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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스에게로 피신한 다윗(2255.2024.6.23)
삼상 29:1-11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이 일어난지 74주년이 되는 6.25상기 기념주일입니다. 74주년이 되었다는 말은 73세 이상이 된 분들만이 6.25를 경험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하가 되는 분들은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경험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dP배드리시는 여러분도, 요즘 젊은 학생들도 6.25사변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6.25사변은 우리나라가 경험한 가장 큰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다음에 가장 격렬했던 전쟁이 6.25사변이라고 할 때 얼마나 심각한 전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종전선언이 되어야 끝나는 것인데 6.25전쟁은 아직 종전이 되지 않고 휴전상태입니다. 6.25전쟁의 상흔은 이산가족문제와 남북 간의 심각한 대치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헌법상 남한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물론 북한의 주적도 남한입니다. 북한은 핵무기와 같은 최신무기를 개발하여 남한을 위협하고 있고 남한은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공언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살벌한 분위기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이런 한반도의 현실이, 같은 민족끼리의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그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까?
북한은 남한을 계속 위협하고 남한에 대하여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하였습니까? 지금은 말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남한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였습니다. 얼마전에 러시아 푸틴과 김정은 만나서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런 북한에 대하여 남한도 지지 않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이것이 안 되니까 미국과 핵무기를 공유해야한다는 말을 합니다. 북한이 도발하면 그 이상으로 보복을 하겠다는 말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한반도는 어떻게 될까요?
남북한의 관계는 더 험악해져가고 남북한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평화공존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악순환을 끊고 이 한반도에 평화가 임하고 전쟁의 소문이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분노와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와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면서 신32:7절‘옛날을 기억하라 연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훌륭한 신자가 되고 사람이 되려면 잊을 것과 기억할 것을 잘 분별해서 잊을 것을 속히 잊고 기억할 것을 꼭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6.25를 기억하면 안 오고 잊으면 다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6.25를 겪은지도 벌써 74년이 지나고 나니 점점 6.25의 처참했던 일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6.25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6.25와 같은 처참한 비극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6.25를 잊어가는 세대에 살고 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하여 6.25전쟁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28장 첫 부분에서부터 연결이 됩니다. 1-2절을 보면 아기스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나가는 전투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함께 나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 나가 싸우면 자기가 다윗을 영원히 자신의 심복으로 삼겠다고 합니다(28:1-2). 사울이 영적으로 실패하는 동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향해 총공격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블레셋은 엄청난 공격을 해오려고 전열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사울은 가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군사들을 준비시키며 전쟁을 대비해야 했던 그때에 신접한 여인이나 찾아가 있으니 실패하지 않는게 이상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블레셋의 작전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여기 찌르고 저기 찌르던 것 같은 국지전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골리앗이 나갔다가 다윗에게 패배하여 블레셋 전체가 패한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벌이는 전면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양 진영이 평야 같이 넓은 곳에 서로를 마주 보고 진을 친 후 싸웠습니다. 특히 이 전쟁은, 샘이 있고 비옥한 이스라엘 중부지방에 위치한 이스르엘 평지를 점령하지 않고는 국력을 키워나가기 힘든 블레셋이 그곳을 차지하려고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입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습니다. 1절‘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블레셋 용병으로 자기 동족과의 전쟁에 동원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 동안 숨기고 있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다윗의 속마음이 탄로 날 위기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말렉 같은 민족들을 공격하여 약탈해왔으면서도 이스라엘 지역을 쳐서 약탈해 왔다고 아기스를 속였었는데, 그 말을 믿고 자신을 신뢰하게 된 아기스와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정말 엄청난 위기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들이시는 여러분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아룻 있습니다. 싸우지 않으려고 하면 자기 정체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싸우게 되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움으로써 이제는 정말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기름 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세움 받은 사람이 자기 동족과 싸워 죽이게 되니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이때 다윗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울이 쫓아오더라도 이스라엘 땅 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견디고 견디다 못해 사울이 쫓아오지 못할 블레셋으로 도망 가버렸습니다. 대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힘든 일을 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이 거기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셨든지, 아니면 고난이 끝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견디지 못하고 블레셋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중생활을 하면서, 아말렉 족속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쳐서 물건을 약탈하고 그것을 아기스에게는 이스라엘 마을들을 쳤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때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 어려움은 외부에서 올 때도 있지만 자기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어려움이 오는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계속되면 남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며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 또는 ‘우리 집안이 안 좋다.’라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또는 자기 잘못 때문에 상황이 힘들게 되었는데도 ‘이 십자가는 제가 져야죠.’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다가 손해를 보고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라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못했는데 ‘하나님,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혹시 나에게 없는지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면 자꾸 외부를 보면서 남 탓을 하거나 상황 탓을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이 잘못한게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가게 되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재빨리 다른 데로 다시 도망가버리거나, 이때 블레셋을 공격해서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다윗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도망을 할 만한 곳도 없습니다. 또한 블레셋 땅 안에는 자기와 부하들의 가족들과 재산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에게는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때 다윗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 아기스 앞에서 위협을 느끼고 미친 척했을 때도 그렇게 속으로 기도했는데, 이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블레셋 군대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뜻밖의 방법으로 다윗을 구해주신 손길입니다.
