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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스크랩 학이편 제6장~제8장 해설
설중매 추천 0 조회 76 11.08.27 14: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6장>

子ㅣ 曰弟子ㅣ 入則孝하고 出則弟하며 謹而信하며 汎愛衆호대 而親仁이니 行有餘力이어든 則以學文이니라

공자가 가라사대, 제자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쁘게(믿게) 하며, 널리 무리를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하니,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곧 써 글을 배울지니라.

[본문 해설]
『소학』에 보면, “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 行有餘力 誦詩讀書 詠歌舞蹈 思罔或逾(어린이의 공부 방법은 청소하고 응대하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순하며 행동에 혹 어그러짐이 없고, 행동(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며 시를 외고 글을 읽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생각에 혹 넘음이 없어야 하느니라)라고 하여 『논어』의 이 문장을 일부 인용하여 실천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謹者는 行之有常也ㅣ오 信者는 言之有實也ㅣ라 汎은 廣也ㅣ라 衆은 謂衆人이라 親은 近也ㅣ라 仁은 謂仁者라 餘力은 猶言暇日이라 以는 用也ㅣ라 文은 謂詩書六藝之文이라 ○程子ㅣ 曰爲弟子之職하고 力有餘則學文이니 不修其職而先文이면 非爲己之學也ㅣ라 尹氏ㅣ 曰德行은 本也ㅣ오 文藝는 末也ㅣ니 窮其本末하야 知所先後면 可以入德矣라 洪氏 曰未有餘力而學文이면 則文滅其質이오 有餘力而不學文이면 則質勝於野ㅣ라 愚는 謂力行而不學文이면 則無以考聖賢之成法하고 識事理之當然하야 而所行이 或出於私意니 非但失之於野而已니라

근이라는 것은 행실의 떳떳함이 있음이오, 신이라는 것은 말의 실제가 있음이라. 범은 넓음이라. 중은 무리를 이름이라. 친은 가까움이라. 인은 어진 자를 이름이라. 여력은 여가 날을 말함과 같음이라. 이는 씀이라. 문은 시서육예(시경, 서경, 禮-예절, 樂-음악, 射-활쏘기, 御-말타기, 書-글, 數-셈)의 문이라. ○정자 가라사대 제자의 직분을 다하고 힘이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니 그 직분을 닦지 아니하고 글을 먼저 하면 몸을 위한(사람이 되고자 한) 학문이 아니라. 윤씨 가로대 덕행은 근본이오, 문예(문장과 재주)는 끝이니 그 본말을 궁구해서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가히 써 덕에 들어가리라. 홍씨 가로대 남은 힘이 있지 아니한대 글을 배우면 곧 글이 그 바탕을 멸하고, 남은 힘이 있는데도 글을 배우지 아니하면 질박함이 이겨서 촌스러워지느니라(투박해지느니라). 우는 이르되 행실에 힘쓰고 글을 배우지 아니하면 곧 써 성현의 이룬 법을 상고하고 사리의 당연함을 알지 못하여 행하는 바가 혹 사사로운 뜻에서 나올 것이니 다만 투박한 데서 잘못될 뿐만이 아니니라.


<제7장>

子夏ㅣ 曰賢賢호대 易色하며 事父母호대 能竭其力하며 事君호대 能致其身하며 與朋友交호대 言而有信이면 雖曰未學이라도 吾必謂之學矣라 하리라

자하 가로대 어진 이를 어질게 하되 색을 바꾸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그 몸을 버리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믿음을 두면 비록 가로대 배우지 아니했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르리라.

[본문 해설]
色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색을 말한다. 아름다운 색의 꽃을 좋아함은 물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모두 색을 좋아하는 것이다. 색동, 색정은 모두 사람의 감정 표시인데 그 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어진 이를 좋아하는데 바꾼다는 뜻이다.

子夏는 孔子弟子니 姓은 卜이오 名은 商이라 賢人之賢호대 而易其好色之心이면 好善有誠也ㅣ라 致는 猶委也ㅣ니 委致其身은 謂不有其身也ㅣ라 四者는 皆人倫之大者요 而行之必盡其誠이니 學求如是而已라 故로 子夏ㅣ 言有能如是之人이면 苟非生質之美라도 必其務學之至이니 雖或以爲未嘗爲學이라도 我必謂之已學也ㅣ라 ○游氏 曰三代之學은 皆所以明人倫也ㅣ니 能是四者면 則於人倫에 厚矣니 學之爲道ㅣ 何以加此리오 子夏ㅣ 以文學名이나 而其言이 如此면 則古人之所謂學者를 可知矣라 故로 學而一篇은 大抵皆在於務本이라 吳氏 曰子夏之言이 其意善矣라 然이나 詞氣之間에 抑揚太過하고 其流之弊ㅣ 將或至於廢學이니 必若上章夫子之言然後에 爲無弊也ㅣ리라

