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따라가거나 집착하면 안된다
<17>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2
[본문] 암두(巖頭)선사가 말씀하였습니다. “경계(物)를 물리치는 것이 높음이 되고 경계(物)를 ?아가는 것이 낮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큰 법의 가장 으뜸이 되는 종지(大統綱宗)는 요컨대 모름지기 경지(境地: 句)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경지인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를 바른 경지(正句)라고 하며, 또한 최정상에 머문다고 하며, 또한 안주를 얻었다 하며, 또한 역역하다고 하며, 또한 성성하다고 하며, 또한 이러한 때(恁時)라고 합니다.
이러한 때를 가지고 일체의 시비를 다 깨뜨립니다. 막 이러하다고 하면 곧 이렇지 못합니다. 옳은 경지도 또한 제거하며 틀린 경지도 제거하여 마치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닿기만 하면 곧 다 타버립니다. 무엇이 있어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강설] 암두선사의 말씀을 두 가지 인용하였다. 첫째는 경계를 쫓아가는 것과 경계를 물리치는 것에 대하여 높고 낮음으로 표현하였다. 모름지기 참선납자는 어떤 경계든지 경계를 따라가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산중선정미위귀 대경부동시위난(山中禪定未爲貴 對境不動是爲難)이라고 하였다. 즉 산중에서 선정을 닦는 것은 귀한 것이 되지 않는다. 경계를 만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려움이 된다고 하였다. 수행자가 경계를 따라가고 집착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경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불교수행의 기본이다. 그래서 경계하신 말씀이다.
둘째는 큰 법의 가장 으뜸이 되는 종지(大統綱宗)는 요컨대 모름지기 경지(句)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선불교에서 어떤 경지(境地)를 구(句)로 표현하기도 한다.
활구(活句)니 사구(死句)니 일구(一句)니 하는 말도 그와 유사하다. 여기서 경지란 깨달음을 대신하는 궁극적 경지다.
깨달음을 대신하는 궁극적 경지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이기도 하고, ‘최정상에 머문’ 것이기도 하고, 제대로 ‘안주를 얻은 것’이기도 하고, 또는 ‘역역성성(歷歷惺惺)’ 등으로도 표현한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는 세상의 일체 시시비비와 일체 번뇌 망상이 다 끊어진 자리다.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큰 용광로와 같아서 아무 것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경지다.
간화선 공부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한다. 화두를 들면서 겨우 미지근해지다가 말고, 또 미지근해지다가 말고 하여 한 번도 뜨거운 기운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루가 가고 한철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일생이 간다면, 활활 타오르는 큰 용광로와 같아야 하는 간화선 공부와는 10만8000리다. 간화선은 꿈에도 보지 못한 것이다.
일체 시시비비 번뇌망상
끊어져 활활 타는 ‘용광로’
[본문] 요즘 사대부들이 흔히 사량하고 계교하는 것으로 굴택(窟宅)을 삼아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공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여깁니다. 그것을 비유하면 마치 배가 뒤집혀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강설] 일체 시비와 번뇌 망상이 다 끊어져서 마치 활활 타오르는 큰 용광로와 같아야 비로소 간화선 공부라고 말하면 평소에 사량과 계교와 망상으로써 집을 삼고 살 곳을 삼는 사대부들은 그것은 공(空)에 떨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어디서 공에 떨어지면 참다운 공부가 아니라는 말을 주어들은 것이다.
대혜 선사는 그와 같은 무리들을 비유하여 “배가 뒤집혀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공에 떨어지기는커녕 공은 맛도 보지 못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이 아니라 참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이상적인 “역역성성(歷歷惺惺)”한 마음상태라고 앞에서 말하였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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