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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면(2197.2023.6.25.)
시143:1-12
원수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면(2197.2023.6.25.)
시143:1-1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전에 오신 여러분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보니 참 예쁘고 멋져 보입니다.--목사님도—옆사람과도--
좋은 눈과 입을 가졌으니 좋은 것만 바라보고 좋은 말만 하고 삽시다.아멘
오늘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이 일어난 지 73주년이 되는 6.25상기 기념주일입니다. 73주년이 되었다는 말은 73세 이상이 된 분들만이 6.25를 경험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하가 되는 분들은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경험하였습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은 6.25사변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6.25사변은 우리나라가 경험한 가장 큰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다음에 가장 격렬했던 전쟁이 6.25사변이라고 할 때 얼마나 심각한 전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종전선언이 되어야 끝나는 것인데 6.25전쟁은 아직 종전이 되지 않고 휴전상태입니다. 6.25전쟁의 상흔은 이상가족문제와 남북 간의 심각한 대치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헌법상 남한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물론 북한의 주적도 남한입니다. 북한은 핵무기와 같은 최신무기를 개발하여 남한을 위협하고 있고 남한은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공언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살벌한 분위기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이런 한반도의 현실이, 같은 민족끼리의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의 5천년 역사 가운데서 크고 작은 전쟁을 비롯하여 끔찍한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6,25와 같이 우리 민족에게도 처절했던 기억들과 영영 지울수 없는 쓰라린 상처 투성이의 갖가지 사연들을 남긴 사건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 전국민의 80% 가까이 되는 6,25 전후세대는 6,25 동란을 격지 않았으니 그렇다할찌라도 더욱 안타까운 실정은 전쟁을 격은 기성세대까지라도 그 비극적인 사건을 얼마전에 있었던 무서운 전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6,25를 역사속에 뭍혀있는 비사로 여기며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내리던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선전포고도 없이 북괴의 포성과 함께 남침을 도발하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생존이 위험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을 귀히 여기사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으나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게 하시면서 오늘의 번영을 이루어주셨으니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순국하신 모든 영혼들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이 위로받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민족에게 임할 때 우리 민족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민족 하나님을 향하는 이 민족의 고통을 아시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성도들의 기도와 간구 그리고 울부짖음을 보시고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공산 괴뢰들을 물러가게 하시고 이 땅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고난이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넘치는 것 같이 전란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전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분들이 많고,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과 교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6.25사변 73주년을 맞아 새로운 마음을 가지되 잊지 말아야할 것은 잘 기억하여 두 번다시 6.25와 같은 참화가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원수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고 한다면 오늘 말씀으로 해결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로 인해 속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속상함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어때요 여러분도 속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모두가 살다가 보니 속상한 일을 당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속상한 일은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속상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 험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상하고 자식은 부모 때문에 속상한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 때문에 친구 때문에 속상한다고 하고. 여자들은 결혼 후에 남편의 강퍅한 성격 때문에 마음이 상하다 못해 멍들어있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시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고. 시어머니의 무서운 말 한마디, 또 동서가 잘 산다고 배웠다고 무시하는 듯 하는 말 한마디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남자들은 사업 때문에 속상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회생활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회사일로 속상하는 일도 많이 있어서 사표는 주머니 속에 들고 다니면서도 내지를 못합니다. 아니 내면 안되지요 그것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를 잘 맺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관계가 흩어지면 속상한 일만 남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도 마음 상하는 일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천사들만 모여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 하다가 보면 속상할 때가 있어도 내 영적 생활을 위하여는 참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속상한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되고 병원에 가서 진찰해도 사진을 찍고 CT촬영을 해도 나타나지 않는 병이 마음의 병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의 병은 육신적인 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영혼의 병도 있습니다. 외적인 병은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숨어있는 병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음의 속상함을 분명하게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그 누구도 상처를 받고 속상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속상함을 치료받기를 원하고 그 속상한 것이 빨리 치료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상처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당하신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상한 일들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가 다 속상한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 속을 다 들여다보면 속상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정생활의 파탄으로, 정신적인 고통으로, 영혼의 번민으로, 내면적 상처로, 현대인들이 모르는 깊은 상처로 인하여 굉장히 속이 상해져 있습니다. 이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마음속에 있는 속상함을 치료를 받습니다. 남모르게 눈물 흘리고 고민스러워 하는 것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은총으로 그들의 속상함을 해결해주시고 싸매주고 위로해주고 치유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치유의 사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이 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고백한 약함은 그의 몸에 있는 가시입니다. 찔리는 가시가 있어서 그의 마음은 평생토록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그의 약점과 상처를 부끄러워 하지않고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되고, 속이 상한 사람은 속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께 다 아룁시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그 상처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다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속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찾아 나와야 합니다. 다른데 찾아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속상하다는 말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상하다는 것을 분통이 터진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통이 터진다는 말은 통을 누르고 누르다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통이 터진 것입니다. 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 못 터지면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입니다.
