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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과 화해의 승리자, 『넬슨 만델라 평전』
“진정한 자유란 단지 사슬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넬슨 만델라-
1. 프롤로그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무능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가늠할 길 없이 강한 힘입니다. 이것은 빛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어둠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렇게 영리하고 아름답고 재능 있고 경이로운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사실, 우리 중 그렇지 않은 이가 누구입니까? 당신은 신의 아이입니다. 움츠려 들어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당신 옆의 사람들이 불안해 할까봐 뒷걸음질 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천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일은 어느새 다른 일들로 하여금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두려움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의 존재는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취임사-
2. 넬슨 만델라의 생애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한 뒤 1944년 아프리카 국민회의 청년연맹을 창설하였고, 195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여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한다. 1960년 3월 샤프빌 학살 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노선의 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수차례의 재판 끝에 1964년 6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1990년 2월 흑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압력에 굴복해 백인정부가 그를 석방할 때까지 27년간의 복역 기간 중인 1979년 자와할랄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는 등 현대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전 세계인의 가슴속에 각인된다. 1991년 7월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된 뒤에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94년 4월 남아프리카 최초로 흑인이 참여한 자유총선거를 통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용서와 관용에 기반을 둔 과거 청산에 성공하여 전 세계에 평화와 상생(相生)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만델라가 뿌리에서부터 민중의 투사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섭정의 도움으로 궁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대학교육까지 받으며 일반 아프리카 흑인들에 비해 엄청난 특혜를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적 배경과 부유한 삶을 스스로 버리고 저항운동에 몸을 던졌기에 그의 용기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만델라는 극소수의 백인에 의해 대다수의 아프리카 민중이 억압받고 학대받는, 인간의 존엄성이 비합리적으로 짓밟히는 과정을 목격하고 그대로 안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넬슨 만델라가 진정 위대한 까닭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용서와 관용이라는 미덕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혹독한 탄압과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도 억압 받는 자만이 아니라 탄압하는 자들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파괴된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긴 영어의 생활을 끝내고 자유를 만났을 때 그는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또한 ‘해방’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힘에 의지하던 투사가 인간에게 내재한 선의지와 자비를 믿는 성자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만델라는 결국 인종주의자와 정적들의 과거 만행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고,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무지개의 나라”를 건설한다. 만델라가 견지해온 타인의 의견에 대한 존중과 관용,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이 낳은, 흑백 모두와 인간 정신의 승리였다.
짧은 임기를 마치고 1999년 대통령의 지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만델라는 에이즈, 아동 인권, 아프리카 기아 등 전 지구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89회 생일을 맞이하여 은퇴한 세계 지도자들의 모임인 ‘세계원로회의’의 출범을 선포하였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도 아직 더 많은 언덕이 남았음을 발견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히 꾸물거릴 틈이 없다”라고 고백했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한결같은 그의 실천 의지가 감동적이다.
그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만델라는 흑인 인권운동가로 세계적인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애도를 표했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만델라에 대해 칭송하는 목소리는 하나다. 그가 살아온 삶이 현재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닿아 있고, 우리가 나아가려고 하는 이상과 같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에게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평화롭게 저항하려고 흑인들이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평화시위를 하는데 경찰이 총을 쏘아 18명이 죽기도 했다. 결국 그는 법 안에서 저항을 할 수 없다고 보고,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만델라의 투쟁 노선은 비폭력 저항을 한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서 킹과 달랐다. 간디는 영국의 군사력이 인도보다 훨씬 셌기에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마틴 루서 킹은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보다 훨씬 수가 적기에, 백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흑인 인권 해방이 어렵다고 보고, 폭력 투쟁 노선을 선택하지 않았다.
만델라는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일이 불가능했기에, 폭력을 선택했다. 억압하는 백인 정권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예전에 흑인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어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용서했다. 이 과정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만델라는 자신이 약자여서 저항할 때는 폭력을 쓰다가, 권력을 얻은 뒤에 폭력을 버렸다.
