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역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배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띕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도국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개화기때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인천의 물은 수량도 부족하고 짠물이 많아 식수공급에 어려움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일제는 수도관 공사를 시작하고 이곳 송현동 고개마루에 "수도국(水道局)"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고개마루를 "수도국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네요.
6.25사변때 인천으로 보금자리를 찾아온 피난민들은 이곳 송현동으로 많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판자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산업화가 진행될 즈음에는
시골에서 항구도시 인천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주로 월세집을 구해서 살았는데,
한때는 3천가구 이상이 살았다고 하니
송현동 고개마루는 달동네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린 셈입니다.
고개마루인 이곳에선 낮은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달을 가깝게 볼 수 있어서 달동네!
매달 세를 내는 월세방이 많기 때문에 달동네!
밤에 천막 안에 누우면 구멍 뚫린 천정을 통해 달이 보여서 달동네!
달동네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치 않지만
1980년대에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달동네>라는 드라마가 나오면서
"달동네"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하죠.
입구에 매표소가 있는데,
입장료가 어른은 500원, 아이들은 200원입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갖가지 모형들이 재현되어 있는데..
지게 지고 금방 배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연탄가게 아저씨.
저 뒤에 경순네 20장, 오성상회 50장 적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지금은 연탄구이 고기집에서나 볼 수 있는 연탄이,
그 때는 집집마다 재산목록 1호였다지요.
의사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다듬어주던 이발소 아저씨도 보입니다.
살며시 들여다본 구멍가게엔
초창기의 삼양라면과 OB맥주, 각종 통조림과 성냥, 양초들이 눈에 띕니다.
커다란 과자통으로 보이는 것이, 어머나 세상에~ 하이타이랍니다.
물을 사러 새벽에 나온듯한 아이가 물지게를 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옆면 벽에는 <하숙생>이라는 영화 포스터도 붙어 있고
헥사보이 건강보이! 라는 <헥사비타민> 광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광택나는 빨간 소화기가 좀 생뚱맞네요~ ^^
"이상하면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간첩 신고 포스터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학기마다 반공포스터, 반공표어, 반공글짓기 같은 것을 했었는데
요즘 초등학교에선 그런 것이 사라진 것 같더라구요.
이런 포스터도 이제 더이상 길거리에서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시간은 생명이다. 일초라도 애껴쓰자"
정부에서 시간 아껴쓰기 캠페인까지 했나봅니다.
하긴,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으면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들어야 했으니....
그런데 정부에서 홍보하는 표어에 "애껴쓰자"라니, 푸훗~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엔 "아껴쓰다"를 "애껴쓰다" 라고 했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껴쓰자"는 말을 무진장 강조하고 싶었나보다~ 돌려생각하며 애교로 봐주기로 했습니다.
"너도 나도 미터법, 서로쓰자 미터법"
지금처럼 미터법을 일상화하기까지는
계도하는 기간이 있었겠구나 하는 걸 새삼 생각해봅니다.
"일시에 쥐를 잡자!"
이 포스터도 지금은 웃기지만
그 당시엔 쥐가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
한날 한시에 쥐약을 놓으면서까지 쥐를 퇴치시키고자 했던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사글세 한칸 얻기도 어려웠던 그 때는
몇억, 몇십억씩 하는 지금의 고층아파트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으슥한 골목길에서 한 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여긴 왜 CC카메라가 없어?"
"그 땐 당연히 CC카메라가 없었지~"
그 대화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부엌에선 어머니가 아궁이 불을 때고 계십니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시로 들여다봤던 어머니의 정성이 있었기에
버튼 하나로 난방이 가능한 지금보다 그때가 더 따뜻했나봅니다.
가스렌지도 없고 전기밥솥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식탁도 없는 그 때의 부엌!
"불편했겠다"는 생각보다는 "정겹다"는 느낌이 더 먼저 다가옵니다.
방에서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성냥갑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성냥을 본지도 얼마인가 싶네요.