블레셋은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된 나라인데, 평소에는 자치적으로 각 도시가 알아서 모든 것을 처리했지만 전쟁이나 종교적인 행사는 모두 연합해서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가 자기 성에 다윗을 데리고 있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성에서 자기 부하로 데리고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온 블레셋이 다 합쳐서 나가는 전쟁이기 때문에 다른 블레셋 도시들에서 온 장군들이 심하게 반대합니다.
아기스는 다섯 개 도시 중 가드 왕이었고, 그 외에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아스돗에서 온 장군들이 심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왜 반대합니까? 2절‘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수령들은 각 성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디 있습니까? ‘그 뒤에서’. 그러니까 일단 다윗이 자기들 뒤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앞에 서서 나가지 않고 뒤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스가 그를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28장 2절을 보면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번에 성공하면 영원히 나의 머리 지키는 자로 삼겠다.’라고 하는데, 이 ‘머리 지키는 자’가 바로 경호대장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미 아기스의 경호실장이었기 때문에 아기스 옆에서 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에 나가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니라 아기스와 함께 뒤에서 갑니다. 아기스가 뒤에서 갔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앞에서 나가게 되었다면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어서 아기스 군대가 위치한 뒤에서 아기스와 함께 갑니다. 이것부터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냥 보면 우연한 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러나 이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그런 것이 믿는 사람의 시각입니다.
삼상 27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다가 자신을 따르는 600명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한 사건을 이미 보았습니다. 아기스 역시 다윗을 이용하여 사울을 견제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기에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기스는 다윗과 일행들이 거할 성읍을 지정하여 줍니다. 바로 ‘시글락’이란 성읍입니다(27:7).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윗은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머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다윗은 더 이상 사울의 공격을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에게 유익이었을까요? 그곳에 사는 동안 다윗이 누구를 의지하며 살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비록 불안한 삶이었지만 다윗은 늘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아기스의 은혜’를 기대하며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스에게 계속적인 은혜를 입기 위하여 비굴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아기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말렉 땅을 침략해서 노략물을 갖다 바칩니다. 이때 아기스 왕이 누구를 쳤느냐고 묻자 다윗은 자기 조국인 유다를 쳤다고 하며 마치 블레셋의 편이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비굴하고 거짓된 행동은 아기스의 환심을 사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윗 스스로 큰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느 순간 찾아오는 영적인 침체를 조심하십시오.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영적 침체’가 왔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대로 내려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깨어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흙으로 빚어서 만들어진 나약한 사람들이기에 온전한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아기스는 그를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합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합니다(27:12). 그러나 그 성공이 자신을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블레셋 다섯 도시의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다른 나라처럼 무소불위한 권력을 가진 한 왕이 다스린 것이 아니라 다섯 방백의 대표가 모여서 합의체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당시에 다섯 도시(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 모여서 마치 연방제처럼 나라가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각 다섯 개의 도시마다 방백(아기스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지도자가 있어서 자치적으로 다스렸습니다.