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1) 인류의 시작과 유럽인과의 갈등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석들이 많이 발견되어, 인류의 발상지라고 불린다. 아프리카 남부에 정착했던 최초의 원주민은 코이산족이라고도 불리는 부시먼족으로, 이들은 수천 년 동안 유목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사냥 방법이나 제사 지내는 모습을 동굴 벽화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에서 반투어를 쓰는 종족이 철기 문화를 가지고 내려와 원래 살던 부시먼들을 흡수하였고, 현재는 그들이 남아공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488년, 포르투갈 선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남아프리카 케이프 반도에서 희망봉을 발견하며 남아프리카 대륙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졌다. 그리고 1652년, 무역 보급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들어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얀 반 리베크를 따라 네덜란드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스스로를 농민이란 뜻의 '보어인(Boer)'이라 불렀고 이들은 현재 남아공 백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백여 년 동안 원주민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줄루족은 반투어를 쓰는 여러 종족 중 소수 민족에 불과했지만, 18세기 말 위대한 전사 샤카 왕 때 이르러 크게 성장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치르며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였고, 마침내 19세기 초 인도양 연안에 아프리카 최초의 통일 국가인 줄루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때쯤 영국은 이미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케이프 지방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군대를 포함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이로써 남아프리카에서는 서로 땅을 차지하려는 줄루족과 영국인, 보어인들의 충돌이 이어진다. 그러나 뛰어난 전술과 용맹스러움으로 백인들에게 검은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샤카 왕이 죽으며 줄루 왕국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보어인들마저 내륙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오르게 된다.
케이프 지역을 차지한 영국이 세력을 확대하며 1834년에 노예제를 폐지하자, 이에 반대한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북쪽 지방에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 등을 세웠고, 이 때문에 영국과 충돌하게 된다. 여기에 보어인들이 지배하던 오렌지 자유국에서 엄청난 양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인들은 값비싼 광물과 함께 남아프리카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욕심으로 1899년 보어 전쟁을 일으킨다. 보어인들은 서로 연합하여 맞서 싸웠지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영국군에게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고 만다. 이 전쟁으로 영국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케이프와 나탈 지방에 새로이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공화국을 합병하며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게 된다.
2)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설립과 붕괴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세워진 후, 백인들은 흑인들이 지정된 지역 외의 땅을 사거나 빌리는 것까지 제한하는 인종 차별적인 내용의 법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1948년 백인들만의 선거에서 우익 정당인 국민당이 승리하며 인종 차별과 백인 우월주의가 활개를 치게 되었고,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는 극단적인 인종 차별법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도심에 살던 흑인을 모두 타운십이라 부르는 도시 외곽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지방의 흑인들 또한 출신 종족별로 나누어 정해진 홈랜드에 거주하도록 강요했다. 또 신분증엔 피부색이 표시되었고, 백인 거주 지역에 흑인이 들어오는 것까지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러한 인종 차별 법안에 반대한 흑인들은 아프리카 민족 회의(ANC)를 결성하여 저항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1960년, 샤프빌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통행법 반대 봉기에서는 무기도 갖추지 않은 흑인 시위대에게 백인 경찰들이 총을 발사해, 69명이 죽고 18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남아프리카 연방은 국제 사회뿐 아니라 본국인 영국에서까지 강한 비난을 받았고, 이에 영국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6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세운다. 그 후 계속되는 정부의 강압 속에서도 남아공 전역에서 흑인들의 저항 활동은 계속 이어져, 1976년 소웨토의 어린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대규모 봉기 등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비극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 정책에 쏟아지는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백인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법안을 포기하지 않자, 1974년 유엔은 남아공의 투표권을 빼앗고 곧이어 남아공에 대한 군사 물자 공급을 금지시켰다. 여기에 1986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경제 제재를 실시하자 남아공은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민들의 시위는 점점 심해졌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백인 정부 때문에 혼란은 갈수록 커졌다. 결국 1989년, 새로 취임한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철폐를 감행한다. 이후 1990년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27년 만에 석방되어 1994년 남아공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선출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3) 남아프리카의 흑인 수난사와 아파르트헤이트
1955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클립타운에서는 경찰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인 30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든 인종의 공존’을 표방한 `자유 헌장’을 발표한다. 자유헌장의 서두에는 “남아프리카는 흑인과 백인 등 남아프리카에 사는 모두의 것이며, 국민의 뜻에 기초하지 않은 정부는 그 권위를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 국민은 토지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생득권을 불의와 불평등에 바탕을 둔 정부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것을, 우리 남아프리카 국민은 국내 및 세계만방에 선언한다”라고 쓰여 있다.
