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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Ierosolimitanorum
* 여기에서는 13~15세기까지의 발트 지역 십자군 운동과 연관되는 사항만을 다룹니다.
흔히 기사단의 군대는 획일적으로 흰색의 튜닉을 걸치고 무시무시한 형상의 그레이트 헬름을 뒤집어 쓴 기사의 이미지로 묘사
되곤 합니다. 그러나 발트 지역에서의 성전은 수가 적은 교단의 형제들 만으로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사단의
군사활동은 근본적으로 방어가 아니라 정복을 위한 것이었고,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여야 했습니다.
(1) 교단의 형제들
튜턴 기사단은 일종의 종교 교단으로서, 교단에 소속된 형제들 중 많은 이들이 직접 무장을 갖추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군대의 핵심적인 역할은 기사 형제(리터브루더 Ritterbruder)들이 맡았습니다. 그들은 튜턴 기사단뿐만이 아니라 기사단 국가
의 지배계급을 형성했으며, 동시에 기사단 최고의 엘리트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갑옷 위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의
튜닉을 걸친 모습으로 구분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가장 좋은 갑주와 무기, 군마를 갖추고 중무장한 기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수행원들
(서전트, 세속기사, 보조병 등)을 거느리고 소속된 콤투라이(Komturei)의 깃발 아래 단위 부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거나,
아니면 한데 뭉쳐 단장(Meister)이나 사령관(Marschall)의 지휘하에 강력한 기병대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리터브루더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14세기 경 프러시아와 리보니아에서의 기사형제의 수는 모두 합쳐도
약 600 ~ 8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 형제들의 아래에는 봉사형제 (디넨데브루더Dienendetbruder), 또는 회색망토 (그라우맨틀러 Graumaentler)라고 불리는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교단의 구성원으로서 기사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청빈과 복종, 순결의 서약을 하였지만 귀족은 아니
었습니다.
그들은 갑옷 위에 T자모양의 타우(Tau) 십자가가 그려진 옅은 회색 튜닉을 입고 다녔습니다. 보통 전장에서는 기사형제를
보조하는 기병이나 보병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보병 중에서는 석궁수의 비율이 특히 높았습니다.
기사단에는 교단의 일원이면서도 교단에 봉직하겠다는 종신 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정기간 동안에만 기사단에
봉사하는 그들은 반 형제(할프브루더 Halbbruder)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옅은 회색의 튜닉과 타우 십자가를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기사계급에 속하는 할프브루더들은 자신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튜턴 기사단의 형제들이 기사단 군대에서 차지하는 수적 비율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군사 훈련에 힘을 쏟고 종교적 고행으로 정신무장이 되어 있는 군사 교단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기사단 군대를 선도하는
엘리트 전사 겸 지휘자로서, 기사단 형제들의 지휘력과 전투능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왼쪽의 기사는 타우 십자가가 그려진 방패와 옅은 회색의 튜닉을 입고 있는 할프브루더, 또는 디넨데브루더입니
다. 오른쪽의 기사는 흰색 튜닉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튜닉과 방패를 들고 있는 리터브루더인데, 방패의 검은 십자가에 추가
된 독수리 문양으로 보아 이 기사는 리터브루더 중에서도 대 기사단장(Hochmeister, Grand Master)의 신분에 속합니다.
왼쪽의 기사는 캐틀햇(kettle hat)을 쓰고 있고 오른 쪽의 기사는 그레이트 헬름(great helm)을 쓰고 있는데, 착용할 수 있는
갑주나 투구의 우선 선택권은 리터브루더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를 제외하면 기사단 기사의 신분에 따라 착용할 수
있는 갑주나 투구 형식에 대한 차별은 없었습니다. 사실 리터브루더들도 캐틀햇을 많이 착용했으며, 바구니나 접시모양의
이 투구는 튜턴 기사단의 ‘국민헬멧’이기도 했습니다.]
(2) 원주민 보조병
기사단 국가의 신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병력자원은 기사단이 정복한 옛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병장기를 가지고 보조병으로서 튜턴 기사단과 함께 싸웠습니다.
보조병들은 비팅게(Wittinge)라고 불리는 옛 원주민 족장이나 장로 출신의 귀족계급이 지휘했습니다. 비팅게는 잘 무장한 수행
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아래 다수의 부족민들을 함께 모아 하나의 보조병 부대를 구성했습니다. 보조병 부대는 뾰족한
투구와 작은 사각방패(스키다스 Skydas)와 가벼운 창(술리카 Sulica)을 들고 발트 산의 작은 조랑말에 올라탄 경기병이거나,
또는 도끼나 창, 곤봉을 든 경보병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보조병을 이루는 원주민들은 대부분 프러시아의 프루스 족, 리보니아의 리프 족과 라트 족, 에스토니아의 에스트 족이었습니다.
남쪽의 리투아니아 인들과 북쪽의 에스트 족에게 시달리던 리프 족과 라트 족은 대체로 기사단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지만
다른 두 부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럴 경우 원주민들의 충성심을 보장 받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전리품을 나눠주는 것이
었습니다.
