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을 가다 -18
2014년 10월 10일
에필로그
산동성
산동성은 우리와 가까운 지역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태항산맥 서쪽을
산서(山西),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불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있다.
산동성의 인구는 약 1억이며 중국 각 성중 두번째 많은 인구가 살고있고
넓이는 15만 평방킬로미터로 우리나라(9.9평방킬로미터)의 약 1.5배가
된다. 농업은 밀, 옥수수등이많고 남부 일부에서는 벼 농사도 하고있다.
황하 하류에서 석유가 생산되며 교통의 발달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서쪽의 황하유역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넓은 평야를 이루고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상(商)과 주(周)의 영향이 있었고 춘추전국시대 濟나라와
魯나라가 있었다. 5호16국 시대에는 후월(後越), 전연(前燕), 전진(前秦)
후연(後燕), 남연(南燕), 송(宋) 등에 점령당하고, 南北朝시대에는 북위에
점령당한다. 근세에와서는 1897년 청도가 독일에 점령당하고,위해는
영국이 점령하였다가 1922년 청도가 중국에 반환되고 1930년 위해가
반환되었다. 1937년 일본이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1945년
까지 일본이 점령하고있었다.
이런 역사적 아픔을 가진 산동성은 지금 동부해안 경제개발로 중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기후는 온대기후로 해양성
기후도 띄고있다. 주요도시로는 부성급시 2개소, 지급시15개소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중국 국공 내전 때 공산당을 피해 많은
산동성 중국인이 우리나라로 피신하여왔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화교는
산동성 출신이다.
산동성 지명
여행의 발자취
이번 여행은 꽉찬 4박5일로 진행했지만 워낙 갈데가 많고 볼데가 많은 지역
이라 다 가지못하고 다 보지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어쩔수없는 package
여행이라 그래도 짧은 일정을 감안하면 많이 보고 많이 느끼게한 유익한
여행이었다고 자평 해본다.
이번 일정을 대강 훝어보면 첫날(10/6) 인천공항에서 아침일찍 출발,
청도공항 9시 도착 가이드 미팅 후 기내 조식이 약간 부실하여 점심을
한식으로 시간 이르게 먹고 바로 유방을 향하여 출발. 유방가는 도로
양변의 옥수수밭과(옥수수는 수확 다하고 수수대만 남아있었음) 농촌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500년 전통 연(鳶)의 고장인 유방의 양가부 민속촌 방문
하여 연의 역사와 우리의 추억속에 깃든 그런 연만이 아닌 연을 그림과,
종이, 서예, 죽공예까지 조화시켜 예술의 한 장르로 승화시킨 현장을 방문하였고
임치와 제남간 고속도로 공사 중 2000년 전 제후의 무덤에 순장된 말들과 마차를
발견하여 그자리에 박물관으로 꾸민 고차박물관(古車博物館)을 방문,
다시 가다가 주무왕과 강태공과 주공과 더불어 상(商)의 주왕(紂王)을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강태공 사당을 방문하여 그 분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그 분이 많은 성씨(姓氏)의 조상이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임치에서 1박한 우리는 산동성의 수도이며 고도(古도)로 인구1,200만명인 제남을
방문하여 지금도 샘에서 나오는 물로 호수가 된 제남의 쉼터인 대명호수에서
여유를 가졌고 제남 시내 한 복판을 가로질러 맑은 샘물들이 솟고있는 표돌천
과 제남광장등 관광 후 우리의 1차 여행 목적 태산이있는 태안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태산 기슭에 마련한 매머드한 야외 공연장에서 태산에서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리는 장면들을 연출한 봉선대전(封禪大典)을 관람후 세라톤
호텔에서 1박 후 다음날 아침 태산에 케이블카로 등정하였다.
타 중국 산들에 비해 실망감도 있었으나 1,545m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산은 영산으로 많은 역대 황제들이 옥황상제에게 제사 지낸곳으로 유명하고
지금도 중국인들이 소원을 빌기위하여 7500여개의 계단을 오르는
그런 산이었다. 도교의 중심지며 불교사찰이 많은 곳이다. 또한 아름다운
바위에 많은 서각이 새겨져있어 그것이 자연을 해친것인지 그 자체가 역사인지,
문화인지 모르나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였다.