- 유럽인의 남아프리카 이주민 역사 : 유럽 이주민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한 것은 얀 반 리베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들이 희망봉에 교역소(케이프타운)를 세운 1652년이었다. 케이프 지역은 처음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들이 항해 도중 들르는 정박지였으나, 이후 식민지 개척지가 된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대하는 유럽인의 태도는 거칠었다. 원주민의 목초지와 소를 강탈하는 것은 물론 저항하는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결국 남아프리카 첫 주인이었던 코이산족은 거의 전멸하였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1806년, 아시아와 교역하던 영국이 네덜란드인들(보어인)에게서 케이프 식민지를 빼앗고, 다양한 아프리카 민족과 싸워서 강제로 복속시켰다. 그들 또한 다를 바 없었다.
1899~1902년 보어 전쟁에서 영국을 지지하였던 아프리카인들은 영국 치하에서 좀 더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연방이 결성되자마자 백인 지배를 강화하는 억압적인 법률들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1913년 원주민 토지법이 먼저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법률은 아프리카인들이 보류지(흑인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지역) 이외의 땅을 구입하거나 임차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나마 보류지는 척박한 데다 전체 토지의 극소수에 불과한 터라 토지법은 사실상 아프리카인들의 토지 소유를 철저히 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소작이라도 하였건만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보류지로 쫓겨난 아프리카 흑인들은 백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 1923년 백·흑인 격리 `아파르트헤이트’ : 1936년에는 소수파인 백인이 영토의 87%를 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땅을 빼앗긴 흑인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혹은 도시빈민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몰려드는 흑인들이 혹여 난동이라도 부릴까 우려한 정부는 1923년 원주민법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는 도시 지역으로 들어오는 흑인들의 수를 제한하고, 그들을 특정 지역에 살도록 강제하여 격리시킨 조치였다. 이를 아파라트헤이트 즉 인종분리정책이라고 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19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남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된 국민당 정부가 도입한 차별 원리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또는 격리를 뜻한다.
- 아파르트헤이트의 뼈대가 된 법률의 내용 : 인종이 다른 사람 사이의 결혼을 금지한 통혼 금지법, 인종이 다른 사람 사이의 성관계를 불법화한 배덕법, 남아프리카 주민을 인종에 따라 분류한 인구 등록법, 인종별로 다른 거주 구역을 설정한 집단 지역법, 남아프리카 공산당을 금지한 공산주의 억압법, 피부색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교통수단이나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한데 섞이는 것을 금지하는 공공장소분리법 등 아파르트헤이트는 반인권적, 반근대적 악습이었다. 이 제도로 백인은 이익을 독점했지만 흑인이나 흑백 혼혈인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가난과 폭력에 몸을 떨어야 했다.
4. 노예무역과 아프리카의 가난
1) 노예무역
아프리카의 슬픔은 '노예'에서 시작된다.
오랜 세월 자연적인 삶을 영위하였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유로이 드나들던 땅에서 쫓겨나고, 족쇄가 채워져 유럽에서 대서양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그 통계조차도 불명확한 수천만의 아프리카인들이 팔려갔다. 오늘날 아직까지 세계사의 주류가 아닌 변방의 존재로서, 오랜 옛날 그들을 붙잡아갔던 사냥꾼들이 씌워놓은 야만과 원시의 낙인이 찍힌 체,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 곳곳에 사는 흑인들은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팔려간 노예의 후예들인 것이다.
