눈길을 끄는 광고가 몇차례 났다. 그리고 오윈이라는 사람이 사들였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로부터 여러 가지 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인디언 섬을 산 사람은 헐리우드 영화배우 게이브리얼 털 양이다! 그녀는 1년 가운데 몇 달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섬에서 살려고 한다! <소문난 참새>난 필자는 어떤 고귀한 사람의 별장으로 팔렸다고 했다. <기상대>난은 신혼여행 때문이라고 썼다. 젊은 L경이 마침내 큐피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조너스>는 확실한 정보라고 하며 해군 본부가 샀다고 전했다. 극비에 속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확실히 인디언 섬은 큰 뉴스거리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거의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필적이었으나, 군데군데 뜻밖으로 여겨질 만큼 명확히 알 수 있는 글귀가 있었다.
그리운 로런스님….…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꼭 인디언 섬에….…참으로 아름다운 곳에서….…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잔뜩….…아쉬웠던 옛날 일을….…자연과 벗하여….…햇빛을 받으면서….…패딩턴 역을 12시 40분….…오크브리지에서 기다렸다가….…그리고 보낸 이는 <당신의 콘스턴스 캘민턴>이라고 아름다운 필적으로 서명되어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던가 회상했다.
7년 아니, 8년도 더 된 옛날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일광욕을 하며 자연과 농촌을 즐기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하려던 참이었다. 그 뒤 그녀는 다시 흠뻑 일광욕하고 자연과 유목민과 친숙해지기 위해 시리아로 갔다고 한다.
확실히 콘스턴스 캘민턴은 섬을 사들여 수수께끼 같은 생활을 할 만한 여자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자기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 만족하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는 잠자기 시작했다.
다른 다섯 승객과 함께 삼등차에 타고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머리를 뒤로 기대로 눈을 감았다.
기차로 여행하기에는 무척 더운 날이다. 바다에 닿으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참으로 이번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휴가 기간의 일이란 대부분 많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비서 일은 거의 없었다. 직업소개소에 부탁해도 어려웠다.
그런 중에 편지가 왔던 것이다.
―당신 이름을 직업소개소에서 듣고, 또 추천장도 받았습니다. 직업소개소에서는 당신을 잘 알고 소개하여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급료로, 8월 8일부터 일해 주기 바랍니다. 패딩턴 역을 12시 40분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오면, 오크브리지 역으로 마중나가겠습니다. 여비와 그 밖의 비용으로 5파운드 함께 보냅니다. -유너 낸시 오윈-
편지 윗머리에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 인디언 섬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인디언 섬! 요즘 자주 신문에 나고 있는 섬이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택은 틀림없이 어떤 부호에 의해 세워져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다고들 떠들어대고 있다.
고된 교사 근무로 지쳐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늘 생각했다.
(삼류 학교 교사로 있어 봐야 볕들 날이 없다. 좀더 좋은 학교로 옮겨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언제나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야. 검시관의 심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어딜 가나 걸리적거리거든. 비록 검시관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해도!)
그녀는 검시관으로부터 침착한 태도와 용기를 칭찬받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검시관으로부터 심문받은 자가 이토록 유리한 판정을 받은 일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밀턴 부인도 그녀에게 친절했다. 단 유고만이―.
(그러나 이제 유고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기차 안이 찌는 듯 더운 가운데도 베러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바다에 가는 것을 그만두는 게 좋을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일이 뚜렷하게 그녀 마음속에 떠올라 왔다. 시릴의 머리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바위 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 떴다 가라앉았다―떴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정확한 수영법으로 그 뒤를 헤엄치고 있다―물을 가르고 나아간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며….….
바다, 그 깊고 따뜻함이 감도는 푸르름―모래 위에 함께 나란히 누워 지내던 아침. 유고―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유고….…아니, 유고를 생각해선 안 된다.
베러는 눈을 뜨고 마주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얼굴, 엷은 빛깔의 눈. 키가 크고 입 언저리가 몹시 냉혹해 보일 만큼 뻔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늘 여행하며 여러 가지 재미나는 경험을 가진 남자임에 틀림없어.)
필립 롬버드는 마주앉은 아가씨를 흘끗 보고 생각했다.
(꽤 매력있군. 어쩐지 여선생 같은 데가 있는데. 아마도 쌀쌀한 마음을 지녔을 거야.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여자다―사랑에 있어서도, 싸움에 있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재미있겠는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돼.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일이다.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대체 어떤 일일까, 하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모리스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자네가 승낙하든 않든 나는 어느편이나 좋네, 롬버드 대위.」
롬버드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1백 기니라고?」
1백 기니의 돈쯤 그리 큰 건 아니라고 투로 그는 물었다. 식사도 충분히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던 때의 1백 기니! 그러나 그는 모리스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 때문에 모리스에게 거짓말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롬버드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나?」
아이작 모리스는 조그만 대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말할 수 없네. 롬버드 대위. 지금 이야기한 것만으로 결정해 주기 바라네. 이 일을 나에게 의뢰한 사람은, 자네가 만일의 경우 힘이 될 수 있는 사나이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으로 가기를 승낙하면, 나는 자네에게 1백 기니를 주게 되어 있네. 가장 가까운 역은 오크브리지고, 마중나온 자가 그곳에서 스티클헤이븐까지 데리고 가 다시 모터 보트로 인디언 섬에 실어다 줄 거야. 그곳에서 자네는 나에게 의뢰한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되네.」
롬버드는 불쑥 물었다.
「기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을 넘지 않네.」
조그만 입수염을 비틀며 롬버드 대위는 말했다.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면 손대지 않겠네.」
그는 말하면서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리스는 두터운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만일 옳지 않은 일을 요구받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한마디 말로는 듣지 않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모리스는 미소지었다. 롬버드의 지난날 행동이 언제나 정직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롬버드 자신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엷게 웃었다. 확실히 자기는 한두 차례 위험한 다리를 건넌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끝났다.
비록 옳지 못한 일이라도 그리 마음에 꺼려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위험한 다리를 건너 보고 싶다. 그는 인디언 섬에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스 에밀리 브랜트는 언제나처럼 몸을 꼿꼿이 하고 금연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65살, 기차 안에서 기분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일에는 단연코 반대였다. 옛스러운 풍속을 중히 여기는 대령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예의범절에 엄격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기차 안에서의 예절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도.
에밀리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주장을 굳게 갖고, 붐비는 삼등차에 꼿꼿이 앉아 불쾌함과 더위를 꾹 참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떠들어댄다! 이를 뺄 때는 주사를 요구한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약을 먹는다, 언제나 부드러운 의자며 쿠션을 바라고, 여자 아이들은 예의없이 행동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여름이 되면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닷가에서 뒹군다.
이러한 모든 일이 못마땅하여 에밀리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난해 여름 휴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디언 섬.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미스 브랜트님.
나를 기억하실는지요. 우리들은 여러 해 전 8월, 벨헤이븐의 바닷가 호텔에서 함께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었습니다.
나는 지금 데븐셔 주에 있는 인디언 섬에서 가족적인 그룹을 만들려고 합니다. 간단하고도 맛있는 식사와 예의바른 조용한 손님을 모토로 하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 몸을 드러낸다든지, 밤늦게까지 축음기를 트는 사람은 이곳에 오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올 여름 휴가를 인디언 섬에서 지내 주신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겠습니다. 물론 나의 손님으로 와주시므로 비용은 필요없습니다. 8월 첫무렵이면 어떻겠습니까? 8일에 오시면 좋겠습니다만. -당신의 성실한 UN-
몇 번이나 읽었을까. 몹시 알아보기 힘든 글씨다. 에밀리 브랜트는 초조해 하며 생각했다.
(요즘은 읽을 수 없는 서명을 하는 이가 많아 곤란해.)
그녀는 벨헤이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두 해 여름동안 계속 그곳에 있었다. 분명 중년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아버지는 지위높은 승정이었다. 미스 올턴, 오먼이었던가? 아니, 틀림없이 올리버였다. 그렇다. 올리버다.
인디언 섬! 요즘 인디언 섬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신문에 나고 있다. 영화배우가 어떻게 했다던가―아니, 미국의 부호였는지도 몰라. 물론 이런 곳에 매우 싸게 손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섬은 누구에게나 알맞은 게 아니다. 처음에는 낭만적으로 여겨져 사들이지만 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많아 다시 내놓는 수가 많다.
