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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7일 오후 11:3051 읽음
3월 7일 화요일. 오전 7시. 관광항구인 하니아는 부둣가에 쓰레기통들이 비치되어 있다. 실은 제법 먼 곳에 배들의 쓰레기 버리는 곳이 따로 있는데, 하루에 비닐 봉투로 한두 개 정도라, 그냥 20미터 거리의 쓰레기통에 버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 늘 아침에 괜히 쫄려하며 좀 남몰래 버리는 편이다. 아침 일찍 산책객들도 많아 오늘은 좀 더 일찍 나갔는데, 헉! 딱 쓰레기 수거차가 오고 있다. 근데 쓰레기 통 가까이 가보니, 쓰레기통이 박살나있다. 뭐지? 수거차 두 대가 와서 수리를 한다. 뒤로 돌아 50미터 거리의 다른 쓰레기통으로 가는데 또 소형 수거차가 오고 있다. 청소 아저씨는 차를 멈추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다시 검은 봉투를 설치한다. 괜히 미안해서 슬그머니 지나치려는데, 묻는다.
그거 쓰레기냐?
그렇다.
그럼 이리 줘라.
고맙다. 그런데 저쪽 쓰레기통을 누가 부셨다.
그런가? 지금 반대쪽 쓰레기통도 부쉈다.
정말 미친 짓이다. 어떤 놈일까?
그러게,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에 살면서 일부러 부두의 쓰레기통을 부수고 다니는 녀석은 과연 누구일까? 어떤 억하심정이 있길래, 인적도 드물지 않은 이곳의 공공기물을 파괴하고 다니는 것일까? 여기 CCTV는 설치되어 있을까? 사회시스템의 파괴, 세상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 아름다운 크레타도 역시 밤에는 안전하지 않다.
오전 8시 40분, 시내로 5분 걸어가 하니아 알파 은행 ATM 서 80유로를 찾았다. 택시비와 TEPAI 세금으로 현금을 준비한 거다. 인근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먼저 세관까지 거리와 금액을 물어본다. 거리는 7킬로고, 요금은 10~11유로 나온다고 한다. 음 이런걸 확실하게 안하면 바가지 쓸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두어번 당했다. 외곽으로 나가자 빈집들도 나오고 자동차 판매점등이 소재해 있다. 현대와 기아가 눈에 띤다. 이제 한국은 누가 뭐래도 선진국이다.
9시 10분. 세관에 도착하니 11.58유로가 나왔다. 기사는 10유로만 받는다. 신기하다. 자기가20~30분 대기 할 테니 다시 10유로에 돌아가잔다. 나야 좋지. 그럽시다.
세관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니, 너 이 서류 봤니? 하고 해양경찰이 써준 서류를 내민다. 뭐가 문제니? 물으니 날짜가 전부 틀렸다. 난감하다. 나는 해양경찰이 써준 서류라 그냥 받아 왔다. 라니, 웃으며 그 사람들 영어 잘 몰라서 그래. 여기서 서류 작업 마치고 다시 가서 수정해 달라고 해. 오케이. 그러고 보니 복사하고 돌려준 서류도 막 섞여서 엉망이다. 아무리 관공서라고 해도 반드시 서류를 전부 확인하고 받아야겠다. 원본 서류나 여권이 없어지면 큰일 아닌가. 여긴 한국이 아니다. 공무원들도 정확하지 않다.