초기 서아프리카 기니만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집중되었던 노예무역은 점차 동아프리카에서 중동과 인도양에 산재한 잔지바르, 모리셔스, 쉐이셀 군도의 플랜테이션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탐욕스런 아랍상인과 포르투갈인들이 노예해방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동아프리카를 날뛰고 다녔다.(중동 지역의 노예들은 하렘이나 대저택의 하인으로 거세된 상태로 팔려갔기에 오늘날 그 후예들을 볼 수 없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탐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대륙에선 유럽인이 들여온 독감 바이러스, 매독에 수많은 인디오들이 죽어나갔고, 그것도 모자라 호주 대륙에선 최후의 일인까지 찾는 토끼몰이로 마오리족을 몰살시켰다. 이렇게 원주민이 사라진 이 새로운 땅으로 밀려든 백인들은 금 은 광산을 개발하고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 플랜테이션 농장을 짓고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열매에 이전투구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남유럽에 불어닥친 흑사병으로 삼분의 일의 인구가 사망하고, 인간과 짐승의 중간쯤으로 여기던 원주민들이 유럽인이 들여온 전염병으로 죽거나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점차 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광물을 캐고 환금작물을 재배할 노예가 필요해서였다.
인간의 역사를 바꾸게 한 것들 중 향신료, 커피, 면화와 함께 사탕수수가 있다. 유럽에서 화약과 총포를 싣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제국주의자들과 노예사냥꾼에게 판 뒤, 노예들을 싣고 카리브 연안에 도착하여 물물교환식으로 받은 사탕수수를 유럽으로 다시 가지고 가면 몇 배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소수의 유럽인이 서아프리카의 기니만에서 시작했던 노예무역은 점차 동아프리카의 아랍인이 가세하고, 동족이 동족을 팔아먹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와 중세의 노예무역과는 달리, 근세의 것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및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의 산업개발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을 수입한 무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포르투갈의 B.디아스 이래의 유럽 제국(諸國)의 아프리카 서해안 정복과 밀접하게 결부하여, 식민지에서 형성된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것이다.
C.콜럼버스(1451?∼1506) 이래 에스파냐의 식민(植民)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정복, 노예화하여 라틴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광산개발, 사탕수수와 담배재배의 대농장 등에서 혹사했기 때문에 인디언의 사망 ·도망 ·반항 등으로 원주민의 수는 격감하였다. 16세기 초엽 에스파냐 정부는 선교사 B.라스카사스(1474~1566)의 권유를 받아들여 강건하고도 염가인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인디언 대신 사용하였고, 포르투갈의 모험가가 인도항로(印度航路)의 개척 도상에 아프리카 서안의 흑인을 사로잡아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의 노예화 사역(奴隸化使役)이 1530년에는 에스파냐령(領)에서, 1570년에는 브라질에서 법규로 금지되자, 이러한 추세 속에서 에스파냐왕 특허하에 아프리카 흑인 4000명의 수입권(輸入權)이 주어진 것을 비롯하여, 특약(特約)으로 흑인을 수입하는 독점특허권(獨占特許權)인 아시엔토(Asiento)가 설정되었다. 1702년에는 프랑스의 기네아회사가 4800명의 흑인수입권을 얻었으나, 1713년에 영국의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가 이것을 계승하여 1743년까지 30년 동안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14만 4000명을 수송한다는 요지(要旨)의 계약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노예의 수요도 격증하여 노예무역은 점점 성대해졌다. 16세기 말~17세기 후반에 걸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신대륙과 아프리카 서안의 에스파냐 ·포르투갈 두 나라의 독점권(獨占圈)에 침투하여 경합을 벌이면서 무역기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특히 네덜란드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 진출하여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장악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영국령 자메이카섬이 브라질에 대신하여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가 되자, 영국은 1672년에 노예무역의 독점회사로 설립한 왕립아프리카회사를 중심으로 하여 영국 ·아프리카 ·서인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무역(三角貿易)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한 다음, 이어서 프랑스를 제압한 끝에 1713년의 위트레흐트조약으로 에스파냐령에 대한 노예수출의 독점특허권인 아시엔토도 획득하였다.