보조병들은 튜턴 기사단과 함께 행동하거나, 또는 기사단이 파견한 대리인(포크트Vogt)의 지휘를 받거나, 아니면 기사단령의
세속 기사들과 함께, 또는 그들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보조병들은 주로 이교도의 요새나 마을로 향하는 통로를
개척하고 위치를 파악하거나 적군의 진로를 탐색하고, 때로는 기회를 틈타 불시에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기사단
대신 이교도의(때로는 카톨릭 폴란드 왕국의) 마을 습격, 방화, 살해, 약탈 등과 같은 ‘더러운 전쟁’을 떠맡기도 했습니다.
굳이 첨언하자면 13세기의 리투아니아 인들이나 프루스 인들이나 무장의 차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일러스트에서 원주민 기병이 탄 말은 아마도 발트 산의 토종 말(馬)인 슈베이크(Sweik)로, 옛날 스텝지역에 살았었던 조랑말인
타르판(Tarpan)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혹독한 기후에도 잘 적응했고 무엇보다도 싸게 구입할 수 있었으므로
보조병들의 군마로서뿐만 아니라 기사단의 짐말로도 널리 애용되었습니다.
썰매는 겨울철의 캠패인에서 마차(wagon) 대신 사용되었던 것으로 식량과 같은 필요 물자뿐만 아니라 전리품도 같이 실었습니다.
이러한 썰매는 급할 경우 일종의 방책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었는데, 일례로 1270년경 이교도들이 얼어붙은 바다 한복판에서
튜턴 기사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끌고 다니던 썰매로 방벽을 만들어 돌격을 격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임기응변은
기사단에 고용된 원주민 보조병들도 발휘했을 것입니다. 사실 원주민 보조병이나 이교도 전사들의 구분은 종종 모호했으며,
그들이 서로 벌이는 전쟁은 성전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발트 지역에 만연했었던 부족 간의 싸움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3) 기사단령의 세속 기사들과 시민들
기사단 국가 내부에는 ‘신천지’를 찾아 독일(또는 폴란드)를 떠나온 많은 수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14세기 중반까지의
정복활동으로 인하여 폴란드 왕국의 신민들 중 일부도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튜턴 기사단과 봉건적인 예속
관계에 있었으므로 기사단이 요구할 경우 일정 기간 캠패인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미트브뤼더(Mitbrueder)로 불리는 기사단 국가의 봉건 기사들은 기사단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를 받은 다수의 독일계와 소수의
폴란드계 이주민들, 또는 기사단이 정복한 지역의 일부 폴란드 영주들이었습니다. 튜턴 기사들처럼 그들 역시 기사로서 중무장
기병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흰색과 검은색 일색인 교단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이들 봉건 기사들은 갑주와 방패에 스스로의
문장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자(Squire)와 서전트(Sergeant)들을 거느리고 기사단 군대에 합류하여 튜턴 기사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미트브뤼더들의 군역은 소유한 재산에 따라 크게 두 종류였는데, 로스딘스트(Rossdienst)와 플라텐딘스트(Platendienst)로
불렸습니다.
로스딘스트는 40 하이드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기사들의 군역이었습니다. 이 의무를 진 기사들은 스스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데스트리에 종의 군마에 올라앉아 그를 수행하는 두 명의 기병과 함께 하나의 ‘랜스’(Lance, 군사단위)를 구성했습니다.
플라텐딘스트는 40 하이드 미만의 영지를 보유한 기사에게 부과된 것이었으며, 이 경우에는 보다 가볍게 무장한 기사 한 명이
작은 품종의 말을 타고 기사단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플라텐딘스트의 경우, 봉건영주화 된 원주민 귀족에게도 적용되어 위에
기술한 원주민 군대의 징병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사단 국가에 소속된 세속 기사들로 기사단의 검은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장을 방패 위에 그려 넣었습니다. 일러스트
의 시기는 아마도 14세기 중반 이후로, 이 기사들은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착용했으며 서유럽의 기사들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방의 기사가 착용한 투구 모양이 독특한데, 바이저가 달려있기는 하지만 투구의 스컬(Skull) 자체는 뾰족한 첨탑 모양
입니다. 이러한 양식의 투구는 뾰족투구(페킬후베 Pekilhube)라고 불렸고 다른 말로는 프러시아 식 투구(프레프셰후베
Prewschehube)라고도 했습니다. 페킬후베는 기사단 영토의 세속 기사들뿐만 아니라 튜턴 기사들도 즐겨 착용했던 투구로,
이교도 프루스 족의 군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한편 쿨름 법의 적용을 받는 자치도시와 마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평상시에는 발트해 교역에 종사하거나 장인으로서 활동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민병대를 구성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의 일차적인 방어를 맡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기사단의 요청에 의하여 튜턴 기사단의 군대에 일정기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재산에 따라 직접 갑주와 병기를 마련하고 다양한 형태의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부유한 시민들은
대체로 값비싼 갑주와 군마를 구입해 기사처럼 무장했으며, 그 정도로 돈이 많지 못한 이들은 석궁을 다루는 보병이 되거나
투석기나 화포와 같은 병기를 조작하는 공성 기술자로 활동했습니다.
