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5> 권오민
“무엇을, 왜… 깨달음도 시대따라 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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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권오민 교수는 “무엇을 통찰할 것인가에 따라 선(禪)의 방법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시민선방에서 참선하는 불자들. |
오늘날 ‘깨달음’의 백가쟁명의 시기가 도래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말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그에 관한 온갖 행법 또한 소수 수행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또 다른 산업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깨닫고자 하는 것인가? 정작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무엇을 깨치라고 말하는 것인가?
흔히들 진리라고 말하지만,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진리를 외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진리’란, 굳이 원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말을 발한 화자의 관념만큼이나 무량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사상사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초기불교에서 직접적으로 진리에 대응하는 술어는 4성제의 '제'일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다. 그것은 숲 속에서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이듯이 일체법 중의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성제는 대승의 반야공관(空觀)에 의해 방편설로 전락하고 말며, 공관 역시 유식(唯識)의 도리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유가행자들에 의하면, 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이라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 궁극적 취지는 밝히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식성이었다.
나아가 유식성은 본래 청정한 자성인 진여 불성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동아시아에 이르러 그들의 통일적 불교관에 따라 3제원융(천태종)이나 사사무애(화엄종), 혹은 본래무일물(선종)을 세계의 실상 즉 진리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모두는 중생 근기에 따른 방편일 뿐 본질과 목적은 동일한 것이라고.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온갖 부파의 분열은 차치하더라도 대소승 간의 갈등, 중관과 유식의 대립, 교종과 선종, 남종과 북종, 나아가 남종 내부에서조차 온갖 정사(正邪)의 논란이 제기되었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돈점의 논쟁이 이어져 그것이 마치 불교학의 중심문제인양 여겨지기도 하였다.
불교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는 결국 인간이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지양하기도 하였으며, 종합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이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끝자락에 서서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남겨진 불교만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국불교가 거쳐온 지난 600년간의 굴절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여도, 혹 그것은 이미 박제가 된 구호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오늘날 어떤 이들은 그 대안을 남방의 위빠사나에서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생각하는 그러한 구호 중의 하나는 대승은 자리이타를 추구하는 반면 소승은 오로지 자리만을 추구하며, 대승은 실천수행을 중시하지만 소승은 이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론위주인 소승불교의 수행법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한국불교의 전통인 조사선과 이러한 위빠싸나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것이 지난 2000년 혹은 1500년에 걸쳐 ‘소승’ 혹은 ‘소승선’으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어떠한 반성적인 검토도 없이. 만약 진실로 그러하다면, 그것을 어리석은 이들이 행하는 소승선[愚夫所行禪]으로 규정한 ‘능가경’이나 ‘규봉종밀’은 마땅히 파기되고 비판받아야 한다.
단언하건대 이론만을 중시한 불교는 없다. 세간일반에서의 불교에 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는 ‘불교=선(참선)=수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선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것도 단박에. 깨달음은 물론이거니와 알콜 중독 등의 사회적인 제 문제들까지도. 참선도 해보지 않고서 어찌 불교에 대해 운운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대저 선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선은 범어 드야나(dhyna)의 음역인 선나(禪那)에서 ‘나’가 탈락한 말로서, ‘고요히 생각하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래서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기도 한다. 보통 선은 정(定)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선정’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정’은 사마파티(samapatti)의 역어로서, 어지러운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평등하게 된 상태이며, 그래서 등지(等至)로 번역하기도 한다. 곧 선 혹은 선정이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 전념하는 명상을 말하는 것으로, 삼매나 요가도 명상의 일종이며, 마음의 작용이 멈춘다는 뜻의 사마타(止)도 역시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명상할 것인가? 불교의 목적이 열반이나 해탈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필경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가능하다. 인도전통에서 철학에 대응하는 술어는 다르샤나(darana)이다. 다르샤나는 ‘보다’는 뜻의 동사어근 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세계의 실상이나 존재본성에 대한 통찰 직관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과 사유에 의한 우리의 일상적 개념적 지식과는 다른 것으로, 한역불전에서는 견(見)이나 관(觀)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데, 8정도 중 정견의 ‘견’이 바로 그것이다.
선은 바로 통찰의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이다. 초기불교 이래 통찰의 지혜는 언제나 계율과 명상에 수반되는 것이었다. 계율과 명상과 지혜는 해탈의 세 축이었으며, 명상[止]과 통찰[觀]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찰의 대상은 학파나 시대에 따라 한결같지 않았으며, 따라서 선이 오로지 ‘이 뭣고’의 간화선만을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을 통찰할 것인가에 따라 선의 방법도 목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진리란 무량의 스펙트럼… 고정불변적 실체 없어
무엇을 통찰하느냐에 따라 선의 방법.목적 달라져
흔히들 소승불교는 이론 위주라고 하지만, 이후 불교수행론의 단초가 된 자량위(예비적 준비단계) 가행위(본격적인 준비단계) 견도위(통찰의 단계) 수도위(반복된 통찰의 단계) 무학위(열반의 단계)의 5위는 설일체유부라고 하는 부파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4성제 중 고제인 무상과 무아를 통찰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들에 의하는 한,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된 세계를 영원하고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괴로움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무상과 무아는 다만 개념적 이해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욕망 등의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어떠한 언어적 매개도 통하지 않은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통찰로써만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그 같은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발심으로부터 3생에 걸친 험난한 구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데, 무명과 같은 이지적 번뇌는 마치 해머를 내리치는 순간 돌이 깨어지듯이 통찰[見道]의 순간 끊어지지만, 탐욕과 같은 정의적인 번뇌는 연근의 힘줄처럼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반복된 통찰[修道]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반복된 통찰[修]이 청문[聞]과 주체적 사유[思]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불교에 공통된 사실로서, 이 모두가 그들이 말하는 수행의 의미였다.
다시 반문하지만,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또한 왜 깨닫고자 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기 위함인가, 부처님를 본받기 위함인가? 오늘날의 사회는 폐쇄된 사회가 아닐뿐더러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깨달음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과 개방된 논의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에 따라 ‘왜’와 ‘어떻게’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불교는 좀더 지적으로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찍이 대각국사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성상겸학(性相兼學)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선종 그 중에서도 특히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며, 성종(性宗)계통이 교학의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 전통적 불교 교육기관인 강원에서는 사집과에서 서장 도서 선요 절요를 배우며, 사교과에서는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을, 대교과에서는 화엄경을 배운다. 금강경을 제외한다면 중국선종서 내지 성종 일색이며, 금강경 또한 불교사상사라는 관점을 완전히 배제한 채 혜능과 결부시켜 이른바 공소현(空所顯)의 진리인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기신론 이전의 불교, 유식도 중관도 아비달마도 사라져버렸다.
불교의 바다는 넓고도 깊다. 대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이 어떤 한 사상이 발생하고 전개하는 데에는 항상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계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계기가 간과될 때 역사적 사건이 절대적인 운명처럼 다가서듯이 사상 역시 그러하여 절대적인 이념으로 과장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 뭣고’의 불교는 앞뒤가 막혀버린 과장된 불교는 아닐까?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설혹 진리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그 진리를 접하고 해석하는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무엇이 먼저인가?
권오민/ 경상대 인문학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70호/ 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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