에밀리 브랜트는 생각했다.
(어쨌든 공짜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거야.)
수입이 줄어들어 꼭 써야 할 데에도 쓰지 못하는 형편에 참으로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녀―미스 올리버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녀에 대해 좀더 생각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매커스 장군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기차가 갈아탈 엑서터 역에 닿을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지선의 기차는 느려서 못마땅해. 거리로 오면, 인디언 섬과 코와 눈 사이다.
그는 오윈이라는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지 머리 속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스푸프 레이거드의 벗이고, 조니 다이어의 친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각하의 옛 친구도 보실 수 있습니다―옛이야기를 나눌 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아시고….….
아무튼 옛이야기는 나쁘지 않다. 요즘은 사람들이 애써 그를 피하려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모두 저 가시돋친 소문 때문이다! 벌써 30년 전 일인데도. 아마 아미테이지가 지껄인 것이겠지.
지독한 녀석이다! 뭘 알고 있다고. 그러나 마음아파 해도 아무 쓸데없다. 사람은 마음에 두지 않아도 좋을 일을 마음에 둔다. 이상한 눈초리로 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마음꺼려 한다.
인디언 섬은 그도 가보고 싶다고 여겼던 곳이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해군, 공군, 육군이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뿌리도 잎도 없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의 젊은 부호 엘머 롭슨이 저택을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건축비가 들었다 한다. 온갖 사치스러운 시설을 다했다는 것이다.
엑서터! 여기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시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모리스를 타고 솔즈버리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오늘날의 명성을 얻기까지의 생애가 이 같은 피로를 가져다 준 것이다.
예전에 할리 거리의 진료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최신식 기구의 호화로운 시설에 둘러싸여 성공이냐 실패냐의 두 갈래 길을 걷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솜씨도 훌륭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성공하려면 솜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운도 필요했다. 그는 그 운을 붙잡은 것이다.
올바른 진단, 부인 환자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재산과 지위가 있는 부인 환자로부터. 그리고 소문이 퍼졌다.
「암스트롱에게 보이면 좋아. 아직 젊지만 참으로 착실한 의사지. 팸은 오랫동안 여러 의사에게 보여 왔었는데, 그 의사는 단 한 번에 병의 원인을 밝혀 냈어요!」
마침내 공은 구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병원은 사람으로 붐볐다. 거의 쉴 틈도 없었다.
며칠 동안 런던을 떠나 세븐셔 바닷가의 섬에서 8월의 더위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휴가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가 받은 편지로는 웬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들어 있는 수표는 의심할 나위 없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생각지도 못한 액수였다. 오윈이라는 사람은 돈이 남아도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이,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진찰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신경이―.
신경!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 환자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의사로서는 이런 환자가 가장 힘들다. 진찰을 받는 부인은 몸의 이상은 조금도 없고, 다만 무료할 뿐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대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병을 발견하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좀 이상은 있습니다만―.」
여기서 길고 어려운 이름을 들어 병명을 이야기하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나 대단치는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만, 뭐, 처방은 간단하지요.」
약은 신념을 되찾는 수단이다. 더욱이 그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희망과 신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0년―아니, 15년 전 사건 뒤에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발했다. 술도 끊었다. 참으로 위험한 고비였다.
갑자기 고막이 터질 듯한 경적이 들리고 스포츠 경기용 자동차 댈메인이 시속 80마일쯤의 속력으로 그를 앞질렀다. 암스트롱 의사는 하마터면 길가 울타리에 자동차를 처박을 뻔했다.
예사롭게 난폭한 운전을 하는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의사는 그런 젊은 난폭자가 싫었다. 하마터면 자동차를 길가 울타리에 처박을 뻔했지 않은가. 참으로 싫은 녀석이다!
앤터니 머스틴은 자동차를 달려 미어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어째서 느릿느릿 달리는 자동차가 많은 것일까? 방해되어 참을 수 없어. 더욱이 그런 차들일수록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단 말이야! 아무튼 영국에서는 자동차 여행을 할 수가 없어. 프랑스 같지 않아.
여기서 자동차를 멈추고 목을 축일까, 이대로 앞으로 달려나갈까.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앞으로 1백 마일 조금 더 남았다. 진과 진저 맥주를 마시고 가자. 아주 더운 날이니까!
그 섬의 저택은 틀림없이 유쾌할 거야. 날씨만 좋다면. 그건 그렇고, 오윈 부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돈은 있으나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인간들이겠지.)
배저는 그런 사람들을 잘 냄새맡는 것이 특기다. 물론 그 자신은 돈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을 잡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떻든 술만은 흠뻑 마시고 싶다. 돈은 벌었지만 쓰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게이브리얼 털이 인디언 섬을 샀다던 이야기가 소문에 지나지 않는 게 유감스럽다. 영화배우와 벗하여 노는 것은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는데. 거기에 젊은 아가씨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와는 호텔을 나와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켠 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댈메인에 올라탔다. 아가씨 몇 명이 그의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균형잡힌 6피트의 몸집, 좀 짧은 고수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깊이 있는 푸른 눈.
그는 자동차를 출발시켜 좁은 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노인과 소년이 놀라서 길을 비켰다. 소년은 달려가는 자동차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앤터니 머스턴은 승리에 찬 개선장군처럼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블로어는 플리머스에서 오는 느린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말고는 눈이 흐린 점원 같은 노인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지금 잠들어 있었다. 블로어는 조그만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이게 모두다. 에밀리 브랜드, 베러 크레이슨, 암스트롱 의사, 앤터니 머스턴, 워그레이브 판사, 필립 롬버드, 매커서 장군, 하인 로저스 부부.」
그는 수첩을 덮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구석에서 자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블로어는 생각했다.
(취해 있군.)
그는 마음속으로 빠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면밀히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문제없는 일이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괴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그는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입수염을 기른 어딘지 군인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표정은 거의 없었다. 눈동자는 회색이고 눈과 눈 사이가 굉장히 좁았다.
블로어는 말했다.
「소령으로 보아 줄까? 아니, 잊었었군. 늙은 장군이 있었지. 금방 꿰뚫어 볼 거야. 역시 남아프리카 좋아. 남아프리카에 관련된 이는 하나도 없고, 나는 여행 안내서를 읽었으니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거든.」
다행히도 식민지 사람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던 사나이로 해두면 어떤 이들 속에 섞여 들어도 의심받을 리 없다.
인디언 섬. 그는 소년 시절에 인디언 섬을 알고 있었다. 바위투성이 섬으로 갈매기가 가득 모여 있었다. 바닷가로부터 1마일쯤 되는 거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는 사람 머리를 닮아 있는 데서 나왔다. 미국 인디언의 옆얼굴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 섬에 저택을 짓다니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군! 바다가 거칠어지면 지독한 곳이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 가운데에는 괴상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구석의 노인이 눈을 뜨고 말했다.
「바다는 알 수 없어―알 수 있는 게 아니지!」
블로어는 화난 사람을 달래듯 말했다.
「그렇소. 알 수 없지요.」
노인은 두 번이나 딸꾹질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태풍이 올 거야.」
「그럴 리 없소. 이토록 날씨가 좋은데!」
노인은 성난 듯 말했다.
「틀림없이 태풍이 올 거요. 나는 알고 있소.」
블로어는 거스르지 않고 말했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일지도 모르지요.」
기차가 역에 닿자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기서 내려야지.」
그는 손을 떨며 창가를 더듬거렸다. 블로어가 그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노인은 통로에 서서 위엄있게 한손을 들고 흐릿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가 말했다.
「기도해야 돼. 기도해야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도다.」
노인은 플랫폼에 떨어져 넘어졌다. 그리고 넘어진 채 블로어를 쳐다보며 감격어린 투로 말했다.
「자네에게 말하는 걸세, 젊은 양반. 심판의 날이 바로 옆까지 와 있네.」
블로어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 쪽이 심판의 날에 가까이 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블로어의 생각은 틀려 있었다.
인디언 자장가
오크브리지 역 밖에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여행 가방을 든 짐꾼이 서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외쳤다.
「짐!」
한 택시 운전수가 다가왔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물었다.
