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금융산업의 발전방안
(기본방향)
한국의 금융산업은 낙후되어 있고 국민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금융기관 경영진과 금융관료에게는 꿀단지와 같이 좋다. 주주와 기존 직원에게도 꽤 괜찮다. 한국의 금융기관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도 과보호 덕으로 수익을 많이 내고 경영진은 엄청난 연봉을 챙긴다. 금융관료도 퇴임 후 비슷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한국의 금융산업이 금융기관 경영진과 금융관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경제를 위해 존재하게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추진해야 할 정책은 많지만 다음 세 가지가 우선이다.
첫째, 금융의 기본기능인 자금융통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여야 한다. 즉 영세사업자, 창업자, 저신용자 등에 대한 금융 접근성을 넓힐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영세기업과 창업자 등에 대한 자금 지원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미소금융, 햇살론과 같은 서민정책금융의 신설․확충보다는 신협 등 서민금융기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육성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서민금융도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조달된 자금으로 운영되어야 지속가능하다. 기부금이나 정부보증 등에 의존한 정책자금은 일시적인 지원효과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서민금융기관의 발전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영세사업자 등의 금융접근성 강화는 신협과 새마을금고, 농․수․축협의 단위조합, 상호저축은행의 육성과 제도정비가 핵심이다. 그리고 집세, 병원비, 등록금 등이 없어 대부업체나 사채업자로부터 당하는 약탈적 금융의 피해를 줄이는 것은 금융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복지의 문제이다. 서민금융 확충, 대부업체 등에 대한 규제와 함께 주거와 의료, 교육 등 인간의 기본적 생활을 위한 복지 확충이 시급하다.
둘째는 금융도 하나의 산업으로서 괜찮은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고 경쟁력을 갖고 실물 부분과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쟁력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통해 키워진다. 국내건 해외건 경쟁이 있어야 경쟁력 있는 금융기관이 나온다. 먼저 손쉬운 국내에서라도 은행에 대한 과보호를 조금씩 걷어내 경쟁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기관 신규설립을 단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은행 등 금융기관 신규설립은 선진국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1993년 이후 은행 신규설립이 없었다. 은행 신규설립 허용은 감독당국, 기존 은행, 신규 설립은행 모두에게 장애물이 많고 어려운 일이다. 정책당국은 은행 등의 신규설립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신규설립 은행이 쉽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인프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셋째는 금융감독체계와 감독방식의 전면적 개편이다. 한국 금융산업은 감독당국의 철저한 통제 하에 있고 금융산업의 많은 문제가 감독당국의 전문성․책임성․중립성 등의 부족에 기인한다. 금융관료는 관료 중에서도 퇴임 후에 고액연봉 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챙겨 온 집단일 것이다. 금융관료는 오랫동안 많은 권한과 혜택을 누려왔음에도 금융산업은 한국에서 가장 낙후된 산업의 하나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조직을 통합하여 책임성․전문성․중립성을 갖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감독조직 개편은 그간 많은 논의가 있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의 사례가 있어 추진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금융위, 금감원,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 이해당사자 간의 의견조정이 안 되는 것은 금융감독권이 주는 이권과 특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권과 특혜를 줄이기 위해서는 금융 분야의 관피아를 완전 철폐하고 금융감독의 업무 방식를 전면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이외에도 금융규제의 투명성․합리성을 높이고 금융산업의 국제화를 촉진시키는 작업도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중요한 정책과제이다. 한 분야에서 너무 많은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부담이 크고 쉽게 피로감이 생긴다. 앞의 세 가지 과제도 우선순위를 정해 두 가지 정도는 먼저 추진하고 나머지 과제는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유리하다.
(서민금융기관의 지원육성)
한국에서 서민금융기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신용협동조합과 새마을금고, 상호저축은행, 농수축협의 단위조합이 있다. 기관별로 처한 상황이 다르고 지원․육성방법도 달라야 한다.
첫째, 신협과 새마을금고는 한국에서 서민금융과 지역금융의 대표 금융기관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많은 지원과 독려가 필요하다. 세제 혜택의 존치, 업무규제의 완화와 건전성 규제의 강화, 중앙회와 연합회의 특수은행화와 함께 관계금융을 보다 많이 취급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서민금융은 소액거래로 취급 비용이 크고 차입자의 신용도가 낮다. 신협과 새마을금고가 타 금융기관과의 경쟁을 취해서 예금과 출자금에 대한 세제혜택은 현재 수준에서 상당기간 유지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규모가 작다고 제한해온 자기앞수표 발행, 펀드판매 대행, 한국은행과의 거래 등의 업무 규제를 없애 은행 등과 경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면 거액대출 제한 등 건전성 규제는 강화하여 부실화 가능성은 줄여야 한다.