노예무역에서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인 럼주(酒) ·총포 ·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노예와 교환한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산을 구입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예무역을 통하여 영국에서도 특히 브리스틀 ·리버풀의 상인은 정부의 보호를 배경으로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독점하여 항시(港市)의 번영과 아울러 막대한 이익을 올림으로써, 서인도는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제국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 ·쌀 ·미곡(米穀) ·인디고 생산의 대농장에서도 흑인노예를 사용하여, 아메리카 독립 당시 그 수효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1771년에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총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만 7000명을 운반하여 이윤은 30∼100%에 이르렀다. 그 반면 100 t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길들이는 동안에 1/3이 죽었다고 하며, 중간 항로에서의 잔혹하고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일명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매입할 때는 보통 럼주 ·화약 ·직물 등을 추장에게 지불하였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수렵의 약탈 ·거래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신세계에 운송된 흑인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은 유럽 상업자본의 식민지 착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유럽 제국의 번영에 기여도가 컸다. 교회도 이교도에 자행한 일이므로 이것을 인정하는 편이었고, 정부 ·일반도 이것을 비난하지 않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의 발달과, 인도주의·복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간수렵’의 비인간성과 노예선의 비참한 실정이 전해지자 점차 식지식인들 사이에서 비난이 일어났다.
2) 아프리카의 가난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가난의 원인을 노예무역과 함께 “지리적·기후적인 요인들로 해서 독립국가의 기반을 갖지 못한 곳들을 식민종주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눈 것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일례로 사하라 남쪽 내륙국가 부르키나파소는 코트디부아르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교역이 불가능하다. 이웃한 차드나 카메룬 등도 비슷하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경제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고 관세가 높기 때문이다. 경제 원조를 해주면서 커피, 카카오, 설탕의 생산을 장려한다. 그러나 막상 상품을 팔 때면 과잉 생산 등을 이유로 가격을 폭락시키고 수출할 때는 관세를 높게 책정한다. 당연히 무역적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처럼 마시는 커피 한 잔, 달콤한 코코아 한 잔 속엔 아이들의 몇 달의 월급과 눈물, 땀, 한숨이 서려있다.
또한 정치적 낙후성도 문제이다. 독재와 폭력, 부정부패의 정치가를 내세운 서구 열강들이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부족 간의 갈등과 전쟁을 해결해야 한다. 독립의 과정에서 같은 부족이 다른 나라가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족이 한 나라가 되어 필연적으로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질병과 기아의 문제이다.
기아를 부추기는 가뭄도 문제이다. 사하라가 매년 몇 킬로미터씩 넓어지고, 커피와 카카오, 사탕수수로 인한 땅의 지력이 약해져 질병과 기아는 극복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유럽인이 오기 전에 아프리카에는 1만 가지가 넘는 인종그룹, 국가와 왕국, 술탄국가와 부족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았습니다. 이집트의 역사학자 파티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식민지배는 아프리카를 나누었다기보다 잔혹하게 통합하였다.”
강자에 좌우되는 약자, 강한 것만 아름답다는 왜곡, 패자와 소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인류의 역사,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역사이다.
5. 만델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화해의 정치’ 실천한 우리 시대의 거인, 만델라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거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5일 밤(현지시각) 지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책 제목처럼 ‘투쟁은 나의 삶’이자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다.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에 뛰어든다. 이 나라에서 처음 흑인 법률사무소를 연 1952년에는 전국적인 불복종 저항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권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지하 무장조직의 초대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64년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90년까지 복역한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기간에 그는 자기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진가는 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이겨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 나타난다. 그가 택한 길은 백인 사회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이었다. 흑인에게 심한 탄압과 테러 등을 자행한 사람도 진실화해위원회(TRC)에 출두해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 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위원회에 출두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 것은 만델라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진실화해위 모델’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여러 나라에 좋은 본보기가 됐다. ‘화해의 정치’를 실천한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큰 영감을 줬다. 그러나 그의 꿈이 남아공에서 아직 온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흑인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어 흑백화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8월에는 광산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집회를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실탄을 발사해 34명이 숨지기도 했다. 법률·제도적인 차별 철폐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평등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시급한 상황이다.
만델라의 성취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정의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그의 뚜렷한 역사관과 ‘흑인과 백인이 평화적으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큰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러 요인으로 갈라진 지구촌에 그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2) 위대한 영혼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위대한 영혼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타계했다. 그는 남아공만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정신적 지주였다. 가혹한 흑백 인종차별 국가에서 태어나 차별정책 폐지를 추진하다가 27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도 그는 1994년 대통령이 된 뒤 자신과 흑인들을 탄압한 백인들을 용서했다. 이런 행보는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난 세기 계층 간, 인종 간, 국가 간 지배·피지배 관계를 형성했던 많은 국가들이 ‘혁명’을 거쳤다. 새롭게 독립한 나라들이거나 민주화된 많은 나라들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인종청소’를 상기해보라.