(4) 십자군
튜턴 기사단 군대의 군사 행동의 특징은 이교도를 대상으로 하는 성전(聖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기사
단의 주요 적들이 여전히 고대의 다신교를 고수하는 프루스 인들이나 수도비아 인, 리투아니아 인들이었기 때문이며 튜턴
기사단이 발트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벌일 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따라서 기사단은 기사단장의 외교 활동을 통해서, 또는 기사단에 협력하는 성직자나 수도사들이 서유럽 지역에서 벌이는 발트
십자군의 설파를 통해서 십자가를 달고 이교도들과 싸우려는 수 많은 서유럽 전사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십자군의 역할은 튜턴 기사단 국가의 초창기인 13세기에 특히 중요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수적 열세와 낯선 기후와 지형으로
인하여 이 시기의 기사단은 열 번이 넘는 패배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바다를 건너오는 십자군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세기에 들어서도 십자군의 역할은 중요했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튜턴 기사단의 군사적, 경제적인 능력은 비약적으로 향상
되었지만 그만큼 이교도 적들의 힘도 늘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기사단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하여 십자군으로 참여하는 유럽의 공후들과 외교적인 친선효과를 도모하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십자군이 발트 십자군에 참여하는 주된 이유는 면죄(the remission of sins)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들은 이교도와의
성전에 참여하여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십자군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곳에서 그들은 튜턴 기사단의 세심한
배려 아래 군사적인 훈련과 경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발트 지역은 서유럽과 그리 멀지 않았고 기후의 영향으로 한번의 캠패
인 기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므로 참여하는데 따른 부담은 별로 없었습니다. 지리적인 요인은 특히 독일과 보헤미아 공후
들의 발트 십자군 참여를 고무시키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십자군들은 여름과 겨울에 발트지역으로 찾아와 라이젠(reysen)이라 불리는 튜턴 기사단의 대 이교도 캠패인에 참여
하였습니다. 이교도를 상대하는 십자군의 ‘스포츠 제전’으로도 비유되는 라이젠은, 발트 십자군이 기사단 국가와 이교도 리투
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황무지를 뚫고 이교도 영토에 침투하여 취약한 군사 거점이나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의 리터브루더가 잉글랜드에서 온 십자군 기사와 담소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기사의 뒤에 캐틀햇을 쓴 기사는 사실
프루스 족 보조병으로 동유럽풍의 러멜러 갑옷을 착용하고 발트족 양식의 사각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뒤에는 기사단의
할프브루더가 있고, 할프브루더의 뒤에는 배서닛을 쓴 또 한명의 리터브루더가 후방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대열의 사이에는 이교도 포로들이 있는데, 중간에 뾰족한 투구를 쓴 리투아니아 전사가 있습니다. 만일 그의 지위가 높다면
나중에 포로교환 의식을 통해 풀려날 가능성이 높지만, 대체로 포로들의 운명은 노예로 팔려가 기사단의 금고에 금화를 보태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포로들이 십자군의 행군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라도 처형될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십자군이 ‘사냥’ 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포로교환이나 몸값지불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교도 신에게 바쳐지는 산 제물로 자신의 군마와 함께 통째로 불에 태워질 수도 있었습니다.]
(5) 용병
기사단이 발트해 교역으로 벌어들인 자금 중 많은 부분은 용병을 고용하는데 사용되어 기사단 군대의 숫자를 늘리고 기사단이
필요로 하는 전쟁 전문인력을 충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용병들 중 상당수는 독일에서 고용되었지만 다른 국가에서 온 용병들도
있었습니다.
기사단 군대는 전쟁터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석궁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용병 고용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습니다.
따라서 14세기 후반기에는 제노바 출신의 석궁수들이 대량으로 기사단에 고용되었고, 비록 석궁수는 아니지만 잉글랜드 출신의
장궁병들도 소수 고용되었습니다. 기사단은 화약무기에도 관심을 보였으므로 총기나 화포를 조작하는 전문가들도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그들 중 많은 수는 독일인이었습니다.
용병대의 고용료는 기사단의 회계 장부에 나타나 있으며, 일례로 그룬발트 전투에 참여한 용병대는 한 달에 11마르크의 급료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가치는 한번에 8마리의 암소와 400마리의 거위를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1410년의 패배 이후 폴란드와의 지속적인 분쟁 과정에서 기사단의 용병대에 대한 의존도는 급격히 높아졌고, 이는 기사단
국가에 대한 세금부담을 늘려 신민들의 충성도 상실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계속)
* 딘스트부루더의 표기를 디넨데브루더(Dienendebruder)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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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우 십자가가 뜻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까? Teutonic? 아니면 단순히 구별 의미였나요?
타우 십자가에도 나름대로의 기원과 의미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십자가의 불완전한 형태로 미루어본다면, 아마도 완전한 십자가를 달고 있는 교단의 기사계급과 구별하려는 의도만 있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아우 게이 타우가 생각나는 건 뭐지 이런 타우 쌞...베스피드 너프할라면 제대로 하지 상향된 건 뭐냐!!
ㄳㄳ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