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 서기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예기치 않은 등극>
- 서기 41년 1월 24일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칼리굴라가 갖고 있던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
- 클라우디우스, 제4대 황제에 즉위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게 됨.
<역사가 황제>
-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결함으로 볼품없는 용모를 가졌음.
게르마니쿠스의 지극한 보호 아래서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냄.
- 아우구스투스외 티베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를 공직에는 보내지 않음
역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인정해 주었다.
<치세의 시작>
- 원로원은 1월 24일 밤 클라우디우스에게 두 호민관을 파견.
제일인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이상 회피할 마음은 없다고 함.
클라우디우스는 권력욕이 아니라 스토아 학파로 공익 봉사가 엘리트의 할 일이라고 생각함.
- 칼리굴라의 살해자 처벌
직접 살해한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사형을 선거, 카이레아도 순순히 승복.
동료 사비누스는 사형을 면했는데도 자살을 택함.
<신뢰 회복>
-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초점을 맞춤.
클라우디우스, 국가 반역죄를 이유로 `한 처벌을 폐지
벤토테네 섬에 유배되어 있던 갈리굴라의 누이동생 아그리피나도 로마로 돌아옴.
집정관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요빅을 원로원에서 선출하게 함.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이 각종 오락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을 장려함.
- 공공사업을 중시, 인프라 정비.
칼리굴라가 시작한 수도공사를 재개.
로마 외항 우스티아 항 건설.
이탈리아 중부 피치노 호수 개간.
- 세금을 늘리지 않고 국가 재정을 재건하려 함.
(1) 칼리굴라가 폐지한 1%의 매상세를 부활시킴.
(2)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출은 가차없이 삭감함.
- 칼리굴라의 3대 외교 실책...북 아프리카, 유대,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 칼리굴라의 경솔함으로 미우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남.
칼리굴라가 죽인 왕을 대신할 인물이 없었다.
로마는 로마에 반대하여 봉기한 자들은 교섭 상대로 삼지 않는 원칙다는 원칙대로 반란을 군단을 투입하여 제압.
- 미우리타니아 팅기타나(탕헤르의 마우리타니아), 마우리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셰르셀의 마우리타아) 그리고 그 동쪽의 누미디아 속주, 옛 카르타고 아프리카 속주 그리고 카레나이카 속주 등 북서 아프리카 전역이 수도 밀의 3분의 1을 생산하게 되었다. 나머지 3분의 1은 이집트가 그리고 또 시칠리아 등에서 3분의 1을 조달하게 됨.
<유대 문제>
-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헤롯 와의 친척인 헤롯 아그리파에게 유대 통치를 맡기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중부는 35년만에 왕정으로 돌아가다.
- 클라우디우스 알렉산드리아를 정상화하다.
- 서기 44년 헤록 아그리파의 죽음을 계기로 유대는 로마의 직할 통치로 되돌아감.
- 서기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 2세를 유대 왕위에 앉히고, 로마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직할 통치하는 분할 통치를 실시하다.
<브리타니아 원정>
- 서기 42년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강대한 부족의 우두머리인 크노벨리누스가 사망하다.
후계자 싸움이 브리타니아에서 갈리아 북동부까지 번지다.
-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아 원정군 총사령관에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를 임명하다.
플라우티우스, 4만 병력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남동부에 상륙하여 템스강 남쪽에서 벌어진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다.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로마군과 합류하여 콜체스터에 입성, 브리타니아 속주화에 대한 기본 정책을 결정하다.
아콰이 솔리스(현 바스)에서 온천을 발견.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모나섬(지금의 앵글시)로 도망. 네로황제 시절에 아일랜드로 쫒겨남.
- 서기 44년 클라우디우스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 거행.
<비서관 체제>
-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노예나 해방노예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들로 관저에 비서관 조직이 형성됨.
아브 에피스툴리스(편지 담당) 나르키소스...내각의 총무처 장관
아 라티오니부스(회계 담당) 팔라스...국가 재정ㅇㄹ 총괄하는 곳.
아 리벨리스(청원서 담당) 칼리스투스...청원서나 진정서 접수
수브스크립티오(필기 담당)...청원서나 진정서에 대한 회신 작성.