남아공 역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을 폈던 백인정권에 대해 다수 흑인들에 의한 참혹한 보복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만델라는 용서와 화해를 부르짖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는 그의 흑백 화해 정책 덕분에 남아공은 상대적으로 큰 혼란을 겪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다. 나아가 ‘만델라 방식’은 남미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에서 전범(典範)으로 이어졌고 이들 국가도 ‘혁명’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의 용서와 화해 행보는 평범한 사람들로선 도저히 따르기 어려운 정도였다. 집권한 뒤 첫 부통령에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을 임명했으며 흑백차별정책의 정보책임자와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한 검사를 대통령관저에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투옥됐던 감옥의 교도소장을 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실천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분열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극심한 이념대결,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차이, 세대 간·계층 간 의사소통의 단절이 우리 사회의 활력을 떨어트리고 있다.
6. 자크 랑과 만델라 평전
이 책의 저자인 자크 랑은 총 12년에 걸쳐 문화부와 교육부 장관을 역임해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최장수 임기를 기록했으며, 루아얄, 스트로스 칸 등과 더불어 2007년 프랑스 대선의 사회당 후보로 거론된 바 있는 유력한 정치인이다. 특히 미테랑 대통령의 산하에서 문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운용하여 ‘문화 대통령’이라 불렸을 만큼 프랑스 문화의 제도적 안정을 이루는 데 실질적으로 공헌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문화’라는 관념은 더 광범위한 활동으로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어 보다 대중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982년에 그가 기획한 여름밤의 무료 음악축제는 현재 프랑스 연례행사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리오넬 조스팽 총리 산하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때에는 ‘라 마르세이예즈’를 다양한 아티스트를 동원해 14가지 편곡으로 선보여 공교육 자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자크 랑은 문화 패권주의와 경제적 위협을 경계하여, 문화적인 자산은 통상 협정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각 나라의 고유한 주권과 마찬가지로 보호해야 한다는 ‘문화적 예외exception culturelle’라는 개념을 최초로 주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문화적 다원성을 중시한 그의 열린 철학은 프랑스 현대문화에 독창성과 포용력을 동시에 부여했고, 드골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작가 앙드레 말로에 이어 프랑스 문화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이처럼 문화와 문명의 보존에 깊은 애정을 보이며 정치적으로 실천해온 자크 랑에게 있어, 넬슨 만델라가 보여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단한 헌신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명제였을 것이다. 이에 예술가들을 모아 공연을 후원하는 등의 구명 운동에 이어, 고대극과 남아프리카 해방 문학을 아우르는 지성과 감성으로 넬슨 만델라의 평전을 집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크 랑은 만델라를 다룬 기존의 저서들과는 달리, 연극적 형식 안에 세계라는 큰 무대 위에 선 존재감 있는 배우로서 만델라를 묘사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 나딘 고디머가 이 책의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만델라의 극적인 인생을 다루는 데 있어 자크 랑의 구도는 적절하고 참신한 것이었다. 연극의 한 장면으로 꾸며진 각 부에서 만델라의 역할은 각각 체제순응적 태도를 벗고 투사로 거듭나는 안티고네, 샤프빌 학살 이후 ‘국민의 창’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주도하는 스파르타쿠스, 리보니아 재판과 함께 27년간 로벤 아일랜드의 감옥이라는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기 위해 협상력을 발휘하는 지도자 프로스페로, 그리고 1인1표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흑백 갈등 치유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넬슨 왕이다. 자크 랑은 인간의 고뇌를 담은 문학작품과 만델라의 삶을 오가며 만델라의 내면을 과감히 추측하고 내적 성장을 추적하지만, 그가 그려내는 만델라는 결코 성인이 아니며 종종 일반적인 영웅적 풍모와도 거리가 있다. 만델라는 이 책에서 무조건 미화되고 포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확신을 지녔으면서도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비겁하기도 한 소시민의 면모를 보이는데, 우리는 바로 이 주저하고 어리숙한 모습의 만델라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와 마찬가지인 초라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상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구현하려 애쓰는 그에게서 인간 모두에게 깃든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크 랑은 맹목적이고 순수한 열혈청년이 아니라 노련한 정치인으로서의 만델라를 드러내기도 한다. 