다윗을 신뢰한 아기스는 그를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가하라고 명령합니다(28:1-2). 나아가 자신의 호위병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기스가 그만큼 다윗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려야 할 자신의 백성과 싸워야 하는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동안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교활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모든 일이 다 물거품이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앞으로 왕이 되어 다스릴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같은 동족을 향하여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민이 되는 일이겠습니까?
2.다윗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고민이 되었을까요.
다윗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고민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뜻하지 아니한 일이 일어납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출전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1-3절에 앞서 말씀 드린대로 블레셋은 다섯 성읍의 연합군입니다. 각 성읍의 방백들이 수백 수천 명씩 부대를 편성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갑니다. 그 때 다른 방백들이 다윗과 그를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이 가드 왕 아기스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기스에게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습니다.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염려입니다. 그러자 아기스가 적극적으로 변호를 합니다. ‘그가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변호를 합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방백들이 크게 화를 냅니다. 4-5절‘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은 다윗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강력하게 다윗을 다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칼끝을 겨눌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들을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용맹한 군사로 과거에 골리앗을 쳐 죽이고 돌아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바로 그 다윗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과 함께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비록 자신이 왕이었지만 반발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때문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불러 돌려보내게 됩니다.
3.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돌아가라고 명합니다.
위기를 벗어나는 다윗입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돌아가라고 명합니다. 6-7절‘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아기스는 다윗에게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기스도 다윗이 믿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다윗을 설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고’조용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을 그 누구보다도 다윗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전투에 참여하면 자신의 인생도 끝이 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도 완전히 어그러질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제 아기스의 이러한 조치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알면서도 다윗은 자신의 신실함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8절‘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온 뒤로 지금까지 나쁜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내 주 왕이여, 왜 나는 당신의 적과 싸우면 안 됩니까’ 이렇게 변명한 것은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함과 동시에 아기스가 한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잠잠했다면 다윗을 고소하던 방백들의 말이 참말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이 위선을 떱니다. 다윗은 너무나 억울해하며 8절‘내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의 진심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터에 블레셋 장군들이 나가지 말라고 하니 속으로는 좋았으나, 다윗은 이 일까지도 아기스의 신임을 얻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기스도 9절‘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은 내가 알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이 거절하니 내일 새벽에 일어나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이 기가 막힌 죄악의 현장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11절). 다윗은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이 블레셋에 있었지만, 동족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훗날 왕이 되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될 때,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 부하들의 모든 가족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다윗의 가족들이 살던 시글락을 아말렉이 침공해서 자기 가족과 부하들의 가족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 돌아온 다윗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혀간 자기의 가족들과 부하들의 가족들을 모두 다시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때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모든 가족들이 다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다 떠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장 적절한 때에 돌아와서 가족들을 다 찾아옴으로 다윗이 부하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을 얻도록 하나님은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악 앞에서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시는 사람을 하나님은 이처럼 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은 새벽에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시글락’으로 돌아갑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오지 않도록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인간은 한계가 뚜렷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불신앙과 연약함은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기스의 모습을 집중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한 성읍의 왕입니다. 그는 그 성읍에서 가장 용기 있고, 지혜 있는 자입니다.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1년 4개월 동안 다윗이 그렇게 속여 왔음에도 다윗의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해 왔습니다(27:10) 그런데도 아기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계가 뚜렷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편향적이고 또 조석변개합니까? 한결같지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의 지혜, 사람의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 보입니다. 우주선을 만들어 달에도 가고, 화성에도 보냅니다. 과학적으로 대단한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바이러스 하나 정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같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질 줄로 압니다. 그러나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탑이 언제 무너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5절‘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이 비록 실수를 해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블레셋 땅으로 내려가 믿음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피할 길을 여시며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윗이 전혀 이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해결하신 겁니다. 만일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 역시 틀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역시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의 실수에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획 이어가셨습니다. 다윗의 집을 통해 메시야를 내시려는 계획에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때때로 사람이 실수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로움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십니다. 바울은 고전10:13절‘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일, 즉 범죄 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도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요일 5:18절‘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벧후3:9절‘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위대했기 때문에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워야 하는 중대한 상황에 서 있을 때, 다윗이 정말 씻지 못할 죄악에 빠질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 방법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방백들을 통하여 다윗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을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이와 같이 원수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때를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고도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또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자기의 힘으로 죄악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와 순종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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