그리고 신용협동조합중앙회와 새마을금고연합회는 농협중앙회와 수협중앙회와 같이 특수은행화 하여 폭 넓은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신협과 새마을금고와 거래하던 영세기업이 사업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현재는 대부분 은행으로 거래 금융기관을 바꾼다. 신협 등의 입장에서 어렵게 지원해서 키워 논 거래처를 빼앗기는 것이다. 거래기업의 입장에서도 오랜 거래관계를 가진 신협 등을 떠나 은행과 새로운 거래관계를 수립하는데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든다. 특수은행화한 신협중앙회 등이 성장한 기업에 대해 더 많은 규모의 대출과 복잡한 외환서비스 등을 제공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다만 중앙회와 연합회가 개별 신협 등과 업무 경합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중앙회와 연합회는 가계예금의 수취와 대출, 일정 규모 이하의 중소기업 대출 등을 취급할 수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지면 한국의 신협과 새마을금고 제도도 독일 협동조합은행 제도와 유사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영세사업자 등의 금융접근성이 커지지 않는다. 담보나 과거 실적 등 객관적 자료가 부족한 기업이나 개인 중에서 대출상환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골라내어 대출을 해주는 관계금융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관계금융은 대출 대상자들과의 오랜 접촉과 관찰 등을 통해 정량적 자료보다는 차입자의 평소 행동과 평판 등 정성적 자료를 중심으로 대출상환 가능성을 평가한다. 관계금융은 금융기관의 관리비용 증가, 대출기업의 협상력 약화 가능성 등이 있지만 창업자나 영세사업자가 담보나 보증 없이 적절한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에서 관심이 적고 비용이 많이 드는 관계금융이 활성화 되려면 신협, 새마을금고 직원과 감독당국의 더 많은 노력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 신협 등의 경우 1997년 IMF 금융위기 이전에 신용대출이 현재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볼 때 관계금융의 활성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정책당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협과 새마을금고가 관계금융 등 본연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면 협동조합기본법을 개정하여 금융․보험업에서도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금융․보험 분야에서 새로운 협동조합이 생겨나 풀뿌리 금융을 키워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농․수․축협의 단위조합은 진짜 조합원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조합원 제도와 선거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농․수협은 정부지원이 많고 규모도 크고 기본 체계도 갖추어져 있으나, 조합원보다는 조합장과 조합직원을 위한 조직으로 변해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 있는 짝뚱 조합원을 걸러내는 일, 기존 조합장에게 유리한 선거제도 개혁, 조합장과 조합직원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농․수협이 농민과 어민 등 조합원을 위한 조직으로 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원 제도의 개선은 신용협동조합 등에도 적용하여야 한다.
셋째, 서민금융기관의 역할을 못하는 상호저축은행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상호저축은행은 1972년 8월 사금융 양성화 조치의 하나로 사설 무진회사 등을 제도권 금융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2001년 3월에는 상호신용금고에서 상호저축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문제는 2006년 5월에 88클럽(BIS 자기자본비율 8% 이상, 고정이하 여신 8% 이하)에 해당하는 저축은행에 대해서 동일인 여신한도 등 건전성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생겨났다. 상호저축은행의 절반 정도가 88클럽에 해당되고 이들은 서민금융과 거래가 먼 부동산 PF대출 등과 같은 고수익․고위험 거액대출을 취급하다가 부실화 되었다.
상호저축은행은 신협, 새마을금고와 경쟁하는 서민금융기관 보다는 은행과 서민금융기관 사이를 채워주는 금융기관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살아남은 저축은행들은 서민들에게 급전을 빌려주는 제도화된 대부업체 업무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부동산 PF대출보다는 문제가 적지만 예금수취 금융기관이 고리의 대부업에 전념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은 아니다.
신용도가 떨어지는 영세기업과 소규모 신설기업 등 보다 생산적인 분야에 대출을 많이 하는 저축은행을 우대할 필요가 있다. 생산적인 분야에 대한 대출비중이 크고 재무상태가 양호하고 소유구조상 은행법상 금산분리 규제 등에 저촉되지 않은 저축은행은 일반은행으로 전환시켜주는 것도 좋은 정책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