「인디언 섬에 가십니까?」
네 사람의 목소리가 그 물음에 긍정의 대답을 하고, 그리고 곧 서로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았다.
운전수는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워그레이브 판사에게 말했다.
「택시는 두 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대는 엑서터에서 보통열차가 와닿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5분쯤 걸릴겁니다만, 그 기차로 오는 남자 손님이 한 분 있습니다. 어느 분이 그때까지 주시겠습니까? 그편이 더 편할 텐데요.」
벌써 오윈 부인의 비서가 된 듯한 베러 크레이슨이 곧 입을 열었다.
「내가 기다리겠어요. 여러분, 먼저 가주세요.」
그녀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눈초리와 목소리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명령하는 듯한 투가 조금 나타났다. 여학생들에게 어느 테니스 코트를 쓸 것인지 지시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에밀리 브랜트가 점잔빼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먼저.」
그녀는 운전수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그 뒤를 따랐다.
롬버드 대위가 말했다.
「나도 기다리지요. 저….….」
베러는 말했다.
「크레이슨이에요.」
「나는 롬버드라고 합니다. 필립 롬버드.」
짐꾼이 택시에 짐을 실었다.
자동차 안에서는 워그레이브 판사가 직업적인 주의깊은 말씨로 말했다.
「좋은 날씨입니다.」
에밀리 브랜트는 대답했다.
「네, 참으로.」
아주 훌륭한 노신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닷가 여관에서 보던 남자들과 아주 다르다. 올리버 부인인지 미스 올리버인지는 잊었지만, 그녀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이 부근을 잘 아십니까?」
「콘월과 토키에는 갔었지만, 이곳 데븐셔에 온 것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 부근은 잘 모릅니다.」
택시는 달려갔다.
두 대째 택시 운전수가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안에 들어가 앉으시겠습니까?」
베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밖에 있겠어요.」
롬버드 대위는 미소지었다.
「밖에 있는 편이 기분좋지요. 그보다도 역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여기에 있겠어요. 겨우 무더운 기차 안에서 풀려 났으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에 기차 여행은 정말 견딜 수 없지요.」
「그래도 날씨가 계속 맑아서 좋아요. 영국의 여름날은 변덕이 심하니까요.」
롬버드는 스스로 평범한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물었다.
「이곳을 잘 아십니까?」
「아니오, 처음이예요.」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두려는 듯 급히 덧붙였다.
「아직 나의 고용주와도 만나지 않았어요.」
「고용주라고요?」
「네, 나는 오윈 부인의 비서로 고용되었어요.」
「그렇습니까?」
그의 태도가 눈에 띄지 않게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어 말하기 쉬워진 듯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묘한 이야기로군요.」
베러는 웃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부인의 비서가 갑자기 앓게 되었다며 직업 소개소로 전보가 와서 오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곳에 가서 만일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렵니까?」
베러는 다시 웃었다.
「뭐, 임시적인 일인걸요. 여름방학 동안만의. 나는 여학교에 나가고 있어요. 게다가 인디언 섬에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신문에 여러 가지 기사가 나고 있었거든요. 정말 아름다운 곳일까요?」
「나는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나, 그러세요? 오윈 부처는 매우 좋은 분들일 것 같아요. 어떤 분일까? 좀 가르쳐 주겠어요?」
롬버드는 생각했다. 난처하게 되었군. 아는 체하는 게 좋을까, 정직하게 모른다고 할까.
그는 갑자기 빠르게 말했다.
「팔에 벌이 앉았군요. 가만히 계십시오.」
그는 더없이 친절하게 그녀의 팔에 앉은 벌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고마워요. 올 여름은 벌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더위 때문이겠지요. ….…우리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기차가 가까이 온 듯 길게 꼬리를 끌며 기적이 울려 왔다.
롬버드가 말했다.
「온 것 같군요.」
역 출구에 나타난 사람은 키 큰 군인 같은 노인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깎고 잘 손질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육중한 가죽 여행 가방을 무거운 듯 든 짐꾼이 베러와 롬버드 쪽을 가리켜 보였다.
베러는 사무적인 태도로 나아갔다.
「오윈 부인의 비서예요.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분은 롬버드 씨예요.」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푸른 눈이 롬버드를 관찰했다. 순간 그의 눈 속에서 하나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남자로군. 어딘지 의심스런 점이 있긴 하지만….….)
세 사람은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그들은 조그만 오크브리지의 잠든 듯 조용한 시가지를 지나 플리머스 가도를 1마일쯤 달렸다. 그리고 나서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데븐셔의 이 지방은 전혀 모르오. 도시트셔와의 경계 가까운 동 데븐셔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소만.」
베러는 말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언덕이 있고, 땅은 붉고, 한쪽으로는 아름다운 푸르름이 펼쳐져 있군요.」
필립 롬버드는 그녀의 관찰을 비평하듯 말했다.
「좀 협소한 느낌이군요. 나는 넓은 곳이 좋습니다. 멀리까지 환히 내다보이는….….」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여행을 많이 한 것 같구려.」
롬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요전번 전쟁에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 묻겠지. 이런 늙은이들은 꼭 그렇게 묻거든.)
그러나 매커서 장군은 전쟁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험준한 구릉의 비탈길을 올라가 스티클헤이븐 쪽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갔다. 작은 집이 몇 채 모여 있고 바닷가에 어선 두 척이 조는 듯 끌어올려져 있었다. 남쪽 방향으로, 저물어 가는 저녁해를 받은 인디언 섬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비쳤다.
베러는 놀라운 듯 말했다.
「바닷가에서 꽤 떨어져 있군요.」
그녀는 바닷가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하얀 저택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인디언의 머리를 닮은 바위투성이 섬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나쁜 모습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일곱 개의 별>이라는 조그만 찻집 앞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굽고 나이든 판사와, 자세가 꼿꼿한 에밀리 브랜트, 세번째 사나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몸집큰 사람으로 그들 앞으로 걸어와 자기 이름을 댔다.
「기다리는 게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요. 나는 데이비스라고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 있었지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쾌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분명 불쾌한 태도로 그를 보았다. 사나이의 품위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에밀리 브랜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 뚜렷이 결정한 듯했다.
데이비스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물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한 잔 들고 싶은 분 없으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데이비스는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곧 떠납시다. 오윈 씨와 부인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모두의 얼굴에 뜻하지 않은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데이비스도 그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그들에 모두에게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비스가 손짓하자 가까운 벽 쪽에 서 있던 사나이가 다가왔다. 몸을 양옆으로 흔들며 걷는 모습으로 보아 뱃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눈은 검었으며 초점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입을 열었다.
「떠나시겠습니까, 여러분? 보트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동차로 오실 남자분이 둘 있지만, 오윈 씨는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모두 일어섰다. 안내자는 그들을 돌을 쌓아 만든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한 척이 모터 보트가 옆에 대어져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꽤 작은 배로군요.」
배주인은 설득하듯 말했다.
「이래봬도 훌륭합니다. 플리머스까지도 문제없이 갈 수 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많이 타는가?」
「이 곱절의 사람이 타도 끄덕없습니다.」
필립 롬버드가 밝은 목소리로 태평스럽게 말했다.
「괜찮겠지요. 날씨가 좋고 파도도 잔잔하니까요.」
에밀리 브랜트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무서워하며 보트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음울한 기분이 가셔지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보트가 떠나려 할 때 밧줄을 쥐고 있던 안내자가 별안간 고개를 갸웃했다. 자동차 한 대가 급한 비탈길을 마을 쪽으로 달려 내려왔다. 크고 아름다운 자동차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 환상처럼 보였다.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핸들을 잡고 있는 젊은이는 지는 해의 강한 빛을 받아 스칸디나비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젊은 무신(武神) 같아 보였다.