하니아 세관이 있는 수다에서 한동안 난리가 났다. 수다 세관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문제의 TEPAI 세금을 내려하는데 무려 120유로다. 겨우 5일에 뭔 세금이 이리 비싼가? 외국서 온 배들은 전부 내야 한다니. 무슨 고장이 생겨 하루만 들른 배도 120유로. 이러면 누가 크레타에 세일링 여행 오려고 할까? 게다가 외국카드는 안되고 현금만 된단다. 21세기에 별꼴이다. 다행이 세관 가까운 곳에 ATM 기기가 있다. 달려가 카드를 넣으니 인식이 안 되는 카드란다. 한 번 더 해본다. 결과는 같다. 뭐야 오늘 아침에도 택시비 내려고 ATM에서 현금 찾아 온 건데, 바로 곁에 또 다른 ATM이 있다. 또 안 된다. 패닉이 온다. 뭐지? 50미터 거리에 은행이 있다. 거기로 달려가 ATM에 카드를 넣는다. 제발. 역시 안 된다. 뭐지?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세관으로 가서 상황을 설명하니 아까 돈 뽑은 데로 가서 돈 뽑아서 다시 오란다. 네가 서류를 써주면 내가 시내 은행에다 제출하고 돈 내면 안 될까? 안된단다. 대기하고 있던 택시기사가 나를 돕는다. 같이 세관근처 은행에 가보자고 한다. 은행에 들어가 상황을 이야기 하니 한도초과 아닌가? 하고 그만이다. 택시 기사가 나더러 ATM 에 카드를 넣어 보라고 한다. ‘인식불능’이라고 나온다. 택시기사는 아까 시내에서 돈 찾은 알파은행의 ATM 을 찾아 인근으로 떠난다. 가다가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ATM 이 있다. 한 번 해보라고 한다. 이상 없이 진행된다. 오 하느님. 택시 기사가 내게 말한다. 잘 됐다. 하니아까지 다녀오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텐데. 도대체 ATM이 카드를 가려 받고, 여기서 되는 카드가 저기서 안 되고, 한국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즐비하다. 이래서 카드는 두세 가지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우리 부부는 아내와 내가 각각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하니아까지 안가고 인근서 돈을 찾았다. 혹시 몰라 200유로를 찾았다. 그런데 대기 중에 나더러 세관비용 30유로를 더 내야 한단다. 한 번에 말하지. 미리 준비하길 잘했네. 여기서 한국식으로 예상하고 행동하면 실수하기 딱 좋다. 우리의 한 10년 전쯤으로 생각하고 현금을 준비하고 가외로 들어간 예비비까지 준비하지 않으면, 언제든 낭패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은 시스템이 엄청 잘 된 선진국이다. 밖에서 보니 더 그렇다.
오전 11시. 아직도 세관에서 대기 중이다. 두 시간 넘게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중이다. 11시 20분에 마침내 150유로를 내고 다 끝났다. 택시가 두 시간을 넘게 대기한 거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주저하더니 20유로라고 한다. 그러면서, 문제 있냐? 묻는다. 나는 문제 있다! 말한다. 택시기사는 깜짝 놀라며 무슨 문제냐? 되묻는다. 너무 싸다. 나는 30유로를 내야겠다. 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와 크레타 택시기사가 함께 웃는다. 오전 9시부터 같이 세관에서 노심초사한 스트레스가 조금 사라진 것 같다. 2시간 대기에, 말도 안 되게 싼 택시 요금이다.
하니아로 돌아와 먼저 조르주의 보트 수리점에 간다. 가보니 만들어 놓은 뒷 커버가 먼저 보인다. 들어가 조르주를 찾으니 C-80플로터를 가지고 나온다. 그러면서 몹시 근심스런 얼굴로 말한다.
이게 말야, 상당히 비싸게 됐어. 기술자가 열어 보니 그 안에 소금물이 가득이었대. 몇 번만 더 사용하면 아예 다 타버릴 상황이었다는군. 사진을 보여준다. 진짜 소금과 물이 보드에 뒤엉켜 있다. 이 상태로 동작이 된 게 이상할 정도다. 오래된 기계라 이젠 더 이상 방수가 아니다. 설치 위치를 옮기던가, 비닐 커버를 씌워라. 어쨌든 완벽하게 수리됐고 뭐든 안 되면 바로 연락해라. 비용은 355유로, 카드로 계산 하려니, 세금이 24%다. 은행에서 현금 찾아오는 것이 나을 거라 한다. 아하! 그래서 뭔가 비쌌구나.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카드로 계산했다. 전부 24% 씩 더 낸 거다. 제길슨! 억울하다. C-80 플로터 수리에 36만원, 생각보다 비싸지만 새로 사는 것 보다는 훨씬 싸다. 조르주와 잠깐 수다를 떤다. 그의 아들들도 2년 넘게 항해중이다. 그는 내 나이를 묻는다. 나는 1963년 생이다 하자, 자기는 1964년 생이란다. 나더러 세계일주 중이라니 정말 행운아다! 라며 부러워한다. 이윽고 나는 C-80 플로터와 나무 커버를 들고 배로 돌아간다. 날이 엄청나게 더워 땀으로 목욕한다. 아침엔 두터운 외투, 오후엔 곧장 초여름이다.