태산을 내려와 국제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공자의 고향을 찾아서" 곡부로 이동하여 궐리빈사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관광에 들어갔다. 공자의 사당이있는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 직계로 장손이
살던 공부(孔府), 공자의 무덤, 공자아들 무덤, 공자 손자 무덤이있고 공자의
76대손까지 뭍혀있는 공림(孔林)을 방문하여 2,500여년전 위인들을 되새겨보고
호텔에서 푹 쉬었다. 4일 째 아침에는 곡부에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추성으로
가서 성인에 버금간다하여 아성(亞聖)이라 부르는 맹자의 사당인 맹묘(孟廟)와
맹자 후손이 살던 맹부(孟府)까지 방문하여 그 분의 고고한 숨결을 마시고
다시 곡부로 되돌아와 공자 문화원, 공자연구원, 안회의 사당인 안묘(安廟)
주공사당인 주공묘(周公廟)를 방문하고 청도로 향하여 뻥 뚤린 고속도로로
달려왔다.
청도의 명물인 교주만대교(賋州灣大橋)를 지나 청도에 도착, 맛있는
한식 부페로 저녁을 먹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5일 째 마지막날은
청도 시내 관광을하였다. 독일 총독이 살던 영빈관, 부두였던 잔교, 회란각
5.4광장, 욧트경기장, 소어산 전망대. 칭다오 맥주공장, 시내번화가 등 관광
으로 이번 관광을 마치게되었다.
인천공항
유방 양가부 민속촌
임치 고차박물관
강태공 사당
제남 대명호
제남 표돌천
태산 봉선대전 쇼
태 산
태산 옥황상제 사당
1545m 태산정상에 위치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공자무덤
맹묘(孟廟)
주공묘(周公廟)
안 묘(顔廟) 안회사당
공자연구원
공자문화원
청도 교주만 대교
청도 맥주 공장
청도 구 시가지
청도 잔교
청도 빌딩 숲
영빈관(구 독일총독 관저)
잔교 공원
청도공항
에필로그
나는 중국여러 곳을 많이 가 봤지만 이 쪽 산동성은 처음이었다.
청도와 제남사이에 그런 넓은 평야가 있는 줄도 몰랐고 중국 농촌에
일하는 사람은 안 보이고 간혹 트랙터로 밭가는 것만 목격하였다.
중국 농촌도 우리와 똑 같이 농촌 젊은이는 공장많은 도시로 다 나가버려
농사 지을 사람이 없다고한다. 밭들은 사람 손으로 할 수없을 정도로
넓게 경지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농산물은 우리 서해 쪽에서
나는 농산물과 다를 것이 뭐있으랴! 신뢰가 가는 풍경이었다.
사통팔달하고 쭉쭉뻗은 고속도로들, 그 위로 질주하는 차량행렬
그리고 여행 다니는 중국인들! 이런풍경이 요즈음의 중국풍경이다
물론 중국에서 상해, 북경, 청도 등 동부 쪽은 생활 수준이 높은것은
알고있지만 청도시내에 이렇게 외제차가 많이 굴러 다닐 줄은 몰랐다.
가이드 말로는 청도시내 초등학교 등교시간이면 자가용으로 등 하교
시키는 엄마들때문에 학교 주변은 심한 교통 체증을 일으킨다고한다.
중국에 자전거 부대가 시내를 점령하던 시대는 옛말이 되었다.
이번여행에서 너무 느낀것이 많고 배운것이많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있고, 문명의 발상지이기도하며, 많은 사상가, 철학자
를 배출하고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중국이지만 오랜 봉건제 실시로 통일된
나라가 별로 없던 역사적 배경속에서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이민족이
역사를 이끌어 가기도했던 중국! 비록 우리와 이데오르기가 맞지 안았던
과거의 역사가 있지만 지금은 시장 경제를 도입하여 일취월장 발전하고
있는 무서운 나라가 되었다.
중국의 발전이 우리에게 이로운점도 있을것이고 해로운 점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동북공정이라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이다.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처럼 나라를 말아먹는 당파싸움만
하지말고 너무나 강대한 중국을 옆에 두고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중국의 인구는 15억이다. 초 강대국이다.
끝
|
첫댓글 "산동성을가다" 전 편을 다 읽었습니다. 나는 안 가봤지만 가 본겄처럼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계속 활동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