아 코그니티오니부스(지식 정보 담당)...황제에게 모여드는 모든 서류를 정리 보관.
아 스투디스(공부 담당)...황제의 이름으로 나가는 포고문을 작성.
- 클라우디우스의 축적된 지시과 의지를 현실과 대조시켜 주는 역할을 함.
- 비서관 체제에도 단점은 있었다.
원로원의원이나 기사 계급의 관료들이 이 비서관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비서관들이 축재에 열을 올림.
- 거기에 클라우디우스는 이 부하들에게 심지어는 부인에게마저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질 못했다.
<메살리나 황후>
- 클라우디우스의 세번째 부인으로 클라우디우스보다 35세나 젊었다.
- 메살리나는 대 안토니아의 딸의 딸로써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외종숙임.
-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서기 41년에 메살리나는 16세 였슴.
- 황후가 된 직후에 브리타니쿠스 출산.
- 남편의 개선식에 챀가하여 주위를 놀라게 함.
- 간통죄 처벌법이나 국가 반역죄 처벌법을 이용 재산을 몰수하여 사리사욕을 채움.
철학가 세네카도 여기에 말려들어 코르시카 섬에 유배 됨.
네로 황제의 아내가 된 포파이아의 어머니 포파이아를 간통죄로 고발 자살하게 만듬.
전직 집정관 빌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메살리나에게 무고를 당하고 자살하다.
- 성욕도 강했다고 소문이 나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의 대명사가 됨.
<국세 조사(켄수스)>
- 서기 48년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지 34년 만에 국세 조사를 실시함.
재무관(켄소르) 제도 부활. 초대 켄소르에 클라우디우스와 비텔리우스가 취임.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총수는 약 598만명.
군사력 증강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티베리우스 방식을 고수 어디에서도 공세를 취하지 않음.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인이 강 서쪽으로 침입, 로마군 사령관 코르불로가 반격하였으나 클라우디우스는 도중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개선식을 허락함.
그리고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수가 비 전투시에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광산 개발을 시도 했으나 병 성과가 없아 병사들의 원망만 삼, 클라우디우스는 이 사람도 개선식을 허락함.
<우편제도>
- 클라우디우스는 국영 우편제도를 공용만이 아니라 민간에게도 개방함.
역참(무타티오네스), 역관(만시오네스)를 설치
- 클라우디우스는 그간 무료로 되어 있던 변호사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상한선을 정함.
- "세기제"를 거행히다.
기원전 17년에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거행한 세기젠,ㄴ 계산을 잘못한 것이고 로물루스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기산하면 서기 43년이 건국 800년이된다고 주장, 클라우디우스는 비테릴우스와 함께 세기제를 거행함.
<"클라우디우스 항">
-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 새 항구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하다.
(1) 언젠가는 토사로 메워질 강어귀 부근에는 항구를 건설하지 않는다.
(2) 오스티아에서 북서쪽으로 3키로 정도 떨어진 해안에 건설.
(3) 이 항구와 테베레 강을 운하로 연결.
(4) 새 항구와 로마 사이를 가도로 연결.
(5) 항구에는 선착장과 창고 및 필수 불가결한 설비만 갖추고 교역장 등은 오스티아에 그대로 둠.
<메살리나의 몰락>
- 서기 48년 메살리나가 중혼죄를 짓고, 클라우디우스의 비서관 나르키소스의 명령으로 살해되다.
원로원 의원이며 내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실리우스에게 메살리나가 반함.
메살리나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실리우스와 진짜 결혼식을 올림.
나르키소스 등 비서관들이 클라우디우시에게 알렸으나 클라우디우스는 별로 개의치 않음.
실리우스에게는 자살 명령을 내렸으나 메살리나의 처벌은 차후로 미룸.
나르키소스가 근위대 대장을 시켜 루쿨루스 정원에 숨어 있던 메살리나를 살해함.
- 서기 49년 클라우디우스, 질녀인 아그리피나(칼리굴라의 누이 동생)와 네번째로 결혼하다.
