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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7, 마 7:13-14,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 20.8.30, 박홍섭 목사
그리스도인은 말씀 안에서 팔 복의 사람으로, 빛과 소금으로, 사람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사는 천국의 백성들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육체와 더불어 여전히 죄 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신자와 함께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기에 피할 수 없는 재물의 문제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문제를 겪어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믿음의 기도로 이런 삶의 숙제들을 풀어가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산상수훈의 결론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7:7-12). 이 말씀은 구약성경과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이 내내 가르쳐온 이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당신의 삶으로 성취하고 온전히 드러내고 계시면서 이렇게 정리해주십니다.
13-14을 다시 보실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성도 앞에는 두 문과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문과 넓은 길입니다. 이 문은 들어가기 쉬운 문이고 들어가고 나서 걸어가기도 쉬운 길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하고 싶은 것 다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다 갈 수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릴 수 있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 문은 들어가기 위해 내려놓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 길은 가기 위해 손해 보거나 양보해야 할 일도 없습니다. 이 문과 이 길이 지향하는 기독교는 자유롭고 화려하며 매력적이기에 찾는 이가 많습니다.
또 하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걸어가는 길은 진리와 생명과 영원으로 연결되어,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버리게 하실 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들어가고 나서도 내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 풍조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버려야 하고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을 내려놓아야 하는 길입니다. 옆에 있는 넓은 문과 넓은 길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고 고달파 보이며, 신자 된 외로움과 어려움이 있고 특별한 자기 책임이 있기에 찾는 이들이 적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두 문과 길 중에 어떤 문과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단호하게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니 좁은 문으로 가고 좁은 길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이 길을 가시면서 성령에 이끌리어 말씀에 순종하는 승리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생명의 길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길을 먼저 가신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여져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 생명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길 아닌 천국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문,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눅14:25-27을 보실까요?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따라주어서 고맙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따르느냐?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따르려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야 하는데 그래도 따라올래? 입니다.
번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어느 수준 이상의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특별한 제자도라고 해석하려 합니다. 그들은 신자와 제자를 나눕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신자와 제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신자보다 더 열심 있고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올라선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요구하는 헌신이 제자도가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처음부터 요구되는 것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제자도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예수를 믿게 하신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를 위해 살던 삶에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 사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그것을 위해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다, 누구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신앙을 이 세상에서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따라오면 만사가 형통하고 세상에서 성공과 출세가 보장된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와야 한다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좁은 문과 좁은 길을 말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금욕과 고행을 떠올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감격하던 사람들이 좁은 문을 말하고 좁은 길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돌리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의 진위를 모르고 그것을 금욕적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을 보면 여주인공 알리사가 사촌 동생 제롬이 자신을 사랑함을 압니다. 자신도 제롬을 사랑하지만 알리사는 제롬과의 사랑이 자신의 지고한 신앙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알리사는 제롬과의 지상의 사랑 대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영혼의 합일을 이루는 지고한 신앙을 택하고 제롬은 그런 알리사의 선택에 절망합니다. 알리사의 오해가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을 금욕과 고행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오해가 제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죠.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은 금욕이나 고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와 자기부인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미워하는 것을 내 삶에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따라가겠다는 복된 결심이지 고행과 금욕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의 결단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다하여 안과 밖의 반대와 유혹을 이겨내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으로 주님에게 통제받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고행과 금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이며 자기희생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자기 죽음입니다. 그것이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넓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입니다. 사랑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남자, 저 남자, 주위에 있는 남자들을 다 사랑하고 자기 남편도 사랑한다면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여자 다 좋아하면서 동시에 자기 아내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사랑이 크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약으로 묶인 독특한 배타적 관계입니다. 사랑은 독선적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 사람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다른 사람을 절대로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금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쁨이고 사랑의 행복이고 특권입니다. 그 기쁨과 행복과 특권이 좁은 문과 좁은 길입니다.
왜 이 좁은 길을 찾는 이가 적습니까? 사랑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고행과 금욕, 쾌락과 자기 욕망의 관점에서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 좁은 문과 그 좁은 길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가신 문과 길임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에 들어가고 이 길을 걸어가라고 요청받고 있습니다. 강압이 아니라 사랑의 요청입니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문이고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기에 부지런히 이 사랑의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누가복음 13:24에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힘쓰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여기 ‘힘쓰라(strive)’라는 단어 “agonizomai”는 고린도전서 9:25에서는 절제, 골로새서 4:12은 “열렬한 수고”, 디모데전서 6:12에서는 “싸우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는 서로 열렬하게 수고하면서 사랑하되 그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절제해야 하며 모든 외도의 유혹과 도전에 싸워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우리의 헛된 욕망에 대해 절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라가는데 열렬히 수고해야 하며 그 일을 반대하고 유혹하고 도전하는 일체의 대적들과 싸우면서 사랑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한우리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물음에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습니까? 좁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 찾는 사람이 적지만 생명으로 연결되는 그 길을 가고 계신지요? 혹, 모두가 편하게 걷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좋아하는, 넓고 쉬운 길이지만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17세기의 청교도였던 매튜 미드라는 분이 쓰신 “유사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인데, 이 책에서 매튜 미드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게 변질 된 소위 “대중 복음”을 경계합니다. 대중 복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복음,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복음, 내 삶을 조정하지 않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입니다. 대중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유사 그리스도인,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 뿐입니다. 아그립바와 부자 청년, 열 처녀 비유에 나오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대중 복음이 유사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 돌아가도 됩니다. 바뀌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만 나오면 그냥 살던 대로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쉬운 복음이 기승을 떨치고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포기할 것도 없고 바꿀 것도 없으니 부담도 없습니다. 얼마나 믿기 좋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살던 모양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적당하게 헌금하고 적당하게 봉사하고 적당하게 믿으면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위로받고 다시 있는 모습 그대로, 살던 모양 그대로 살면 됩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 그대로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 그대로 싫어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다가 천국 갈 수 있겠습니까?
다시 눅13:22-27절을 보실까요?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사랑에 묶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좁은 길을 가지 않는 자들,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자들, 여전히 악을 행하고 여전히 자기 욕심을 따라 살며,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자들에게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번영 복음, 대중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가짜 복음입니다. 대중 복음이 제시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유사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번영 복음이 가도 된다고 하는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유사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좁은 문을 갑니다. 좁은 길을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하지만 그 길은 매우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 너희는 넓은 길을 경계해라. 그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서 있을 것이지만,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너희는 반드시 좁은 길을 걸어가라.”
주님이 가라고 명령하는 길은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길이며, 진리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길입니다. 주의 은혜로 이 길을 가면, 걷는 동안 헛된 인간의 자랑이 끊어지고 잘난 척이 중단되며, 교만과 허영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면서 이 길을 가면, 가는 동안 팔 복의 독특한 내면적 특징이 더 뚜렷해지고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과 짠맛을 내는 소금의 기능이 더 선명해집니다.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 길을 가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맛보는 한우리 식구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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