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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령에 봄비가 촉촉히 내린다
△ 황학산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는 황학산은 제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 거리에 솟아 있고 바로 옆에 덩치 큰 백화산(1,064m)이 있기에 잘 알려지지 않는 곳이고
이 때문에 호젓한 산길과 산마루에 펼쳐진 큰 억새밭과 참나무 숲길은 어느 산과 비교해 보아도 뛰어나다.
△ 백화산
백화산은 경북 문경군과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가르며 우뚝 솟아있다. 주봉에서 이화령(548m)에 이르는 북서능과 이만봉을 거쳐 시루봉(914m)에 이르는
용유담 위로 분지리에 이르는 깊고 깨끗한 계곡도 깊은 인상을 준다.주변에는 문경새재도립공원, 수안보온천, 쌍곡계곡, 선유동계곡 등이 있다.
겨울철에 눈 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하얀 천을 씌운 듯이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봉황이 날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백화산 정상에 서면
서.북쪽으로 시루봉과 조봉을 양 날개로 하여 동.남쪽으로 성주산과 옥녀봉을 바라보며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라 함.
△ 평천치
경북 문경시 마정면 성내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를 넘나들던 고개
△ 사다리재
△ 이만봉(二萬峰, 990m)
옛날 만호라는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 해서 붙여 졌고,이 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때 도원수 권율이 군막을 쳤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910봉 뒤로 희양산이 살짝 보인다 ▷ 삼국시대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희양산성"
△ 희양산 가는 길은 봉암사에서 참선수행을 목적으로 통제한다.
봉암사의 유래와 역사
<유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종찰(宗刹)로 879년(헌강왕 5)에 지증대사인 지선(智詵)이 창건했다.
935년(태조18)에 정진대사 긍양(兢讓)이 중창하고, 1431년(세종13)에는 기화(己和)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15)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스님이 재건했다.
1915년 세욱(世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과 요사채등이 있다.
1947년 성철스님의 봉암결사(부처님번대로 살아보자)가 있었지만 6.25전란으로 소멸되였다. 그후 70년대에 봉암사에 몰려든 스님들에 의해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1982년 조계종 자체적으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어 성역화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보물 제137호)·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제138호)·3층석탑(보물 제169호)·정진대사원오탑(靜眞大師圓悟塔:보물 제171호)
정진대사원 오탑비(보물 제172호) 등이 있으며 이 절의 서북쪽 계곡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는 높이 600cm의 마애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이 새겨져 있다.
<역사>
희양산문은 선종의 구산선문 중 하나이다. 直指人心. 見性成佛, 敎外別傳, 不立文字의 선종 교리를 따른다.
달마대사가 창시한 선종은 신라 선덩여왕 5년도의 道義가 당나라의 서당지장에게서 법문을 받아드려 가지산문, 전남장흥 보림사을 개창하면서 전국적으로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면서 번창하였으나 고려시대에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이 번창하면서 쇠퇴하였으나 고려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산에
수선사를 세우고 정혜결사를 세우면서 다시 번창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붕숭유정책에 의해 점차적으로 쇠퇴하였으나 세종6년에 9개 종파로 나누어져 있던 불교는 선종과 교종 두개의 종파로 통합 되었다.
이때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의 세 개의 종파가 선종으로 단일화 되었으나 양종제도가 폐지 되면서 불교의 암흑기로 불리는 산중시대를 보내는 혼란기를 맞게 되나
휴정과 선수대사에 의해 중흥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면서 계통을 이어 오다가 구한말 표교 활동이 자유로와 지면서 원제종,임제종으로 불려져 오던 선종은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
조계종으로 귀속되기전까지 봉암사는 김천의 직지사 말사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명맥만 유지해 오던 봉암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자운.
우봉스님등이 "부처님 뜻대로 살아보자"라는 원을 세워 봉암결사를 하고 칼날같은 법도를 지켜 기강을 잡아갔으나 6.25전쟁 소용돌이에 중단되었다.
그후 1970년 봉암사에서 모여든 스님들의 정진으로 부활하게 되었으며 1982년6월에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를 선언하였고
82년 7월 문경군은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희양산 봉암사지역은 특별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1984년 6월에는 종단상임위원회는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 하였다.
등산로의 출입금지는 이상의 내용과 관계없이 희양산을 오른 일부 등산객들이 "야호"을 외치거나 취사및 흡연을 하면서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를 하였다는 목적으로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성터까지 출입을 막고 있는데 스님들의 주장은 등산로는 사유지이므로 우회하라는 것이다.
(현행법상 사유지에 있는 등산로는 도로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토지 소유주가 출입금지을 시킬 수 있으며 침입시 사유 재산법에 해당 된다고 함)
"운해산방"에서 펌
△ 안개속의 낭떠러지
△ 희양산 정성 부근의 암릉
△ 희양산
희양산은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신령스러운 암봉이다.
산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희양산의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지증대사가 희양산 한 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 하였다"고 감탄한 산이라고 전한다. 태백산을 일으켰던 백두대간 줄기는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이 일대에서 가장 험준한 산세를 이뤄 놓았고 이들 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산이 바로 희양산이다.
△ 마지막 관문 지름티재 가는길
△ 은티재
은티마을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로 마을 뒤는 구왕봉과 희양산, 시루봉, 이만봉등이 둘러 싸여 있고, 앞으로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앞을 감싸고 있는
산중 분지로 그 안에 수십호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동네입구가 좁고 연풍 10리길이 협곡으로 되어있어 옛날에 피난지로 유명하다.조선 초기 연풍현 당시에는 인지동 의인촌리(義仁村里)로 되어 있었으나,
왜인들이 의인은 민족정신이 함유되어 있다 하여 은치(銀峙)로 개칭하였다가 광복후에 '은티'라고 칭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은티는 여궁혈(女宮穴)에 자리잡고 있어 동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 안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에 정제일로 마을의 평안과 동민가족 보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며 제가 끝나면 한 자리에
모여 음복하고 제물을 나눠 먹는 등 고사를 지내고 있다.
△ 정겹고 아름다운 은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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