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원재 유교문화해설(108)
《육사시인이시여 청포도 익어가는 고향마을에서 편히 잠드소서》
○4/5일 육사선생의 묘소 이장이 있었다.
육사 이원록선생은 일제 암흑기 저항 시(詩)와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민족시인이다.
그는 일제 암흑기 요시찰 인물로 낙인되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열일곱 번이나 감옥에 드나드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1932년 북경에서 윤세주 의사를 만나 그의 권유에 따라 의열단에 가입하고 간부학교로도 불린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였으나 1934년 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43년 일제 패망을 앞두고 최후의 발악을 할 때 특수임무를 띄고 북경에 다녀왔다가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1월 모진 고문으로 북경의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순국이후에도 고단한 행적이 계속된다.
1944.1.16. 새벽5시 모진 고문으로 싸늘한 감옥에서 순국하자 북경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인 친척 이병희(李丙禧)여사에게 연락이 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을 치르고 사망신고를 하였다. 1944.2.1경 육사의 동생 이원창(李源昌)이 일제 관원의 입회하에 화장된 육사의 유해를 인계받아 국내로 이송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1946년 당시에 일점 혈육인 딸 옥비(6살)가 있었지만 대를 아들이 없자 막내동생 이원창의 3남 동박(東博)을 양자로 입적하였다.
1960년에 육사의 큰집 장조카 이동영(李東英)이 미아리 공동묘지에 모셔진 육사 유해를 고향 원촌리 마채골 뒷산에 이장하였고 1983년 6월 육사의 부인(안일양)이 별세하자 육사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2004년 육사문학관이 개관된 후 2015년 문학관이 확장 개관 되면서 많은 관광객과 문인들이 문학관을 찾게 되었고 육사에 대한 추모열기도 높아지게 되면서 육사묘소를 찾는 문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육사묘소는 이육사문학관에서 왕복 6km지점 외딴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묘소 가는길이 위치상 높고 길도 좁아 방문객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여론에 따라 가족과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이 협의 끝에 문학관 인근에 이장하기로 결정하였다.
2023년 4월 5일 비가 오는 가운데 육사의 딸 옥비(沃非)여사와 손자(승엽,상엽)가 주관하여 육사부부의 묘소와 “民族詩人 李陸史眞城李公源祿之墓, 配儒人順興安氏 祔”라고 새겨진 묘비를 함께 문학관 인근 100m지점 뒷산에 합폄(合窆)으로 이장하고 육사의 아들 동박(東博)의 유골도 묘소 계하에 이장하였다.
이날 이장 행사에는 이동시 이육사추모사업회 이사장과 임원, 손병희 육사문학관장과 직원,내빈으로 김형동 국회의원, 정동호 전 안동시장, 김법수 경북북부보훈지청장, 정진영 경북독립기념관장, 권광택 도의원, 이동원 정신문화재단대표, 이진구 추모사업회명예이사와 기관 단체장, 광복회, 문인, 예술인 등 60여명이 참여하였다.
묘소이장과 더불어 생시와 사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육사선생이 고향 원촌마을 뒷산에 편히 잠들게 되었고 문학관을 찾는 방문객과 문인들이 쉽게 만나 추모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이육사추모사업회는 안동시 권기창시장의 지원으로 묘소정비와 단장을 마친 뒤 일반인들의 공식 참배를 허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 육사 이원록(李源祿,1904~1944)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안동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선생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할아버지 이중직(李中稙)에게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하였고 12세에는 할아버지가 맡고 있던 보문의숙(寶文義塾)에 다녔다.
1920년 가족들이 모두 대구 남산동에 이주하여 정착한 후 1921년 영천 화북면 안용락의 따님 안일양과 결혼하였다. 1922년 영천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에 공부하였고,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여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5년 항일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 후 1927년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형(源祺) 및 동생(源朝)과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주범 장진홍이 체포되자 석방된 후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검속되기도 한다.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여 근무하였는데, 그 사이 1930년 1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후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제 1기생으로 입학한다.