그는 경적을 울렸다. 그 커다란 소리가 만 안쪽의 바위에 부딪쳐 메아리쳐 왔다. 현실로 여겨지지 않는 한순간이었다. 이때의 앤터니 머스턴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이 곳에 있던 몇 사람은 뒷날 이 순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 옆에 앉아 이상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상상한 오윈 씨의 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름답게 차려 입은 여자들과 스포츠 옷을 입은 신사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머 롭슨 씨를 찾아오던 손님들과는 전혀 다르다. 프레드 내러컷은 롭슨 씨의 손님들을 생각해 내고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들은 무척 쾌활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오윈 씨는 몹시 색다른 인물 같다. 이상스럽게도 프레드 내러컷은 아직 오윈 씨를 만난 적도 없고 부인을 본 일도 없었다. 오윈 부처가 마을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은 모리스 씨를 통하여 했고, 돈도 모리스 씨가 치렀다. 언제나 명확히 지시되고 지불도 틀림없었으나 이상한 일임에는 변함없었다. 신문에 <수수께끼의 인물 오윈>이라고 난 것을 내러컷도 읽었지만, 확실히 그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아니면 섬을 산 사람이 정말은 게이브리얼 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배에 탄 손님들을 보자 그렇게 믿어지지 않았다. 영화배우나 영화에 관계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프레드 내러컷은 손님들을 차가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늙은 노처녀 한 사람―잔소리 심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여자가 싫었다.
군인 같은 노신사―얼굴 표정으로 보아 참다운 군인인 듯하다.
아름다운 아가씨―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헐리우드 스타일의 호화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니다.
몸집 단단한 쾌활한 신사―이 남자는 진짜 신사가 아니다. 아마 세일즈맨 같은 일을 하던 남자이리라.
또 한 사나이는 눈이 날카롭고 방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혀 정체를 모르겠다. 이 사나이는 혹시 영화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윈 씨의 손님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몰고 온 젊은이다.
(얼마나 훌륭한 자동차인가! 스티클헤이븐에서는 본 적도 없는 자동차다. 값이 굉장히 비싸겠지.)
이 사나이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재산도 꽤 있음에 틀림없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이상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스럽다.
보트는 바위코를 돌았다. 마침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섬 남쪽은 경치가 전혀 달랐다. 토지가 부드러운 굽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택은 그곳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낮고 네모진 건물로, 둥근 창이 모든 빛을 받아들이는 근대적 건축물이었다. 멋들어진 저택이었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었던 대로의 저택이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을 멈췄다. 보트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자연적인 수로를 따라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를 댈 곳이 없겠는데.」
프레드 내러컷은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동남풍이 불면 인디언 섬에는 상륙할 수 없습니다. 1주일이 넘도록 교통이 끊어진 때도 있지요.」
베러 크레이슨은 생각했다.
(요리사의 고생이 심하겠군. 섬은 어디나 그래. 집안일을 맡는 것은 고생이지.)
보트는 바위 사이에 닻을 내렸다. 프레드 내러컷은 보트에서 뛰어내려 롬버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상륙시켰다. 내러컷은 바위에 박힌 쇠고리에 보트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 모두를 안내하여 바위에 새겨진 층계를 올라갔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꽤 좋은 곳이로군!」
그러나 마음속은 침착치 못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저택의 넓은 뜰로 나오자 마음이 놓인듯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 정면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하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침착한 몸가짐이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더욱이 저택 그 자체가 느낌 좋은 건물이었으며, 저택에 달린 테라스의 전망도 아름다웠다.
하인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앞으로 나왔다. 키크고 여윈 사나이로 머리는 희었으며 기품이 있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넓은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었다. 술병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앤터니 머스턴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여기에 모인 이들이 재미없는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 함께 말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기를 이런 부류에 불러 넣다니, 배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술은 상등품인 것 같다. 그리고 얼음도 충분하다.
뭐라고? 하인 녀석이 뭐라고 말하고 있군. 오윈 씨는 안됐습니다만 내일이 되어야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시가 계셨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먼저 방으로 안내하고….… 식사는 8시에….….
베러는 로저스 부인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으며 문이 열려 있었다. 베러는 바다 쪽으로 난 창문과 동쪽으로 또 하나의 창문이 있는 아늑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로저스 부인이 말했다.
「뭐, 필요한 게 있나요?」
베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트렁크가 날라져 와 그 안의 물건들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방 한쪽에 문이 열려 있고, 담청색 타일을 깐 욕실이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말했다.
「없어요.」
「볼일이 있으면 방울을 흔들어 주세요.」
로저스 부인은 억양없는 단조로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베러는 호기심을 품고 그녀를 보았다. 어쩌면 이토록 핏기없는 여자일까. 마치 유령 같다! 머리칼을 뒤로 꽉 움켜 묶고 검은 옷을 입은, 조금도 빈틈없어 보이는 하녀지만, 불안한 듯 눈동자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베러는 생각했다. 이 여자는 자신의 그림자에 겁먹고 있다. 그렇다. 두려워하고 있다.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힌 것같이 보인다. 베러는 차가움이 등골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베러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윈 부인의 새로운 비서예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예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여러분의 이름과 방의 할당만 지시받았을 뿐이지요.」
「오윈 부인이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로저스 부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아직 마님을 뵙지 못했어요. 우리들도 이틀 전에 왔을 뿐이에요.」
오윈 부처는 참으로 색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고 베러는 생각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나와 내 남편뿐이에요.」
베러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택에는 여덟 명의 손님이 와 있다. 주인 부처를 포함하면 열 명이 된다. 그런데 시중드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뿐인 것이다.
로저스 부인은 말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고, 남편은 저택 일이라면 무엇이나 해요. 이토록 많은 손님이 오시리라는 건 몰랐지만….….」
「손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네,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만일 더 많은 손님이 오시면 마님이 돌봐 주실 거예요.」
「그래야 되겠지요.」
로저스 부인은 돌아서서 나갔다. 그녀는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방에서 나갔다.
베러는 창가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이상했다. 오윈 부처의 부재, 얼굴빛 나쁜 유령 같은 로저스 부인, 그리고 손님들! 그렇다, 손님들도 이상스럽게 모여 있다. 한시 빨리 오윈 부처를 만나고 싶다….…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완전히 근대적 스타일로 꾸며진 나무랄 데 없는 침실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윤나는 쪽마루 바닥에 깔린 새하얀 카펫, 엷은 색이 칠해진 벽, 전등으로 에워싸인 긴 거울.
하얀 대리석 곰 조각이 놓여 있을 뿐인 벽난로. 곰 조각 속에 시계가 들어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크롬 액자에 커다란 양피지가 끼워져 걸려 있었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것은 노래 가사였다.
그녀는 난로 앞에 서서 그것을 읽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오래된 자장가였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아홉 인디언 소년이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
한 소년이 잠들어 여덟 소년이 되었다.
여덟 인디언 소년이 데븐셔를 여행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그곳에 남아 일곱 소년이 되었다.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한 소년이 제 몸을 두 조각내 여섯 소년이 되었다.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
벌이 한 소년을 쏘아 다섯 소년이 되었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네 인디언 소년이 바다에 나갔다.
한 소년이 훈제 청어에 먹혀 세 소년이 되었다.
세 인디언 소년이 동물원을 걷고 있었다.
큰 곰이 한 소년을 안아가 두 소년이 되었다.
두 인디언 소년이 양지 쪽에 앉았다.
한 소년이 햇볕에 타서 한 소년이 되었다.
한 인디언 소년이 뒤에 남았다.
그 소년이 목을 매어 아무도 없었다.
베러는 미소지었다. 과연 여기는 인디언 섬이다! 그녀는 다시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째서 저토록 넓을까! 육지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바다―오늘은 이토록 조용하지―때로는 거칠게 날뛸 때도 있다. 인간을 그 깊은 곳으로 빨아들이는 바다. 빠진 것이다….…빠져서 발견된 것이다….…바다에 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아니, 그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일은 지나간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마침 해가 바다에 잠기려 할 때 인디언 섬으로 왔다. 바다를 건너올 때 그는 배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고장 사나이였다.
의사는 인디언 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프레드 내러컷이라는 그 사나이는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암스트롱 의사는 날씨와 낚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긴 자동차 여행으로 지쳐 있었다. 눈이 아팠다. 서쪽으로 드라이브하는 것은 해를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바다와 완전한 평화, 그것이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에게는 오랜 휴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런던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없었다. 요즘은 누구나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아니, 성공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니 만큼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런던에 돌아가지 말기로 하자. 런던이며 할리 거리며 일과 인연을 끊어 버리기로 하자.
