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7:11-17,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심 8.11, 박홍섭 목사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던 주님이 40킬로 정도 떨어진 나인 성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제자들과 일행을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과부의 죽은 아들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나인 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의 행렬과 나인 성을 나서는 장례 행렬이 맞부딪쳤습니다. 생명의 행렬과 사망의 행렬이 만나고 있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그 장례 행렬을 멈추시고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신 뒤 관에 손을 대고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합니다. 이 일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서 큰 선지자를 우리 가운데 일으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온 유대와 사방에 이 소식이 두루 퍼집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기적입니다. 왜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나인 성으로 옮겨가셨을까요? 다른 볼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다 보니 나인 성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우연히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도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곳에 독자를 잃고 울고 있는 한 과부가 있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가셔서 장례 행렬을 만나 그 행렬을 멈추고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울지 마세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그 말이 실제적인 영향과 힘으로 나타나지 않고 말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진심과 사실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해도 울지 않도록 해줄 힘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의 피상적인 위로와 다릅니다. 우리의 위로는 말로만 그칠 때가 많지만, 주님의 말은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말씀에는 그대로 되는 힘과 권위가 있어서 한 마디도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순종하는 권위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무기력하지만, 주님은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꾸짖을 수 있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이 울지 말라고 하시면 울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아들이 죽어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울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곧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살다 보면 울 일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앞서 백부장은 “말씀만 하옵소서”라는 믿음으로 하인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나인 성의 과부가 누렸던 이 은혜는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에게 조건과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유일한 원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그녀를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것 말고는 원인이 없습니다. 그 불쌍히 여기심으로 가버나움을 떠나 여기 나인까지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연히 과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불쌍한 사정을 아시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찾아오지 않고 주님이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부르지 않았고 주님이 그녀를 방문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이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거기 ‘돌보셨다’라는 말은 의사가 환자를 왕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환자를 왕진하는 의사처럼 나인 성의 과부를 불쌍히 보시고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극한 슬픔에 빠지게 한 죽은 아들의 시신 앞에서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고 아이를 살립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에도 찾아오시고 방문하시는 주님의 임재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의 죽어 있는 모든 부분에 “일어나라”라고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인 성입니다. 나인이란 마을의 이름은 ‘즐거움’, 혹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슬픔의 사건이 일어났고 눈물의 장례 행렬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생이 이렇습니다. 여러 이름의 희망을 품고 살지만, 현실은 울 수밖에 없는 장례와 슬픔의 행렬일 때가 많습니다. 나인 성의 이 여인이 과부가 되고 싶어서 되었겠습니까? 독자를 잃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슬픔에 빠졌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나그네 인생이 이러합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끝내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장례 행렬로 찾아옵니다. 우리는 장례의 행렬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행렬을 멈출 능력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 여정에 주님의 불쌍히 보시는 은혜, 슬픔의 행렬을 멈추고, 사망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에게 그 은혜를 주실 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죽은 과부의 아들을 담고 있는 관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과부의 아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만 고쳐주신 것처럼 죽은 과부의 아들도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만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전에 죽은 시신이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민수기 19장 11절 이하의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나 그의 뼈 혹은 무덤이나 관을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관을 만져 죽은 자가 초래한 부정을 자신이 끌어안으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생명이 그냥 주어지지 않고 죽음과 죽음이 불러온 모든 부정과 고통을 주님이 다 끌어안으신 결과로 주어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제 관을 만져서 부정을 끌어안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셔서 죽음 자체를 끌어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가져온 모든 부정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정결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적은 그 은혜의 예표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기적을 연상하고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들은 아직 주님이 엘리야와 엘리사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고 있지만, 죽음을 다스리는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없는 신앙은 경박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경박한 신앙이 아니라 경건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나인 성의 과부는 독자를 잃었습니다. 그녀의 죽은 독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여기 독자가 독생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독자를 잃어버린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인 성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독자를 살려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정작 자신의 목숨은 구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긍휼과 자비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부터는 주님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유일한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 이후의 삶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독자를 잃고 슬픔에 빠져 울고 있던 과부에게 아들을 살려 돌려주신 것처럼, 죄와 불순종으로 생명을 잃고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한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잃어버린 생명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룩한 신분을 찾아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고 받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죄와 사망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옮겨진 사람의 겸손한 믿음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동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생명의 주님이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아끼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을 잃고 울면서 걸어가던 장례와 슬픔의 행렬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생명의 행렬로 기쁨의 행렬로 바꿔주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 주님의 찾아오심이 있으면 이런 노래가 맺혀집니다. 시편 30:11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도다” 주님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베옷을 벗겨 기쁨으로 띠 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기쁨의 성, 즐거움의 성이란 이름의 나인이란 성에 살고 있었지만, 독자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장례 행렬에서 울고 있었던 과부를 불쌍히 보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서 슬픔을 춤이 되게 하신 그 은혜가 한우리 모든 식구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