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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24:1-34) 장동건, 이건희, 예수님 중 누가 부럽나?
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5.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6.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7.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8.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9.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중심으로 <장동건, 이건희, 예수님 중 누가 부럽나?>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장동건씨 이건희씨 그리고 예수님 중에 누가 부럽나?'라고 물어보면 솔직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꼭 대답을 강요하는 질문 같아서, 그 질문에 강압당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얘기하면 아무도 안 부러운 경우가 많을 겁니다. 장동건씨 잘 생겼습니다. 톱클래스의 배우가 되어서 아름다운 고소영씨와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부러워하려면 부러워하겠지만 그렇게 실감나게 부럽지 않아요. 이건희 회장님 다시 복귀했더라고요. 부러워해야 하지만 그렇게 실감나게 부럽지 않습니다. 예수님 특별히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하늘의 지혜를 쉽게 풀어내시는 예수님, 그러한 예수님의 면모에 대해서는 목사님들 중에서 부러워하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누가 부러워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이일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하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모습을 위해 오셨는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 그 모습을 부러워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냥 그 분께서 나를 위해서 어린 양이 희생하듯이 희생했으므로 내 죄가 사함받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으신 예수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부러운 예수님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4장 1절에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라는 것은 여러 번 우리가 접하게 되는 구절입니다.
도대체 '부러워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악인이라고 하는 것도 꼭 살인하고 도둑질 한 악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등쳐먹고 사기치고 내게 원수가 된 악인만 아니라, 포괄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건성으로 잘못 알거나 잘못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악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형통할 때에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왕왕 부러워할 수도 있을 일들이 일어난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부러워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정도의 일들이, 그러한 형통함 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에요. 그때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장동건씨 그렇게 부러워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건희씨 부러워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너무 거리가 멀어요. 이건희씨는 안 부러운데 제가 기억나는 모 교회에서 부사역자로 섬기고 있을 때, 심방을 가는데 구역장 되시는 권사님이 못 보던 차를 타고 나오셨어요. 그래서 이게 무슨 차냐고 했더니 롯데 백화점에서 경품 추첨을 했는데 당첨이 되었데요. 그래서 새 차를 타고 오셨는데 되게 부럽더라고요. 지금의 소나타에요. 그 소나타를 경품으로 받아서 풀 옵션 된 차를 몰고 나오셨는데 부러워요. 그리고 목회할 때 옆 교회에서 옆 교회의 교인이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어요. 하여간 십일조를 이십만 불을 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짜리 로또가 당첨이 되었나 봐요? 마음이 뜨끈뜨끈 하던데요. 마음이 달라요.
이건희씨가 부럽다는 생각은 마음에 생기지를 않지만, 만약에 백대 재벌 중에 내가 속했다고 하면 이건희씨가 부럽겠지요. 우리나라 백대 기업 중에 사장님이라면 한 15번째라든지 40번째라든지 그러면 부러울 수 있겠지요. 부럽다고 하는 것, 동서네 집에 조카아이가 서울대 들어갔습니다. 이게 안 부러울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대한민국의 엄마 중에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수출하는데 환율 때문에 그냥 앉아서 돈을 법니다. 앉아서 백억을 벌었어요. 이것 부럽지 않을 사장님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다 부럽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뭘 부러워하느냐? 형통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형통은 내가 뜻하는 바대로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게 될 때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뜻하는 바가 뭡니까? 대표적인 것이 승진, 돈, 육체의 건강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치라는 것은 그런 거예요. 승진하고 돈 많이 벌고 자손들 잘 되고 건강하고 돈 많고 그게 다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부러워 하는 것은 우리가 뜻하는 바도 지금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뜻하는 바가 똑같으면 그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악인이 꼭 악한 범죄를 행한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포괄적으로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뜻하는 바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 가치관의 서열을 따라서 자기가 최고라고 느끼는 현실에서 지금부터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뛰어 갈 때, 그것을 이루면 형통한다고 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몽골이나 인도에서는 땔감이 넉넉지 않으니까 말린 소똥이나 말린 말똥을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떡을 굽거나 음식을 만들 때도 소똥을 땔감으로 해서 음식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 3,000마리가 문 앞에 와서 똥을 잔뜩 누고 갔습니다. 땔감이 말할 수 없이 많아졌어요.