섬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섬이라는 말만 들어도 환상적 분위기가 상상된다. 세상과의 교섭이 없어지고 섬만의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그 섬에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좋다, 인생을 완전히 잊어버릴 계획을 세워 나갔다. 바위에 새겨진 층계를 올라갈 때에도 그는 아직 미소짓고 있었다.
테라스의 의자에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그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구리 같은 얼굴, 자라 같은 목, 굽은 등, 그리고 날카로운 조그만 눈. 어디서 보았을까.
그렇다. 워그레이브 판사다. 옛날 이 판사 앞에서 증언한 일이 있다. 언제나 반쯤 잠든 것 같지만,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사람이 달라진 듯 날카로운 말을 뱉아 내는 사람이었다.
배심원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배심원의 판결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한두 번 배심원들로부터 뜻밖의 판결을 끌어낸 일이 있었다. <목매다는 판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묘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이런 뜬세상을 벗어난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워그레이브 판사는 생각했다. 암스트롱일까. 증인석에서 본 적이 있었다. 똑똑한 사나이로 증언도 주의깊고 빈틈없었다. 의사란 대개 우둔한 자들이다. 할리 거리의 의사는 더욱 그렇다. 그는 그곳 의사 중 한 사람과 만난 최근의 회견을 떠올렸다.
그는 암스트롱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소.」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먼저 주인 부처에게 인사하고 와야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눈을 감고 파충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은 할 수 없소.」
암스트롱 의사는 놀랐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인도, 부인도 없소. 이상한 일이오. 나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소.」
암스트롱 의사는 잠시 판사를 바라보았다. 노신사는 정말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워그레이브 판사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여자를 아오?」
「네―아니, 모릅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오. 나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소. 필적도 거의 읽을 수 없었소. 잘못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암스트롱 의사는 머리를 흔들며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는 모두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저택 안에 있는 두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늙은 노처녀와 젊은 아가씨. 아가씨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차가운 아가씨다.
아니, 로저스의 아내를 합하면 세 사람이 된다. 그 여자는 언제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착실해서 하는 일에 실수가 없다.
로저스 테라스로 나왔다.
판사는 물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부인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고 있나?」
로저스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아니오, 모릅니다만….….」
판사는 눈을 들었다. 그러나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인디언 섬인가. <장작더미>속에 검둥이가 하나 있다.
앤터니 머스턴은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욕조 속에서 팔다리를 뻗었다. 긴 드라이브를 한 뒤라 손발이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앤터니는 감각과 행동만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한번 마음에 결정한 일은 어떻게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욕조, 지친 팔다리, 수염을 깎고, 칵테일, 식사, 그리고 나서―.
블로어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치 못했다. 옷차림에 이상한 데가 없을까. 그로서는 없다고 보았다.
그를 알아본 이는 하나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서로가 상대의 태도를 떠보고 있다. 마치 사정을 알고 있는 것같이. 그렇다, 일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일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벽난로 위의 자장가 가사가 든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 액자를 여기에 걸어 놓은 것은 영리한 착상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 섬은 어릴 때 살아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섬이 이 저택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간이 미래를 예상할 수 없다는 건 어떤 뜻에서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매커서 장군은 자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이상하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 될 수만 있다면 무슨 구실을 대고 돌아가고 싶지만….…모터 보트는 이미 돌아가 버렸다. 섬에서 묵을 수밖에 없다.
저 롬버드라는 사나이가 묘한 녀석이다.
정직한 사나이는 아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온 사나이가 아니다.
종소리가 울리자, 필립 롬버드는 방에서 나와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표범같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몸 전체의 인상에도 어딘지 모르게 표범 같은 데가 있었다. 먹이―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그는 미소지었다. 1주일 동안 있게 된다.
1주일 동안 충분히 즐기기로 하자.
에밀리 브랜트는 식사하러 가기 위해 검은 비단옷을 입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입술이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여러 백성은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져 들고….…여호와는 나를….…심판하도다. 악인은 자신의 덫에 걸려 지옥으로 가리라….….」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녀는 성서를 덮었다.
그녀는 일어나 연수정 브로치를 달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식사가 끝나 가고 있었다. 요리는 물론 술도 훌륭했다. 로저스의 시중도 나무랄 데 없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질좋은 포도주로 기분이 풀어져 그의 특성인 풍자를 섞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사람은 앤터니 머스턴과 암스트롱 의사였다.
에밀리 브랜트는 매커서 장군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친구들 발견해 냈다. 베러 크레이슨은 데이비스에게 남아프리카에 대해 묻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크레이슨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대화를 롬버드 대위가 옆에서 듣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눈을 들어 그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보며 모두의 태도를 관찰했다.
앤터니 머스턴이 갑자기 말했다.
「이상한 게 있군.」
둥그런 테이블 한가운데에 둥근 유리 받침대가 있는 몇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앤터니는 말했다.
「인디언이군요. 인디언 섬이라고 해서 이런 게 놓여 있는 모양이군.」
베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몇 개 있나요? 열 개지요?」
「그렇소. 열 개요.」
베러는 소리쳤다.
「알았아요! 자장가에 있는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이로군요. 내 방 벽난로 위에 그 자장가 가사가 액자에 들어 있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내 방에도 걸려 있소.」
「내 방에도.」
「내 방에도.」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베러가 말했다.
「기분좋지 않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보 같으니!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오.」
그리고 그는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베러 크레이슨의 얼굴을 보았다. 베러 크레이슨도 에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이 테라스 쪽으로 열어제쳐져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기분좋은 소리군요.」
베러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싫어해요.」
에밀리 브랜트의 눈이 놀라며 베러를 보았다. 베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태풍이 불어오면 여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에밀리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되면 저택을 비워 두겠지요. 무엇보다도 가정부가 없으니까요.」
「겨울이 아니더라도 가정부는 여간해서 오지 않을 거예요.」
「네, 저 두 사람이 와주어서 올리버 부인은 정말 다행이에요. 로저스 부인은 요리 솜씨도 뛰어나니까요.」
베러는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어째서 이름을 잘못 아는 것일까.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오윈 부인은 아주 행복한 분이에요.」
에밀리 브랜트는 주머니 속에서 조그만 자수를 꺼냈다. 그리고 바늘을 움직이려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윈이라고요, 오윈이라고 했나요?」
「네.」
「나는 오윈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 없는데요.」
베러는 에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거기서 대화를 멈췄다. 문을 열고 남자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판사는 에밀리 브랜트 옆으로 와서 앉았다. 암스트롱 의사는 베러 곁으로 왔다. 앤터니 머스턴은 열려 있는 창가로 갔다. 블로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조그만 놋쇠 조각품을 보고 있었다―이상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도 여자인가.
매커서 장군은 벽난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조금밖에 없는 흰 수염을 비틀고 있었다. 꽤 훌륭한 식사였다. 장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롬버드는 벽 옆의 테이블 위에 신문과 함께 놓인 펀치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맞좋은 커피였다. 진하고 뜨거웠다.
모두들 실컷 마셨다. 누구나 만족스럽고 몸이 노곤해졌다. 시계 바늘이 밤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은 아주 조용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정적이었다.
별안간 그 정적을 깨뜨리고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 예고도 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벽을 보았다. 누가 말한 것일까.
소리는 말을 이었다. 높고 확실한 소리였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에드워드 조지 암스트롱, 너는 1925년 3월 14일, 루이저 메리 크리스를 죽게 했다.
에밀리 캐럴라인 브랜트, 너는 1931년 11월 5일에 일어난 비트리스 테일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 너는 1928년 10월 10일, 제임스 스티븐 랜더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베러 일리저버스 크레이슨, 너는 1935년 8월 11일, 시릴 오딜비 해밀턴을 죽였다.
필립 롬버드, 너는 1932년 2월 어느 날, 동아프리카 어느 마을 사람 20명을 살해했다.
존 고든 매커서, 너는 1917년 1월 4일, 네 아내의 애인 아서 리치먼드를 고의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앤터니 제임즈 머스턴, 너는 지난해 11월 14일, 존과 루시캠즈를 살해했다.
토머스 로저스와 에설 로저스, 너희는 1929년 5월 6일, 제니퍼 블레이디를 죽게 했다.
로런스 존 워그레이브, 너는 1930년 6월 10일, 에드워드 시튼을 살해했다.