시골 구멍가게에 가야 만날 수 있는 희귀품이 되어버린듯.
30촉 백열등 아래로 인두와 구식다리미가 보입니다.
한쪽 구석엔 재봉틀까지...
새삼, 그 당시 어머니들은 얼마나 부지런해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벽지는 신문지! 옷장은 비키니장!
저녁에 다시 깔아야 하니, 이불은 대충 개어두었나봅니다.
시커멓게 변한 바닥 저 자리는 불을 땠을때 유독 더 뜨거운 자리였을 겁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
비록 모형이지만,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반찬은 단촐하지만, 밥그릇엔 고봉밥이 담겨 있네요.
보리밥이라 소화가 잘 되어 부른 배는 금방 꺼졌을 겁니다.
밥 말고는 달리 군것질거리가 없으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이려했던 엄마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귀신이 손을 쑥 내밀며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했다는
귀신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화장실!!
변을 보면 철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신문지 대충 구겨서 썼다는 그 시절의 화장실!!
너무 생생해서 구경왔다가 용변을 보는 분도 있는지
화장실 입구에는 "용변금지"라고 적혀 있어,
또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 집은 달동네에서 좀 산다는 집인지, 방두칸에 거실도 있네요.
요강이 있는 걸로 봐선, 왼쪽 방에 어르신이 기거하셨나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 아래로 "가훈"도 눈에 띕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가족 사진들!
사소하지만 그런 소품 하나 하나가
가족이라는 존재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결혼사진,
자식 사진, 자식들의 결혼사진,
손자 손녀 백일사진, 돌사진.
그렇게 3대의 사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액자는 방에서도 눈에 띕니다.
비닐로 막아놓은 유리창에서 찬바람이 쌩쌩 들어와도
자식생각, 손자손녀생각에 추위도 잊으셨나봅니다.
예전에는 국회의원들이 달력을 돌렸는지,
의원 사진이 박힌 한장짜리 달력이 눈에 띄네요.
건전지가 아닌 태엽을 감은 힘으로 갔던 벽시계!
반닫이 트렁크는 각종 잡동사니를 담아뒀던 수납장이었지요.
겉에 영어가 적혀 있는 걸로 봐선 어디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것인듯~
어렸을 때 외할머니댁에서 봤던 풍경들이 기억 너머로 피어올랐습니다.
그 옛날의 책들도 한쪽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만화책들도...
옛날 문방구는 기념품 판매소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책가방과 신발주머니, 각종 게임 도구들, 그리고 장식품들!
어린 시절, 저의 재산목록 1호로 애지중지했던 종이인형도 반가웠습니다.
하늘 아래 달과 가장 가까운 1번지, 달동네!
이제 그 모습을 직접 만나기 힘들지만
박물관을 통해서나마 그 시절의 모습을 만난 건
잊혀져가는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첫댓글 아이들은 저렇게 살아온 어른들의 삶을 알련지... 아이들과 함꼐 추억속으로 떠나보는것도 공부라고 해야겠지요~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조선시대를 생각하는 것쯤으로 이 시대를 체감하지 않을까 싶네요. 물질문명은 발달했을지언정 지금은 없는 그 시절의 정서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여블단에서 보기드문 희귀한 김작가님 포스팅이네요~ 이제 자주 볼 수 있을려나요 ㅎㅎ 종이인형 닮았으요
제 글이 희귀한 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네요..ㅎㅎㅎ 따금한 지적 감사합니다 으흠~
화장실 보고 놀래지 않았어요..? ^^ 저도 처음 이곳에 갔을때 화장실 문열어보고 깜짝 놀랬어요...ㅎㅎㅎ
저는 지금도 시골가면 할머니 집 화장실이 푸세식이라 좀 덜 놀랬지요. 다만 조명이 정말 귀신 나오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ㅎㅎㅎ
저기다 용변 보신분.. 제발 좀;;;;
설마....진짜 용변 보시는 분이 있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