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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서전서숙 세운 이상설 … 백성들의 복, 사대부의 영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05년의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1907년의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왕은 순종이었지만 모든 주요 직책은 매국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춥고 긴 동토(凍土)였다.
1 이상설이 의병장 출신의 이승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2 유인석의 초상화.
절망을 넘어서
④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이었다.
이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이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이회영의 평생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이관직(李觀稙)은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정규(李丁奎)는
이관직은 이상설 자신이 “내가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만주에 나아가 운동을 열고자 한다”고 자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가 1917년 망명지 연해주(沿海州)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만 47세의 나이로 병사했을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하고 두고두고 아쉬워한 것은 이유가 있다. 명실상부한 국사(國士)였던 그를 제쳐두고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노선 투쟁과 자리다툼을 벌이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1 이상설이 의병장 출신의 이승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2 유인석의 초상화.
망명 당시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한데다 국제적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다.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었던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李用雨)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와 이회영과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일화는 많다.
10대 때 신흥사(新興寺)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는데, 위당 정인보는 “통역 정도는 오히려 얕은 데 속해서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는데, 선교사 헐버트에게 배웠다고 전해지는 것은 회화일 것이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이상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했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대한 문제를 반나절이나 씨름하다 못 풀고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풀었다고 기뻐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정인보의 제자인 강화학파 민영규 교수는 “보재와 치재(恥齋: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을 공부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고 전하는 대로 소론가 자제답게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창(李建昌)이 24세의 이상설을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뒤를 이을 대학자로 지목한 것은 조선의 학문 전통을 바탕으로 양명학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흡수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정인보가 “조정에서는 그(이상설)를 물에 뜬 돛대로 생각했고, 선비들은 주석(柱石)으로 의지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물여섯의 나이로 관제 개혁 전의 성균관 대사성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이건창이 “(이상설은) 나라의 부유함의 상징이요, 백성들의 복이요, 사대부의 영예”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앞세우면서 고난의 인생길에 접어들게 된다. 1905년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광경을 때마침 백범 김구가 목도하고
용정촌이 현재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인데, 이상설은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연다. 북간도이면서 동만주에 속했던 용정촌은 북동쪽으로는 러시아령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내와 통하는 교통 요지이고 무엇보다 교포들이 계속 이주하고 있어서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당한 장소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한 업적은 좁은 반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자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유림(儒林) 출신 의병장들도 망명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원도 춘천 출신의 유인석(柳麟錫)과 경상도 성주 출신의 이승희(李承熙)였다. 유인석과 이승희는 같은 유림이지만 사상적 배경은 조금 달랐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유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이었는데, 이항로는 이(理)를 기(氣)보다 높이는 ‘이존기비(理尊氣卑)’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理’가 주가 되고 ‘기氣’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지나 기氣가 주가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심전주리설(心專主理說)은 대외적 관점에서 이(理)를 명나라·소중화(조선)로 대치하고, 기(氣)를 일본·서양으로 대치하면 강력한 침략 저항 논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인 관점에서 ‘이理’가 양반계급으로 대치되고 ‘기氣’가 일반 백성으로 대치되면 다시 성리학 체제로 회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항로가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萬東廟:명 신종·의종의 사당) 복설을 청한 것이 그의 이런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승희는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아들이었다. 이진상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심(心)과 이(理)를 별개로 본 것과 달리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심즉리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명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는 양명학에 동조했던 셈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학파에서 면우(<4FDB>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회당(晦堂) 장석영(張錫
英:1851~1929), 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다.
이승희의 문집인
이승희는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함북 사람 김(金) 감리(監理)의 집에 거주할 때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난다.
이렇게 망국 이전 만주 용정촌에 이어 한민족이 흥하는 터전이란 뜻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한흥동(韓興洞)이 개신 유림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이상설 (한국 독립운동가) [李相卨]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이무렵부터 여준(呂準)·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범세(李範世)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으나, 12월 체직(遞職)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자에 〈독이참찬소 讀李參贊疏〉라는 제목으로 '순사지의(殉社之義)로써 임금에게 고한 대충대의(大忠大義)의 사람은 오직 이참찬뿐'이라고 게재했다.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망명과 헤이그 특사
1906년 이동녕·정순만(鄭淳萬)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왕창동(王昌東)·박무림(朴茂林) 등과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5월 차고려(車高麗)의 안내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 당해,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 控告詞〉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7월 14일 저녁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아이큰다우의 공원묘지에 매장하고, 이후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외교운동과 망명정부 수립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 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도총재에 유인석을 선임하고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이해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러시아·중국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왔다.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 등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서전서숙 (한말 교육기관) [瑞甸書塾]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조현(呂祖鉉)·정순만(鄭淳萬)·박무림(朴茂林)·왕창동(王昌東) 등은 해외 한인의 민족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각 지역에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06년 이들은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고, 북쪽으로 러시아와 통해 외교가 편리하며, 한국과 거리가 가까워 국권회복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간도 옌지 현[廷吉縣] 용정(龍井)에 우선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용정 천주교 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매입, 학교건물로 개수하고 학교명을 서전평야에서 따 서전서숙으로 명명했다.
