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파(Sherpa)란 티베트어로 '동쪽 사람'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히말라야 등산에 없어서는 안 될 등산안내자 즉 '도우미'란 의미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상업등반대
셰르파는 크게 셰르파족과 보티아(Bhotia)족으로 구분한다. 셰르파는 에베레스트 남쪽기슭인 쿰부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 티베트족이고 보티아는 티베트 동부에서 시킴이나 쿰부 지방으로 이주한 티베트족이다. 쿰부 지역에서는 이들을 캄바(Kamba)라고 부른다. 이들이 다른 점은 토박이냐, 이주민이냐 하는 것이며 모두 티베트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초의 셰르파족은 16세기 티베트 동부 캄(Kham)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피난을 위해 티베트와 네팔의 국경에 있는 낭파라(5,716m) 고개를 넘어 에베레스트 남쪽 기슭에 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보테코시 강과 두드코시 강의 가파른 계곡이나 협곡에 있는 쿰부와 파라크에 정착했다. 그 후 점차 농사에 유리한 쿰부와 파라크 남쪽의 솔루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힌두교(네팔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솔루‒쿰부 지역의 오지마을들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대승불교인 라마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보다 개방된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고유의 언어와 문자가 없다.
이들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산악부족이 된 데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등반이 기원이 되었다. 1920년대에 에베레스트를 정찰과 시등(始登), 그리고 많은 짐을 운반할 인부와 잡일을 할 막일꾼들이 필요했다. 1921년, 에베레스트 정찰대에 참가한 의사 켈라스(Alexander Kellas) 박사는 세 번(1907, 1911, 1912)에 걸친 히말라야 6000미터 급 등반에서 셰르파족이 높은 고도에 잘 적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추천으로 1921년 정찰에 셰르파족을 고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찰에 참여한 인물 중에는 인도 식민지정부에서 근무한 경력자들도 있다. 그중 군인들은 지금도 용병으로 유명한 구르카 병을 채용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용감한 것과 높은 산에서 짐을 운반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금방 증명되었다. 그리고 셰르파족처럼 추운 기후와 높은 고도 생활에 익숙한 강인한 인종은 없다는 켈라스 박사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들이 정찰대에 채용된 것은 출발지인 인도북서부의 휴양도시 다르질링에 막일을 하러 온 여러 소수민족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막일하는 것보다 임금은 적게 받았지만 일이 쉬웠기 때문에 원정대에 따라 나선 것이다.
초기 세 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정찰과 시등에서 셰르파들의 능력과 가치가 입증되자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원정대는 그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1953년 5월 에베레스트를 초등정한 텐징 노르가이에 의해 셰르파라는 단어는 세계적인 단어가 되었다. 원정대에 참가하는 셰르파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들은 인도어로 우두머리를 뜻하는 사다(Sirdar·Sirder)가 된다. 사다는 짐꾼을 선별해 그들에게 교육해 그들의 고충을 알리고, 산중에서 할 작업을 조직한다.
처음에 셰르파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원정대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미터 고봉을 오르겠다는 야심을 지닌 셰르파는 없었다. 그러나 1953년 텐징이 에베레스트를 올라 그들의 전설대로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황금사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후부터 셰르파들은 신기록에 도전하고 상업등반대에 참가하고 여행사를 운영하는 등 수익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현재 네팔에는 약 7만 명의 셰르파족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