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곧 자성을 보아[見性]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자성, 즉 불성(佛性)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그리고「열반경」에서는 중도(中道)를 불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견성한다는 것은 중도를 바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는 그 말씀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불하려고 하면 자성을 바로 보아야 되는데 자성이란 곧 중도이므로 중도를 바로 깨쳐야 견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을을 알아서 자성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룬다.
識心見性하야 自成佛道이니라 [六祖壇經]
「육조단경(六組壇經)」을 보면 견성을 종취로 하여 법을 설했습니다. 그 중심사상은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인데 마음을 안다는 것이 견성한다는 것이고 견성한다는 것은 마음을 안다는 것이니 마음 다르게 성품이 없고 성품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진여심(眞如心)을 말하고 성품이란 불성(佛性)을 말합니다. 또 진여심이란 유·무를 여윈 중도를 아는 것이며 중도를 본 사람이 부처님 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즉시 확철대오하여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는다.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니라 [六祖壇經]
누구나 공부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다든가 무슨 기연을 만나 어떤 기회에 즉시로 크게 깨친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이지 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같이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 즉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本有佛性]을 얻는 것이지 깨쳤다고 해서 딴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있는 물건을 도로 찾았을 뿐입니다. 육조스님도 "내가 5조 홍인화상 밑에서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서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찰나간[頓]이란 시간 간격을 두지 않는 눈 깜짝할 사이를 말합니다.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무념이다. 무념법을 깨치면 만법을 두루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모든 부처님 경계를 보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요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이고 卽時無念이니라... 悟無念法하면 萬法을 盡通이요 悟無念法者는 見提佛境界요 悟無念法者는 支拂地位니라
[六祖壇經]
여기서 말하는 무념(無念)은 제8아뢰야의 망념까지도 다 떨어진 구경의 진여무념입니다. 따라서 견성이란 해탈이라고도 하고 반야삼매라고도 하고 무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불(成佛)을 말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부처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이고 부처님 지위에 이른 것이니 결국은 성불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견성하면 이것이 바로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그 다음에 성불을 한다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주장한다든가 선종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불교를 팔아먹는 대도적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 불교계에 이러한 견해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니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문은 부처님 마을을 알지 못하니 공정(公定)에 머물러 있다. 모든 보살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의 중생은 지위를 거치지 않고 찰나간에 본 을 깨친다.
聲聞은 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은 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요 上根衆生은 不歷地位하고 頓悟本性이니라 [馬祖語錄]
견성이 성불임을 강조하는 마조스님의 말씀입니다.
성문·연각이나 보살들이 공(公)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니[沈空滯寂], 즉 제8아라야 무기식(無記識)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상근(上根) 중생이 삼현·십지를 뛰어 넘어 자기 본성을 보게 되니 이것이 성불입니다.
침공체적(沈空滯寂)이란 멸진정(滅盡定)인 제8아뢰야의 지위를 말합니다. 흔히 성문승의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을 분리해서 보기도 하지만「능가경」같은 데에서는 8지보살 이상이 깨친 멸진정과 성문·연각이 깨친 멸진정이 제8아뢰야위라고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결국 양편이 다 침공체적이라는 큰 병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지보살이 구름이 일고 비기 쏟아지듯 설법을 하여도 오히려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으니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린 것과 같다.
十地成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야도 猶被佛呵호대 見性은 如隔羅穀이니라
[雲門·無業, 傳燈錄 19]
아무리 얇은 비단이라도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보면 정확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얇은 비단으로 보면 어렴풋이 무엇이 비칠지 모르지만 정확히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종문정전의 통칙 입니다. 구경각, 즉 여래지만이 견성을 성취한 것입니다.
보살이 십지에 올랐다 하여도 불성을 밝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하물며 성문·연각이리오. 있는 바 불성은 이렇게 깊고 깊어 알아보기 어려우나 오직 부처님만은 알 수 있느니라.
菩薩이 位階十地하야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어니 何況聲聞緣覺이리요.... 所有佛性은 如是甚深 難得知見하야 唯佛能知니라 [涅槃經 8]
구경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도 견성이 아닙니다.
보살지가 다하고 방편이 원만구족하여 일념에 상응하여 망심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쳐 마음에 처음 모양이 없으면 미세망념을 멀리 벗어난 까닭에 마음의 성품을 보아서 마음이 상주하니 구경각이라고 합니다.
如菩薩地盡하야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心無初相하면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하나니 名究竟覺이니라 [大乘起信論]
십지보살이 수도(修道)의 방편을 원만구족하여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벗어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구경각으로서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도 떠나며 또 십지·등각보살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명업상의 동념(動念)이 망념 가운데에서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한다. 이 미세망념이 모두 없어져서 영원히 남은 자취가 없으므로 멀리 떠난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떠난 때에는 정확히 부처님 지위에 머물게 된다.
業相動念이 念中最微細할새 名微細念이니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之時엔 正在佛地니라 [元曉·賢首, 起信論疏]
무명업상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서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이 없는 까닭으로 마음의 성품을 본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다시 나아갈 바가 없으므로 구경각이라 한다.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 [元曉·賢首, 起信論疏]
구경각을 성취하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지·등각은 아직도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묘각을 성취해야 되지만 견성이란 구경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성이 구경각이고 구경각이 성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선이나 교나 할 것 없이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열반경」에서는 십지보살은 견성을 하지 못했고 오직 부처님만이 견성하였다고 했고, 「기신론」에서도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현수대사나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같은 대논사들도 구경각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선·교를 망라한 불교의 정통사상은 견성이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여본성이란 어떤 것인가?