목사가 속상하다고 하면 ‘목사님도 속상하나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당연한 것입니다. 목사도 사람이고, 속상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목사의 삶에도 속상한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교회 건축할 때에 대출받는 과정에서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교인들이 빌려온 것도 빨리 갚아달라고 할 때에도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일이니 하고 참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다윗도 상당히 속이 상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3-4절에 보니 다윗은 사람들 때문에 특히 원수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심지어 참담하다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참담하다는 것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꽉 막히고 비참하고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을 지경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윗도 속상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그가 모범 답안지입니다. 주님께 찾아 나와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에 참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4절에 보면 다윗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속상할 때에 어떻게 하였는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속상한 것이 있다면 오늘 치료받기를 축복합니다.
1.속이 상해도 남을 속상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냥 던지는 말인데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감정을 폭발하면서 ‘나는 이래도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뒤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뒤끝이 남아 있습니다. 뒷끝 장렬입니다. 나는 뒷끝 없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이왕 상처 준 말인데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입니다. 별 의미 없이 행하는 눈짓하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때로는 남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 하나 하나가 무심히 내 뱉은 말 한 마디가 남의 가슴에 날카롭게 꽂혀진다면 그 상처로 인해 아파하는 고통이 큽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한번 내 입을 통해서 나간 상처의 말은 비수와 같이 타인의 가슴에 꽂혀지고 맘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은 타인을 향하여 속상하게 하는 마귀의 도구로 쓰임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타인에 대한 험담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맘니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듣는 사람, 그리고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험담을 한 자기자신입니다. 일은 다 저질러놓고는 아이구 입이 방정이야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상처를 입습니다. 엡4:29절‘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그랬습니다.
시39:1-4절‘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남의 이야기를 재미삼아 하지 말고 꼭 필요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는 뒤에서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뒤에서 한 이야기도 둘 이상이 했으면 다 돌고 돌아서 귀에 들어가는 법입니다. 그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말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말고가 없습니다. 이미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너무 마음이 속상할때가 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고 부글부글 거릴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좋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좋은 눈을 가지고 좋은 입을 가졌으니 좋은 것만 바라보고, 좋은 이야기만 하는 성도가 되셔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속이 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원수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고난이 너무 극심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속히 고통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고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행한대로만 보응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속이 상한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속이 상하면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리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만이 가진 병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화병입니다. 울화가 쌓인 것입니다. 속상한 것을 풀지 않고 쌓아두어서 생긴 병입니다. 여러분 화병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화병 날 만한 것이 있으면 다 풀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그럼 우리가 속상하면 어디에다가 풀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내나 남편, 자녀 등 가족들에게 풀어 가족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 못하는 강아지에게 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에게 얻어맞았을 때 그 속상함을 어디에다 풉니까? 어린아이들은 집으로 달려 들어와 엄마 하면서 어머니 품에 안깁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맞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또 격려해 주시면서 어떤 놈이 그랬어 하며 부시깽이를 들고나가면 그때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은 풀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제일먼저 교회로 달려와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아버지’ 이 한마디 속에는 나의 억울함, 원통함이 다 들어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속만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생깁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신다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나가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한 주간 동안 상처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마시고 다윗처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시143: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의 일생도 완벽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믿음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정확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을 버리지 않았기에 당당하게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먼저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다 자신의 부족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먼저 시인 할 때에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나는 이렇게 속상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내게만 생기는 것일까? 억울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속상한 일에 더 속이 상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은 마땅히 당해야 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시143:2절‘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하는데 1절에서는 당당하게 기도했는데 이것은 행위에 대한 것이기에 행위로 말하면 누구하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자들의 행위로 심판하지 않으시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행위로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되 하나도 남김이 없이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빠진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치 않은 입술을 통하여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너무 속상한 것을 마음에 두지말고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시143:3절‘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우리는 하나님앞에 바른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속상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주여, 심판을 행치 마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3-4절에서 그는 원수들로 인하여 죽은지 오래된 자 같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령은 멍들대로 멍들고 상할 대로 상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치료받을 수 없는 참담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고합니다. 