자하는 공자 제자이니 성은 복이오 이름은 상이라. 사람의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그 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면 선을 좋아함에 성실함이 있느니라. 치는 버림과 같으니 그 몸을 버려서 그 몸을 두지 않음을 이름이라. 네 가지는 모두가 인륜의 큰 것이고 행함에 반드시 그 성실함을 다하는 것이니 배워서 구한다는 것은 이와 같을 뿐이라. 그러므로 자하가 말하기를 능히 이와같은 사람이 있으면 진실로 나면서 바탕이 아름답지 아니하더라도 반드시 그 학문에 힘씀이 지극할 것이니, 비록 어떤 사람이 일찍이 배우지 아니했더라도 나는 반드시 이미 배웠다 이르리라. ○유씨 가로대 삼대(하 은 주)의 학문은 다 써 인륜을 밝힌 바이니 이 네 가지에 능하면 인륜에 후중할 것이니 학문하는 도가 어찌 써 이에 더하리오. 자하가 문학으로써 이름을 냈으나 그 말이 이와 같으면 곧 옛 사람의 이른바 배운 것을 알만하니라. 그러므로 학이 한편은 대저 다 근본을 힘쓰는데 있느니라. 오씨 가로대 자하의 말이 그 뜻이 선함이라. 그러나 말의 기운 사이에 억양(누르고 고양시키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그 흐르는 폐단이 장차 혹 학문을 폐하는 데 이를 것이니 반드시 윗장 부자의 말씀과 같이 한 연후에 폐단이 없으리라.

<제8장>

子ㅣ 曰君子ㅣ 不重則不威니 學則不固ㅣ니라

공자 가라사대 군자가 후중하지 아니하면 위엄하지 아니하니 배우면 견고하지 못하니라.

重은 厚重이오 威는 威嚴이오 固는 堅固也ㅣ라 輕乎外者는 必不能堅乎內라 故로 不厚重이면 則無偉嚴하야 而所學이 亦不堅固也ㅣ라

중은 후중이오, 위는 위엄이오, 고는 견고함이라. 밖에서 가벼운 자는 반드시 안에서 견고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중하지 아니하면 (밖으로) 위엄이 없어 배우는 바가 또한 견고하지(성실하지) 못하니라.

主忠信하며

충신으로 주장하며

[본문 해설]
안으로 충성하며 밖으로는 믿음을 두는 것, 中心 곧 忠을 體로 삼고 信을 用으로 하라는 뜻이다.

人不忠信이면 則事皆無實이니 爲惡則易오 爲善則難이라 故로 學者ㅣ 必以是爲主焉이니라 ○程子ㅣ 曰人道는 惟在忠信이니 不誠이면 則無物이오 且出入無時하야 莫知其鄕者는 人心也ㅣ니 若無忠信이면 豈復有物乎아

사람이 충성되고 미쁘지 못하면 곧 일이 다 실제가 없으니 악함을 하는 데는 쉽고 선을 함에는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반드시 이로써 주장을 삼느니라. ○정자 가로대 사람의 도리는 오직 충신에 있으니 성실하지 아니하면 물건이 없고 또한 출입에 때가 없어서 그 향함(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람 마음이니 만약 충신이 없으면 어찌 다시 물건이 있으랴!

鄕 : 시골 향, 여기서는 ‘향할 향’

無友不如己者ㅣ오

(벗을 사귐에) 자기만 같지 못한 자를 사귀지 말고,

[본문 해설]
『논어』계씨편에서 공자는 '유익한 벗이 셋이오, 해로운 벗이 셋이라. 곧은 사람과 벗하고, 신실한 사람과 벗하고, 견문이 넓은 사람과 벗하면 유익하고, 편벽한 사람과 벗하거나 굽실거리기를 잘하는 사람과 벗하거나 빈말 잘하는 사람과 벗하면 해로우니라 (益者三友요 損者三友니 友直하며 友諒하며 友多聞이면 益矣요 友便하며 友善柔하며 友偏이면 損矣니라)'고 하였다. 곧 좋은 벗이란 마음으로 배우고, 행동으로 배우고, 학문으로 배울 수 있는 벗을 말한다.

無는 毋로 通하니 禁止辭也ㅣ라 友는 所以輔仁이니 不如己則無益而有損이라

무는 ‘말다’로 통하니 금지하는 말이라. 벗은 써 어짊을 돕는 바이니 자기와 같지 못하면 유익함이 없고 손해만 있느니라.

[앞주해설]
『논어』안연편에 “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이라”(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느니라)하였다.

過則勿憚改니라

허물이어든 고침을 꺼리지 말지니라.

勿은 亦禁止之辭라 憚은 畏難也ㅣ라 自治不勇이면 則惡日長이라 故로 有過면 則當速改요 不可畏難而苟安也ㅣ라 程子ㅣ 曰學問之道는 無他也ㅣ라 知其不善이면 則速改以從善而已니라 ○程子ㅣ 曰君子ㅣ 自修之道는 當如是也ㅣ라 游氏 曰君子之道는 以威重爲質하야 而學以成之요 學之道는 必以忠信爲主하야 而以勝己者로 輔之라 然이나 或吝於改過면 則終無以入德하야 而賢者未必樂告以善道라 故로 以過勿憚改로 終焉이라

물은 또한 금지하는 말이라. 탄은 두려워하고 어려워함이라. 스스로 닦는데 용감하지 못하면 악이 날로 증가함이라. 그러므로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속히 고치고, 가히 두려워하고 어렵다고 하여 구차히 편안히 해서는(안주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정자가 가라사대 학문의 도는 다른데 없느니라. 그 불선함을 알면 속히 고쳐서 써 선을 따를 뿐이니라. ○정자 가라사대 군자가 스스로 닦는 도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느니라. 유씨 가로대 군자의 도는 위엄과 후중으로써 바탕을 삼아 배워서 써 이루는 것이오, 배움의 도는 반드시 충신으로써 주를 삼아 나보다 나은 자로써 보필을 삼느니라. 그러나 혹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면 마침내 써 덕에 들어감이 없어서 현자가 반드시 선도로써 고함을 즐거워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허물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것으로써 마쳤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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