Malinakis Chania 731 31 +302821090777 (보트 수리점, 사장 조르주 1964년생)
배에서 나무 커버를 설치해 보니, 걸쇠 설치하는 곳을 조금 깎아내야 한다. C-80은 소리가 잘 나는데, 두 번, 네 번째 스위치가 작동을 안 한다. 하나를 고쳤는데 두 개가 고장? 레이더의 감시 존을 설정하는 중요한 스위치다. 이래서는 감시 설정을 못한다. 조르주에게 전화한다. 오후 3시 15분에 온단다. 나는 과연 내일 출항할 수 있을까?
오후 2시 30분에 기술자들이 왔다. 뭐지? 약속을 너무 빠르게 지킨다. 젊은 전기 기술자의 이름도 조르주다. 여긴 같은 이름이 너무 많다. 혹시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니라 조르주 아냐? 그들이 와서 이것저것 체크하고 오늘 다시 온단다. 한 밤중에 와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내일 출항해야 한다.
4시에 젊은 전기 기술자 조르주가 왔다. C-80플로터를 설치하니 모든 게 정상이다. 가드 존 알람도 잘 울린다. 뭐가 문제였냐고 묻자, 기계에 소금물이 가득 들어서 회로 몇 군데가 끊어지고 머잖아 시스템 전체가 타버릴 운명이었다고 한다. 어쩐지 이탈리아에서 올 때 레이더가 잘 안 켜지더라니, 조르주는 한국까지 잘 운항하기를 바란다며 악수하고 갔다.
여기서 5일 만에 1,600유로(210만원이다) 를 썼다. 수리비 588유로에, 디젤+가스 429유로, TEPAI 와 관세 150유로. 필수비용만 1,167유로다(160만원). 수리를 잘 마친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지만, 하루에 40만원씩 쓴 셈이다. 무섭다. 빨리 뜨자.
마스트에 4번이나 올라가 윈드인디게이터를 고쳐준 Tasos(타소스)에게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하려고 했는데 그는 오후 5시에 약속이 있다고 해서 같이 차 한 잔 하기로 했다. 4시 30분 정확하게 그가 왔다. 그는 맥주 한잔, 나는 에스프레소 더블이다. 나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뒤를 가리킨다. 저기가 그 영화 촬영지야. 엇! 그래? 하니아 마리나 곁의 카페에 앉아 스키퍼들 끼리의 수다가 끝이 없다. 내가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년경~기원전 1170년경)을 이야기 하니, 그는 신나서 이야기 한다. 미노스 문명 때에 크레타는 노르웨이에서 은을 가져왔지. 노르웨이에도 크레타와 비슷한 유물과 기호문자가 발견되고 있어. 크레타와 비슷한 유물이 페루의 8천 년 전 유적에서 발견 되었어. 호오 난 전혀 몰랐다. 그는 크레타 역사에 해박하다. 대단해. 너는 마치 역사 선생님 같구나. 그러자, 나는 겨울이면 별로 할 일 없어 역사책을 본다며 웃는다.
그는 또한 카타마란 지도자다. 오래 전 작은 카타마란으로 크레타 남부 섬으로 세 번 갔다가 그중 두 번은 SOS로 돌아 왔다고 한다. 대단하다. 그는 세일러를 4단계로 분류한다. 첫째 아무 것도 모르는 행복하고 용감한 단계, 둘째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만만한 단계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세 번째,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공부하는 단계, 네 번째 세일 요트를 다루는데 있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단계. 세계일주는 적어도 세 번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크레타에서 자신의 카타마란으로 요트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이곳 하니아에 좋은 기술자들이 있고 좋은 세일링 코치들이 있으니, 여기서 훈련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고 의견을 말한다. 나는 이번에 여기서 요트 수리 건으로 돈을 좀 많이 썼지만, 이탈리아에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크레타에서 해결했다. 이제 야간에도 보다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타소스는 약속한 친구가 20분 늦게 오는 바람에, 5시 20분까지 나와 수다를 떨다가, 포옹하고 헤어졌다.
5시 30분에 나무 커버를 가지고 왔다. 설치가 잘 되었다. 한 밤중에 온다더니 크레타 사람들은 약속을 더 일찍 지키기 좋아하나보다. 하니아에서 수리하고 싶은 것들을, 예상 밖으로 모두 다 깔끔하게 마치게 되었다. 내일 아침 해양경찰서에 TEPAI 영수증으로 제출하고, 육지 경찰서에 여권 출국 도장을 받으면 출항이다. 윈디를 보니 바람도 괜찮다. 4일 후엔 이집트 port said.
“두목, 산다는 게 뭔지 알아요? 허리띠 풀고 말썽을 만드는 게 바로 삶이지요. 사는 게 곧 말썽이에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