이 기도들은 다윗이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괴로움과 육체적인 어려움과 환경의 난관들을 하나님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형편이 좋을 때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어려워지면 언제 하나님을 믿었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어쩌자는 것인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되고, 속이 상한 사람은 속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걸 사람에게 하지 말고, 아니 사람에게 하듯 하나님께 하자는 것입니다. 내 속 상한 이야기를 속에 두고 참으면 병이 됩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결국 때가 되면 ‘그 때 돈 잃어버린 것이 참 잘된 일이야’라고 말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우리 아버지입니까?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손해 본 것도 보상해 주시고 얻어맞은 것도 위로해 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시고 약한 것도 강하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 송에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기도할 때에 위로와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속이 상할 때가 너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 속상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혼자만의 고민입니다. 혼자만의 울화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달래야 합니다. 누구나가 다 상처를 받는데 그중에서 내가 조금더 받은 것 뿐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너무 속상해 하지말고 이 속상한 것을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받지 못하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폭팔을 합니다. 그러면 더 큰 문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심리적으로, 상담학적으로도 좋겠지만 우리는 영적인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치유해 주십니다. 마11:28절‘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이 상했을 때에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해주시는 의사중의 의사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자세하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속상할 때에도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닫히면 주님도 역사 안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열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큰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옆사람과‘은혜 충만 받읍시다’은혜 받으면 속상하더라도 주님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울고 웃고 하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맑은 날씨도 맞는가 하면 굳은 날씨도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굳은 날씨가 많았습니까? 맑은 날씨가 많았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도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좌절하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소원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만을 해결하려는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모르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시143:5절‘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기억하면서 묵상하면서 내 상한 마음과 곤경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속상할 때에 폭음하고 설치지 않고 ‘묵상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출14장에는 애굽에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에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쳐들어옵니다. 출14:10-12절에 당황한 이스라엘 백성이 술렁거리며 자기들을 이끌고 온 모세에게 원망하며 집단행동을 할 자세입니다. 그때 모세는 그들에게 출14:13-14절‘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했습니다. 또한 반석에서 물을 낸 일과 이웃 군대들을 쳐서 물리치신일과 요단강을 건넌 일과 또한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묵상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묵상했습니다. 자신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사자와 싸워서 이겼던 일 또한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닐 때 사울 왕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일 또한 블레셋 군대의 장군 골리앗과 싸울 때 자신과 함께 하시어서 그 큰 용사 골리앗을 죽인 일들을 묵상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주님의 하신 일들을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시어서 승리하고 기쁨을 얻게 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어 속상한 마음이 오히려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속상할 때 세상 사람들 처럼 떠들고 다닌다든지, 설치든지 하지 마시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묵상하시고, 입은 침묵으로 지키시기 바랍니다. 침묵은 말보다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속이 상할 때면 침묵을 하며 주님의 행사를 묵상했습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그 행하신 능력을 묵상한 것입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성공했을 때에나 실패했을 때 기쁠때나 속상할 때 그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상한 영혼이 치유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다윗은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주를 사모 했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손으로 과학 문명이라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생각한 대로 다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면 무슨 일이 안될 때마다 좌절과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점점 상하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사모하며 손을 펼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울고 돌아오는 아들을 엄마가 품에 안고 위로해 주시듯이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속상한 사람들, 참담한 아픔으로 한숨짓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아픔이나 상한 심정을 노출시키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주님을 향하여 손을 폈던 시편 기자처럼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기도하며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214장에 보면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찬송하는 심령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며 치료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 상할 때마다 겸손히 나의 모든 형편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며, 주님을 생각하고, 특히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찬송하십시오. 뭐가 문제가 됩니까? 여러분 심령 속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이상할 때에 주를 향하여 두손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시143:6절‘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했습니다. 5절에서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내적 행동이고 정신적인 태도라면 6절에서 손을 폈다는 것은 외적행동이고 결단을 의미합니다. 손을 폈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과 무소유를 의미합니다. 즉‘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저는 힘이 없습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못난 척하고 사는사람, 없는체 하고 사는 사람, 모르는체 하는 사람보다는 잘난척 하고 있는체하고 아는체 하는 사람이 10배이상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 나는 믿음이 좀 모자라’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보다는 ‘나는 믿음이 좋아, 내 신앙이 제일이야’하는 사람이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자신의 손을 표 보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왜 손을 폈습니다. 거지들을 보면 한국거지이든, 미국거지이든, 영국거지이든지 간에 다 손을 편다는 것입니다. 달라고 할 때 손을 펴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를 향하여 손을 편 그의 마음에는 주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상한 내 마음을 위로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에 손을 펴는 마음이 있는데 ‘주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속상한 사람들, 참담한 아픔으로 한숨짓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 그뿐 아니라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아픔이나 상한 감정을 노출시키지 못한채 가슴을 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누구를 향하여 손을 펴보이시겠습니까?