피고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는가.
소리는 끝났다. 화석 같은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무엇이 깨지는 큰소리가 났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방 밖에서 외침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롬버드가 맨 먼저 행동했다.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가 힘차게 양옆으로 열어제쳤다. 그곳에 로저스 부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롬버드는 외쳤다.
「머스턴!」
앤터니가 달려가 롬버드를 도왔다. 두 사람은 쓰러진 여자를 안고 응접실로 갔다. 암스트롱 의사가 달려와 로저스 부인을 소파에 눕히고 들여다보았다.
그는 말했다.
「대단치 않소. 정신을 잃었을 뿐이오. 곧 의식을 되찾을 거요.」
롬버드가 로저스에게 말했다.
「브랜디를 가져오오.」
로저스는 핼쑥한 얼굴로 손을 떨며 대답했다.
「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방을 나갔다.
베러가 외쳤다.
「누가 말했을까요? 어디서 지껄여댔을까요? 마치―마치―.」
매커서 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쓸데없는 장난을 하는 녀석 같으니!」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갑자기 10년이나 더 늙어 보였다.
블로어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워그레이브 판사와 에밀리 브랜트만이 겨우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두 볼이 불그스름했다. 판사는 언제나처럼 머리를 목에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만히 귀를 막았다. 다만 눈만이 무엇을 찾는지 의미없이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시 롬버드가 가장 먼저 행동했다. 정신잃은 여자를 암스트롱에게 맡기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 소리는 이 방안에서 들려 온 것 같았소.」
베러가 외쳤다.
「누구예요? 누구지요? 우리들은 아니었어요.」
롬버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한순간 열려진 창문을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곧 부정하듯 머리를 저었다. 별안간 그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난로 곁에 있는 옆방으로 통하는 문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는 민첩한 동자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열어제쳤다. 그리고 옆방으로 뛰어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에밀리 브랜트만이 몸을 꼿꼿이 하고 의자에 앉은 채 있었다.
옆방의 응접실과 맞닿은 벽에 테이블이 밀어붙여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축음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가 달린 구식 축음기였다.
스피커는 벽을 향해 있었다. 롬버드가 그것을 밀어젖히자 두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벽에 뚫려 있었다. 그는 바늘을 레코드에 대었다.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베러가 소리쳤다.
「멈춰 주세요! 멈춰 주세요! 무서워요!」
롬버드는 그 말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놀라운 듯 깊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몹시 나쁜 장난이로군!」
워그레이브 판사의 낮으나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장난이라고 생각하오?」
의사는 판사를 지켜 보았다.
「장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판사의 손이 조용히 윗입술을 눌렀다.
「아직 나로선 의견을 말할 수 없소.」
앤터니 머스턴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잊어버린 일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 누가 축음기를 틀었지요?」
워그레이브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소. 먼저 그것을 조사해야만 하오.」
그는 앞장서서 응접실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로저스가 브랜디 글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밀리 브랜트는 입에 거품을 물고 누워 있는 로저스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로저스가 그 옆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에설―에설―아무 일도 아니오.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하오.」
로저스 부인은 거칠게 숨쉬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는 눈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몇몇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로저스가 재빠르게 말했다.
「정신차려요, 에설!」
암스트롱 의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소, 로저스 부인. 정신을 좀 잃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정신을 잃었었나요?」
「그렇소.」
「그 소리, 그 무서운 소리. 하느님의 심판과도 같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핼쑥해지고 눈썹이 떨렸다.
암스트롱 의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디는….….」
로저스는 글라스를 조그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그것을 의사에게 건네 주었고, 의사는 괴로운 둣 숨쉬고 있는 여자 위로 몸을 굽혔다.
「이것을 마시오, 로저스 부인.」
그녀는 좀 목이 메어 흐느꼈으나 이윽고 브랜디를 꿀꺽꿀꺽 마셨다. 곧 얼굴빛이 좋아졌다.
「이젠―괜찮소. 좀 놀란 것뿐이오.」
로저스가 곧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나도 놀랐고. 쟁반을 떨어뜨릴 정도였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대체―.」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춰졌다. 그것은 하나의 헛기침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낮은 헛기침 소리였으나, 로저스의 흥분된 말을 가로막을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로저스는 워그레이브 판사 쪽을 보았다. 판사는 또 한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누가 레코드를 걸었을까. 자네인가, 로저스?」
로저스는 외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맹세합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레코드를 틀지 않았을 겁니다.」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아마 사실이겠지. 그러나 일단 설명을 듣고 싶은데, 로저스.」
로저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만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구의 명령인가?」
「오윈 씨의….….」
「분명하게 들려주게. 오윈 씨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었나?」
「나는 한 장의 레코드를 축음기에 걸어 놓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레코드는 서랍 속에 있었고, 내가 커피 쟁반을 가지고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레코드를 틀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갈수록 이상한 이야기로군.」
로저스는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레코드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습니다. 음악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롬버드의 얼굴을 보았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고?」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붙어 있었습니다. <백조의 노래>라고.」
매커스 장군이 별안간 큰소리를 질렀다.
「언어도단이야! 그런 거짓 제목을 붙여 놓다니! 그대로 둘 수 없어! 오윈이라는 자가 누구든―.」
에밀리 브랜트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판사가 끼여들었다. 오랜 세월 법정 생활에서 몸에 밴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그 일을 신중히 조사해야겠소. 그전에 로저스, 자네는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오는 게 좋겠네. 그리고 나서 이리로 돌아오게.」
「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내가 도와주지, 로저스.」
로저스 부인은 두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한잔 하고 싶은데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찬성이오.」
「내가 가져오지요.」
앤터니는 방을 나갔다가 곧 되돌아왔다.
「방 밖에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
그는 무거운 듯 들고 온 쟁반을 가만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 1,2분은 술을 따르는 데 소비되었다.
매커서 장군은 독한 위스키를 골랐다. 판사도 장군과 같은 것을 마셨다. 모두들 기분을 바꿔 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에밀리 브랜트만이 물을 달라고 하여 컵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방으로 돌아왔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두고 왔지요. 뭐요, 술이군요. 나도 한잔 합시다.」
여러 남자들이 글라스에 두 잔째 술을 따랐다. 로저스가 방으로 돌아왔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좌석의 우두머리가 되어 방안은 마치 법정처럼 되었다. 판사는 말했다.
「그럼, 로저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만 되겠는데, 오윈 씨는 어떤 사람인가?」
로저스는 판사를 쳐다보았다.
「이 집 주인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일세.」
로저스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방안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만난 적이 없다고? 그건 무슨 뜻인가?」
「우리들은 이곳에 온 지 아직 1주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편지로 고용되었지요. 플리머스의 레지너라는 소개소입니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곳이오. 신용도 있지요.」
워그레이브가 말했다.
「그 편지를 갖고 있나?」
「아니, 없애 버렸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주게. 그래, 편지로 채용되어….….」
「네, 날짜가 편지에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정된 날 이곳에 왔습니다. 모든 게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지요. 식량도 충분히 저장되고, 가구며 부엌살림도 훌륭한 것으로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저 먼지만 털면 될 정도였지요.」
「그리고….….」
「그 밖에 특별히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편지였습니다만, 손님을 맞을 테니 방을 준비 해 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다시 편지가 와서 주인어른과 마님은 좀 늦어진다면서, 손님들에게 실례되지 않게 할 것과 식사와 커피를 대접하고 레코드를 틀라는 지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편지는 가지고 있겠지?」
「네, 갖고 있습니다.」
로저스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판사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흠, 과연. 리츠 호텔이라고 되어 있군. 타이프라이터로 찍혀 있어.」
블로어가 판사 옆으로 다가왔다.
「좀 보여 주십시오.」
그는 판사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편지를 받아 들고 눈을 빛냈다.