견성을 했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진여본성이란 어떤 것인가? 진여본성이란 억지로 말하려고 하니까 진여(眞如)라 하는 것이지 말로서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증(證)해서 깨쳐야만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진여·법계·심지(心地)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름이 있다고 무슨 물건이 있는 듯이 알면 큰 오해가 됩니다. 말로서는 진여라고 하지만 뜻은 오직 깨쳐야 알지 말로서 표현할 수 없고 형용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심오한 원리입니다.
마음의 성품인 근본자성은 항상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불변(不變)이라 하고, 진여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이 상응하지 못합니다.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무명이라 하고 미세한 망념을 떠남을 들어간다고 하니 미세한 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깨달음으로써 상응한다고 합니다.
미세망념인 무명업상의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았다고 말함은 곧 무념입니다. 그러나 망념의 구름이 덮여 있으면 진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망념이 다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는 생각까지도 끊어져서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지면 무명업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여를 깨친 것이며 무념을 성취한 것입니다.
무념(無念)을 성취한 사람은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주·이·멸이란 생멸(生滅)의 생·주·이·멸인 진여의 큰 작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주·이·멸 이대로가 무념이어서 일체가 공한 가운데에서 항사(恒沙)의 묘용(妙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멸의 생·주·이·멸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불의 지위를 과지(果地) 또는 과상(果上)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부처님 도를 수행하는 지위를 인지(因地)라고 합니다. 십지·등각까지도 인지(因地)라고 하며 부처님 지위만이 과지(果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깨치실 때에 제8아뢰야가 생기기 전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시니 이런 까닭으로 무념(無念)이라 말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卽本來淨故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결국 자성을 깨친다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8아뢰야 무기무념도 아닌 진여무념을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입니다. 진여무념을 깨치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고 성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생멸심·기멸심·망상이 그대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견성·성불했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불법에서 공인된 견성과 성불은 제8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뽑아버린, 근본 미세념까지도 뽑아버린 무념이라야 견성이고 성불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혜능스님이 말 끝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아니함을 크게 깨치고 5조 홍인대사에게 아뢰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일체만법을 능히 내는 줄 알겠습니까."
홍인대사는 혜능스님이 본성을 깨친 것을 아시고 혜능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를 배워도 이익이 없으며 본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를 조어장부·천인사·부처라 한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惠能이 言下에 大悟一切萬法이 不離自性하고 遂啓祖言호대 何期自性이 本自淸淨이며 何期自性이 本不生滅이며 何期自性이 本自具足이며 何期自性이 本無動搖며 何期自性이 能生萬法이리요 祖知悟本性하고 謂惠能曰不識本心하면 學道無益이요 若識本心見自本性하면 卽名丈夫天人師佛이라 하고 三更에 受法하니 人盡不知니라 [六祖壇經]
육조스님이 홍인대사의 말 끝에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서 건립(建立) 되어있어 일체 만법 이대로가 자성이고 자성 이대로가 일체만법 임을 확철히 깨치고 감탄하였던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자성이 본래 청정(淸淨)한 것을 몰랐는데 자성을 깨치고 나니 자성이 청정하더라는 놀라움과 감탄을 표현한 것입니다.
청정 자성을 아는 것이 견성이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에 삼십방을 맞아야 하는 청정'이라는 것입니다. 허공이란 본래 깨끗해서 무슨 때가 있을까마는 이 깨끗한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은 청정한 허공이라고 할지라도 청정이라는 상이 붙어 있을 것 같으면 진정한 청정이 아니므로 허공도 삼십방을 맞는 구경 청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자성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견성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경지를 어떻게 자성청정이니 견성이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체 망념이 다 떨어지면 자성청정이 안될 수 업으며 자성청정은 곧 무념인 것입니다. 청정한 자성을 깨치고 보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텅빈 것인가 하겠지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하고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공한 것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공한 가운데 무진묘용·항사묘용이 원만히 구족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업견(業見)으로 볼 때는 일체만법이 동요하고 있으나 자성을 깨친 정견(正見)으로 보면 진여대용이라서 일체만법이 구족해 있지만 추호의 동요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성이란 청정하고 생멸이 없고 일체가 구족하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일체만법이 건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진여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지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자성을 깨치지 못한 동시에 변견에 떨어진 외도입니다. 자성을 깨치면 이 사람이 곧 조어장부이며 천인사이며 부처이며 세존입니다.
견성이란 성불, 즉 구경각의 성취
이와 같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견성이란 성불, 즉 구경각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지 십지·등각·삼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나 교가에서나 어느 대법사, 대논사들도 구경각의 성취를 견성이라고 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구경각 아닌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외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느냐 하면 선종에 있어서든지 교가에 있어서든지 불교의 근본목표는 성불에 있는데 그 성불은 어디에 성립하느냐하면 견성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개 견성이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공부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으면 견성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지금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기는 폐단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든지 교학을 연구하든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정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되풀이 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