1933년 4월 군관학교 졸업 후 1934년 1월 귀국하였으나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난 후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모친과 아우(源一)와 서울 명륜동에 기거하면서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하였다.
1941년 딸 옥비가 태어난 후 부친상을 당하였고 이듬해 모친과 형(源祺)의 잇달은 상을 당하였다.
1943년 북경에 갔다가 모친과 맏형의 소상에 참석키 위해 4월 고향에 왔다가 그해 6월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감옥에 드나들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육사는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대표적인 저항문인으로 민족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 이육사 추모사업 및 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2008년 (사)이육사추모사업회가 발족되어 육사선생의 따님 이옥비 여사를 문학관 상임이사로 모셔와 안동시가 운영하고 있던 이육사문학관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문학관에는 육사선생의 자료와 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일제 강점기 저항문학과 독립투쟁으로 한 몸을 불사른 육사 이원록선생의 숭고한 얼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활동하고 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의 사업으로는 문학관의 상설운영과 이육사순국일 추념식, 이육사시문학상 시상, 해외이육사문학제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간의 육사추모사업을 살펴보면
- 1943년 육사 사후 1945년 동생 원조(源朝)가 유시(遺詩) 《꽃》, 《광야(曠野)》를 소개한 후 이듬해 1946년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출판하였고.
-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고 1968년 5월 낙동강변 영호대교 입구에 광야시비 건립 되었다.
- 1991.10. 이육사연구회(회장 최유근) 발족하여
- 1993.10. 원촌마을 이육사청포도시비및 육사태실(육우당) 유허비 건립하였다.
- 1994. 8. 21 이육사 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이육사기념사업회’ 창립하여
- 1995년 7월 문화체육부 이육사를 이달의 문화인물(1995년 7월)로 선정되었고
- 2000.2월 이육사기념사업회 총회에서 2004년 탄신100주년, 순국60주기에 맞추어 이육사문학관 개관및 생가 복원키로 추진하였다.
- 2002.11~2004.7.31. 1차 이육사문학관 및 육사생가복원 사업 추진
- 2003.11.24. 탄신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 구성
- 2004년 7월 탄신 100주년, 순국 60주기에 생가 복원 및 이육사문학관을 개관하여 안동시가 직영 운영.
- 2008년 7월 15일 (사)이육사추모사업회 발족하여 이육사문학관 위탁 운영
- 2013~2015.12.23. 유교문화권개발사업으로 원촌마을 유림문학유토피아 사업으로 문학관을 확장 증축하고 생가신축, 청포도 시비공원조성과 주차장, 연수시설 신축 주변정비사업을 마무리하여 많은 관광객이 문학관을 찾고 있다.
○ 원촌마을 회상
초가 --이육사--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
돌담울이 고성같이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묻혀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묵화 한 폭 좀이 쳐
띄엄띄엄 보이는 그림 조각은
앞밭에 보리밭에 말매나물 캐러 간 가시내는
가시내와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술레짠 두 뺨 위에 모매꽃이 피었고
그네 줄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더니
앞내강에 씨레나무 밀려나리면
젊은이는 젊은이와 뗏목을 타고
돈 벌러 항구로 흘러 간 몇 달에
서릿발 잎져도 못 오면 바람이 분다
피로 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아가고
곰처럼 어린 놈이 북극을 꿈꾸는데
늙은이는 늙은이와 싸우는 입김도
벽에 서려 성애 끼는 한겨울 밤은
동리의 밀고자인 강물조차 얼붙는다.
* 이육사가 그린 고향의 모습 ‘초가’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고향의 모습을 시로 형상화하여 어려워져가는 일제 암흑기의 시인의 아픈 현실을 추운 겨울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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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항일 투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언어적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의지를 드러낸다. 또한, 베이징 유학 시절에 받은 중국 문학의 영향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태도도 나타난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의 저항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적인 면모와 다른 부분이며,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두산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