「콜로네이션 타이프라이터군. 아직 신품입니다. 종이는 엔사인. 어디서나 쓰고 있는 거지요. 이 편지에서는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을 겁니다. 지문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없을 테지요.」
판사는 날카로운 눈길로 블로어를 보았다. 앤터니 머스턴이 블로어 옆에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보기드문 이름이군. 유릭 노먼 오윈. 부르는 느낌이 꽤 좋은데.」
판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네, 머스턴. 자네 덕분에 묘한 게 생각났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고 자라가 놀랐을 때처럼 고개를 움츠렸다가 길게 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인물에 대해 저마다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털어놓아야만 되겠소. 한 사람씩 이 집 주인에 대해 바를 제공해 주기 바라오.」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로부터 초대받은 손님이오. 모두들 어떻게 초대되었는지 알게 되면 반드시 얻을 것이 있으리라 보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에밀리 브랜트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나는 보낸 이의 주소가 확실치 않은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2,3년 여름 어느 피서지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로부터 온 것 같았지요.」
나는 그 이름이 올턴 또는 올리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올리버 부인이라는 사람도, 미스 올턴이라는 여자도 만난 적은 없어요. 물론 친한 사이도 아니지요.」
「그 편지를 갖고 있소, 미스 브랜트?」
「갖고 있어요, 찾아오지요.」
그녀는 방을 나가 편지를 가지고 곧 돌아왔다.
그 편지를 읽고 난 다음 판사는 말했다.
「알 수 있을 것 같군. 크레이슨 양, 당신은?」
베러는 비서로 채용된 사정을 설명했다.
판사가 말했다.
「머스턴, 자네는?」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전보를 받았습니다. 친구인 배저 버클리라는 남자로부터였지요. 노르웨이에 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좀 놀랐습니다. 이리로 오라는 전보였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암스트롱 의사, 당신은?」
「나는 의사로서 불려왔습니다.」
「흠. 지금까지 이 집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편지 속에 동료의 이름이 있기에….….」
「믿었다는 거로군요. 그래, 그 동료란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사람이었겠지요.」
「아니―네, 그렇습니다.」
블로어의 얼굴을 보고 있던 롬버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판사님, 지금 깨달은 일입니다만….….」
판사는 한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야 하오. 우리는 지금 오늘 밤 우리가 이곳에 모이게 된 까닭을 조사하고 있는 거요. 매커서 장군, 당신은?」
장군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편지를 받았지요.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로부터. 나의 옛 친구와 와 있다면서 갑자기 초대장을 보내는 실례를 용서해 달라고 씌어 있었소. 지금 그 편지는 갖고 있지 않소.」
「롬버드, 자네는?」
롬버드는 판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그는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같습니다. 초대 편지가 왔는데, 잘 아는 친구 이름이 씌어 있고―요컨대 잔뜩 유혹한 내용이었지요. 편지는 찢어 버렸습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만큼 조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소. 우리들은 한 사람씩 이름이 불려져 죄를 문초받았소. 그리하여 지금 그 일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거요. 지금 거기에 대한 조그만 일 하나가 나에게 의문을 갖게 하오. 불려진 이름 속에 윌리엄 헨리 블러오라는 이름이 있었소. 그런데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이 가운데 헨리 블로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소. 또한 데이비스라는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 무언가 할말이 없소, 데이비스 씨?」
블로어는 기분나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러나 버렸군요. 솔직하게 인정하지요. 내 이름은 데이비스가 아닙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요?」
「그렇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좀더 물어 봅시다. 블로어 씨, 당신은 본디 이름을 숨기고 이곳에 왔을 뿐 아니라 큰 거짓말쟁이오. 당신은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서 왔다고 했소. 나는 그곳을 잘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곳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은 일이 없소.」
모든 눈이 블로어에게로 쏠렸다. 노여움에 찬 의혹짙은 눈빛들이었다. 앤터니 머스턴이 한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할말이 있소?」
블로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네모난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보여 드리지요. 나는 런던 경찰국의 수사과에 근무했었고, 지금은 플리머스에서 탐정사무실을 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 때문에 고용되어 온 겁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누구에게?」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에게지요. 비용으로 꽤 많은 액수의 송금 수표가 함께 들어 있었고 용건이 편지에 씌어 있었습니다. 손님으로 꾸미고 오도록 지시되어 있었던 거지요. 여러분들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지켜 보는 게 내 임무였습니다.」
「그 까닭이 씌어 있었소?」
블로어는 내뱉듯 말했다.
「오윈 부인의 보석입니다. 그런데 오윈 부인이라는 여자는 있지도 않군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의 추리는 올바르다고 생각하오. Ulick Norman Owen! 미스 브랜트의 편지를 보면, 휘갈겨 써서 잘 모르겠지만 세례명은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소―Una Nancy요. 어느쪽이나 모두 같은 머리글자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소. Ulick Norman Owen―어느쪽이나 머리글자만 취하면 UN Owen이오. 좀더 머리를 쓰면 곧 알 수 있소. NKNOWN(어디의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에요!」
판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소.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머리가 돈 사람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거요. 틀림없이 위험을 즐기는 살인광이겠지!」
처벌받지 않은 범죄
한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불안과 곤혹의 침묵이었다. 판사의 낮고 잘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럼, 우리들의 조사는 다음 단계로 들어가오. 그러나 그전에 나 자신의 일을 이야기해 두겠소.」
그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 편지는 나의 옛벗 콘스턴스 캘민턴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소. 나는 그녀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소. 그녀는 근동에 가 있을 거요. 이 요령부득한 편지의 내용은 그녀의 글씨체와 흡사하오.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도 갑작스럽고, 이곳 주인 부부일도 이 편지로는 잘 모르겠소. 여러분에게 온 편지와 같은 구실이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편지들로부터 하나의 흥미로운 결론이 나오지요. 우리를 여기로 불러모은 게 누구든, 그는 우리들을 잘 알고 있거나 또는
자세하게 조사한 게 틀림없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콘스턴스 캘민턴 사이의 교우 관계를 알고 있소. 그리고 그녀가 잘 알아볼 수 없는 편지를 쓴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소. 암스트롱 의사의 동료에 대한 일을 알고 있고,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소. 머스턴의 친구에 대해서도, 그가 어떤 전보를 치는지도 알고 있소. 미스 브랜트가 2년 전 어디서 휴가를 보냈으며 거기서 어떤 사람과 만났는지 정확히 알고 있소. 매커서 장군의 옛 벗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소.」
판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처럼 그는 우리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죄를 물으려 하는 거요.」
매커서 장군이 큰소리로 외쳤다.
「근거가 없소!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베러가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숨결이 가빠져 그녀는 겨우 그 말만 했다.
로저스가 메마른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당치도 않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아내도….….」
앤터니 머스턴의 목소리는 부르짖는 듯이 들렸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판사는 한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하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소. 이 수수께끼의 고발자는 내가 에드워드 시튼이라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소. 나는 시튼을 잘 기억하고 있소. 1930년 6월에 피고로 내 앞에 나타났던 사나이였소.
어떤 연상의 부인을 죽였다는 혐의였소. 꽤 유능한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고, 증언대에서의 증언도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소. 그러나 증거를 조사해 보니 확실한 유죄였소. 그래서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고, 배심원들도 유죄 판결을 내놓았소. 나는 그 판결을 승인하고 사형을 선고했소. 공판이 피고에게 불리해지도록 유도되었다는 이유로 공소가 제기되었으나 기각되고 예정대로 사형이 집행되었소. 나는 여러분 앞에 확실히 말해 두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나도 없소. 나는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오. 정당한 판결을 받은 범인에게 사형 선고한 것에 지나지 않았소.
암스트롱은 그 사건을 생각해 냈다. 시튼 사건이다!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뜻밖으로 여겨졌다.
공판이 열리고 있던 때인 어느 날, 그는 변호사인 매슈즈와 함께 식사를 했었다. 매슈즈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판결은 정해져 있소. 9할이 무죄요.」
그 뒤 그는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다.
「판사가 적의를 품고 있었으므로 배심원을 유도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워그레이브에게 실수가 있을 리 없다.」
「그는 피고에게 개인적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즈음의 기억이 주마등같이 암스트롱의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말해 보았다.
(당신은 시튼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공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겠지요!)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눈이 암스트롱을 지그시 보았다.
판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물론 공판이 시작될 때까지 시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소.」
암스트롱은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거짓말하고 있다. 틀림없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러 크레이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두고 싶어요. 그 아이 일인데요. 시릴 해밀턴 말예요. 나는 그 아이의 가정교사였어요.