세심히 계산하고 냉철히 예측해 행동의 수위를 조절하고,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어떻게 포장하고 다루어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낼 것인지를 궁리하는 만델라의 재능을 정치의 예술이라 격찬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만델라를 다룬 기존 저서들과 구분되는, 바로 자크 랑이 독특하게 그려낸 만델라의 힘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실천적인 모범을 보이려 노력해온 정치인이자 예술가라는 만델라와의 공통분모를 통해 자크 랑은, 정치가가 바라보는 정치가에 대한 평가를 넘어 오늘날 정치가 지닌 의미로까지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정치에 대해 신뢰를 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자크 랑은 정치 본연에 담긴 숭고한 의미, 다시 말해 공동선에 대한 노력과 동지애를 전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영웅적 삶을 구가한 넬슨 만델라를 선택한 것이다. 자크 랑에게 있어 정치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소명이다. 그것은 운명적이고, 또한 공공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이다. 자크 랑은 만델라의 삶을 미학적으로 그려내면서 궁극적으로는 만델라의 이상과 교점을 이루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예술 미학을 투영하고자 했다. 『넬슨 만델라 평전』이 때로 자크 랑 자신의 고백록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웅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그러나 영웅이 사라진 시대 또한 불운하다. 만델라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좌절을 이기고 삶과 이상을 일치시킨 참다운 영웅의 궤적과,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동시에 목격한 행복한 증인이다.
7. 에필로그
영국 리즈대학의 동양·아프리카학 교수 리처드 J 리드는 『현대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대서양 노예무역을 통한 서양 문명의 압축성장은 그들이 아프리카를 인종차별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던 시점과 일치한다”며 “이렇게 확립된 유럽 중심주의는 20세기 내내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줬다”고 했다.
16세기 이래 20세기까지 유럽의 번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퍼져 있던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수탈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결과 서구 유럽은 아직까지 부귀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여전히 가난과 분쟁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들의 교묘한 방법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 따라서 고통 받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 있어 유럽인들은 분노와 원망을 넘어 복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넬슨 만델라는 그럴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27년 동안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 억압 받는 자뿐 아니라 탄압하는 자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파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긴 영어의 생활을 끝내고 자유를 만났을 때 그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또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상이나?
나는 넬슨 만델라와 호치민, 그리고 덩샤오핑과 체게르바를 좋아한다.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 개인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국가의 백년대개를 그리는 마음, 국민들로 하여금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지도자들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근세 이래로 우리에게는 왜 저런 인물이 없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1) 쇠사슬로 된 족쇄에 채워진 노예를 가둔 갑판 아래의 공간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리고 무역선의 과열경쟁과 이로 인해 떨어진 노예의 몸값을 벌충하고자 점점 더 선박 당 노예수를 늘려 1인당 평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0,4제곱m에 불과할 만큼 열기와 냄새가 진동하는 소름끼치는 노예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직 배식 때 잠깐을 제외하곤 밀폐된 갑판아래에 머물러야 했던 노예들중 상당수가 두 달이 넘는 항해 중에 병들고 죽어나가, 노예선 뒤로 상어떼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그곳은 밀폐되어 있었고 온도도 매우 높았으며, 사람들로 가득 차 몸을 돌릴만한 공간조차 없어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땀을 비오듯 흘렸으며 역한 냄새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점점 병에 걸리는 노예들이 생겨났고 많은 수가 죽어나갔다. 거기에다가 쇠사슬 때문에 피부가 벗겨져.... 그리고 변기통속에 아이가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비명소리,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등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1756년 11살의 나이로 노예로 팔린 후, 자유의 몸이 되어 노예폐지운동에 앞장선 '올라우다 에퀴아노'-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