시인의 고백처럼 주님의 행하신 것을 묵상하고 주를 향해서 손을 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고 항상 주를 사모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해결자입니다. 사단권세를 결박하는 열쇠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주를 향하여 손을 펴서 속이 상한 마음들을 위로받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손을 편다는 것은 절박한 심정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거지가 손을 벌릴때에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고 참으로 용기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다윗은 자비를 호소했습니다. 시143:7절‘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다윗은 지금 자기의 속상한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기도자의 절박한 호소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리고는 시143:8절‘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해서 참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의지입니다. 그져 입술로만 ‘주여 의지합니다’가 아니라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을 내가 운영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묵묵히 살다가 보면 이런 속상한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쁨을 되찾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에 빛이 되시고 발에 등이 됩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밝히면 갈 길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고백하면 말씀 속에서 길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빛이 없으면 인생이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빛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을 잘 그려놓은 지도와 같습니다. 정확한 지도가 있으면 자기 위치를 알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설교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아예 자기를 하나님께 봉헌을 합니다. 시143:12절‘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종의 신분은 비천합니다. 자유가 유보당하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속상한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종으로 자원을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종이 되게 하시고 이후로 예수그리스도가 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역시 우리도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자신의 원수를 끊어달라고 부탁하는데 부탁하는 이유가 자기가 주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속상한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과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어떻게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는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속상한 일을 만나면 신앙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주님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은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정체성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정체성이 약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확신이 약합니다. 이게 약하면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고난이 찾아와도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신앙이 흔들흔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소망도 미래도 온전히 주께 맡기고 주의 이름으로 살기로 작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응답을 기다리면 됩니다. 시143:8절‘아침에 나도 주의 인자하심을 듣게 하소서’라고 자비하심을 속히 경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궁휼히 여겨주시며 주의 백성으로 살도록 부족함이 없도록 응답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상한 것을 마음속에 자꾸 담아두지 말고 해결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주님앞에 고백을 하시고, 늘 주님이 행하셨던 것들을 묵상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께 손을 내미셔서 시143:9-12절‘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내적, 외적 고통에서 구원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운 일 당하실 때, 속상하실 때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손을 펴지 마시고, 주님을 의지하시고 주님께 두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실줄 믿습니다. 혹시 나의 그 작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주님께 손을 펴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나의 그 외식을 회개하시고 주님을 향하여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손을 펴지만 주님을 사모하지 않고 물질을 사모하고 어떤 사람들이 도와주기를 기대하며 그 사람을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손을 펴셨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107:9에 보면 하나님은 그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그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내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혼자 괴로워하거나, 떠들고 다니시거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오셔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행사를 묵상해 보시고 나의 하나님께 손을 펴시고,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로하사 만족케 하시며 또한 좋은것으로 풍성하게 채워 주실줄 믿습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노정 중에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아무리 극심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역풍과 폭풍우가 제아무리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해도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항구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약점과 불완전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침내 우리를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 심령이 상했을 때, 오늘 이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까지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까지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