그 애는 멀리까지 헤엄쳐 나가면 안 된다고 일러두었는데도, 어느 날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앞바다로 헤엄쳐 나갔어요. 나는 곧 뒤따라 헤엄쳐 갔어요….…따라갈 수 없었어요. 무서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내 죄는 아니예요.
검시관은 나를 심문하고 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리고 그 애 어머니도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요? 너무해요! 왜 그런 말을….….」
베러는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매커서 장군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울 필요없소. 물론 사실이 아니오. 미치광이가 하는 말이오. 미쳐 있는 거요! 정말 미쳐 있는 거요!」
장군은 노여움으로 어깨에 불끈 힘을 주며 일어섰다. 그는 부르짖듯 말했다.
「그런 말을 귀에 오래 담아둘 수는 없소! 그러나 나는 한마디 해두고 싶소. 아서 리치먼드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이오. 리치먼드는 내 부하 장교였소. 나는 그를 정찰하러 내보냈소. 그리하여 그는 전사했소. 전쟁 때 흔히 있는 일이오. 그런데 내 아내에게까지 오명을 뒤집어씌우다니! 아내는 훌륭한 여자였소! 군인의 아내로서 모범적인 여자였소!」
매커서 장군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비틀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련한 표정이었다.
롬버드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그 토인들 말인데….….」
머스턴이 말했다.
「어떤 사정이었소?」
필립 롬버드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이오. 나는 토인들을 놓아둔 채 달아났소. 자신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오. 우리는 정글 속에서 길을 잃었소. 나는 두 친구를 꾀어 남은 식량을 갖고 도망쳐 나왔소.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요.」
매커서 장군이 격렬하게 말했다.
「토인들을 모르는 체 내버려두었단 말이오? 식량을 모조리 훔쳐내어 굶어 죽게 했단 말이오!」
「신사적인 행동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자신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첫째가는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토인들은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와는 다르니까요.」
베러는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롬버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버렸단 말인가요?」
롬버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지요.」
앤터니 머스턴이 당혹한 듯 말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던중이었는데, 존과 루시 캠즈는―내가 케임브리지에서 자동차로 치어 죽인 어린아이들일 거요. 운이 나빴던 거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차갑게 말했다.
「자네 말인가, 아니면 어린아이들 말인가?」
「내 운이 나빴던 거지만 당신 말씀대로 그들도 운이 나빴습니다. 물론 진짜 사고였습니다. 갑자기 뛰어들어왔거든요. 운전면허증을 1년 동안 압수 당하고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암스트롱 의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속력을 너무 내는 것은 좋지.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교통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거요.」
앤터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스피드 세상이잖습니까. 영국의 도로가 돼먹지 않았습니다. 속력다운 속력을 낼 수 없으니까요.」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기가 마시던 글라스를 찾아내 테이블에서 집어 들고 사이드 테이블로 걸어가 위스키와 소다수를 섞었다. 그리고는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아무튼 내 죄는 아니야. 사고에 지나지 않았어!」
하인 로저스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두 손을 비비며 자못 겁에 질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롬버드가 말했다.
「말하시오, 로저스.」
로저스는 헛기침을 하고 메마른 입술을 다시 한 번 혀로 축였다.
「아까 우리 부부 이름도 나왔습니다. 블레이디님 일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우리는 블레이디님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지냈었습니다. 우리가 고용되기 전부터 건강이 몹시 나빠 있었지요.
그날 밤―블레이디님의 용태가 갑자기 나빠졌던 날 밤 태풍이 불었습니다. 전화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태풍 속을 걸어 의사를 부르러 갔었는데,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나무랐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 한마디도….….」
롬버드는 하인의 비틀린 표정과 바싹 마른 입술과 눈에 떠오르는 공포를 지그시 지켜 보았다. 그리고 커피 쟁반을 떨어뜨렸을 때의 소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가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블로어가 입을 열었다. 용의자를 심문할 때와도 같은 말투였다.
「그렇지만 그 노파가 죽은 다음 적은 돈이나마 갖게 되었을테지. 그렇잖소?」
로저스는 몸을 굳히며 말했다.
「블레이디님은 우리들이 충실하게 모신 것을 인정하시어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게 나쁜 일입니까?」
롬버드가 말했다.
「당신 일은 어떤 것이었소, 블로어 씨?」
「내 일?」
「당신 이름도 리스트에 들어 있었지요.」
「랜더의 일 말이로군. 은행 강도였소. 런던 상업은행이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소. 내가 다룬 사건은 아니었지만 잘 기억하오. 랜더는 당신이 제출한 증거에 의해 유죄가 되었지요. 그 사건을 다룬 게 당신이었소?」
「그렇습니다.」
「랜더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중 1년 뒤 다트무어 감옥에서 죽었소. 몸이 몹시 약한 사나이였소.」
「나쁜 녀석이었지요. 방범대원을 죽인 것도 그 사나이입니다. 확실한 사건이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 사건으로 표창을 받았었지, 아마.」
블로어는 내뱉듯 말했다.
「승진했지요.」
그리고 넉살좋은 태도로 덧붙였다.
「어쨌든 나는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별안간 롬버드가 웃었다. 방안에 울려 퍼지는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그는 말했다.
「모두들 의무에 충실하고 법률을 잘 지키는 이들뿐이잖은가! 나는 예외지만. 의사 선생, 당신은 어떻소. 직업상의 조그만 과실이었겠지요. 그렇잖으면 비밀스러운 수술이라도 했소?」
에밀리 브랜트가 혐오의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롬버드를 한 번 쏘아보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암스트롱 의사는 침착하게 머리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걷잡을 수 없군.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오. 뭐라고 했던가요? 크리스였던가요, 크로스였던가요―그런 이름을 가진 환자를 진찰한 적도, 죽는 걸 본 일도 없소.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오.
물론 오래된 일로,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인지도 모르지요. 병원에는 이미 손쓸 수 없이 중태가 되어 오는 환자가 많으니까요. 그런 환자가 죽으면 언제나 의사의 실수로 여기지요.」
그는 머리를 흔들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무렵의 일을 생각했다. 취해 있었다….…취하여 수술했던 것이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자기가 죽인 것이다. 나이든 여자였다. 맑은 정신일 때라면 간단한 수술이었다.
다행히 자기네 직업인들은 서로 비밀을 폭로하지 않는다. 간호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받은 충격도 꽤 컸다. 마음을 굳게 가져야지. 그러나 아무도 알 리 없다. 먼 옛날 일이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모든 사람들이 슬그머니 또는 똑바로 에밀리 브랜트를 지켜 보았다. 모두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그녀가 느낀 것은 그로부터 1,2분 지나서였다. 양미간이 좁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가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나요? 나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어요.」
판사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소?」
「없어요!」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판사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게 없소?」
에밀리 브랜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없어요. 나는 언제나 양심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어요. 숨길 일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그런 일로 마음이 움직여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판사는 두 번쯤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것으로 일단 끝내기로 합시다. 그런데 로저스, 이 섬에 우리들 말고는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말했다.
「이 저택의 수수께끼 같은 주인이 왜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했는지 나는 아직 그 참뜻을 알 수 없소. 그러나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든 내 의견으로는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라고 보오.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르오. 한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가장 좋겠소. 오늘 밤에라도 이 섬을 떠나도록 합시다.」
로저스가 말했다.
「그러나 이 섬에는 배가 없으므로….….」
「한 척도 없는가?」
「없습니다.」
「육지와 어떤 방법으로 연락하나?」
「프레드 내러컷이 아침마다 빵과 우유와 우편물을 가져다 주고는 이쪽 부탁을 듣고 갑니다.」
「그럼, 내일 아침 내러컷의 배가오면 돌아가기로 합시다.」
모두들 찬성했으나 한 사람만은 반대였다. 그것은 앤터니 머스턴이었다.
「얼마나 용기없는 짓입니까. 가기 전에 수수께끼를 풀지 않겠습니까? 마치 미스터리 소설같이 스릴넘치고 재미있군요.」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나만큼 나이먹으면 스릴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없어지네.」
앤터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법률에 얽매여 사는 생활은 답답합니다. 나는 범죄를 예찬합니다! 범죄에 건배합시다!」
그는 글라스를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셨다.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괴로운 듯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보라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뱉아 내듯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서 미끄러 떨어져 글라스가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