숙장은 이상설, 교사는 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이었고, 운영은 이동녕·정순만이 맡았다.
모든 경비는 이상설이 부담했다.
처음 학생수는 22명이었고 학과목은 역사·지리·정치학·수학·국제법·헌법 등이었으며, 철저한 항일·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07년 3월 이상설이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신병인도 요구 때문에 용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간도 보통학교를 개교하고 각지의 서당을 매수하는 한편 서전서숙 측에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서전서숙 측은 이를 거절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훈춘[琿春] 방면으로 떠나 탑두구(塔頭溝)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했으나, 1908년 8월 20일 졸업식과 동시에 폐교하고 말았다.
1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의 민족교육방침은 이후 이 학교 학생이었던 김학연의 명동서숙(明東書塾)·한민학교(韓民學校) 등 간도·연해주 지역의 많은 민족교육기관의 설립과 박무림의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 등의 항일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
中 조선민족 서예사의 뿌리는 100년전 '서전서숙'
중국 조선민족 서예사는 100년
19세기 중엽에 조선인들이 鴨綠江, 豆滿江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왕조 말에 조성된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었다.
朝鮮 후기 정치기강의 해이와 탐관오리의 발호, 그리고 빈발하는 民亂 등도 渡江 移住를 促發시킨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地理的으로 西北間島는 韓半島와 連接해 있어서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변경 지대에서는 鴨綠江과 豆滿江을 건너면 바로 西北間島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주 旅程이 容易하고 또한 산천지형이 낯설지 않아 西北地方의 貧民이 쉽게 間島로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北間島 이주 초기 단계에서는 朝鮮人들이 두만강변의 무산?종성?회령 등지에서 渡江한 뒤 강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海蘭江 이남 일대, 즉 豆滿江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朝鮮人 村落을 형성하였다. 그 뒤 北間島 도처에 朝鮮人 마을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朝鮮人들은 北間島에 이주 정착하게 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瘠薄한 땅을 개척하여 水田農을 실시하였던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의 龍井市 開山屯鎭 천평일대와 용정 부근 해란강변의 瑞甸大野 일대가 朝鮮人들이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예로부터 後代敎育을 남달리 중시한 朝鮮民族은 중국에 移住한 初期부터 마을마다에 書堂을 設立하고 子女들을 敎育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 朝鮮民族의 民族敎育은 迂餘曲折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發展하여 왔다. 書堂敎育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朝鮮民族 敎育史는 朝鮮民族 歷史의 重要한 構成部分이다.
1883년 龍井에 最初의 書堂이 서게 되고 1887년에 黑龍江省 遼河縣에 順華書堂이 섰다. 그 후 東北三省 各地에 연이어 朝鮮民族 書堂이 設立되었다. 愛國志士이며 漢學者인 金躍淵은 敎育의 重要性을 감안하여 1901년 4월에 圭巖齋라 일컫는 書堂을 차렸다. 주로 漢學을 전수하는 구식 교육이었으나 이것이 중국 朝鮮民族社會가 갓 형성된 時期인 20세기의 첫 배움터로서 敎育史上 아주 큰 意義를 갖고 있다.
서전서숙-도편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되고 1910년 韓日合倂으로 일본이 朝鮮을 완전히 강점하자 朝鮮의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식인들은 延邊을 비롯한 東北三省 朝鮮民族 거주 지역에 망명하여 와서 거점을 마련하고 근대적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펼쳤다.
중국에서 제일 처음 설립된 朝鮮民族 사립학교는 이상설이 1906년에 龍井村에 설립한 瑞甸書塾이었다.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비록 8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新文化運動의 불씨를 뿌려 전국에 확산되게 하였다.
그 후로 和龍縣 大立子 明東村의 明東書塾, 局子街의 光星書塾, 流河縣의 東明學校, 吉林省 永吉縣의 吉興學校등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민족의 교육에 앞장섰다.
不完全統計에 의하면 1916년 말까지 延邊地域에 세워진 여러 가지 유형의 사립학교는 158개였는데 그 학생 수는 3,879명이었다.
민족의 애국시인 尹東柱가 다녔던 학교인 明東學校의 전신인 明東書塾은 1908년 4월 27일에 설립되었는데 초기의 名譽塾長에 朴禎瑞였으며, 1910년에 明東中學으로 발전되어 圭巖齋를 운영하던 金躍淵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明東學校 교과목에는 성경, 국어, 한문 도화 외에도 습자과목이 있었다.
明東學校는 成立되어 중학부가 폐지된 1925년까지 무려 1,000여명의 청년학생을 졸업시켰다. 그 중 적지 않은 청년은 反日 民族 獨立運動에 참여하였으며 이름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金光振, 尹東柱, 羅雲奎 등은 모두 明東中學 출신이다.
1906년에 설립된 서전서숙은 중국 조선민족의 첫 사립학교로서 조선민족 교육사가 100년이 된 증거이며, 교과목에 <습자>과목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민족의 서예사는 교육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중국 조선민족 서예사는 1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