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13
제13대 명종(이화)의 여자들
인순왕후 심씨!
후궁 6명, 총 7명이다.
참 일주일이 빠듯하다.
하루는 안식해야 하는데..
그러나 자녀는 인순왕후의
순회세자(14세 졸) 하나뿐이었다.
명종, 뭐 땜시 저렇게 많이 후궁이 필요했을까?
애도 못 낳는데 말이다.^^
仁順王后 沈氏!
어질 인(仁)자에 순할 순(順)자를 쓰신다.
사람은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굳이 성명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질고 순하고 지혜로운 왕비였다.
보기 드물게 칭송을 듣는 이유는
그런 왕비들이 적었다는 이야기다.
저 세종비 소헌왕후와 비견할 만한 분이다.
중종 27년(1532) 5월에 청송 심씨 심강과
전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에 10살의 경원대군(명종)과
결혼했고 14세에 왕비가 된다.
인순왕후가 왕비로 있는 동안 20년은
저 유명한 문정왕후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게다가 명종은 마마보이었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은 대단했다.
자기 소생의 아들이 명종으로 열두살에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한다.
말이 수렴청정이지 자기 하고 싶는대로
다 했으니 여왕이나 다름 없었다.
*양재벽서사건(문정왕후 비방글 부착)을
보아도 문정왕후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원한을 아주 많이 산 모양이다.
남편인 명종은 유약했고,
시어머니는 드세고 게다가 조정의 실권은
시어머니 친정 윤씨 집안이 장악하고 있으니
숨이나 제대로 쉬었겠는가?
시집살이를 단단히 했다.
명종!
13대를 끝으로 왕비 소생의 적장자는 사라진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나이 14살에 병으로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세자는 호군 윤옥의 딸과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뒷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애미의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순회세자, 적장자의 차례를 끝내고 방계로
왕의 자리를 순회하게 만들어서 순회세자인가?
명종의 이미지는 마마보이다.
엄마가 현재 유행어로 타이거맘,
헬리콥터맘인 문정왕후이니 재위 22년 동안
20년을 엄마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했다.
왕으로서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외가 윤씨들이 하도 설치니
왕으로서 위신도 서지 않았다.
뭐라고 외가에 불평이라도 하면
문정왕후 귀에 바로 들어갔다.
문정왕후 18번 말씀이다.
"아니 주상!
이 애미와 외삼촌 윤원형이 없었다면
주상이 어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소?"
찍 소리도 못했다고 한다.
하긴 왕이 쥐가 아니니 어떻게 찍 소리를 내겠는가?
그러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안으로는 을사사화로 소윤파가 대윤파를
피의 대청소를 하고, 윤씨 일가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은 극에 달했고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은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많이 죽었다. ㅠㅠ
그래서 저 의적 임꺽정이 출현하게 된다.
大盜(道)無門(대도무문)!
큰 도적은 문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임꺽정이는 청석골을 근거로 백성들의
지원을 받아 가진자들 것을 빼앗아서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기가 지금 대권 잡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보다 지지율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비록 여론조사는 없었지만...
아쉽게도 참모였던 서림의 배반으로
붙잡혀서 형장의 이슬로 목이 달아났다.
밖에서는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 영암,
진도 일대를 약탈과 살인으로 쑥대밭을 만든다.
이것이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이다.
비변사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명종 임금님!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들 하나 있는 순회세자가
먼저 가버려서 후사도 없다.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이런 것이다.
후궁이 여섯이나 있어봐야 뭐하나?
후궁들이 문제가 아니고
명종의 불임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과도한 스트레스로 생산능력이 저하되었나보다.
그때 차병원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참, 아쉽다. ㅠㅠ
명종,
후사를 잇기 위해 무수리 장씨와 가깝게 지낸다.
너무 가깝게 지내다보니
후사는 커녕 명만 재촉하게 된다.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헛발질(?)만 하다가 1567년(재위 22년) 6월 34세로
경복궁 양심당에서 유언조차도 못하고 죽는다.
명종의 사망 원인은?
어머니 문정왕후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무수리 장씨와의 지나친 정사로
온몸의 기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들,
이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오래 살려면...특히 스트레스는
'silent killer'(조용한 암살자)라고 한다.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리고, 근심걱정 하지 말자.
우리가 하는 근심걱정 거리의
96%가 소용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꼭 근심걱정 하고 싶으면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에 딱 10분만 하자!
인순왕후!
참 지혜로웠다.
남편 명종이 죽자마자 바로 옥쇄를 감추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 태서난
덕흥대원군의 막내, 하성군을 왕으로 임명한다.
선조!
인순왕후님에게 백배 천배
인사를 드려도 모자랄 것이다.
왕을 시켜주었으니 말이다. 원래
시집살이를 많이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에게 더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한다.
악의 대물림이다.
그런데 인순왕후는 달랐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전횡을 보면서 많이 느꼈다.
"대비가 되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셨다.
선조가 친정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자 일년만에 수렴청정의 발을 싸들고 뒷궁으로 내려오셨다.
대신들 의견을 존중하고 자기 색깔을 고집하지 않았다.
인순왕후님!
문정왕후의 전철을 밟지 않고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지혜로운 왕비님 이셨다.
"짝~짝~짝"
1575년(선조 8년) 1월!
인자하고 지혜로우신 인순왕후님은 창경궁에서
44세로 이승의 여행을 마무리 하고 가셨다.
'정관의 치'로 태평성세를 이루었던 당태종과
그의 참모 위징의 말을 기록한 정관정요에 보면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고 나온다.
나라를 세우고 기업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쉬울 지도 모른다.
모두가 힘을 합쳐 단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 수성은
훨씬 힘이 더 들어갈 것이다.
초심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성종까지는
나라의 틀을 잡는데 성공했으나
연산군 이후로 수성의 노력은 사라졌다.
흥청망청하고 사욕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오늘날 모모 나라의 모습이다. ㅠㅠ
이럴 때는 초심을 생각하자!
오늘의 교훈이다.
이런 글들은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내일 또 계속됩니다 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