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오 덕 렬
인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인간의 말은 수담(手談)으로 ‘우 상귀 소목’이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체가 있는 듯 안 보이니 우선 도깨비라 부를 수밖에 없다. 도깨비! 농경시대에는 부지깽이나 몽당비가 인간화했었지만 지금은 도깨비도 형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연두색 잎을 키워내는 봄날의 느티나무를 연상했다. 뿌리에서 마른 가지로 몸속 파란 물결을 쏟아 새잎을 밀어 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도깨비는 1분 30초 만에 ‘좌 상귀 화점’으로 응답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담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인간이 세 판을 내리 패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인간은 눈을 감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순간 흘러가는 미묘한 인간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충격, 아쉬움, 자존심, 당혹, 고독…. 무표정한 멘붕 상태에서 스쳐간 생각들이 살아났다. 여기서 무너지고 말 것인가?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5전 전승을 장담했는데…. ‘인간이 진 것이 아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미간을 찌뿌리지 말자.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을 이제는 짓지 말자. 더 집중하자. 실패한 포석에 답이 있다.
아쉬움들이 스쳐갔다. 아이스크림을 든 어린 딸의 해맑은 모습도 나타났다. 힘이 솟았다. 도깨비도 한 점 허점을 보인 것을 놓치지 않고 생각해 냈다. 초당 10만 가지의 수를 계산하는 도깨비의 수도 완전하진 않다는 걸 깨달았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의지를 다니는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꿈이 살아나고 있었다.
수담의 규칙을 잘 지켜자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기본 시간 2시간. 이 두 시간이 지나면 1분 초읽기 3회가 주어진다. 가로 세로 19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고 한다. 그 안에서 인간과 기계가 제집 짓기 내기를 하였다. 이런 집짓기 놀이를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제대지기(帝臺之棋)’라 했다. 이 제왕의 바둑판 앞에는 두 사람이 수담을 하며 앉아 있는 그림도 함께 나온다. 5천년 신화에 닿아 있는 그림에서 현대판 도깨비의 형상을 상상해 본다.
이마는 나오고 귀가 있어야 할 곳에 다시 얼굴이 좌우로 붙어 있다. 얼굴이 셋인 괴물이다. 뒤꼭지에 난 머리카락 끝 신경망에는 1202개의 중앙처리 장치가 작동하여 상대방에게 정보의 물결을 쏘아댄다. 혁명적이다. 제 얼굴은 가리고 인간의 머릿속 곳곳을 투과하여 인간의 생각을 훔쳐가는 것 같다.
도깨비의 대역을 맡은 아자황 박사도 괴물 도깨비가 전달하는 대로 인간 로봇이 되어 있었다. 마치 도깨비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의 어느 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의사도 대역 노릇을 하고, 판사도 대역 노릇을 하고, 교사까지 대역노릇을 하는 날이 올 것도 같다는 혼란에 빠졌다. 도깨비와 로봇이 한 몸이 되어 사람의 감정을 훔쳐간다면 어떻게 될까? 괴물 도깨비는 이제 겨우 세 살배기다. 사춘기가 올 때쯤이면 사람과 똑 같이 말하고, 생각 하고, 감정까지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도깨비가 로봇의 몸으로 어떤 것은 여성으로, 어떤 것은 남성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들은 곧장 성형수술을 하여 <태양의 후예>의 특전사 장교 유시진(송중기)과 의사 강모연(송혜교)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사랑에 빠질 것이 아닌가. 미래학자가 말하는 신인류(新人類)가 탄생하게 될 것이라 했다.
도깨비는 감정이 없으니 평정심을 잃을 일도 없다. 표정도 없고, 지치지도 않고, 형상도 없으니 인간을 대하기는 쉽다. 인류 대표는 도깨비의 감정을 읽지 못했으니 혼자 두면서 스스로 지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직감에서조차 앞서지는 못하겠지…’ 생각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다섯 손가락과 냉정한 정보만이 흐르는 로봇 손가락의 대결을 ‘세기의 대국’이라 했다. 바둑의 신과 계산의 신이 맞붙은 것이다. 지구촌 이목이 서울로 쏠려 있을 때, 신들의 ‘자존심 대결의 상황은 유튜브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구글은 ‘우리는 달에 착륙했다’고 환호했다.
이런 인간 대 기계의 싸움은 영화에서는 이미 시작되었다. “기계군단은 인류를 점령했고, 우리는 이에 대항해 왔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저항군의 리더인 존코너는 외쳤다.
어떤 수를 놓을까, 돌의 위치를 계산하는 정책망도, 승률을 예측하는 가치망의 정체도 허사비스의 안경 너머 두 눈에서 읽어냈다. 진즉 놓았던 중앙 흑 한 칸을 끼우는 78수가 ‘신의 한 수’가 되어가고 있음도 스스로 느꼈다. 철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혼신의 반격을 퍼부었다. 괴물 도깨비도 흔들려 패착을 놓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180수만에 ‘알파고는 포기한다’며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세돌 9단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인간 승리! 목메인 목소리로 ‘인간 승립니다.’ 한 마디 전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어버린 케스터. 대국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세돌, 이세돌’을 연호하며 일어섰다. 이세돌도 환하게 웃었다. 밝은 표정 속에 인간의 정신력과 꿈이 보였다. 바둑 예술이 거기에 있었다.
도깨비의 정체는 알파고(AlphaGo, α +바둑)로 드러났다. 인공지능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이었다. 구글은 구골(googol, 10100)을 바탕에 깔고 태어났다는 것도 이름에서 유추해 냈다. 연산의 선수인 알파고는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구골! 구골! 구골!…’하면서 신경망을 작동시켜 알고리즘의 최적수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런 알파고와 싸운 주인공 이세돌은 ‘돌코너’란 애칭으로 불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돌바람―이세돌 바람, 바돌 바람―되어 흐르고 있었다.
알파고는 제3의 정보 물결이다!
정보 물결은 산업혁명이다!!
돌코너는 활짝 웃으며 외치고 있었다.
* 바돌 ‘바둑’의 방언(경상, 전라, 제주, 충남).
첫댓글 컴퓨터를 의인화하여 시작한 점이 눈에 띕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장면을 다시 더듬어가며 읽었습니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도깨비처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옛날 도깨비는 아이들만 무서워했는데~~~
현대판 도깨비는 전 인류가 공포라고 생각됩니다.
6.25 전쟁을 소재로한 작품이 아직도 많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경험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상상력의 창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함께 경험한 일>을 소재로 삼을 경우 에세이도 창작도 둘 다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조정래의 <택백산맥>이 성공한 이유는 <모든 사람의 경험을 뛰어 넘는 상상력의 창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큰 숙제로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