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에서 야! 정말 부럽다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누가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옆집, 맞은편에 사는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한 3일 잠이 안 와요. 왜 나는 안 되느냐? 로또 아니라도 정말 자동차 경품 외제 차 한 대 경품으로 받아서 BMW를 타고 다닌다면 당장 나도 그 마트에 가서 필요 없는 물건을 사면서 경품권을 받습니다. 이게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가치관을 가지고 뜻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인데 무엇을 뜻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부러워하는가 보면 압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적인 형통을 부러워 할 뿐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나가 있느냐? 아예 부러워하고만 있지 말고 나도 할 수 있다. 왜 패배주의적 생각을 갖고 그렇게 머뭇머뭇하느냐? 우리도 뛰쳐나가면 가능하다. 더군다나 우리는 능력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업해 주고 계시니까 일어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라는 좋은 구절이잖아요.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인과 악인이 똑같이 돈을 뜻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돼요? 의인도 돈을 뜻하고 있고 악인도 돈을 모으려고 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백업해 주시니까, 부러워하고만 있을 게 아니고 이건희씨를 부러워하고만 있지만 말고, 너도 이건희씨 처럼 될 것을 비전으로 삼으라. 하나님이 너를 밀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자들이 뜻하는 바를 우리도 같이 뜻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뜻하는 대로 이루면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느냐? 부러워하지 않느냐? 나를 보면 내 믿음이 가짜냐? 진짜냐를 우리 스스로에게 확인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악인, 우리가 느끼는 뉘앙스의 악인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형통이란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형통은 뭡니까? 십자가에 달린 주님 그 분이 부러워지면 이제 형통을 위한 준비가 비로소 된 거예요. 십자가에 달려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이 부러워지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이제 형통의 출발점에 와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부럽지 않고서는 아직 형통이 뭔지 맛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통이란, 내가 뜻하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뜻한바 대로 이루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형통입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려 뭐라고 하십니까?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는 이게 바로 형통입니다.
‘내가 만사에 형통하였다.’라는 뜻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형통이라는 게 없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미 악인의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관점을 갖고 있는 상태를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형통을 네가 부러워하느냐? 그러면 너는 지금 문제가 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게 참 믿음이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것 하나님의 뜻하는 바대로 내 삶에서 나타나야 형통이지. 어떻게 내가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게 형통이겠습니까?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하는 바가 내게 재물을 주시는 것일 수 있어요. 내게 승진을 주시는 것일 수 있어요. 아름다운 미모를 주시는 것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렇고, 이것을 보며 불통과 형통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 선교를 위해 애를 쓸 때 불통됩니다. 그런데 꿈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불러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아시아에서의 선교를 막은 것이 불통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게 아니라서 하나님이 막으셨고 아시아 선교가 안 되었다면 사도바울은 오해해서 아시아를 선교하려 했지만 사도바울 뜻대로 안 되었어도 형통이라는 겁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아요. 내 뜻한 바와 세상 사람들이 뜻하는 바는 다 건강하기를 원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다리를 부러뜨리시고 눕혀 놓으신 다음에 그 침상에서 뭔가 하나님과 함께 깊이깊이 이루실 일이 있어서 영적교제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다리 부러져 병원에 입원한 것이 이게 형통입니다. 불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돈을 많이 번다고 이게 형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깜깜한 불통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부럽다는 것은 내가 그 자리에 섰으면 하는 거예요. 그 사람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열 네 다섯 살 되는 우리 소녀들, 스물 한 두 살 되는 아가씨들 얼마나 자기 외모에 신경을 씁니까? 다리가 긴 것, 이것 노력한다고 되는 것 아니잖아요. 아름다운 각선미,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부러워합니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 좋겠다. 저 다리의 임자라면 좋겠다. 그 입장에 서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게 뭐예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입장에 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전혀 안 부러워요. 왜 그렇습니까? 이건희씨가 부러운 것은 이건희씨가 돈이 많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안 부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렇지요? 장동건씨가 부러운 것은 그의 외모가 너무나 잘 생겨서 미모가 많기 때문에 부럽습니다. 예수님을 부러워 할 게 없어요. 내가 갖고 싶은 것 중에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이 없으니까 안 부러워요.