<개국 노선>
- 갈리아 부족장들이 로마의 원로원에 자기들도 원로원 의석을 달라는 청원서를 보냄.
- 원로원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짐.
원로원은 대부분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었눈제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문명이 인류에게 남김 교훈의 하나로 칭찬 받을 만한 연설을 하게 됨.
원로원은 일단 하이두이 족에게만 의석을 배분. 다른 부족에게는 차츰 검토하는 것으로 결정.
<노예해방 규제법>
- 로머인들은 한편으로는 개국 노선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노선에 제동을 거는 법안도 만듬.
-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년과 서기 4년애 노예 해방을 제한하는 법률을 성립시킴.
기원전 2년 "푸리우스 카미니우스 법"... 유언에 의한 노예 해방에 관한 법.
서시 4년 "아일리우스 센티우스 법" ...생전의 노예 해방도 허용하고 그 규제를 정한 법.
-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이 로마인의 전통에 따랐던 것이다.
<아그리피나의 야망>
- 서기 49년 클라우디우스, 질녀인 아그리피나(칼리굴라의 누이 동생)와 네번째로 결혼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섭정하여 로마 제국을 통치해 보려는 야망으로 클라우디우스에게 적그적으로 접근을 했고, 오랜 협력자인 비텔리우스가 나서서 지원 사격을 맡음.
- 아그리피나는 크라우디우스를 졸라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아냄.
- 자기 출생지인 쾰른에 고참병들을 이주시켜 로마의 식민도시(콜로니아)로 격상시킴.
그래서 쾨른의 옛 이름이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다.
- 황후 간택 시 경쟁자였던 롤리아 파올리나를 자살로 몰아넣음.
점성술사에게 다닌다는 혐의를 날조하여 추방을당하게 함.
<철학자 세네카>
- 서기 49년 아그리피나, 간통죄로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어 있던 철학자 세네카를 석방. 아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나중에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로 삼기 위해 로마로 부르다. - 또한 아들의 무술 교사로는 나중에 근위대장이 되는 부루스를 임명하다.
<네로의 등장>
- 서기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가 데려온 아들 도미티우스를 양자로 삼고,
자기의 친딸 옥타비아를 약혼 시키겠다고 공표.
그후 도미티우스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가 되다. 네로("과감한 사나이")
- 서기 51년 아그리피나, 14세의 네로에게 3년아 빨리 성년식을 올리게 하다.
예정 집정관의 권리를 부여 받아 21세개 되면 집정관에 선출될 권리를 가짐.
동시에 프린켑스 유벤투스("젊은 제일인자")라는 칭호도 얻음.
- 서기 53년 네로와 옥타비아 결혼식을 올림.
- 네로는 16세에 정책 입안자로서 원로원의 의결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원로원에서 첫무대를 밟음.
<만년의 클라우디우스>
- 안전보장
브리타니아 정복
잉글랜드는 일단 재패했지만 웨일스 지방에 들어간 이후론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음.
제국 서방과 남방은 "로마에 의한 평화"기 확립되고 있었음.
동방은 제국의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에서는 까다롭고 문제가 많은 지역이었다.
서기 51년 볼로가세스, 파르티아 왕에 즉위하다.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지만 로마의 움직임을 보고 철수하다.
유대 문제: 처음에는 3분의 1만 아그리파 2세가 다스리게 하고,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로마에서 파견된 두 장관이 분담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에는 유대를 양분하여 아그리파 2세와 로마 장관 1명이 분할 통치하는 체제로 바뀌었지만, 예루살렘과 그 주변은 로마의 직할 통치 구역으로 남았다.
- 식량확보: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여러가지 밀 확보를위한 노력으로 별 문제는 없었음.
- 사회 간접 자본의 정비
칼리굴라가 착공한 수도공사(아쿠아 클라우디아)는 51년에 완공.
오스티아 항만 공사는 완공을 앞두게 됨.
피치노 호 간척 사업은 실패로 끝남.
<사망>
- 서기 54년 10월 13일 클라우디우스가 원인불명으로 사망. 향년 63세.
같은 날 네로가 근위병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받다. 원로원도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
네로, 16세의 나이로 제5대 황제에 즉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