도대체 여러분이 갖고 싶은 게 뭡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안 부러운 이유는 십자가라는 극한 형벌을 수용하시면서 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께는 많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그렇게 이 현실이 어렵고 힘든 현실을 아버지가 허락하신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을 만큼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믿음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싶어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부럽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크기,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열망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서 바보같이 사셨습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바보 같으시지요. 그 능력을 가지고도 돈 버는 데 안 사용하시고 자식 키우는데 안 사용하시고 결혼하는데 안 사용하시고 승진하는데 안 사용하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만 이루어 드렸어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이 제일 부럽지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안 부러워요. 그냥 그 분께는 고마운 예수님, 좋은 예수님, 좋으신 예수님. 왜 좋으신 예수님? 내가 부러워 할 일들을 이루어 주시니까 좋다는 거예요. 정작 그 예수님이 부럽지는 않다는 겁니다.
이러고도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지요. 옆의 교회 교인이 로또에 당첨되어서 십일조 이십만 불 냈다고 하니까 당장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이런 놈이에요. 부러워요. 마음이 뜨끈뜨끈해지더라고요. 성령의 뜨끈뜨끈함이 아니에요. 정말 돈이 사람을 뜨끈뜨끈하게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내 원수가 잘못되었을 때 기뻐하지도 말라"라는 겁니다. 잘못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 예를 들어 원수가 사업이 망했는데 내가 기뻐한다. 그게 뭐예요? 그 기쁜 이유가 뭡니까? 나도 돈을 좋아하니까. 그 사람이 돈을 못 버는 게 기쁜 겁니다. 원수니까. 동전의 앞뒤에요.
여러분! 정리하고 마칩시다. 장동건씨가 부럽습니다. 왜요? 미모가 많고(미모가 많다는 것은 어법상 맞지 않아요. 그런데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재산도 많데요. 그래서 장동건씨 고소영씨 재산 합치면 얼마가 될까? 그런 것 계산하더라고요. 이건희씨가 돈이 많아요. 이명박씨가 정말 시골 출신이 대통령이 되셨어요. 출세가 많아요. 승진이 많아요. 부러워요. 예수님은 안 부러워요.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 많아요. 그런데 안 부러워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많이 이루어 드렸어요. 그런데 안 부러워해요. 그래서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부럽고 그 자리에 내가 서고 싶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가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왜 우리 중에는 이건희씨가 없느냐? 왜 교인 중에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처럼 항공회사 하나 갖는 사람이 없냐? 그러면 외국여행가고 당회에서 괌으로 가서 당회를 한다고 하면 싸게 해주고 그럴 텐데? 왜 없느냐? 우리도 이루자.’라고 하는데 이건 아니에요. 믿는 사람 중에 이건희씨 같은 분이 나오고 장동건씨 같은 분이 나오고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말고 제3의 항공회사 사장님이 나오고 대통령이 나오고 내가 대통령이 되던 옆집에서 대통령이 되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러워야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좋은 예수님일 뿐 아니라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그 정도로 하나님아버지의 뜻만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러기를 부러워하는 그러한 참된 형통을 부러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아버지의 자녀요. 하늘 백성들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부러워하십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은 좋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은혜의 예수님이시오. 구주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라는 극형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만을 쫒아갔던 그 예수님을 부러워해 본적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 갈 때에 십자가에 달린 주님 생각하면서 나도 저렇게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부러워 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